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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마천루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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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제국
Восточная Империя
국기
2396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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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3년 신 정교회 창설
  • 2396년 건국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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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블라디보스토크
최대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요 도시
우수리스크, 아르세니예프, 하산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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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주류 문화
표트르
소수 문화
항카, 시호테알린, 육진, 경성, 함흥, 원산, 강릉
언어
러시아어,함경어 등
종교
국교
정교회
소수 종교
맑스주의, 러시아 정교회, 천진교, 무속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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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체제
동해 제국정
지도자 (차르/Царь)
야로슬라프 로제스트벤스키

개요

동해제국은 프리모리예(연해주)를 중심으로 동해안의 주도권을 잡고있는 제국이다.

역사

부서진 마천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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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2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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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 발생
2137 신안 문명
2189 러시아 공산당 출현
2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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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백두산 화산 분화. "신의 징벌"
2234 정교회의 정비
2235 아르세니예프 공의회
2235 - 2395 프리모리예 군벌 시대
2298 신안 제국 형성
2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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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4-2327 신안의 인천 정복
2317 신성 복음 연합 건국
2322 - 2324 제1차 신안-복음 전쟁
2327 고려국 선포
2332 제2차 신안-복음 전쟁
2349 - 2365 인천 독립 전쟁
2351 신미년의 역
2365 인천 연합 출범
2371 - 2374 1차 강화도 전쟁
2377 - 2381 2차 강화도 전쟁
2383 서해안 연합 형성
2387 - 2402 인천 제 1 군정
2395 - 2396 대 조국 전쟁
2396 동해 제국 건국
2399 - 2415 동해안 식민 계획
2399 제3차 신안-복음 전쟁
25세기 - 본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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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 - 2413 대반란
2402 기계교 반란
2405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2410 경오정난과 대요 건국
2416 - 2418 1차 화북 원정
2419 요양 조선족 폭동
2420 - 2421 2차 화북 원정
2421 - 2422 묵던 원정
2423 얄루 제국 건국
2427 - 2439 인천 제 2 군정
2428 - 2432 주체교도의 난
2432- 신성혁명
2439 - 2442 얄루 전쟁
2440 대진의 분열
2440 인천의 봄
2444- 인천 내전
244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등장
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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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동해 제국의 분열
24?? 얄루 제국의 분할
2666? 스포일러의 등장

프리모리예 러시아의 형성

사건 이후 프리모리예 지방은 중앙 정부와 단절되었다.

극동에 고립되었다는 강박관념과 사회 불안정의 확산으로 인해 프리모리예는 끊임없는 소요와 분쟁을 경험하고 스스로 고립된다. 주변 지역의 상황은 더욱 참혹했는데 만주는 사막이 되어 거대한 황무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한반도 북부는 개마고원으로 인해 극한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속적인 시베리아 러시아 유민들의 유입과 주변 지역에 비해 비교적 살만한 환경에 의해 프리모리예 지방은 점차 성장하기 시작하며 안정되기 시작한다. 시베리아 유민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 인구는 상당히 감소해 있었고 프리모리예 지방의 삼림은 급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하며 몇몇 인구 밀집 지역을 제외한 프리모리예 전체가 삼림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식량 생산에 불이익을 제공했지만 풍부한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특산물을 주요 상품으로 만주와 동해안 교역로를 건설한다.

사건으로 인한 가공할 정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프리모리예 지역은 점차 다시 일어서고 있었고 극동에서의 새로운 지리적 환경과 주변 지역으로부터 고립된 상황은 기존의 러시아 문화에 몇몇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사회와 기술 수준의 중세로의 후퇴, 주변 아시아인과 가시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인종적 구분으로 인한 고유의 정체성 형성, 중앙 러시아와의 단절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 주변부에 위치한 프리모리예의 지리적 환경, 위기 의식과 지역 전체에서 공유되는 러시아 정체성 그리고 타민족의 칩입에 대한 두려움은 프리모리예를 단결시키고 무장시켰다.


신의 징벌

백두산이 분화한 이후 프리모리예 지방은 화산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지역이다. 수많은 화산재는 하늘을 뒤덮고는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점차 기온이 내려오며 수많은 작물이 피해를 입고 땅은 얼어붙었다. 농업 생산량은 급감했고 뒤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화산재, 그 회색의 눈은 대지를 감싸안고서 모두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많은 사람들은 재앙을 신의 징벌이라 생각했다. 본래 무신론이 다수를 차지하던 프리모리예 사회는 이에 큰 격변을 경험했고 정교회로 재개종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증가했다. 사람들은 재앙에서 모두를 이끌 강한 지도자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이들은 이는 신의 징벌이므로 모두 회개하고 기도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강하고 통일된 종교적 권력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교회 조직은 크게 개편되기 시작했고 분열된 민중을 통합하고자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234년 사도 니콘은 초대 정교회 극동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민중은 하나의 영적 권력 아래 통합되었고 종교는 보다 편협하고 교조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초대 교황 니콘은 이런 움직임을 이용해 교회 기구를 보다 중앙집권적이고 수직적으로 개편했다. 니콘은 선출 직후 개최된 2235년의 아르세니예프 공의회에서 프리모리예의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가 아니라 정통 정교회임을 천명했다. 이는 프리모리예의 정교회와 과거 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과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으로 이를 통해 니콘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교회 개혁의 초석을 다졌다.

공의회에서 그는 본래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을 준수할 것을 주장했으며 교회의 챙정 체계를 개편하며 정교회 교황청을 설립했다. "정교회 교황청"의 설립은 니콘의 정치 모델이 서방 카톨릭 교회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요소이다. 통일된 교회 세력의 등장과 맞물려 세속적 권력을 원하는 야망가들은 점차 늘어났다. 인망을 얻은 이들은 자신의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다른 군벌들과 다투기 시작했다.

백두산 분화, "신의 징벌"로 촉발된 종교적 통일과 세속적 분열은 프리모리예에 황폐와 죽음을 가져왔다. 재앙 속에서 교회는 기근과 전쟁으로 지친 민중의 등불이 되었다. 등불은 민중을 비추고 민중의 얼어붙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녹이고 감싸안았다. 마치 모든 것을 감싸안고 얼어붙게 만든 회색 눈처럼.


