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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레우니 건국 기원
1156 MCLV

mīlle centum quīnquāgintā quīnque


 게시글 보기 도움말: 데스크톱, 모바일, 제이위키 리버티 스킨 베이스 | 제작: 여이 | 세계관: 레우니


레우니 왕국
아키텐 제4왕국 파벨로트 왕조 레우니앙 가문 집정
Royaume de Réuni
Royaume d'Aquitaine
Kingdom of Reunia
Kingdom of Aquitaine
Regnum Réunitatum
Regnum Aquitanum
국기 국장
Pour Dieu et ma famille
신과 나의 가족을 위하여
상징
국가 레우니인의 개선행진(La marche du progrès de la Réunion)
국수
사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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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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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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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파베르트 드 레우니(Pavert de Réuni)
최대 도시
몽루망트(Montrumant) 광역시
접경국
프랑스, 스페인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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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52,363,740명
인종
레우니인 78%, 프랑스인 21%, 기타 1%
기대 수명
85세[1]
공용어
프랑스어
지역어
바스크어, 오크어[2]
공용 문자
라틴 문자
종교
국교
가톨릭교회
분포
가톨릭교회 66%, 무종교 23%, 개신교회 8%, 기타 3%
군대
국왕 폐하의 군대(Armée de Sa Majesté le Roi)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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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땅(Terre du roi)
파벨로트 드 레우니(Pavellot de Réuni) 왕령지
광역시(Ville métropolitaine)
랑데즈비옹(Rendez-vous), 몽루망트(Montrumant), 카르티니(Cartinie)
기타 행정구역(Autres districts administratifs)
35개 시, 180개 군, 387개 소구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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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국가 원수 (국왕)
샤를 12세(Charles XII de Réuni)
정부
요인
국가각료회의 의장
레옹 드 마르시옹(Léon de Marsillon)
국가각료회의 부의장
샤를 마르멘(Charles Marmen)
귀족원 의장
카르사 드 베르됭(Carsa de Verdun)
평민원 의장
루카트 랑데즈(Lucas Rendez)
왕실부 장관
막시밀레 레위트(Maximille Levit)
외무부 장관
요안나 마를렌(Joanna Marlen)
군대부 장관
프랑수아 레우니트(François Reunite)
여당
레우니 국민동맹(Alliance nationale de Réuni)
연립 여당
민주보수당(Parti conservateur démocrate), 국민과 왕정을 위하여(Pour le peuple et la monarchie)
신임과 보완
환경운동(Mouvement environnemental), 이제는 다함께!(Ensemble maintenant!)
원내 야당
민주주의당(Parti démocrate), 보수연합(Union conservatrice), 레우니 사회당(Parti socialiste de Réuni), 진보정의당(Parti de la justice progressiste), 보수왕당파(Un royaliste conservateur), 국가전선(Front national)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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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수정자본주의
GDP
(명목)
전체 GDP
$2,193,988,342,260[3]
1인당 GDP
$41,899[4]
화폐
공식 화폐
레우니 레우(Leu)
ISO 4217
LRE(Leu Reúni)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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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GMT+2
도량형
미터법 표준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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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수교국
UN 가입
창립 회원국(1945년 창설 당시 가입)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 246(종로3길 17) D타워 광화문
ccTLD
.re
국가 코드
KRE, RE, RN
전화 코드
+174[5]
여행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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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여행주의보
코로나19


레우니 왕국은 유럽 대륙의 한 지방인 갈리아의 아키텐 지역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이다. 수도는 파벨로트드레우니(Pavellot de Réuni)이며 이를 제외한 주요 도시로는 랑데즈비옹(Rendez-vous), 레우니의 최대 도시인 몽루망트(Montrumant), 카르티니(Cartinie) 등이 있다. 인구는 52,363,740명[6]이며 주민의 대다수는 갈리아 아키텐 지방에 정착했던 서고트인들과 노르드인들의 후손인 레우니인(아키텐인)이다. 국어는 레우니어이다. 일부 지역에 바스크어와 오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화자들이 존재하며, 국어인 레우니어는 프랑스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음에도 일부 단어의 차이와 이질적인 민족성 등의 이유로 다른 언어로 구별된다. [7]

