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포르 공화국 육군

Titel in Mitteleuropa.png

Picto infobox military.png
벨포르 공화국 육군
Armée de Terre
벨포르 공화국 육군.png
벨포르 공화국 육군의 문장
벨포르령 움베네네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벨포르 육군 소속 전차대
벨포르령 움베네네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벨포르 육군 소속 전차대
활동 기간 1773년 ~ 존속 중
국가 벨포르 공화국 벨포르 공화국
소속 벨포르 국기.png 벨포르 공화국군
종류 육군
규모 720,000명
명령 체계 벨포르 공화국 국방부
벨포르 공화국군 국방참모본부
본부 일드벨포르, 구스펠트 시
6구, 포부르 루야알 가 14번지
별명 Armée
표어 Honneur et Patrie
    파란색
    흰색
    붉은색
군가 Hymne à la liberté
마스코트 군마(軍馬)
참전 제1차 대전쟁, 제2차 대전쟁, 탕헤르 위기
기념일 6월 27일 (재향군인의 날)
지휘관
참모총장 아드리앙 위고 랑레자크 대장
주요 지휘관 외젠 클레베르, 르네 오펜바흐, 알랭 발라뒤르 등

벨포르 공화국 육군(프랑스어: Armée de Terre 아르메 드 테레[*])은 1773년부터 벨포르 공화국의 영토 방위를 책임지는 군사조직이며, 50만 명의 정규군과 12만 명의 본토 방위군(Continentale Garde nationale)을 거느리고 있다. 1921년부터 국방부에 소속되어 있으며, 최고 통수권자는 필리프 드 브로이 대통령이다. [1]

1773년의 창설 이래 수많은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주요 참전기록은 제1차 대전쟁, 제2차 대전쟁, 탕헤르 위기 등이다.

현재 공화국 육군의 임무는 본토 방위, 해외 영토의 이권수호 등이며 유사시 전쟁에 대비한 편제와 장비를 갖추고 있다.

역사

혁명 당시의
벨포르 혁명군

그 전까지의 역사는 벨포르 제국 군대 참조.

벨포르 제1공화국 시기

1773년, 대혁명이 터지고 수립된 혁명정부 초기의 벨포르군은 무리한 귀족 계급 장교의 축출로 인해 군이 혼란에 빠져들었고 혁명기간의 혼란으로 군수 산업이 마비되어 모든 것이 미비하고 부족한 사태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개병제의 실시로 인해 벨포르군의 징집된 병력 수는 약 72만 5000명 정도로 당시로선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물량이었던 데다가, 군수물자의 부족 문제도 평민 출신 육군 포병장교이자 평원파였던 아론 볼렝(Aaron Bolreng)이 군권을 책임지는 파견위원총감에 임명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볼렝 총감은 혁명 찬동파에 속하는 귀족 장교들을 대거 복직시켰고, 유능한 병사들을 장교로 승진시키면서 내부 인적 자원을 회복시켰고 그동안 황폐화되었던 내부 관료체제를 부활시켜 서서히 공화국을 침공하는 유로파 대륙 국가들의 군대를 격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볼렝 총감의 조치에 따라 복직되거나 승진한 유능한 장교들이 혁명군 수뇌부를 구성하면서, 벨포르 혁명군은 사실상 무적의 군대로 탈바꿈했다. 바로 이 때, 벨포르군이 처음으로 군단 규모의 작전제대를 활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벨포르군의 기틀을 잡은 볼렝 총감이 평원파였다는 이유로 산악파와 파견위원 총감부 내의 과격 분자들에 의해 반동분자로 몰려 처형당하자, 분노한 몇몇 장교들은 자신들의 부대를 이끌고 1778년 5월 31일에 산악파가 장악한 국민공회를 포위한 뒤, 볼렝 총감의 복권과 평원파 의원들의 복권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6월 2일, 산악파에 의해 동원된 국민위병에 의해서 볼렝 파 장교들의 쿠데타는 진압당하게 된다.

볼렝 파의 쿠데타 기도에 당혹한 산악파와 파견위원들은 공안위원회를 통해서 많은 장교들을 마구잡이로 숙청하게 된다. 이렇게 산악파가 극단적으로 폭주하게 되자, 산악파의 첨병 노릇을 했던 국민위병마저 등을 돌렸고 결국 제1공화국 정부와 파견위원 총감부는 국민위병과 혁명군에 의해 전복되고 만다.

그리고 3년 간의 무정부 시기를 거치게 되면서 벨포르군은 현격한 약체화를 면치 못하게 된다.

벨포르 제2공화국 시기

3년 간의 무정부 시기를 떨쳐내고 수립된 제2공화국 정부 앞에 당면한 최우선적 과제는 망가진 행정체계의 복구와 현격히 약체화된 군을 다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알퐁스 드 카스텔노(Alphonse de Castelnau)에 의해 벨포르군의 재건 계획인 부흥 계획이 수립되었고, 약 150억 프랑의 막대한 예산이 부흥 계획에 따라 집행되었고 국민개병제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리고 군 내 장교단의 복원을 위해 브뤼엔느 육군사관학교(Académie militaire Brühne)를 개교했다. 이런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벨포르 공화국군은 어느 정도 군세를 추스를 수 있었다.

