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의 구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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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골국
蒙古大汗國 |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Great Khanate of Mongolia
국기 국장
위대한 황제가 다스리는 신성한 영혼들의 땅
ᠶᠡᠬᠡ ᠬᠠᠭᠠᠨ ᠤ ᠤᠳᠤᠷᠢᠳᠤᠯᠭ᠎ᠠ ᠳᠣᠣᠷ᠎ᠠ ᠠᠷᠢᠭᠤᠨ ᠰᠦᠨᠡᠰᠦᠨ ᠦ ᠣᠷᠣᠨ
1905년 4월 12일 ~ 1923년 2월 1일
(17년 9개월 20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청나라 치하 몽골 대한국
(외몽고부, 찰합이부)
역사
• 1905년 4월 12일 건국
• 1909년 4월 20일 광종의 대칸 즉위
• 1923년 2월 1일 멸망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대칸
역대 대칸 온곤 우짐 칸 (1909~1920)
토모르 조리그투 칸 (1921~1923)
정부수반 총리 (ᠶᠡᠷᠦᠩᠬᠡᠢ ᠰᠠᠶᠢᠳ)
주요 총리 바담도르지 (1908~1909)
남난쉬렌 (1915~1919)
담딘바자르 (1921~1923)
통화 원(투그릭)

개요

1905년부터 1923년까지 외몽골과 내몽골 일부 지역에 존속한 입헌군주제 왕국. 그러나 건국부터 내외정에 있어 한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온전한 독립국으로 기능하지 못한 괴뢰국으로도 평가된다.

공식 국호는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지만 당시 대외적인 공식 한자 국호가 ‘몽골대한국’이었기에 현재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계에서는 몽골대칸국으로 표제어를 정한 상황이다.

역사

청나라 황실과 혼인동맹으로 긴밀하게 엮인 내몽골(차하르)과는 달리 외몽골(할하)은 완전히 복속되는 시기도 18세기 준가르가 멸망할 때까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기에 외몽골 지역은 청나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중원과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물론 기, 소목, 맹등의 부족별 행정구역을 만들어 함부로 이주를 금지하는 분할통치를 펼치긴 했지만 건륭제가 세상을 떠나고 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그동안 꾸준히 저항하던 할하 몽골인들은 19세기 말엽 청나라가 확실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자 1892년 후레(現 알탄호트)에서 왕공족회의를 개최하여 몽골족의 독립국가를 천명했다. 이에 청은 대단히 불쾌하게 여겨 광서제가 토벌을 명하는 칙서까지 내렸지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의화단의 난등을 거치면서 청은 한국과 서구열강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처지에 놓인다. 이런 상황속에서 한국은 외몽골 지방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차하르 몽골인들은 1901년경 한국이 화북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자 왕공족회의에서 대칸의 지위를 광종에게 넘기기로 결정했을 정도로[1] 빠르게 한국에 복속되기를 청했고[2] 노국을 한노전쟁에서 격파하여 네르친스크, 캬흐타 조약 영구 준수를 약속받았지만 그들이 언제든지 몽골에 진출하여 한국을 다시금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라도 외몽골을 복속시키거나 (혹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외몽골을 완전히 합병시키기로 결정하고 할하 몽골인들의 분열을 획책하는 동시에 왕공족회의와 접촉하여 독립을 돕는다는 이중적 외교술을 확립하였다. 우선 한국은 내몽골인들을 왕공족회의에 침투시켜 구성원들 서로가 칸이 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상호간의 불신이 커지게 만들어 구심점이 생기는 것을 막아 몽골 민족이 협력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려 했다. 동시에 1903년 광종은 8대 젭춘담바 후툭투[3]와 접촉하여 그를 극진히 대접하여 국사(國師)로 모시고 일부 지역에 막대한 경제 지원을 했으며 이는 몽골인에게 한국이 친근하게 다가가는 동시에 일부 왕공족을 포섭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몽골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 또한 높아졌기에 한국은 반한파를 제거하기 위해 광서제를 부추겨 청군과 함께 1904년 외몽골 정벌을 단행한다. 외몽골 정벌은 말이 정벌이지 실상 쿠데타에 가깝게 빠르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는데 후레에서 왕공족회의가 열렸을 때 민간인으로 위장한 한국군과 소수의 청군이 모두 청군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회의장을 급습하여 의원들을 체포한 뒤 친한파 왕공족만 석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칸드도르지등 반한파 지도자는 후레에 감금되어 실권을 잃었다.