국명과 민족명의 어원

레우니의 국명과 그 민족인 레우니인의 어원은 현재 군림하고 있는 왕가인 파벨로트-레우니앙(Pavellot-Réunionnais) 가문의 "레우니앙"에서 따왔다는 주장과 프랑스어 형용사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으로 나뉜다. 1번째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레우니의 어원인 레우니앙은 파벨로트-레우니앙 왕가가 건국 이래 터를 잡았던 레우니 서남부 레우니앙(Réunionnais) 영지에서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고 그 이름은 직계 당시에서부터 이미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주장은 주류 언어ㆍ역사학계에서 인정받는 설로, 레우니는 "결합된, 연결된, 합동의, 모인, 연합된" 등등과 같은 뜻을 가진 프랑스어 형용사 "Réuni", 민족인 명사 레우니인(Réunion)은 "결합, 연결, 집합"의 뜻을 가진 명사에서 그대로 이어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역사적 정당성도 가지고 있다. 보통 레우니 건국 이전 레우니인들은 그저 아키텐인(Aquitain)이라고만 불렸는데, 이들이 카롤루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다른 지역의 프랑크인들과 민족성이 크게 분리되기 시작했고, 자신들끼리 결속을 꾀하는 와중 시간이 지나면서 레우니옹이라는 명사가 아키텐인들을 부르는 공식명칭으로 바뀌었다가, 그게 독립 전쟁 이후에 이르러 국명에까지 적용되었다는 주장이다.

역사

이 설정은 순수창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프랑크 왕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레우니 국가 형성

중세 초 프랑스 남부의 아키텐은 프랑크 왕국과 매우 상이한 사회・경제・문화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정복당한 이후에도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781년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중앙집권주의를 포기하고 아키텐 왕국을 창건하여 주민들의 분리주의 성향을 달래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이 지역을 프랑크 왕국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한편 아키텐을 통치하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루도비쿠스 1세가 수차례에 걸쳐 상속령을 개정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아들들이 831년부터 본격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카롤루스 왕가의 내부 갈등은 아키텐에서 가장 첨예하 게 드러났으며 수십 년에 걸친 내전 끝에 카롤루스 대머리왕이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서프랑크 왕이 된 그는 자신의 아들을 아키텐 국왕 으로 임명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아키텐 왕국의 모든 권력을 독점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통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아키텐 귀족들이 이 같은 지배 방식에 반기를 들면서 카롤루스 왕권은 9세기 말 부터 급격하게 해체되었다.
9~10세기 왕권의 해체와 지방 권력의 성장 -프랑스 아키텐의 사례- The decline of royals and growth of locals in the 9th~10th centuries: Aquitaine of France,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서양중세사 논문 中

아키텐과 아키텐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분리주의 주장이 사회에 만연해있었다. 이런 반감들로 인해 분리주의가 더욱 커지고 레우니인이라는 민족성의 형성까지 어우러져 이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3개로 분열되고, 그나마 아키텐 내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존중해주던 카롤루스 왕조의 피핀 왕이 폐위되면서 결국 서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그 이외에도, 845년 샤를 2세가 보르도를 점령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가속화된 이래 아키텐 지역에서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샤를과 前아키텐왕 피핀, 피핀이 죽은 후에는 아들 피핀 2세와 함께 그 동생 샤를 간의 일종의 왕위분쟁이 존재했는데, 서프랑크 정부는 이러한 위기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주민들의 불만을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서프랑크의 아키텐 통치력이 약화되었고, 레우니인의 정체성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마침내 867년, 부유하고 영향력 있던 상인이자 아키텐 일대의 부를 독점했던 "레우니인" 루이가 서프랑크 왕의 지배에 저항하고 아키텐의 유력한 인사들과 함께, 그리고 서프랑크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자원을 받아 대규모 독립전쟁을 일으키면서 6년간의 전쟁이 지속된 끝에, 872년 3월 16일을 끝으로 레우니 지역은 서프랑크 왕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당시 서 프랑크 왕국은 이미 20여년전 아키텐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대규모 충돌과 반란으로 인해 많은 군사력이 소비되었고, 형제국인 동프랑크와 로타르, 이탈리아 등과의 정치 분쟁이 이어지면서 아키텐 지역에 개입할 군사상의 여력이 없어졌다. 6년간 이어졌던 전쟁은 후대에서 혁명전쟁(Guerre révolutionnaire)이라고 부를 만큼 레우니인들에게는 깊이 회상되었다.