재건된 벨포르 공화국 육군이 다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라치오 왕국오스트마르크 제국을 상대로 벌인 통일전쟁에 참전했을 때였다.

벨포르 공화국은 전통적으로 로마냐 반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른 이해관계 당사자였던 연합왕국이 통일 전쟁에 소극적이자 당시 라치오 왕국 수상이었던 주세페 데 바르디는 벨포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벨포르 공화국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패권을 사사건건 위협하는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필요를 느꼈기에 두 국가 간의 합의는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리고 1805년 3월, 라치오 왕국과 벨포르 공화국은 갈라치아 동맹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공화국 육군 산악사단이 대거 로마냐 반도 쪽으로 배치되었고, 이에 오스트마르크는 라치오 왕국의 영토인 피에드몬트 지역을 침공하는 것으로 화답했지만, 오스트마르크 육군은 끝내 피에드몬트 요새를 뚫지 못했다. 그런 오스트마르크 육군을 벨포르-라치오 연합군은 리보르노에서 격파함으로써 벨포르 공화국은 전통적인 육군 강국임을 다시 한번 증명해보이는 듯 했다.

벨포르 제3공화국 시기

1차 대전쟁 당시 전선에 투입되는
육군 제17보병사단 병사들

하지만 제3공화국 체제가 자리잡고 1844년에 벌어진 오스트마르크-벨포르 전쟁에서 벨포르 육군은 후장식 총기의 등장으로 화력이 강화된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제1공화국 시대처럼 종대로 돌격하는 한계를 노출했다. 반면 로마냐 통일 전쟁에서의 참패에 충격받은 오스트마르크군은 이 전쟁의 교훈을 살려 화력지상주의 교리를 채택하고 수십 년간 군대를 훈련시키는 바람에 병력 수 자체는 벨포르 육군이 월등했는데도 불구하고 참패를 당한다.

더군다나 오스트마르크 제국은 제국 황제의 보좌역인 참모본부에 힘을 실어주는 형식으로 사실상 참모본부가 전쟁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 육군 최고사령관은 명목상 황제였지만 참모총장이 군의 실질적 통수권자로, 의회에서 선출된 내각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오로지 황제에게만 충성과 책임을 다했다. 또한 제국 참모본부는 개전 이후의 군 통수권 뿐만이 아니라 개전 이전에도 전쟁계획을 작성하고 그 계획을 하달하는 역할 또한 수행했다.

반면 벨포르 육군은 3년 간의 무정부 시기로 인해 군이 황폐화된 전적이 있었고, 그나마 구성된 수뇌부는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시대의 고전적 장성들로 구성된 것 때문인지 경험을 중시하고 지식과 지성을 사용하는 일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장군들은 군사학을 무시하고 경험을 통해 배운 터프한 군인을 선호했다. 당연하게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전쟁을 지휘하거나 작전을 세우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직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은 아직 초임 장교에 머물러 있었다.

오스트마르크-벨포르 전쟁 이후 오스트마르크 제국 육군은 전 유로파 대륙 육군의 모범이 되었고, 벨포르 육군 역시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략전술적인 면 등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재정립해 뛰어난 장교와 부사관들을 기르려 노력했으며, 오스트마르크 제국에 비해 뒤떨어진 동원능력을 개선하려 노력했으며 각종 신기술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신기술을 군의 지휘체계에 통합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공화국의 적극적인 식민 정책 때문에 군 장교단은 수많은 식민지 전쟁으로 실전경험을 쌓아갔는데, 이는 오스트마르크-벨포르 전쟁에서 초임 장교로 참전한 고위 장성들을 빼면 실전경험이 거의 없던 오스트마르크 제국 육군의 장교단과 비교해서 아주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1872년에 오스트마르크 제국이 세계정책으로 대표되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펼치자, 한때는 동맹이었던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급격한 팽창에 두려움을 품은 연합왕국과 에쉬르 공화국이 벨포르 공화국과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는 동맹의 역전이 일어나면서 유로파 대륙의 정세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오스트마르크 제국은 연합왕국과 에쉬르 공화국의 배신에 격노하였으며, 이는 곧 오스트마르크 제국과 삼국 동맹간의 군비 경쟁으로 나타났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전쟁 뿐이었다.

