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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신문(중국어: 民國新聞)은 1847년 4월 7일에 발간된 국내 최초의 민간신문[1]으로서 한글3면, 영문 1면으로 구성됐다. 오경석을 중심으로 한 북화개항파에서 창간되었으며, 처음에는 주 3회 250부 발행하였다가 1853년 5월 1일 이후 일간지로 바뀌었다. 이후에는 1869년에 정부에서 인수한 뒤 폐간하였다.

아래아가 남아 있는데, 민국신문이 창간을 시작한 지 한참이나 지나서 1933년에 아래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글에 띄어쓰기를 정착시키게 한 신문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한글을 쓸 때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개신교계 이화학당(梨花學堂)과 같이 한민족 역사에서 최초로 성탄절을 기념한 곳이 민국신문이었고. 당시 크리스마스를 휴무로 할 것을 정했다.

『민국신문』 창간 배경

당시 김좌근이 이끄는 척신 내각이 희종에게서 수령의 장죄(贓罪, 뇌물)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다가 결국에는 국왕의 압력으로 퇴임함에 따라 일시적으로 유홍기(劉鴻基)를 필두로 한 개화 내각이 재수립하게 되었다. 이전 김좌근 내각 당시만 하더라도 이들 수구파들은 당시 허약한 민중들의 여론을 결집시켜 자신들의 정권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신문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창간하게 되나, 한성순보는 순우리말이 아닌, 한자로 되어 있기에 기존 유생들과 양반 계층 외에는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이후 유홍기 내각이 당시 역관이면서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이었던 오경석(吳慶錫)에게 신문 창간비를 지원함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민국신문은 민간신문이라는 점 외에도 정부에 강력한 지원을 받았는데, 주요 학당(學堂)과 서당(書堂)에서 이를 구독할 것을 지시하였고 내부(內部)는 각 지방 관청에게 민국신문을 구입토록 압력을 주었다. 또한, 이들 민국신문 출신의 기자(記者)들에게는 관청 출입층을 발급하여 기자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내용

『민국신문』의 체제는 평판중형(가로 22cm x 세로 33cm)이었고, 한글판은 가로 3단제, 영문판은 세로 3단제였다. 당시 이러한 가로쓰기 편집 체계에 대해 정인덕(鄭仁德)[2]"제호일망정, 가로쓰기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경천동지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라며 극찬하였다. 파격적인 '한글문화'에 대해 기존 한문체제의 붕괴를 촉진시켰다며 근대 문학의 출발점을 『민국신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민국신문』의 창간호 논설에서 "우리 신문이 한문을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아하리라. 또 국문을 이렇게 띄어쓴즉 아해라도 이 신문 보기 쉽고 신문 속에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람이라."고 밝히면서 "만국(萬國)에서는 사람들이 귀천없이 본국 국문을 배워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우는 법인데 이 나라 조선에서는 조선 국문은 아니 배우고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 아는 사람 드묾이라. 조선 국문과 한문을 비교하면 조선 국문이 한문보다 나은 점이 무언고 하니 첫째는 배우기 쉬워 좋은 글이요, 둘째는 이 글이 조선 글이니 조선 인민들 알아서 보고 알아듣기가 쉬울 터이랴"고 하였다. 이에 정인덕은 "『민국신문』의 이 같은 조선글 사용은 조선국이 비로소 근대 국민국가의 틀을 갖추는데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라 볼 수 있으라."라고 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글이 여전히 '암클'이나 '언문'이니 하여 천대 받고 있던걸 감안할 때 더욱 생생하게 부각될 수 있으며, 주시경(周時經)은 『배재학당사』에서 민국신문의 창간에 대해 "이를 슬프리 생각해 몇 번이고 소리 없는 울음을 내며 조선글 위해 헌신하겠다."라는 맹세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경석은 『민국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려면 조선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정인덕을 영입하려 했고, 이런 정인덕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 정인덕은 한글 표준어와 방언, 발음 등에 정통하였으며 『민국신문』 발간 중에도 쉬운 단어 선정을 위해 직접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1850년 7월 8일부터 영문판이 분리되어 4면으로 구성된 The People가 발행되었다. 영문판에는 국제정세에 대한 칼럼이나 오경석 등의 논설 외에도 국내 사정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오경석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25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25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신문은 이내 3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기관지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 뒤 강위(姜瑋)가 경영을 맡은 이후에 1853년 5월 1일 주 3회에서 일간으로 바뀌었다.

각주

  1. 국내 최초의 신문은 1846년에 발간을 시작한 한성순보(漢城旬報)이다. 한성순보는 민국신문과는 달리 국가에서 공인 발행하는 관보였다.
  2. 1840년대 ~ 70년대에 활동한 근대 수용론자로서 개화 교육 및 언어 교육에 대해, 특히 언어 연구에 치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