"건국왕" 루이 1세의 즉위와 독립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

수백년간 우리 아키텐 사람들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 아래, 그들과 일치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들의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배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군주를 위해 싸우지 못하였고, 저들 프랑크 왕의 지배 아래에서 불평등에 참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프랑크인들의 왕국으로부터 지속 투쟁을 통한 확고한 결과를 쟁취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치와 독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자랑스럽게 선언 합니다.

새로운 출발에 앞서 우리들의 정체성은 확고합니다. 나는 한명의 레우니인으로써 이 보편된 아키텐인들이 원하는 새 시대의 질서에 절대적으로 찬동하여, 완전히 독립된 아키텐의 레우니인들의 위대한 자치와 대의, 자유와 함께하는 생존과, 외국과의 공존과 국내 종교의 보전을 위해서 독립된 왕국의 선포를 말합니다. 나는 이제 역사의 움직임에서 아키텐의 레우니인이 영광되는 나라를 가짐으로써, 외국으로 인한 모든 압제를 더이상 수용하지 않으며, 고귀한 국가가 이 곳에서 영원할 것임을 확신할거라 믿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필사적으로 이 전쟁에서 싸우고자 한 모든 사람들이여, 결단코 우리가 지은 조국을 보호하여 각자마다의 권익을 온당하게 수용하고, 우리가 가진 문화로 하여금 세워진 왕좌를 하나로 하여금 영원한 봉역의 통일을 지킵시다.

나는,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이 길이 한줌의 부끄러움도 없을뿐더러, 오직 우리들이 지은 강건한 의지의 성벽이 보증하는 거룩함만이 존재하다고 강력히 믿습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를 위해 투쟁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모두 파리에 있는 압제자에게 소리 칩시다. "그대들은 다시 이 땅에 함부로 침범할 수 없으며, 다시는 이 땅에 대한 악행을 반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전 유럽의 군주들에게 알립시다. "프랑크의 압제자를 몰아낸 이 숭고한 나라와 함께 평화로운 미래를 건설하자."

로마의 거룩한 가톨릭 교회와 복된 베드로의 선출된 후계자이신 교황 성하께 청합시다. "레우니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해주십시오!"

거룩한 왕국의 미래를 위하여, 나는 그리스도의 축복된 대관의 영예와 축복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대들의 왕으로써, 여러분께 선포하니, 모든 사람이여, 신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임을 믿고 함께 이 대지의 번영을 일구도록 합시다!

867년 4월 8일, 루이 1세의 레우니 국왕 대관 연설 中

872년 4월 8일, 루이 1세는 마침내 위의 연설[8]을 통해 레우니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찬양을 받은 루이 1세는 동년 4월 23일에 왕위에 등극하였다. 루이 1세는 아키텐의 권익을 위해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란을 전개하였던 1대조 레우니의 이름을 새 왕국의 이름으로 정함으로써,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하지만 루이 1세는 그저 봉신들과 백성들이 지지하는 내부의 왕위에 올랐을 뿐, 대다수의 이웃 국가들은 레우니 왕국을 여전히 서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규정하고 레우니인들의 독립국 영지로 인정하지 않고, 공개적인 외교도 실시하지 않았다. 특히 서프랑크는 독립의 인정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레우니 왕을 "프랑크 왕의 이름으로 임명된 아키텐 자치 지방의 영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때문에 루이 1세와 왕국은 30년 가까운 세월인 26년 동안 이웃 국가와 교황청에게 자국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비록 루이 1세는 896년 사망하면서 그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 아들인 프랑수아 1세가 마침내 898년에 교황으로부터 "레우니인과 아키텐 지방의 정당한 왕"임을 인정받고 교황이 본인의 대리 자격으로 임명한 레우니 주교에게 대관을 수여받으면서 프랑크(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게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서프랑크 왕국은 이 시기 전후로 (왕조 명칭은 모두 국내 다수가 부르는 방식, 편의상입니다. 둘 모두 자신들을 카롤루스 혹은 카페 왕조라고 부른 적은 없습니다.)카롤루스 왕조와 카페 왕조의 왕위 분쟁으로 인해 레우니에 간섭하지 못하다가 카페 왕조의 집권 이후 레우니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레우니의 주교구는 900년대 초인 913년, 마침내 대주교구로 격상되어 레우니의 대관을 담당하는 레우니 주교는 레우니 대주교가 된다.