군벌과 도시

신의 징벌 이후 군벌들은 각지에서 난립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과거 러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던 10개의 지역 종속 도시를 중심으로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그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는 군벌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블라디보스토크는 어느 군벌의 지배도 받지 않는 중립 자유도시로 성장한다. 나머지 아홉 도시들은 군벌들에게 복종했고 군벌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군벌들의 개발과 투자에 따라 도시들은 성장했다.

도시들은 구시대의 유산이었고 프리모리예의 상징이었다. 도시들의 긴밀한 공조와 협력 하에 프리모리예는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달네고르스크의 군벌, 러시아 마피아의 수장인 게오르기 피오네르, 그는 남다른 야심가이자 광인이었다. 뛰어난 지적 능력과 예측하기 어려운 광기에 가까운 그의 행동은 매우 충동적으로 보이면서도 상당히 정교했다. 그는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갈망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다른 9개의 도시들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견고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프리모리예의 패권을 손에 쥔다는 것을 상징했다. 동시에 그것은 분명한 다른 9개 도시들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외로운 투쟁, 프리모리예의 내전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담대한 계획을 실행시키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내전의 주인공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겼다. 그는 자신의 안목을 의심하지 않았다. 분명 그라면 프리모리예의 분열을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게오르기 피오네르가 설계한 프리모리예의 주인공은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였다.


블라디미르

분열된 프리모리예와 느슨한 도시들의 협력, 이는 이미 프리모리예에 언젠가 다가올 내전을 암시하고 있었다. 프리모리예는 다시 통일되고 하나의 권력 아래 지배되고 통치될 것이라는 기대가 사회에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그 기대의 중심에는 프리모리예의 인민들을 이끌고 나아갈 길을 제시할 통치자가 있었다. 그들은 영웅을 갈망했고 자신들을 이끌어줄 선지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블라디미르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혜성같이 나타나 도시의 신뢰와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민중은 그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지도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블라디미르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했고 게오르기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자유도시를 거점으로 한 하나의 독립 세력으로서 성장한 블라디미르는 통일 전쟁을 계획했다. 그는 치밀하고 세심하게 자신의 전쟁 계획을 구체화했고 선전과 여론을 활용해 민중의 지지를 확보했다. 프리모리예는 3개의 종교와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사건 전 프리모리예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자랑했던 러시아 정교회, 사도 니콘의 개혁 아래 중앙집권적화에 성공하며 프리모리예에서 가장 강력한 교세를 이끌고 있던 정교회, 마지막으로 구시대의 지성을 간직한 맑시즘이였다. 종교가 국가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이해하고 있던 블라디미르는 셋 중 하나의 종교적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정교회를 선택했다. 블라디미르는 정교회 교황청을 방문해 3일 동안 극동 교황과의 담화를 진행했다. 블라디미르는 먼저 교회의 지지와 프리모리예 전역에 대한 전쟁 명분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교황의 입장은 정교회 국교 선언과 프리모리예 패권 보장이었다. 협정은 체결되었고 교황은 블라디미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프리모리예 전역에 대한 정당한 통치권을 인정함에 더불어 프리모리예 통일을 하느님의 왕국 건설에 결부시켜 이는 적그리스도와 불신자들에 대한 성전임을 표방했다.


제국의 탄생

블라디미르의 전쟁 수행을 위한 공격적인 행보는 프리모리예를 더욱 긴장시켰다. 수많은 군벌들은 블라디보스토크가 가지는 잠재력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블라디미르의 움직임에 크게 대항했다. 아르세니예프를 중심으로 하여 군벌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시에 대항한 도시연합을 결성한다. 이때 결성된 도시연합, "북방 동맹"의 목적은 블라디미르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견제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쟁취하는 데 있었다. 제각기 다른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모인 군벌들의 동맹은 매우 불안정했다.

한편 남부의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들의 상황은 또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존 프리모리예 무역의 중추이던 블라디보스토크가 블라디미르에게 넘어가며 기존에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던 블라디보스토크는 보다 공격적으로 무역 경쟁을 시도하게 된다. 블라디미르가 창설한 러시아 연방 해군은 재해권을 장악하고자 남부 도시들과의 상선들과 충돌을 거듭했고 남부의 무역 도시들은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남부의 무역 도시들은 블라디보스토크가 강력한 해군력을 통해 해상 봉쇄를 실시하고 무역로를 독점하자 상당한 불만을 야기하게 된다. 도시의 상인들은 이제 현 프리모리예의 상황 중에서 자신들에게 가장 이득이 될 만한 결정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통일되지 못한 동맹. 블라디미르는 북방 동맹의 결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도시들. 오직 자신들의 이권 확보에 충실한 상인 계층, 분열되고 불안정한 사회에 공포와 불만을 가진 민중들. 기존 프리모리예의 질서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수많은 군벌들. 그는 도시들의 분열에 초점을 맞추어 동맹을 이간질 시키고 분열하는 공작을 진행했다. 동맹은 안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2395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의 군대는 결집하여 북쪽의 아르툠을 향한 공세를 수행했다. 아르툠 군벌은 급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침공을 알리며 원군을 요청했다. 북방 동맹의 수장이던 아르세니예프는 급히 군대를 소집하였으나 남부와 동부의 해안 도시들은 중립을 선언하며 소집에 불응했다. 그런 반항에도 불구하고 급히 아르세니예프의 군벌을 주축으로 한 3000의 북방 동맹 원군이 남하했지만 우수리스크 근처에 진입할 무렵 아르툠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기별을 받는다. 이미 2000명의 블라디미르의 군대는 라즈돌노예를 거쳐 우수리스크를 향하고 있었다. 아르툠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내륙과 이어주는 길목으로서 북방 동맹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함락되었다는 사실과 블라디미르의 선전에 휘말린 대중에 의해 북방 동맹의 사기는 점차 저해되고 있었다.

