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관의 난
날짜1441년 8월 1일 ~ 12월 31일
장소북중국
결과 반란 실패, 명의 쇠퇴와 전호자의 난 촉발
교전국


지휘관
정통제†
경태제
왕혁†
신유
정석†
자경
병력
100만~120만 명 35만~67만 명
피해 규모
사상자 150만~167만 명 사상자 78만~99만 명


개요

명 제국 말엽인 1441년에 일어난, 짧고도 굵은 대규모 군사반란. 당나라 시대 안사의 난과 많이 비교되는데, 삼관의 난은 안사의 난에 비해 피해규모는 260만명 정도로 작았지만 재산 피해 규모는 반란의 지속 기간에 비해 엄청 컸다. 삼관의 난은 세(三) 환관(官)이 일으킨 난이라 하여 삼관의 난이라 부르고, 반란 주동자인 왕혁의 이름을 따 왕혁의 난이라 부르거나 경신년에 일어났기에 경신의 난이라 부르기도 한다.

발단

당시, 명은 실세인 환관 왕진에 의해 굴러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제인 정통제는 왕진에게 휘둘렸으며, 왕진은 베이징에 기반을 두고 계속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통제가 눈치없게 난징으로의 천도를 추진해버린다. 이에 왕진이 반발했으나 정통제는 무시로 일관했다. 이때, 왕진의 양아들인 왕혁은 양부의 간섭을 벗어나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고자 했다. 왕혁은 황제가 난징으로 간 틈을 타 베이징에서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대했고, 결국 연나라를 세워 반란을 일으킨다. 왕진은 정통제의 고집을 꺾기 위해 왕혁의 반란을 어느정도 눈감아 줬고, 왕혁의 반란에 환관 신유와 정석도 가담하며 삼관의 난이 시작되었다.

상세

8월

8월 1일, 왕혁이 '선대 왕과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천도한 정통제를 징벌한다'는 명분 하에 하북을 점령하고 반란을 시작했다. 이튿날, 신유 또한 간쑤성에서 봉기를 시작했고, 둘은 무서운 속도로 영토를 확장했다. 5일에는 정석이 쓰촨성에서 반란을 시작했고, 6일에는 왕혁이 산둥 반도를 점령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정통제는 하루빨리 대응을 준비했지만, 정통제 개인도 너무나 무능했고 또 반란이 확산되는 속도가 어마무시했기에 초기 진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왕혁의 연, 신유의 위, 정석의 촉이 차례대로 건국되며 명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8월 10일부터 정석의 촉은 운남 정벌을 시작했는데, 이때 촉은 베트남 국경까지 진출했으나 쿤밍 전투에서 명나라에게 대패하여 밀려나게 된다. 한편 위는 장안을 집어삼켰고, 연 또한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12일, 신유와 정석의 영토분쟁으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틈을 탄 명나라는 19일 충칭을 넘어 청두 코앞까지 진출했고, 촉의 영토는 거의 두동강나 버린다. 이후 28일부터 명의 장안 탈환 작전이 시작된다.

9월

그러나, 장안 탈환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명은 위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이틈을 타 9월 초 촉도 재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해 결국 청두가 함락당하고 정석은 자살한다. 이에 정석의 의형제 자경이 2대 황제로 즉위하였고, 위는 촉을 지원하기 위해 대남 원정을 실시한다. 이에 힘입어 촉은 고토 회복을 시도한다. 이때, 연이 강남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작전을 시행했고 창사 전투에서 대승하여 남부 해안까지 진출하고 광저우까지 먹어버린다. 그러나, 보급 문제로 인해 연이 후퇴하는 동안 자경의 여러 삽질로 15일 촉은 결국 명에게 점령당한다. 촉 멸망 이후, 11월까지 소규모 교전만 여러 차례 일어났다.

11월

두달 동안 만반의 준비를 마친 명은 연에게 반격을 시도했으나, 준비하던 건 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명은 연에게 줄줄이 패배하고 결국 난징이 함락되었으며, 정통제는 처형당했다. 이후 즉위한 경태제는 뛰어난 전술로 삼관의 난을 끝내기 시작한다.

12월

2일까지 연과 위는 무지성 대남 원정을 계속했으나, 창사 전투 때처럼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경태제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난이 진압되기 시작한다. 12월 8일 난징이 탈환되었고, 마침내 경태제는 북부 국경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회복된 명의 침입을 우려한 오이라트가 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동안 얻은 북부 국경 지대를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경태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북벌을 계속했으며, 전세가 다시 뒤집혔고 역사서에는 '해가 끝나기 전에 반란을 척결하겠다'라는 경태제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 수록되어있기도 하다.

이후 19일 북부 국경을 다시 되찾았고, 수세에 몰린 위가 23일 오이라트에게 의뢰해 오이라트가 칭양을 공격하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어찌저찌 경태제는 계속 북벌을 이어갔으며 결국 25일 위는 항복한다. 이에 반발해 연이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27일 지난 공방전과 29일 톈진 공방전에서 연달아 패배한 왕혁은 결국 경태제의 말대로 해가 바뀌기 이틀 전인 12월 30일 항복했다. 이튿날 왕혁은 처형당했다.

파급효과

삼관의 난은 결과적으로 명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었고, 화북 지역을 초토화시켜 경제를 박살나게끔 했다. 이에 명나라는 세금을 가혹하게 걷었고, 이는 전호자의 난과 원후의 난 등 여러 민란을 불러일으킨다. 여러 농민반란이 복합적으로 일어나자, 명나라는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강남으로 내려갔으며 결국 삼관의 난은 명 멸망의 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호자의 난

삼관의 난으로 인해 중국 전 지역의 경제가 쇠퇴했는데, 그중에서도 화북에 위치한 도시 칭양의 경제는 거의 개박살 났다. 장안과 가까웠고 위의 대표적인 수탈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토목의 변 당시 침략당한 도시가 칭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나라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자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이때, 칭양 출신의 이름난 농민이자 상인인 전호자는 자신의 인맥과 무술실력을 활용해 전호자의 난을 일으켜, 화북을 점령하고 진을 세운다. 이후 강남에도 여러 민란이 일어났으니 삼관의 난이 명나라 멸망의 첫 단계라면 전호자의 난은 두번째 단계이자 결정타인 것이다.

의의

이 전쟁은 그당시 정통제의 무능함과, 환관에게 잠식된 명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선덕제까지 이어진 명의 전성기는 한순간에 무너졌고, 중국의 경제는 한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한편, 이 전쟁은 병약하지만 정통제보다 나았던 경태제의 유능함을 극대화시켜주는 장치이기도 해서, 복합적인 평가들이 공존하는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