레우니를 인정한 당대 교황은 바로 요한 9세로, 본래 레우니가 서프랑크의 통치에서 벗어난 872년경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아키텐 지방의 온전한 평화를 위해 서프랑크 측에 더이상의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고[9] 루이 1세를 서프랑크 하의 봉신 공작으로 인정했으며, 이후 레우니 측의 사절단이 지속적으로 파견되어 독립 왕의 영지으로써의 인정을 요청했고, 레우니의 사제들이 왕실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기 시작하며 로마에 우호적인 의견을 전달하여 교황청과의 관계를 증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결국 898년에 이르러서 교황이 프랑수아 1세를 왕으로, 레우니를 별개의 독립국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법률왕" 프랑수아 1세의 업적과 "소년왕" 레누앙

초대 국왕인 루이 1세 "건국왕"의 아들 프랑수아 1세 "법률왕"(재위:896~908)는 유럽 국가들에게 독립국임을 인정받자 내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선 법전을 정리하고, 교회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통치하는 왕의 조언"이라는 책을 편찬해 후대 왕들이 자신의 조언을 귀감삼기를 바랬다. 프랑수아 1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 3세와 협상하여 관습적인 영토를 매듭짓고 더 이상의 분쟁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908년 프랑수아 1세를 이어 즉위한 "소년왕" 레누앙은 재위 2년만에 심한 폐렴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하여 별다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우니 최초의 국가 법전

레누앙이 즉위한지 2년만에 병사하자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이자 레누앙의 동생이었던 루이 2세(재위:910~921)가 즉위했다. 루이 2세는 재위기간 중 교회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레우니 곳곳에 성당을 세웠다. 또한 루이 1세의 법률 정리 작업에 이어 루이 2세 법전을 정리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루이 2세는 또한 "비만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루이 2세가 재위 후반에 심한 비만으로 인해 고생했으며, 비만으로 인해 생긴 질병이 심해져 사망했기 때문이다. 루이 2세가 사망하면서 그 아들인 루이 3세(재위:921~960)가 즉위하였는데 루이 3세가 아버지 루이 2세의 미완성 법전을 완성하여 938년 11월 16일에 "레우니 법전"을 편찬했다. 루이 3세가 만든 레우니 법전은 레우니 역사상 최초급으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국가 통치 법전으로, 레우니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불린다. 루이 3세의 별칭은 "용맹왕, Roi Intrépide"으로 그가 이룬 왕으로써의 업적에 대한 칭송을 하기 위한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분명 루이 3세가 일생 중 다른 사람들에게 용맹한 성격을 보여주었다는 추측도 있다.

샤를 1세, 아버지가 완성한 법전을 지웠지만 왕권을 강화하다

루이 3세가 960년에 수도 일대 산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서 평소 자신의 취미였던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고, 휴유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장자인 샤를 1세(재위:960~979)가 즉위했다. 샤를 1세는 평소 부왕인 루이 3세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이는 부왕이 자신보다는 차남인 프랑수아를 더 총애하고 자신에 대한 계승권 부여를 탐탁지 않아 했으며, 자신에게 언제나 차가운 태도로 대하며 어린 시절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샤를 1세는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프랑수아 왕자를 "신성한 왕권에 불충했다"는 이유로 살기 힘든 산중 시골로 보내 그 곳을 다스리게 하고 수도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으며, 레우니 법전의 효력을 박탈하고 법전의 사용을 금했다.