급히 북방 동맹은 방어 거점을 수정하여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한 방어선을 형성하였고 블라디미르의 군대는 그 전선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가 우수리스크에 진입하기 전에 북방에서 달네고르스크의 군벌 게오르기 피오네르가 이끄는 1000명의 군대가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 아르세니예프를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아르세니예프의 군벌은 초조해졌다. 달네고르스크의 독자적인 세력으로는 1000명의 소집이 불가능할 터였다.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짐작한 북방 동맹의 수장은 더욱 서둘러 블라디미르와의 교전을 통해 결착을 내어야만 했다. 북방 동맹의 중심이던 아르세니예프의 공성은 아르세니예프의 군벌이기도 하던 북방 동맹의 수장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교황의 성전 선포와 통일되고 안정된 미래를 약속한 블라디미르의 선전에 여러 도시들에서 소요사태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의 군대는 우수리스크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겨울이 찾아왔고 군대의 보급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상황이 점차 다급해지고 있음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블라디미르의 군대도 역시 보급이 점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곧이어 피오네르의 군대가 아르세니예프를 함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쪽에서 그들이 남하할 것을 예상한 북방 동맹은 방어진을 풀고서 성 밖으로 나와 회전을 준비했다.

이윽고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북방 동맹은 자신들의 수적 우위를 활용해 다수의 기병대를 양 측면에 포진시켜 전진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블라디보스토크의 군대는 우수한 재력을 통해 무장한 중보병이 다수였다. 기병대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숫적으로 불리했다. 블라디미르는 질적으로 우수한 중보병을 군대의 전열에 배치하고 소수의 중기병을 이끌고 우익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 북방 동맹의 총지휘관은 아르세니예프의 군벌이였으나 많은 군벌들은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전투에 혼선을 빚고 있었다. 통일되지 못한 지휘체계의 근본적 결함에 따라 다급했던 몇몇 군벌들은 지휘가 채 내려지기도 전에 기병대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좌익에 돌진했다. 블라디미르의 중보병은 이른 기병대의 충격에도 굴하지 않고 아직 버텨내고 있었다. 북방 동맹의 기병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좌익에서 주춤하는 사이 후방의 블라디보스토크 예비 기병대가 좌익을 구원하기 위해 돌격했고 졸지에 다수의 보병에게 둘러싸여 기병대의 돌격을 받아내게 된 북방 동맹의 우익 기병대는 발이 묶여 기동하지 못하게 된다.

블라디미르는 이때 우익을 이끌고 북방 동맹의 좌익을 향해 돌격했다. 블라디미르의 우익에 비해 비교적 소수였던 북방 동맹의 좌익을 블라디미르는 단순히 힘으로 뚫고자 시도했고 이는 성공적이였다. 우익에 상당히 편중된 블라디미르의 배치는 좌익을 약점으로 두고 있었다. 좌익에 배치된 병사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의 좌익은 어떻게든 군벌들의 돌격을 막아내며 북방 동맹 우익의 발을 묶어놓고 있었다. 이윽고 전진하던 양측 중앙의 보병대가 격돌했고 난전에 돌입하였다. 북방 동맹의 군대는 수적 우위를 활용해 보병대를 밀집 대형으로 운용했고 이는 질적으로 우수한 블라디보스토크의 중보병에 대항하여 깊은 종심을 통해 중보병의 전열을 와해시켜 블라디미르를 패배시키려는 북방 동맹의 고려였다. 이 계산은 성공한 듯 보였고 북방 동맹 보병대의 질량은 점차 블라디미르의 중보병을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블라디미르가 이끌던 우익이 북방 동맹의 좌익을 추격하다가 갑자기 선회하며 북방 동맹의 후위를 향해 돌격하게 된다. 중앙에서 깊은 종심을 형성하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대의 중심으로 파고들던 북방 동맹 보병대의 후위가 갑자기 나타난 적 기병대에 의해 차단되어 포위되었고 당황한 북방 동맹 후위의 징집병들이 사기가 떨어져 패주하기 시작하며 후방의 병사들이 자꾸 도망치기 시작하자 중앙의 보병대는 상당한 공황 상태에 빠지며 진형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상당한 밀집 대형은 피해를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병사들이 도망치거나 중앙부로 파고들기 시작하면서 압축된 병사들은 압사하거나 무기를 휘두를 수도 없게 뭉치게 되었다.

중앙이 붕괴되는 걸 목격한 북방 동맹의 우익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앞서 돌격했던 군벌들 말고도 아직 북방 동맹의 우익에는 총지휘관과 더불어 여분의 병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며 돌격을 감행하고자 했던 우익은 중앙이 붕괴되는 걸 보고서 전황이 이미 뒤집어졌음을 직감했다. 후위를 찌른 블라디미르의 우익을 향해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하자는 아르세니예프의 군벌과 달리 다른 군벌들은 자신의 살아남은 병력을 데리고 이미 탈주하고 있었다. 이에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직감한 아르세니예프의 군벌은 자신의 기병대를 이끌고 보병대 후위에서 병사들을 사냥하고 있던 블라디미르의 우익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이제 돌아갈 도시 또한 없어진 아르세니예프 군벌은 자신의 마지막으로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다수의 병사들에게 자살 돌격을 감행했다. 아르세니예프 군벌은 돌격 도중 전사했고 자신의 마지막 남은 병력과 함께 소멸했다. 이에 더불어 밀집되어 붕괴된 중앙의 북방 동맹 보병대는 포위당한 상태에서 아르세니예프 군벌과 운명을 함께했다. 블라디미르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전장을 수습하며 우수리스크에 무혈 입성하게 된다.

그는 지도자 없이 패주하는 북방 동맹을 추격하지 않았다. 패주하던 북방 동맹군은 아르세니예프를 점령하고 남하하던 피오네르의 군대와 마주치며 학살당했고 몇몇 살아남은 군벌들은 자신들의 도시로 돌아가 피해를 수습하던가 또는 자신들의 도시에 의해 배반당하고 살해당했다. 북방 동맹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도시들은 군벌들의 통제하에서 벗어나 블라디미르에게 합류하기 시작했고 전쟁 초반 북방 동맹의 소집령에 불응하며 중립을 지키던 해안 도시들은 블라디미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쟁을 개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 치밀하고 신중하게 계획된 전쟁 설계와 민중의 지지로 순식간에 군벌 세력들을 일소하는데 성공한다. 군벌들은 모두 블라디미르에게 복종하거나 추방당했다. 프리모리예는 통일되었다. 강력한 통지자의 통지 아래 프리모리예는 번영하고 성장해나갈 것이 틀림 없었다. 2396년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는 동해 제국을 창건하며 차르에 오른다. 성직자와 교회의 지지 아래 대관식에서 정교회 교황은 블라디미르를 사도 니콘에 이은 제 2의 사도로 추앙했다.


