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서는 안타룩스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 세계관: 메이사/알헤나 | 문서 제작자: 리반


베아른 2세 (Béarn II)

지위 정보
이름 베아른 2세 (Béarn II)
대관식 우주력 275년 12월 4일
즉위식 우주력 276년 2월 13일
재위 E.K 275년 7월 11일~289년 5월 23일
(13년 10개월)
전임자  니콜라스 1세 (Nicolas I)
후임자  아마데오 2세 (Amadeo II)
수상  - 마크 드 사르텡
(Mac De Sartaing, 277~281)
- 안토니오 마타렐라
(Antonio Mattarella, 281~289)
신상 정보
출생일  우주력 245년 6월 27일
출생지  안타룩스 팔레 알페라츠
사망일  우주력 289년 5월 23일
사망지  안타룩스 에리다느뢰 왕립 성당
가문  알데고뉴 가문

베아른 2세(인류 통합어:Béarn II)는 안타룩스 제1 왕정국왕이었다. 본명은 베아른 샤를 로베르 드 알데고뉴(인류 통합어:Béarn Charles Robertiens De Aldegogne)이며, 안타룩스 항성계(인류 통합어:Antalux System)의 초기 안타룩스 항성계를 개척하던 세력, 안타룩스 연맹 중 하나인 알데고뉴 가문(인류 통합어:House of Aldegogne) 출신이었다.[1]

재위 기간 동안에 안타룩스의 정세가 안정화 궤도에 접어들게 되면서, 왕정 주도의 과도 체제는 종식을 선언하였으며, 이윽고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인류 통합어:Prime Minister) 중심의 의원내각제가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무분별했던 안타룩스 왕위 계승에 대해서 안타룩스 연맹(인류 통합어:Antaruxius Confederacy)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은 가문에서만 왕위 후보자를 선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신스 사회주의(인류 통합어:Synth-Socialism)를 지지하면서 인류-신스 문명(인류 통합어:Human-Synth Civilisation)으로의 초석을 다졌다.[2]

초기 생애

아버지였던 베아른 1세(인류 통합어:Béarn I)가 재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E.K 248년에 급사하게 됨에 따라 유복자가 되었던 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위를 잇게 된 니콜라스 1세(인류 통합어:Nicolas I)로서 왕위 계승에 대한 권리를 공인받은 뒤에 확고한 후임자로서 루도비쿠스 공(인류 통합어:Prince de Ludovicus)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니콜라스 1세에 전폭적인 지지 아래 팔레 알페라츠(인류 통합어:Palais Alpheratz)에서 제왕학을 교육받으면서 군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1세 재위 시기에 안타룩스 사회는 개척자 연합(인류 통합어:United Settlers)과의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태양계 연맹(인류 통합어:Federation of Solar System, FSS)과는 항성계 실질 통치권을 두고서 대립하는 시점이었다. 내부에서는 고도화된 인공지능 체계인 신스(인류 통합어:Synth)에 대한 시민권 부여를 두고 내부적 분열을 겪기 시작했다. 이것은 안타룩스 왕정에 대한 반발로도 이어지면서, 신스 사회주의자들과 해체주의자(인류 통합어:Deconstructivist)[3]들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는 인류 순수주의(인류 통합어:Human-Purism)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서 많은 이들을 곤란하게 하기도 했지만,[4] 신스 통합청에서 일을 수행하게 되면서 점차 신스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표감하기 시작했다.[5] 이를 통해 급격한 사상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사회 통합과 안정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데 몰두하게 된 그는, 신스 사회주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니콜라스 1세에 승인을 얻어 신스 자치의회(인류 통합어:Synth Self-government assembly)의 설립을 통해 신스가 안타룩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참여를 촉진시킴으로서 인공지능 지성체를 포함하여 신스 사회주의자들과 신노동공산주의자(인류 통합어:Neo-Syndicalismist)[6]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왕위 승계와 치세