때문에 샤를 1세의 법전을 철폐한 행위는 그의 재위기간 동안 봉신 귀족들과 왕권이 보다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고, 향후 백여년간 부분적인 입헌 통치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한편 샤를 1세가 법전 철폐 조치를 시행하면서 왕권의 신성함과 교회의 거룩함을 교황에게 동시에 인정받으면서 왕권이 증진되었고, 그러자 예술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샤를 1세에게는 예술을 후원하는 것에 대한 숨통이 트이면서 후대 왕들의 왕권을 강화하고 궁중 문화와 레우니의 예술이 발전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랑수아 2세, 숨고르기에 나서며 국가를 안정시키다

샤를 1세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시골 공작이라는 한직에 가있던 루이 3세의 차남이자 샤를 1세의 동생 프랑수아 2세(재위:979~992)가 23세의 나이에 레우니 왕위에 올랐다. 프랑수아 2세는 형이었던 샤를 1세가 부왕에게 천대받은 것을 가엽게 여기고 자신을 내쳤던 형의 행동을 그다지 원망하지 않았다. 형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프랑수아 2세는 슬퍼하기도 했다. 새로 왕위에 오른 프랑수아 2세는 형의 왕권 강화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봉신 귀족들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샤를 1세가 법전을 폐지하고 교회에 의존하여 무리하게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지역의 봉신들이 큰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수아 2세는 봉신들과 지속적으로 연회를 열어 교류하는 한편, 변경백 제도를 실시하여 국경 지대에 있는 봉신들에게 군사 특권을 수여하고, 지각 있는 봉신들을 주요 궁정 관직에 책봉하였다.

프랑수아 2세는 재위 2년째인 981년에 동년배의 마가렛 왕비와 결혼하였고, 이 둘은 금슬이 무척이나 좋은 걸로 유명했으며, 휘하에는 7남 11녀를 두었다. 프랑수아 2세는 재위 후반 987년 프랑스에 들어선 카페 왕조와의 친교와 갈리시아 왕국과의 협력을 주 외교 정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프랑수아 2세는 992년, 심한 과로와 어릴적부터 다소 허약한 체질의 영향으로 가지고 있던 병이 과로성 스트레스로 인해 폭발하면서 왕위에 오른지 13년만에 3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루이 4세, 더불어 어버이 앙리를 위하여

프랑수아 2세가 36세의 나이에 과로로 병사하자 장남 루이 4세(재위:992~1000)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4세 역시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성적으로 몸이 약했고, 왜인지 내성적이었다. 루이 4세의 궁정은 왕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자 어려움이었다. 루이 4세도 왕위에 오른지 8년만에 병사했다. 선대 왕들이나 후대 왕들과 달리 별다른 기록이 없어 사가들 사이에서는 몸이 약하고 내성적이며 무능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루이 4세가 즉위 8년만에 사망하면서 프랑수아 2세의 차남 앙리 1세(재위:1000~1034)가 레우니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앙리 1세는 다행히도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아 몸이 건강했다. 하지만 은근 성깔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한번 시작한 바는 반드시 성취하려는 고집이 존재했다. 앙리 1세는 아버지 프랑수아 2세의 정책을 존중하면서 그 기조를 이어갔다. 앙리 1세는 매우 호탕한 성격이기도 했기에 이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디. 앙리 1세 국왕은 34년의 재위기간 동안 전대 국왕들의 혼란을 수습하고 레우니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킨 공로를 민간에서 인정받았다. 그래서 이후 그는 공식적인 명칭을 받지는 않았지만 민간에서 "어버이"라는 비공식적 존칭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의 고집스러운 면모는 지역 봉신들의 불만을 쌓이게 했고, 그는 결국 1034년 자신이 연 연회에서 독살당하고 말았다. 향년 52세였으며 이후 왕위는 장남이었던 샤를에게로 넘어갔다.

샤를 2세 재위기의 혼란

앙리 1세가 독살당하자 샤를 2세(재위:1034~1038)가 즉위했다. 샤를 2세는 아버지의 면모를 빼닮아 고집스럽고 호탕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샤를 2세는 부왕만큼의 관리력은 닮지 못했는지, 낭비가 극심하여 재위기간 동안 레우니의 국고를 바닥까지 드러나게 만들어버렸다. 샤를 2세는 1038년 사냥에서 술을 먹고 걷다가 물에 빠졌다. 곧 구조되었으나 얼마 못가 그 휴유증으로 궁전에서 후사 없이 죽었다. 그는 후대 국왕들을 힘들게 만든 암군으로 평가받으나,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기에 예술가를 적극 후원했고 결국 중세 레우니 예술의 발전을 이끈 셈이다. 그의 왕위는 앙리 1세의 차남이자 샤를 2세의 동생인 샤를 3세가 이어받았다.