제국의 부상과 그늘

수없이 지나가고 반복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프리모리예는 언제나 변방이었고 문명의 변두리에 조용히 존재했었다. 러시아인들은 춥고 험난한 시베리아를 거쳐 이곳에 도달했고 결국 그들의 땅을 페트로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했다. 프리모리예는 러시아인들에게 동쪽의 끝, 극동의 종점이였다. 이러한 변방이자 변두리에 위치한 낙후된 지역은 러시아인들에겐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차르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는 프리모리예를 통일하고 차르에 올랐다. 그는 프리모리예의 전부를 손에 넣었다. 동쪽의 시작에서 블라디미르는 그들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리고 싶었다. 그는 극동 러시아 민족의 본거지인 프리모리예를 문명의 중심지이자 발전되고 부유한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국가의 광대한 영역은 곧 그 국가의 국력과도 같다. 러시아인들은 항상 바다로 나아가고 싶어했다. 그또한 그러했고 만주 사막의 황량한 황무지에 비해 부유한 동해안의 무역로에 이목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의 시선은 남쪽의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창설했던 러시아 연방 해군을 동원해 동해안 식민지의 설립을 계획했다. 동해안 식민지 계획은 동해안의 무역로를 점거한 다음 만주 내륙과의 중계 무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해군을 동원해 병력을 상륙시키고 주요 거점을 장악한 후에 총독을 파견하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무역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의 동해안 침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점차 제국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의 남쪽을 향한 야망은 동해 해군의 조우를 경험한 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보다 훈련되고 경험적인 동해 해군은 주의 깊게 동해 제국의 확장주의적 행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동해 해군은 마침내 동해안의 재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동해 해군의 주력 함대에 대한 선제 공격을 계획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동해 연안을 지나던 동해 제국의 함대를 기습하였고 순간의 기습에 주력 함선과 병력을 잃은 차르의 계획에는 큰 차질이 생겨났다.

함대와 해군의 재건은 쉬운 일이 아니였을 것이다. 무역로를 장악할 수단이 손상되며 차르는 빠른 대화를 시도했다. 동해 해군과의 협상에서 동해 해군은 잠정적으로 동해안 북부에 대한 동해 제국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대가로 동해 제국은 남부 동해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서 동해 제국의 팽창은 종식되었고 이제 차르는 식민지의 관리에 집중해야만 했다. 동해안 상인들의 권리 보장은 필연적이였고 적당한 상호 협력을 통해 동해안 무역로에서 이윤을 창출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협조적이지 않은 원주민의 반발과 총독들의 부패와 태만, 반발에 대항해 더욱 거세지는 탄압은 동해안 식민지의 분리주의를 재촉하고 있었다. 제국의 행정 한계는 식민지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비효율적 행정은 식민지 총독들에게 무제한적인 권한을 제공해주었고 이는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들이 돈을 축적하고 병력을 기르게 해주는 발판이 되었다.

2415년 블라디미르가 동해안에서 수행한 식민지 건설을 끝마치고 프리모리예에 귀환했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마흔을 넘어 있었다. 이제 그는 프리모리예의 통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행정 조직을 개선하고 프리모리예의 관습법과 판례를 모아 법전을 제정하고 성을 축조하고 개선하며 옛 10개의 군벌 도시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도시를 재건하며 상인들을 후원하고 무역로에 투자하며 상공업 발전에 힘을 쏟았다. 그의 마지막 행보에서 뚜렷이 관찰되는 부분은 제국의 안정과 번영이었다. 프리모리예의 균열이 메꿔지고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지는 이제 백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영역에 다시금 혼란과 분열을 초래할 것임을 가장 잘 알고 있던것도 차르 본인이였다. 분열된 그들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는 그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폭력으로 점철된 신생 제국의 그늘은 점차 깊어지고 있었다.


차르의 결정

블라디미르의 마지막 10년 동안 동해 제국에는 새로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동해 제국의 차기 계승자를 두고 파벌 간에 논쟁은 점차 격해지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스뱌토폴크와 차남 야로슬라프, 그 둘의 성격은 꽤나 대조적이었다. 동해 제국의 분열은 점차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차르가 연로하고 점차 블라디보스토크에 기거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제국의 행정 한계는 더욱 크게 다가오고 있었고 동해안의 식민지는 사실상의 독립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차르는 자신의 두 아들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장남 스뱌토폴크를 프리모리예의 벨리키 크냐지에 임명하여 행정 업무를 맡기고 차남 야로슬라프는 동해안 식민지구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식민지의 통제와 안정을 맡겼다.

둘의 행보는 대조적이였다. 스뱌토폴크는 독선적이고 가학적이였다. 그런 그의 성격은 봉신들과 상당한 마찰을 빚게 만들었다. 그의 행보는 매번 적을 만들었고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프리모리예 지방 봉신들도 예외가 아니였고 불만을 불러일으키며 분열을 재촉했다. 반면 야로슬라프는 준수한 행정 수완으로 식민지의 통제를 충실히 수행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제국의 행정 한계에도 불구하고 동해안 식민지의 유지를 제법 오랜 시간동안 가능하게 해주었다.

차르 블라디미르는 그 사실을 보고선 차남 야로슬라프가 능력과 성품 모두에서 형을 능가함에 따라 야로슬라프를 비밀리에 동해 제국의 황태자, 차르 내정자인 체사레비치로 지정했다. 제국을 이끌어 나갈 차기 계승자는 수많은 민중과 봉신들을 한데 모으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황제의 개인적인 신념과 평소 근면하고 유능한 모습을 보였던 야로슬라프에 대한 호감에 따른 판단이었다.

이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스뱌토폴크는 동생에 비해 뛰어난 무력에 더불어 자신이 장남이라는 사실에 매몰되어 자신이 차기 계승자가 아닐 것이라는 우려를 버리게 된다. 수많은 민중이 황제가 은밀히 유포한 소문에 따라 무력이 출중한 스뱌토폴크가 다음 황제일 것을 예상했으며 그에 비해 성품이 온화하고 인망있던 야로슬라프가 왕위에 오른 스뱌토폴크에게 제거당할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이러한 황제의 기만 작업과 주변 지인들의 지속적인 아부는 그의 시야와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다. 그는 곧 야로슬라프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중단하고 방만한 운영을 이어갔다. 야로슬라프는 자신이 매번 아버지와 형과 비교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겸허함과 침착함을 가지고 매번 자신의 열등감을 이겨내려 노력했다.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었던 그의 욕망은 그에게 근면함을 가지게 해주었다. 아버지와의 수많은 비교와 장남의 존재로 인한 상속 2순위라는 열등감은 야로슬라프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성장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근면한 성품도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었다.