이듬해 친한파 몽골 지도자들은 몽골족만의 독립국가인 ‘대몽골국’을 선포하였다. 청도 한국의 압력에 독립을 승인하였으며 최초이자 마지막인 몽골인만의 근대 독립국가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대몽골국은 명목상 입헌군주제 왕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국왕이 공위상태였고 헌법상 입법기구인 후랄도 소집되지 않았으며 쿠릴타이라고 부르는 왕공족회의의 연장선인 행정기구가 실권을 휘둘렀다. 후랄은 1913년에서야 공식 소집되는데 후레 일대에서만 의원 선거를 치렀으며 그마저도 제대로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대부분 쿠릴타이 구성원들이 정한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동안 한국은 후레에 증기발전기를 설치하고 한성에나 있던 전차를 놓았으며 최초의 근대식 건물을 짓는등 신문물을 몽골에 들여왔다. 동시에 지리조사를 시작해 현 에르데네트, 다르한 부근에서 막대한 광물 자원을 발견하였고 몽골인을 채용하여 채굴을 시작했다. 한국은 광물과 목재로 얻은 이익을 다시 쿠릴타이 구성원에게 제공해 유착관계를 형성했고 한국은 몽골내 철도 부설권, 군 주둔권등을 얻어내며 차근차근 몽골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갔다. 1909년 청이 멸망하자 드디어 쿠릴타이에서는 광종을 대칸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쿠릴타이에서도 점차 한국에 위협을 느끼는 세력이 나타났는데 1908년부터 09년까지 총리를 지낸 바담도르지가 그 중 하나였다. 바담도르지는 건국 초기에는 친한파였으나 한국이 점차 직접적으로 몽골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하자 이를 경계하여 철도 부설권을 회수하고 대노 외교를 개시하는 등 한국을 견제하려 애썼다. 그러나 한국이 제공하는 이권에 눈이 먼 다수의 쿠릴타이 의원들은 그를 탄핵하였으며 부패혐의로 체포하여 실각시켰다. 게다가 그는 한국과 협력은 하되 외국인 대칸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을 견지했기에 바담도르지가 실각하자 광종의 대칸 즉위는 일사천리에 이루어졌다. 바담도르지 이후에는 친한 총리만 연달아 집권하며 차근차근 괴뢰국이 되어갔다. 1915년 집권한 친한파 총리인 남난쉬렌도 그중 하나였다. 그도 한국이 부설한 후레와 베이징을 잇는 철도, 광물 채굴등을 통해 이익을 보는 가문의 수장이었기에 후랄은 아무런 이의 없이 그를 총리로 선출했다.

하지만 1918년 12.10 운동이 발발해 한국이 혼란에 빠지자 남난쉬렌은 정책을 180도 바꾸어 탈한 정책을 펼쳤다. 후레-베이징 철도회사와 광물 채굴권 소유권은 몽골인만 가질 수 있다는 법을 제정했고 영국 프랑스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러시아 내전의 백군 진영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한국을 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자리를 잃은 한국인 기술자와 경영진이 떠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실제로는 탈한정책으로 인해 기술자와 경영자들이 떠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적 생활양식, 그리고 한국인 경영자들이 제공하는 이득에 적응한 여타 귀족들과 후레 시민들의 눈에는 남난쉬렌이 괜한 정책을 펼쳐 한국인들의 반감을 사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결국 1919년 4월 12일 후랄은 남난쉬렌을 탄핵하여 총리직에서 끌어내렸고 곧바로 부패 혐의를 씌워 구금했다. 이후 쿠릴타이가 과도정권을 이끌었는데 백군과의 관계 순차적 단절, 주요 회사 운영권을 원래 인원에게 반환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한국은 여전히 몽골을 신경쓸 여유가 없긴 했지만 이러한 정책에 일부 인사들이 돌아와 상황을 정리하였다.

  1. 광종은 명목상 몽골 대칸인 광서제가 있으니 이 결정을 ‘일단’ 거절했다.
  2. 물론 내몽골 지방으로 숨어든 한족등 의화단 잔당들에게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한국에 보호를 청한 것도 있었다.
  3. 몽골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처럼 환생이라는 시스템으로 승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