샤를 3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한 왕

샤를 3세(재위:1038~1064)는 형 샤를 2세로 인해 파탄난 국가 재정을 채우느라 기나긴 치세를 보내야 했다. 그 과정 중에서 프랑스와 내통한 봉신들의 반국왕 반란까지 겪으면서 레우니는 존립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float: right
샤를 3세는 교황청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독실한 그리스도인 국왕으로 어필하며, 교황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050년 3월 경에 샤를 3세 국왕이 선출 1년차를 맞은 신임 교황 레오 9세의 선출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을 접견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우니의 모든 성직자 임명권은 오직 교황 성하께서 가지고 계시며, 거룩한 전체 교회의 교도권은 오로지 베드로 사도의 참된 후계자이신 성하께서 온전히 지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러자 교황 레오 9세는 국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는 왕의 어진 행실과 자신에 대한 예의바른 왕의 언행에 크게 감복받아 그에게 황금으로 봉한 베드로 사도의 초상화를 건네 주면서 "레우니의 백성들은 어질고 용맹한 왕의 치세 아래 행복하다. 하느님의 복된 종인 샤를 왕과 그 후손들은 합당한 레우니의 왕임을 확신한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샤를 3세에게 고마워했다고 전해진다. 교황과의 관계개선에 성공한 샤를 3세는 얼마 못가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고자 공식적인 왕위 계승 법을 마련했다. 이는 레우니 역사상 최초의 왕실전범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1064년, 형의 죽음으로 인해 왕위에 올랐던 동생 샤를왕은 장남 앙리에게 왕위를 넘기고 사망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샤를 3세 본인이 형의 방탕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자신만은 돈을 허투로 쓰는 경우가 절대 없었지만 정작 아들 앙리 2세가 역사에 남을 최악의 방탕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게 차남인 루이 5세는 레우니 군주중에서 영예로운 호칭인 대왕을 받게 되었다.

최악의 방탕왕이자 폭군, 앙리 2세

1064년 부왕이 사망한 뒤 즉위한 앙리 2세(재위:1064~1077)는 레우니 역사상 최악의 방탕왕이자 폭군이다. 어릴적 부모님도 화목했고 인간관계도 괜찮았으며, 무엇보다도 고등교육을 받아 똑똑했던 앙리 2세는 왕세자 시절 성군이 될 것이라며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이 기대는 헛된 꿈이었을 뿐이다. 국왕에 즉위한 뒤로 1065년 첫 부인 루이제 왕비가 병사하면서 앙리 2세는 점차 광적인 여색을 밝히기 시작했으며 어전회의에도 연속 불참하는 등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앙리 2세는 여색을 밝히는 것이나 정사에 무관심한 것 이외에도 값비싼 것을 사들여 궁전을 치장하고 매번 화려한 옷을 주문해 입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을 칼로 죽이거나 거세해버렸다. 이러한 행위에 당대의 많은 지하 기록[10]에서는 왕을 ‘광인’이나 ‘악마’같은 것으로 묘사했다. 왕이 여색을 밝히고 정사에 무관심하며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거세시켰기 때문에 전대 왕 당시 레우니 왕가를 지지했던 교황청은 매우 분노하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1070년 6월에 이르러 앙리 2세를 파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7년이 넘도록 파문이 해제되지 않다가, 1076년에 이르러 왕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사경을 헤메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파문을 해제해주었다.

앙리 2세는 1070년부터 1076년까지 6년간 파문된 상태였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파문이 해제되긴 했지만 사후에도 앙리 2세는 지속적으로 파문 당할만한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앙리 2세는 왕국을 돌보지 않고 폭군의 행동을 일삼다가 1076년 12월 경 통증을 느꼈다. 다음은 당시 묘사된 기록이다.