차르는 미리 후계자를 지정한 후 차분히 죽음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 지정은 가장 가까운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었고 나중에 이는 다른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체사레비치 야로슬라프의 계승

2443년 7월 15일 차르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는 죽었다. 차남 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는 전임 차르에 의해 미리 계획된 계승 절차에 따라 다음 황제로서 대관식을 수행했다. 그때 스뱌토폴크는 북방 전선에 시찰을 나가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대관식 직전까지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지 못했다. 스뱌토폴크는 급히 남부로 군대를 돌려 이는 정당한 계승이 아님을 주장했다.

전 차르의 수행원들은 야로슬라프가 다음 계승자라는 황제의 유언과 친필 싸인이 담긴 유서를 보여주었고 스뱌토폴크는 현실에 절망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스뱌토폴크의 회군은 야로슬라프에게 충분한 반역의 행보로 여겨질 수 있었다. 스뱌토폴크에게는 잠시 국경을 살피기 위한 소수의 병력만이 존재할 뿐이였다. 그 정도의 병력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함락할 수도, 포위할 수도 없었다.

야로슬라프는 스뱌토폴크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스뱌토폴크는 프리모리예 남부 하산스키의 크냐지에 임명되었다. 하산스키는 만주와 한반도에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척박하며 낙후됬을 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에 매우 가까웠다. 하산스키의 자체적 역량으론 차르에게 반기를 들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야로슬라프는 현명했고 자신의 적을 친구보다 더 가까이 두라는 격언을 충실히 수행했다. 스뱌토폴크는 뛰어난 음모력에도 불구하고 야로슬라프에 대한 감시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스뱌토폴크는 자신의 명분을 포기한 대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왕위 계승의 희소식에도 불구하고 동해 제국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프리모리예의 영혼 그 자체와도 같은 블라디미르는 사망했고 민중은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다음 황제는 무능할 뿐만 아니라 동해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였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고 있었다. 평소부터 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봉신들을 생각해보면 소문의 출처는 뻔한 것이였다.

동해 제국의 식민지는 야로슬라프가 차르로 즉위하고 프리모리예에 집중함에 따라 이제 유지될 수 없었고 프리모리예의 봉신들도 세력을 결집하여 2개의 세력으로 분화된다. 러시아 연방 공산당, 소보르노스티. 그들은 이제 황제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무력 행보를 점차 확대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세력들은 자신만의 이해관계와 다른 세력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에 따라 서로 경쟁하고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제의 옥좌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고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야로슬라프가 근시일 내에 그에 응답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제국의 붕괴는 이제 눈앞으로 다가왔다. 신의 뜻에 따라 프리모리예의 운명 또한 결정될 것이다.


동해 제국의 붕괴

시작 시점에서 동해 제국은 몇년 후 이벤트를 통해 동해안 식민지를 상실하게 된다. 곧이어 이어지는 내전으로 인해 동해 제국 작위는 파괴된다.

프리모리예 내전에서 승리한 세력은 프리모리예 데쥬레를 가지는 왕국령을 생성한다.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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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 해군

러시아 연방 해군

현재 동해제국의 패권을 잡고 있는 주도 세력이다. 지도자는 동해 제국의 차르 야로슬라프 로제스트벤스키. 동해 제국의 강대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때 동해안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자랑했던 세력이지만 시나리오 초반에 동해안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며 기회를 잡은 하위 세력들의 반발에 따라 프리모리예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내전에서 승리하고 프리모리예를 통일하게 될 시 러시아 연방 해군 왕국위를 생성할 수 있다.


프리모리예는 사건 직후 무정부 사태에 빠지게 된다 중앙 정부와의 단절, 그리고 극동에 고립되고 버려졌다는 강박 관념이 사회에 확산되며 사회 불안정과 급격한 무력 분쟁을 경험한다. 2376년 수많은 군벌들이 난립하며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활동이 일상이 될 무렵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가 태어난다. 부모가 없던 블라디미르는 노예시장에 팔려가며 마피아 두목 게오르기 피오네르 휘하의 소년병으로 종군하게 된다. 아이는 총명했기에 글읽기에 관심을 보이며 틈틈히 책을 읽곤 하였다. 그중 고대 러시아사를 접하게 된 블라디미르는 키예프 역사 상의 전사-군주였던 스뱌토슬라브를 동경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아이는 전쟁사와 전략 전술 연구에 몰두하였고 이는 그가 종군하던 부대에서 부각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2393년 그가 18살이 되었을 무렵 인정받은 블라디미르는 게오르기 피오네르 휘하에서 꽤나 많은 병력을 지휘하게 되고 게오르기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기 위해 블라디미르를 보내 블라디미르는 블라디보스토크와의 무력 분쟁을 천부적인 리더쉽과 인망으로 협상 끝에 아무런 사상자 없이 종결짓는다.

