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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산
Saeyoung-san
결성 1969년, 청나라 장춘현급시
해체 1992년
재결성 2005년, 2012년
장르 팝 록, 포크, 프로그레시브 록, 뉴웨이브
멤버 신한규 (기타, 보컬)
조윤우 (드럼)
김휘 (베이스)
레이블 서라벌 레코드, 천경 레코드

개요

부여의 3인조 록밴드. 1970년대 초반 혜성같이 등장하여 199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였다. 부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의 팝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밴드로 평가받는다.

이름은 국악 정악곡인 영산회상의 세 번째 곡에서 따온 것이다. 이름이 지어진 경위가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와 비슷하다.

역사

장춘예술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신한규신한성 형제가 1967년 결성한 아마추어 고교 밴드를 시초로 두고 있다. 이후 두명이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밴드는 잠깐 해체되었다가, 1969년 대학교 친구인 조윤우가 드럼으로 참여하면서 3인조 밴드인 세영산이 결성되었다. 1집이 발매된 직후 신한성은 형과의 음악적인 불화, 그리고 생업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밴드를 탈퇴하고, 이후 장춘국립대학교 철학과에 재학중이던 김휘가 베이시스트로 영입된다.

초기에는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팝 록 성향의 노래를 많이 만들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클래식 음악과 당대 영국에서 유행하던 프로그레시브 록의 영향을 받은 전위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 밴드를 통틀어 부여의 예스(Yes)나 핑크플로이드(Pink Floyd)라고 칭한다.

그러다가 1973년, 2집 <나의 마을>에 실린 타이틀 곡 <나의 마을>이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부여 내에서 유명한 밴드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영미권의 팝 음악과 부여의 전통 국악을 배합한 독특한 곡으로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평론적인 극찬도 아낌 없이 받았다.

1980년대 이후로는 디스코 음악이 부상함에 따라 본래의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벗어난 뉴웨이브를 더 많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때는 이른바 세영산 2기라고 불린다. 보통 음악적인 평가는 1기가 2기보다 훨씬 좋다. 그러나 대중적인 음악 조류를 받아들인 2기 세영산은 1기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고 이때 세영산은 부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1985년 베이시스트였던 김휘가 교통사고로 급사하면서 밴드는 위기를 맞았다. 신한규는 밴드를 계속하자고 주장했지만 조윤우는 더이상의 세영산은 없다고 선언, 밴드를 탈퇴했다. 1990년 밴드는 야심차게 6집을 발매하지만 상업적, 음악적으로 모두 실패하였고, 신한규는 조윤우가 말했던 내용이 맞았음을 인정하면서 1992년 밴드를 해체했다.

이후 밴드 멤버들은 각자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신한규의 경우 조윤우와 같이 라이브를 하는 등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음악성

부여의 전통적인 음악과 영미권 팝, 록 음악 그리고 클래식 음악을 결합하여 독특한 음악을 선보였다. 그들의 독특한 음악 세계는 이후의 동아시아 팝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는 음악 교과서에도 들어갈정도로 성공적인 문화적 사례로 꼽힌다.

의외로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주목하는 이가 많은 밴드이다. 서양의 음악과 동양의 음악을 가장 잘 이어준 사례라는 것이다. 서양의 리스너들은 많지 않지만, 프로그레시브 록 관련 사이트인 Prog Archive같은 곳에서는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다. 롤링 스톤 선정 50대 프로그레시브 명반에서도 세영산 3집이 제네시스의 <Selling England by the Pound>의 뒤를 이은 6위로 선정되었다.

리더 신한규는 자신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음악가가 비틀즈라고 말했다. 그 외에는 핑크 플로이드, 예스, 킹 크림슨 등 당대 영국에서 인기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가들을 참조하며 트렌디한 음악을 했다고 한다.

넓게 보자면 현대의 K-pop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멤버

  • 기타 겸 보컬
  • 베이스
  • 드럼

디스코그래피

대표곡

1기





2기



여담

  • 밴드 리더 신한규는 활발한 사회 자선 활동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