E.K 275년, 니콜라스 1세가 서거함에 따라 확고한 왕위 계승을 인정받은 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새로운 안타룩스 사회를 이끄는 군주로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그는 먼저 부패하고 타락한 귀족 사회에 대한 청산을 위하여 비정기적으로 개회하던 귀족원(인류 통합어:House of Lords)의 해산을 명령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귀족 가문들을 '왕명 비협조자'로서 규정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국왕이 주도한 이 사건은 네오앙시앵 레짐(인류 통합어:Neo-Ancien Régime)으로 불리던 이른바 '과도적인 절대 귀족 체제의 혁파'를 의미하였으며, 동시에 초기 과도 사회가 붕괴된 것은 물론이며, 시민과 국왕과의 연대적 성격을 강화하여 시민 군주제(인류 통합어:Citizen Monarchy)를 확립시키는 것이었다.[7] 이에 안타룩스 연맹의 소속 가문이었던 후베르투스 가문(인류 통합어:House of Hubertus)을 포함하여 탄압받은 귀족 가문들은 이른바 항명 사태(인류 통합어:Insubordination crisis)를 일으켜 베아른 2세를 퇴위시킨 후 기존의 구체제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쿠데타 모의 과정에서 발각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과도 귀족 사회를 혁파하는데 성공한 베아른 2세는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되었던 '국왕선출위원회'를 폐지한 뒤,[8] 그동안 구 사회의 본산이었던 안타룩스 연맹을 일종의 선거군주정 성격의 국왕 선출 기구로서 기능을 조정함으로서 그동안 왕위 계승 과정에서 일부 부정부패한 귀족들의 위협과 방해를 받던 선출 방식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당시 신스 사회주의자이자 사회인민당을 이끌던 마크 드 사르텡(인류 통합어:Mac De Sartaing)에게 '수상' 직책을 맡기면서 국정을 일임하게 되었다. 이로서 안타룩스 초기 사회를 지탱하던 과도 체제가 종식되고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인 입헌군주정의원내각제을 전면 도입하게 됨에따라 시민 사회의 근간을 되찾게 되었다.[9]

마크 드 사르텡 수상이 E.K 281년에 국가 통합과 태양계 연맹과의 대립 구도에 따른 장기적 위기 대비를 이유로 임시 징병제를 실시하여 기초군사교육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에미뉘엘 웰즐리급 호위함을 건조하는 등 군사력 증강 과정에서 발생한 이념 문제와 경제 문제에 잇따른 악재로 인해 퇴임을 선언함에 따라, 베아른 2세는 일시적으로 국정에 복귀하였으나 곧장 신스혁신당의 대표, 안토니오 마타렐라(인류 통합어:Antonio Mattarella)를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하여 국정에서 다시끔 손을 놓게 되었다.

그는 국정에서 손을 떼게 된 이후 에리다느뢰 왕립 성당을 지속적으로 방문하면서 신앙 생활을 즐기는 것과 동시에 대다수가 알아주던 신스 사회주의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기에 '신스산업위원단'과 '노동자산업복지협회'의 명예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노동자, 인공지능에 대한 인권과 노동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안토니오 마타렐라와는 사석에서 만나 국정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도 한다.

몰락과 암살

그러나 그를 지지하지 않는 인류 순수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여전히 왕정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으로 가득찼으며, 안토니오 마타렐라의 내각을 지속적으로 비난하고 고의적인 국정 방해를 야기하면서[10] 또 다른 혼란이 초래되고 있었다. 점차 이러한 상황에 지쳐가던 그는 급진적인 신스 사회주의 정부 관료들을 온건적인 관료들로 새로이 내각을 구성시킬 것을 안토니오 수상에게 요청하는 등, 일관적인 정치 사상을 유지하지 못할 뿐더러, E.K 287년부터 지속적으로 본인을 향한 암살 테러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 질환을 앓게 되면서 철통 같은 경비와 보안 아래에 왕궁이었던 팔레 알페라츠에 은거하게 되었다.