블라디미르는 졸지에 블라디보스토크의 후원을 등에 업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게오르기는 뒤늦게 블라디미르를 제거하러 했지만 실패하고 프리모리예 북부 해안으로 쫒겨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지금까지 프리모리예 내에서 하나의 중립 자유 도시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그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영원히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의 심장은 지금까지 없었던 모험심과 숭고한 신념으로 차오르고 있었으며 그의 눈길은 항상 저 멀리의 수많은 땅과 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복 활동을 추진하기에 앞서 강습 해군 보병으로 구성된 과거 러시아에서 기인한 군사 조직 러시아 연방 해군을 창설하고 정복 계획을 보다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의 뛰어난 무력, 군사적 식견 하에 해군을 동원하여 프리모리예의 해안을 기습적으로 상륙하여 적의 중심부를 타격하는 전략은 수많은 성공을 낳기 시작했다. 기습적인 블라디미르의 침공 하에 그동안 난립하던 군벌들은 무너지고 일부의 세력만 약간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생존하게 된다. 프리모리예 전체를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가능성을 눈여겨 보고 하나의 무역 거점이자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2396년 온 프리모리예의 대지와 해안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음을 확인한 차르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는 동해 제국을 선포한다.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도시를 국제 무역의 종점으로 건설해 수많은 부를 모았고 이렇게 다시 모은 자본을 활용해 한반도로 남하하여 본격적인 약탈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군사 행동은 동시에 내정이기도 하였는데 약탈로 모은 자본을 블라디보스토크와 프리모리예의 재건에 투자하며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한반도로 남하한 블라디미르는 곧 동해안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여 동해안의 재해권을 확보했으며 카톨릭 덕원자치수도회를 발견하여 정교회 수도원으로 변경시켰다. 남하하던 제국은 끝내 동해 해군을 맞이하고 몇번의 무력 분쟁 이후 확장을 중단한다. 2416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차르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는 자신의 국가에 많은 결점이 존재함을 깨닫고 수십년간 제국의 안정과 통일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개인의 리더쉽과 무력으로 유지되던 동해 제국이 차르의 사후 무너질 것임은 마치 당연할 것이다. 수많은 식민지는 이미 제국의 행정 한계를 초과하고 있었고 점차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차르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살아남았던 소수의 군벌들 또한 다시금 프리모리예에 자신만의 질서를 세우고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블라디미르는 후계자 야로슬라프와 차남 스뱌토폴크를 남긴채 68세의 나이로 2443년 7월 15일 사망한다. 장남 야로슬라프는 28세의 나이로 동해 제국의 차르로 즉위하였다. 황제 사후 리더십의 부재로 제국은 내부에서 분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시작 시점의 지도자인 차르 야로슬라프의 시간대에서 다른 파벌들이 득세하게 되고 이는 곧 제국의 위기와 식민지의 기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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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

소련 공산당. 사건 이후 400년이 지났음에도 공산주의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공산주의자들은 부서진 문명의 잔해 아래서도 여전히 혁명투쟁과 프톨레타리아 독재를 외치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행동 때문에 공산당은 제국내에서 가장 경멸받고 소외되는 세력이다. 지도자는 이네사 크룹스카야. 그녀의 사망한 남편인 예브게니 리보프는 공산당 내에서 뛰어난 연설로 지지받던 젊은 유망주였다. 그는 암살당했고 크룹스카야는 차기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임기 중의 경험들과 자식의 죽음은 그녀를 잔혹한 모략가로 거듭나게 하였고 뛰어난 음모력으로 공산당을 권위주의적 1인독제체제로 전환시킨다.


사변 직후 러시아 공산당의 비밀은 많은 전설들이 난무할 뿐 베일에 쌓여있다.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공산당은 어려운 시기를 보냈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하며 혼돈의 세기 속 지식인들 소수가 모여 러시아의 마지막 남은 지성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모습은 드러낸 것은 2189년이라는 이른 시점이었다. 그전까지 그들은 군벌들의 호의에 기댄채 책이나 강연을 팔아 입에 풀칠하는 지식인 무리에 불과했으나 언젠가 공산주의에 감화된 우수리스크 군벌이 거처와 식량을 지원했고, 얼마 뒤에 그들은 그간 보존하고 발전해내었던 모든 지식들을 빠짐없이 기록하는데 성공하며 혁명의 전파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2230년 우수리스크 군벌이 백두산 분화에 휘말려 사망한 후. 이전까지 당원들의 민주적 투표를 통해 서기장을 결정했으나 문제는 우수리스크 군벌 - 전 서기장의 사후 발생했다. 이전까지 당원들의 민주적 투표를 통해 서기장을 선출하였으나 우수리스크 군벌이 공산당 서기장을 겸임하며 공산당원 뿐만 아니라 우수리스크 지역 주민들의 투표권을 두고 선거 방식과 피선거권자, 선거권자의 범주 등에 관해 긴 토론이 벌어졌으나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에 임시 서기장 니키타 리보프는 독단적으로 인민위원회에 의한 간선제를 도입하며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선거 제도를 확립시켰다. 이 선거를 통한 첫 당선자는 당연하게도 리보프였다.

이후 리보프는 세계혁명이라는 공산당의 장기적 목표를 설정하며 연해주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전파 사업을 펼쳤고, 운이 좋게도 백두산 분화를 기점으로 민중들은 구호 사업을 벌이는 공산당에 호의적이었다.2248년 리보프가 폐 질환을 이유로 서기장직을 내려놓았을 때 공산당은 상당히 커져있었고 영토면에서나 신도 면에서나 강력해졌다. 그러나 그때를 기점으로 늘어난 공산당원들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처음부터 믿던 이들이 아니었고, 도리어 그들은 민간신앙과 마르크스주의를 혼동하며 그 둘이 혼합된 이단을 신봉했다. 뿐만 아니라 리보프 사임 이후 그가 파견했던 선교사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공산당 내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선교하던 지역의 토착 신앙에 현혹되며 마르크스주의와 민간신앙이 혼합된 이단을 신봉하고 있었고 또한 이들이 공산당 내에서 무시 못 할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이미 황폐해지고 있던 공산당 내에 더 큰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처음의 서기장 선출 문제와 단순한 교리 논쟁으로 시작한 감정의 골은 갈수록 격해지며 사실상의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2271년 과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였으나 현재는 다소 종교적 경향을 띤 로자 아르만트가 임시 서기장으로 선출되고 공산당을 기존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우수리스크 지부와 종교적으로 변질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로 분할하며 막심한 피해를 감수하고 내전을 종결지었다. 로자 아르만트는 내전의 피해를 수습하고 북방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2314년 그녀가 사망할 즈음 공산당의 개척지가 북방한계선에 이를만큼 성공적인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북방 개척지는 전부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우수리스크의 관할이었기에 이는 블라디보스토크 지부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아르만트 다음의 서기장을 선출하는 선거는 더욱 격해졌다. 아르만트 재임기 동안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조차 그녀의 입김을 통해 종교적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종교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신으로 추앙하며 스탈린을 그의 마지막 사도로 추대하고선 잊혀졌던 과거 '스탈린주의'라는 칭호를 차용하며 자신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노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도저히 이에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넓은 영토에서 오는 많은 선거인단에 의해 우수리스크 지부는 자신들이 지지하던 미하일 숄로호프를 과반수로 선출시킬 수 있었으나,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는 이에 불응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사실상의 독립 상태에 이른다. 숄로호프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서 연변과 함경북도, 그리고 그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2340년에 사망할 때까지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였고 그중에는 그의 아들인 신의주 공산당의 창건자 표토르 숄로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는 인근의 토착 정교도들이 군벌을 형성하기 시작하며 상당한 군사적 위협을 경험하고 있었으나 우수리스크 지부는 관여하지 않았다. 2365년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는 소멸하였고 당시 서기장이던 세르게이 그루지닌은 같은 공산당 동지들을 도와주려 노력하였으나 당시 우수리스크 지부가 연변과의 분쟁에 휘말리며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를 지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2388년 그루지닌 서기장은 연변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새로운 서기장 파벨 블류헤르가 취임한다. 그가 취임했을 당시 시대의 흐름은 급변하고 있었다. 공산당의 전도 정책은 신의주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성령신앙에 위축되며 모든 성과는 초기화되었고, 마피아와 같은 새로운 세력들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블류헤르는 이 상황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고, 2386년 프리모리예의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세력이 러시아 연방 해군의 블라디미르에게 복종했을 때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세력이 입을 피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에 승기가 분명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 투항 제안을 보내었다. 연변과의 긴 투쟁으로 지친 블류헤르는 독단적으로 제안을 승인하였다. 많은 비판이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민들은 끝없는 투쟁에 이미 지쳐있었기에 공산당 관료들을 주축으로 하여 이런 서기장의 독단적인 결정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이들은 많았다.