1076년 12월 경에 국왕폐하의 건강이 급속도로 안좋아지셨다. 국왕께서는 가슴 아래쪽과 복부 위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셨는데, 우리 궁정의 의사가 알고 있는 모든 의술을 동원해도 통증이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결국 의술이 발전되어 있다는 동방 이슬람 국가에서 전문 의사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는데, 폐하께서는 날로 야위어 가시고 사경을 헤멜 지경이시어 의사가 제때 올지 두렵다.
레우니 궁정史 ― 궁정 기록자 장 베르투이
작년 12월에 국왕 폐하께서 큰 통증을 느끼셔서 궁정 의사가 진찰하게 하였는데, 아무런 병도 찾지 못해 임시 방편으로 의자에 앉게 한 다음 양의 가죽을 입고 양 고기를 드시게 했다. 그러나 증상에 있어 아무런 개선이 되지 못하였고, 결국 동방에서 교역하는 이슬람 국가의 유망한 의사를 불러 진찰하게 했다. 의사가 찾아와 국왕께 진맥을 하고 여러 검사를 하더니 이윽고 국왕께서는 암에 걸리셨다고 말했다. 이윽고 국왕폐하께서는 몇달도 지나지 않아 올해 3월 첫날 새벽에 승하하셨는데, 뼈밖에 남지 않은 왕의 몰골을 보고 실로 충격에 빠지지 않은 이가 없었다.
레우니 궁정史 ― 궁정 기록자 장 베르투이

결국 궁정의사가 왕의 병명을 찾지 못하면서 왕실에서는 당대 이슬람 왕조의 유망한 의사를 불러 앙리 2세를 진찰하게 했고, 의사는 앙리 2세가 암에 걸렸다고 했다. 앙리 2세는 이미 쇠약해진 상태여서, 1077년 3월 1일 오전 5시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현대 의학계에서는 왕이 췌장암 말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앙리 2세는 나라를 성공적으로 이끌 성군의 유망주로 꼽혔으나, 아내를 잃은 충격에 심한 정신질환에 걸렸고 결국 최악의 폭군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루이 5세 "대왕"

희대의 폭군이자 방탕왕이었던 앙리 2세가 암에 걸려 투병 1년만에 병사하면서 샤를 3세의 둘째 아들이자 앙리 2세의 친동생이었던 루이가 왕국의 보위에 올랐다. 5번째 루이 왕이었던 그는 얼마 없는 대왕 중 하나다. (Louis V le Grand, 재위 1077~1103) 루이 5세는 재위 2년인 1079년, 선대 국왕이었던 샤를 1세가 효력을 중지시킨 지 정확히 100년만에 레우니 법전을 다시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켰다. 또한 법전을 면밀히 살피고 다시 정리하여 시대에 맞게 개편했다. 그래서 그런지 루이 5세는 입법왕이라고도 불리는데, 모두 이런 정책의 영향이다.

루이 5세는 재위 중이었던 1095년 경 제1차 십자군이 선포되자 교황의 부름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친정했다. 최고의 전략가였던 국왕은 십자군을 이끌며 병사들을 단합시키고 적들과 싸우며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전략적인 전투를 잘 실행한다는 칭찬을 받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1098년 펼쳐진 전투에서 팔과 다리, 어깨에 깊은 중상을 당했다. 그 후 급하게 레우니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지만 왕의 기력은 많이 떨어졌고, 결국 걷지도 못해서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했을 정도로 위독해졌으며 결국 와병하고 있던 1103년 사망했다.

위기를 헤치고, 샤를 4세

부왕은 십자군에 참전해 위세를 떨쳤지만 결국 중상을 입고 돌아와 와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루이 5세의 외아들이자 6살의 어린 아이였던 샤를 4세(재위: 1103~1130)는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라야 했다. 어린 왕은 대부분의 신하들에게 진심으로 칭송받지 못했으며, 어리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무시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강직한 어머니이자 루이 5세의 왕비였던 안나 왕비의 대리 통치로 사람들은 서서히 복종하기 시작했고, 샤를 4세는 성인이 되었던 16살까지 안전한 재위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성인식을 치른 샤를 4세는 친정[11]을 시작했다. 부왕과 모후를 쏙 닮아 불꽃같은 야심과 얼음같은 이성을 이어받은 청년왕은 몸이 약했기에 빠르게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 직감했는지 샤를 4세는 아들들에게 인생과 국가 통치 등등에 대한 교육을 열정적으로 진행했다. 상냥하고도 친절한, 때로는 엄격하고 냉혹한 아버지로써 그는 자식들에게 국가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고 봉신들로부터 어떻게 무시당하지 않을 지 가르쳤다.