E.K 289년, 그는 마지막으로 팔레 알페라츠에서 벗어나서 '안타룩스 건립제'에 참석하기 위해 왕궁을 나서면서 제러드급 무인함을 탑승하는 도중에, 해체주의자였던 마리아노 아스나르(인류 통합어:Mariano Aznar)에 의해 설치된 '광학-분리철갑탄'에 의해 전신이 관통되면서 중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후송 도중에 죽음을 예감한 그는 "마지막으로, 인민의 얼굴을 보여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11]

사후에는 신스 자치의회에 만장일치에 의거된 결의 아래 '가장 거룩한자'(신스어:Mestoa-sacrete)라는 작위를 인정받았으며, 그의 후임은 안타룩스 연맹 소속 아시브리아 가문(인류 통합어:Casa d' Assibria)의 출신이었던 아마데오 2세(인류 통합어:Amadeo II)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평가

혼란했던 중앙 정계에 대해서 확고한 왕위 선출 체제를 다진 한편, 과도기적이면서도 귀족 사회에 의거된 엘리트주의(인류 통합어:Elitism)와 네오앙시엥 레짐을 혁파한 후에 후진적이면서도 몽상적인 사상으로 치부되던 민주주의를 회복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나 인류 순수주의, 해체주의와 같은 극단화된 정치 사상을 부분적으로 포용하는 것과 동시에, 신스 사회주의를 국가 사상으로서 채택한 점에 대해서는 무분별하고 어지러운 안타룩스 내 정치 환경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됨에 따라 대중을 비롯한 교양인들에게까지 폭넓은 지지를 쌓을 수 있었다.

반면에 지나치게 신스 사회주의에 심취했다는 점에서 "붉은 국왕"으로 불릴 정도로 노동자와 신스 체제의 권익만을 옹호하고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화를 주창하면서 자본가들과 생산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극단적 정치사상을 포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과 마찰을 중재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암살이라는 최후를 맞이했던 점에서도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후에는 그의 사상적 화합 정책이 무위로 그치게 됨에 따라 아마데오 2세 시기에는 여러 사상 테러가 집중적으로 활동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사상 대립의 절정이 '왕정체제의 타도'로 이어진것도 우연히 아닌, 베아른 2세 치세의 사상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학자들도 있다.

각주

  1. 본래 알데고뉴 가문안타룩스 연맹에 속했던 가문이 아니었으나, 안타룩스 내 인공지능 사회에 크게 공헌했던 제1대 루도비쿠스 공 베아른이 민중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됨에 따라, 알데고뉴 가문은 연맹의 실질적인 구성 세력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2. 신스 자치의회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자'(신스어:Memoris-Kinde)라는 이름으로서 추앙하게 되었다.
  3. 아나키즘과는 다른 방식으로서, 이들은 '완전한 사회의 몰락'이라는 극단적 사상 아래에서 무력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4. 당시 그는 어떠한 인공지능 체계와도 교류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으며, 팔레 알페라츠 내 한 발자국도 드로이드(인류 통합어:Droid)와 신스가 발을 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5. 그가 부임했던 당시의 신스 통합청은 단순히 신스를 비롯한 인공지능 지성체에 대한 관리를 도맡는 것이 아닌, 시민권 관리 및 항성계 교류 관할에 대한 폭넓은 역할을 부여받은 곳이었다. 이 역시 니콜라스 1세가 그를 성장시키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이들은 인류-신스 문명 혹은 기계 제국이 인류 노동 사회의 근절과 기계 공산사회로서의 이행에 대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7. 이렇게 확립된 시민 군주제를 통해 안타룩스의 군주들은 중세 라틴어에 기인된 '렉스 안타룩시엠'(인류 통합어:Rex Antaluxiem), 즉 '안타룩스인들의 국왕'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8. 이 국왕선출위원회는 주요 부정부패에 얼룩되었던 귀족 가문들이 대거 참여했기에 '그림자 의회'라는 악명으로 자자했다. 니콜라스 1세도 민중의 지지를 받던 베아른 2세에 대한 왕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압박과 국정 방해를 통해 베아른 2세를 확고한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9. 이전까지 안타룩스에 과도정을 경험한 이들과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사회 근간으로서 채택했던 몇몇 우주 식민지들은 "안타룩스 사회는 진보하다 못해 퇴보하고 말았다."라는 말로 정치 체제에 대한 혹평을 남겼다.
  10. ECM으로 불리는 방해 전파를 통한 네트워크 행정 혼란, 의도적인 인공지능 차별 폭력과 같은 사례가 있었다.
  11. 애석하게도, 왕궁을 막 나서던 도중 갑작스럽게 발생한 암살이었기 때문이었던지라,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인민들의 곁에서 세상을 떠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