2435년 블류헤르 사후, 옛 리보프 가문의 후예였던 예브게니 리보프는 서기장에 선출되며 정권을 잡는다. 그는 블류헤르의 투항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존재였으며 동해제국에 당장 충성하는 척 기만하며 언젠가 다가올 동해 제국에 대한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르 블라디미르는 이를 미리 인지하고 있었고 공산당 관료들을 회유하여 2440년 리보프를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서 당장의 큰 불은 끈 듯했으나 이는 상당한 착오였다. 그가 죽었다고 기존의 리보프를 지지하던 반 동해 제국 노선 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다음으로 선출된 이네샤 크룹스카야, 그녀는 프리모리예의 그 누구보다 많은 앙심과 교활함을 가지고 있는 복수자였다. 그녀는 다가올 동해 제국의 붕괴, 그리고 내전을 미리 예견하고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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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보르노스티

소보르노스티

'소보르노스티' 동해 제국 내전 발발시 러시아 제국 해군(동해 제국 황가)에 대항하는 두개의 팩션 중 하나. 러시아 정교회(개혁 이전 정통 정교회)를 신봉하는 정교회 근본주의 세력.

프리모리예 통일 전쟁 당시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발밑 아래 모든 프리모리예의 군벌들을 무릎꿇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차르가 취한 선택은 관용이었다. 흔히 정복자들이 그랬듯 차르는 기존 지배층의 권리를 그대로 보장해주었고 그들의 작위 또한 축소했으나 유지시켜주었다. 이러한 관용 정책에 수많은 군벌들, 특히 남부의 나홋카와 포키노, 아르툠을 주축으로 한 해안 도시의 군벌들은 해상을 통제하고 있는 차르에게 무한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아르세니예프는 그날의 굴욕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북방 도시들은 약간의 문화차를 가진 남부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교회 개혁 이후에도 북방 도시들은 여전히 옛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었다. 아르세니예프, 카베일로보, 달네고르스크, 스파스크달니는 과거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항하던 북방 동맹의 기억을 되살려 동해 제국에 반발하는 파벌 집단을 형성했다. 이러한 반발을 제어하고자 블라디미르는 북방 도시의 자제들을 볼모로 잡아 궁정에서 교육시켰다.

그중에는 전장에서 비명횡사한 북방 동맹의 수장이였던 아르세니예프 군벌의 손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 아르세니예프, 아르세니예프 군벌가의 차기 가주, 그의 가문은 차르에게 대항했던 북방 동맹의 맹주였다. 우연하게도 아이는 차기 제국을 이끌어나갈 야로슬라프와 동갑내기였고 두 아이는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궁정에서 함께 생활해 동고동락했던 그들 사이였지만 아이들이 성장하자 둘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체사레비치, 제국의 상속자인 야로슬라프는 현임 황제의 정책을 존중하고 동해 제국에 상당한 애정을 보인 반면 자신의 가문이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접했던 알렉산드로는 가문의 도시와 가주를 죽여버린 동해 제국과 그 가문에 대해 본질적인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고 여전히 옛 정교회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 야로슬라프에 대한 오랜 우정이 뒤엉키며 알렉산드로는 야로슬라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2441년 두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 차기 계승자가 야로슬라프로 확정되자 차르는 두 가문의 아이들을 결혼시켰다. 야로슬라프는 알렉산드로의 여동생을, 알렉산드로는 야로슬라프의 여동생을 각자 아내로 맞아들였고 이내 알렉산드로는 궁정에서 해방되어 그들 가문의 도시, 아르세니예프로 향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는 아르세니예프를 향하는 길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가문과 조부의 원한을 갚아야 하는 가주로서의 임무와 옛 군벌 시대의 균형과 질서를 회복해야 할 의무 동시에 자신과 함께 자라왔으며 이젠 그의 아내이기도 한 동해 제국 황가에 대한 봉신으로서의 충성, 아르세니예프를 향한 길에서의 모든 생각이 그를 짓누르고 곤경스럽게 만들었다.

아르세니예프에 도착하자 도시는 여전히 번창하고 있었다. 전쟁 당시의 점령이 도시의 활기를 잠시나마 침묵시켰을 뿐 도시의 모든 민중은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들 가문의 도시인 아르세니에프는 정교회 개혁이 시작된 아르세니예프 공의회의 개최지였다. 그가 이 도시 위에 서자 모든 것, 그의 도시와 그의 민중, 그의 가문과 프리모리예 국가, 러시아인, 이제 그것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도시 중앙에 엄숙하게 우뚝 서있는 교회, 공의회의 배경이었던 교회를 알렉산드로는 둘러보았다. 사건 이전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교회는 옛날 세계, 사건 전의 러시아가 더욱 위대하고 찬란했었던 과거의 모습을 여전히 일부나마 간직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교회에서 생각했다. 전통과 역사는 프리모리예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의 생명줄이였으며 가장 강력한 자부심이였다. 누구든 이것들을 버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셈이 틀림없었다 동시에 검은 수면 아래서 이 찬란한 과거를 배반한 교회가 떠오르고 있었다.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과거를 회고한 알렉산드로는 이제 그의 운명의 실타래를 끊어내고자 한다. 교회 창문 사이로 비쳐드는 밝은 햇살을 맞으며 그는 그렇게 결심했다.