덕분에 그를 이은 아들들은 다행히도 아버지의 바램에 쏙 맞게 안정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샤를 4세는 즉위 27년만인 1130년 사망했으며, 향년 33세였다. 물론 샤를 4세가 단지 서사시적인 자식 농사에만 열의를 쏟은 것은 아니다. 왕궁과 국왕 직할령에서 일하는 신하들의 관직 칭호와 관복의 규격을 제정하고 법전을 한차례 개정했다. 또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봉신들에게 특수한 상황에만 받는 특별 세금을 제정했으며, 국내 고급 무장병의 의무 주둔을 재확인했다.

정치

레우니 왕국은 입헌군주를 국가원수로 삼은 의원내각제 국가로써, 국왕이 국가의 원수이며 국가 각료 회의 의장(총리)가 정부의 수반을 맡는다. 국왕직은 세습에 의해 전대 국왕이 자신의 가장 가깝거나 가장 유능한 혈족에게 왕태자(혹은 왕태녀, 아들이나 딸이 아닐 경우 왕태제로 불린다.) 임명을 하고, 전대 국왕이 사망하면 왕태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설명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이 레우니 역시 공화국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내란을 일으켰으나 즉시 진압되었고, 또한 당대 국민들이 反프랑스 성향으로 인해 왕실을 지지하면서[12] 공화국 성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유럽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오래된 군주국으로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이웃국가인 프랑스에서의 혁명 발생으로 인한 루이 16세의 처형을 보고 가까운 시간 이내에 혁명의 열기가 레우니까지 덮치는 것을 염려했던 장 4세 국왕은 자신을 오로지 "헌법에 의한 왕"(roi par constitution)으로 칭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완전히 수용하되 공화정 요구 반란의 조짐은 탄압했다.

이후 레우니 정치는 왕국헌법에 기반하여 입헌군주정으로써, 의회와 내각 등의 문민이 이끌고 있다. 레우니 국왕은 국가의 통합을 이끄는 상징적인 존재이지만, 여전히 레우니 국민들에게 국왕은 권위있는 존재이며 여전히 존경받는다.

  1. 2020년 기준.
  2. 남부의 나바르 지역 소수 주민이 바스크어와 오크어를 사용하지만, 모국어로 사용하는 대다수가 80대가 넘기 때문에, 얼마 못가 소멸될 것으로 보인다.
  3. 2021년 기준,
  4. 2021년 기준.
  5. 독립 전쟁이 발발한 867년과 루이 1세가 즉위한 4월을 기념하는 의미다.
  6. 2021년 기준
  7. 단, 레우니 세계관에서 레우니인이라는 존재, 레우니라는 이름은 순수 창작이며, 현실의 아키텐 지역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점을 참고 바란다.
  8. 루이 1세의 레우니 왕국 건국 선포
  9. 앞서 40년이 넘도록 아키텐 지방의 백성과 봉신들이 프랑크 왕국에 불만이 컸고, 이에 따른 저항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군사적 충돌이 심한 상태였다.
  10. 국가가 간섭할 수 없는 지역에서 왕을 비판하거나 묘사하는 자료.
  11. 성년에 찬 군주가 국가를 친히 직접 통치하는 것.
  12. 레우니는 독립 이래 프랑스와는 오랜 시간 동안 척을 졌었다. 독립전쟁 역시 프랑스의 전신인 서프랑크하고 치룬 것이고, 이후 레우니가 국가로 인정된 이후에도 카페 왕조가 통치했던 프랑스 왕국과도 그다지 사이가 우호적인 편이 아니었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좋아진 것은 기이하게도 프랑스에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