제1차 대전쟁

1917년 6월, 반 옐라치치 사건브란덴부르크 전보 사건으로 인해 양국의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았고, 오스트마르크 제국군이 에른스트 폰 프라이징 총참모장의 3호 계획에 따라 홀란트 왕국과 에쉬르, 벨포르 공화국 방면으로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포착되고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선전 포고까지 날아들자, 8월 4일 오후에 공화국 내각회의와 하원의회에서는 총동원령을 승인하고 5일부터 국민을 모병소에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병소에서 무장된 정규군과 예비군은 각각 군용으로 전환된 철도를 통해 지정된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후방의 병력이 전방으로 옮겨지는 동안 이미 전방에 배치된 병력은 서서히 도착해오는 후방군을 엄호했다. 공화국 육군은 14개의 지정된 철도에서 매일마다 평균의 56대의 열차가 바쁘게 와다니는 와중에 활용한 4,278대의 열차중 겨우 20대만이 늦었을 정도의 조직력을 선보인 끝에 모든 후방병력이 16일 만에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8월 11일, 결국 오스트마르크 제국이 중립국이었던 홀란트의 국경을 넘자, 에쉬르 제국 육군의 총사령관 니콜라이 코료멘코 상급대장은 8월 8일에 공세를 펼칠테니 벨포르가 이 공세에 호응하기를 요청했다. 당시 공화국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세르 랑글 드 카리 대장은 이에 흔쾌히 응해 8월 8일에 제7군단, 제8군단, 제13군단, 제14군단, 제21군단과 제6기병사단과 제8기병사단으로 구성된 장 페쉬코프의 제1군과 제9군단, 제15군단, 제16군단, 제18군단, 제20군단과 제2기병사단과 제10기병사단으로 구성된 노엘 귀레의 제2군에게 니더모젤란트 방향으로의 제한적인 공세를 주문했다. (8월 공세)

하지만 이 8월 공세에서 귀레의 2군이 격파되고, 페쉬코프의 1군이 패퇴하자 순식간에 전선이 퐁텐블로 강까지 밀렸고, 당혹한 카요 내각은 랑글 드 카리 대장을 해임하고, 샤를 르노르망 중장으로 교체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르노르망 장군은 퐁텐블로 강을 최종 방어선으로 삼기로 방침을 정한 뒤, 붕괴 직전까지 다다른 2군을 후방으로 물려 재편하고 아직 편제를 유지 중이던 페쉬코프의 1군과 새로 편제된 루이 바르투의 5군, 연합왕국이 파견한 대륙 원정군을 전선에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마침 프러시아 왕세자였던 빌헬름이 이끄는 프러시아 제3군이 구스펠트를 향해서 우회기동을 하던 중, 바르투의 5군에게 측면을 노출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바르투는 즉시 3군의 노출된 측면을 타격했고, 3일 만에 구스펠트로부터 80km 떨어진 곳까지 파고든 오스트마르크군의 전선은 순식간에 밀려 벨포르의 국경 도시인 포르바크까지 밀리게 된다. (퐁텐블로 전투)

이후, 포르바크 쪽으로 전선이 고착화한 뒤, 서부 전선 협상국의 주력은 단연 벨포르군이었다. 1917년 초반에는 서부 전선에 거의 유일하게 존재하는 군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고, 1년 후에 연합왕국군이 대거 투입된 이후에도 여전히 주력이었으며 1920년의 협상군 최후의 공세인 7월 공세에서도 주력이었다.

결국 벨포르는 전쟁의 승전국으로 등극할 수 있었고, 다시 한번 유로파 최강 육군 강국으로서의 명성을 떨칠수 있게 되었다.

전간기

제1차 대전쟁 말에 기관총, 대구경 포와 장갑차의 위력을 실감한 벨포르 제3공화국 정부는 제1차 대전쟁 당시의 인적 피해를 마저 복구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기동이 곧 방어라는 관점 아래에 전차 중심의 기동전 교리를 심도 있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가브리엘 블로크 기병대령이 상신한 군제 개혁안이 받아들여졌다.

블로크 대령의 군제 개혁안은 전차를 집단 운용하는 기갑사단 4개를 기본으로, 장갑차 탑승 보병을 주력으로 삼아 구성된 정찰여단,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야전포병과 지상공격기 부대에 통신/보급 능력을 갖춰서 독자적으로 활동이 가능한 최대 10만명 규모의 기동군을 육군 총사령부 직할의 전략예비대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지노비 비에츠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라츠나비아계였던 비에츠키 총리는 기병을 이용한 그라츠나비아 고유의 기동전에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는데, 블로크 대령의 제안에 구미가 당긴 것이었다.

그런 비에츠키 총리의 열렬한 지지 하에 블로크 대령의 군제 개혁이 통과되자, 블로크 대령을 위시한 기동전파 장교들은 대거 작전기획, 군수 등의 군 요직에 배치되었으며, 군 수뇌부도 대거 물갈이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기동전 교리에 맞춰 무기 개발도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는 제2차 대전쟁 당시 벨포르 육군 주력 중형전차였던 Char MB 시리즈와, 공군 주력 전투기였던 SN.100이 있다.

제2차 대전쟁

명령 체계

주요 장비

각주

  1. 국방부라는 통합 군사행정기관이 탄생하기 전에는 육군부라는 별개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