오래되고 명망있던 군벌가의 자손인 알렉산드로 아르세니예프는 군벌 시대의 종말과 자신의 가문이 몰락한 현실에 분개하며 프리모리예가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위대했던 과거로 회귀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허약하고 나태하며 부패한 러시아의 황혼, 러시아 제국과 그 이름을 추종하는 동해 제국의 지배자들은 프리모리예를 타락시키고 명백한 몰락의 길로 몰아붙이고 있는 적그리스도임이 분명했다. 과거 교회의 이단자들은 영광스럽고 전통과 역사가 살아숨쉬는 정통 교회를 배반하고서 '개혁'이라 이름붙인 일련의 사고를 거쳐 이단으로 개종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과거 키예프 루스와 바랑기안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적 기풍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독교 사회의 순수성을 되찾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몰락한 세계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국하는 것.

차르 블라디미르는 위대했으나 결코 영원하진 않았다. 차르는 제국을 건설했으나 그것은 신기루와 같았다. 우리는 그와 다르며 그보다 더 옳은 길을 나아갈 것이다. 보다 근본으로 돌아가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아래서 영원할 것이다.





특징

게임 시작 시 동해의 패권 국가이지만 초반 이벤트들로 인해 붕괴되어 중소 국가로 위상이 낮아지는 세력이다. 초반부의 식민지 독립 이벤트와 프리모리예 내전 이벤트로 게임 난이도는 높은 편이다. 현재 지도자는 야로슬라프 로제스트벤스키. 동해 제국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의 동해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자식이다. 게임 내 등장하는 유일한 러시아 세력이다. 종교는 정교회. 속국으로 덕원자치수도회를 가지고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의 무역로를 통해 준수한 수입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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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시점 동해 제국 영역








연표

프리모리예 역사
군벌 시대
22세기 말 사건 발생
2189 러시아 공산당 출현
2230 "신의 징벌" 백두산 분화, 정교회 개혁 운동, 각지에서 군벌 형성, 우수리스크 군벌 및 전 서기장 백두산 분화로 사망, 임시 서기장 니키타 리보프 공산당 선거 제도 확립
2234 사도 니콘 초대 정교회 극동 교황으로 선출
2235 아르세니예프 공의회 개최, 정교회러시아 정교회 분열, 정교회 교황청 설립
2235-2395 10개의 군벌 도시 형성, 이후 160년간 군벌 시대 개막
2248 건강 상의 문제로 니키타 리보프 사임, 공산당 내분 격화
2271 로자 아르만트 임시 서기장으로 취임
2314 공산당 영역 북방한계선 도달, 로자 아르만트 사망, 미하일 숄로호프 취임, 우수리스크 지부에 반발하며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독립
2340 미하일 숄로호프 사망, 서기장 세르게이 그루지닌 취임
2365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정교회와의 분쟁에서 소멸, 러시아 공산당 연변과의 분쟁 발발
동해 제국
2376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 출생
2388 세르게이 그루지닌 연변과의 전쟁에서 전사, 파벨 블류헤르 취임
2393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 달네고르스크 군벌, 러시아 마피아 수장 게오르기 피오네르 휘하에서 종군 중 블라디보스토크 무력 분쟁에 파견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시 장악 및 게오르기 피오네르에게서 독립
2394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항하여 9개의 군벌 도시 "북방 동맹" 결성
2395. 9. 4. 대조국전쟁 개전, 블라디보스토크군 아르툠 공세 수행, 아르툠 원군 요청에 아르세니예프의 주도로 북방 동맹 소집, 남부와 동부의 해안 도시들 소집 명령에 불응
2395. 9. 24. 아르툠 함락, 북방 동맹 우수리스크로 방어 거점 수정, 달네고르스크 군벌 게오르기 피오네르 아르세니예프 포위
2395. 10. 31. 아르세니예프 함락, 달네고르스크군 우수리스크로 남하
2395. 11. 1. 우수리스크 교외에서 북방 동맹군과 블라디보스토크군 충돌, 우수리스크 전투에서 북방 동맹군 패배, 패주하던 중 달네고르스크군에 의해 섬멸되고 북방 동맹 와해
2396. 1. 1.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 프리모리예 통일, 동해 제국 선포, 정교회 교황에 의해 사도 니콘에 이은 제 2의 사도로 추앙받음, 우수리스크 군벌,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 파벨 블류헤르와 달네고르스크 군벌, 러시아 마피아 수장 게오르기 피오네르 등등 군벌 세력 복속 및 축출
2396 러시아 연방 해군 창설, 동해안 식민 계획 수립
2399 동해안 식민 계획 실시, 차르 블라디미르의 주도하에 동해안 해안 도시 침공 및 재해권 장악 시작
2414 동해 해군과의 교전, 조약 체결 및 동해안 남부에 대한 권리 주장 포기, 동해안 식민화와 해상 무역로 건설 완료
2415 차르 블라디미르 프리모리예 귀환
2416 제국 행정 조직 개편
2418 프리모리예 법전 제정
2419 성 축조, 개선과 옛 10개 군벌 도시의 지위 회복 및 도시 재건, 상인 후원과 무역로 투자를 통해 상공업 발전
2433 차르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 장남 스뱌토폴크 프리모리예의 벨리키 크냐지에 임명, 차남 야로슬라프 동해안 식민지구 총독으로 임명, 야로슬라프 차르 블라디미르에 의해 비밀리에 황위 계승자, 체사레비치로 지정
2435 예브게니 리보프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
2440 예브게니 리보프 암살, 아내 이네샤 크룹스카야 서기장에 취임
2441 알렉산드로 아르세니예프, 아르세니예프 크냐지로 임명 및 제국 궁정에서 해방, 북방 동맹의 재건 및 '소보르노스티' 세력 형성, 내전 준비 착수
2443. 7. 15. 차르 블라디미르 로제스트벤스키 사망, 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동해제국 차르 계승, 장남 스뱌토폴크 블라디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하산스키 크냐지로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