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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968년 일본 사회주의 연합 노동자당(現 일본공산당) 대회에서 찍힌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일본공산당 의장 미야모토 겐지, 소하 결렬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한국어 한자: 蘇蝦決裂 혹은 蘇蝦決別
영어: Ezo-Soviet Split[1]
중국어: ソ蝦交悪
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эдзоский раскол

개요

1968년, 건국이래 소련의 우방국이자 위성국이던 일본인민공화국(이하 북일본)이 소련의 프라하의 봄 무력 진압을 명목으로 하여 동맹관계를 청산하고 준적대관계로 돌아선 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양국간 불화는 1969년의 일공-소련 국경분쟁만 알려져 있지만, 일공 정권 수립 직후 집단농장 노선과 정치노선에 대한 당시 소련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의 입장차이부터 시작된 나름 유서깊은(?) 분쟁이다.

소련공산당과 일본 노동자당의 적대관계는 소비에트 연방이 유라시아 연합으로 재편된 이후에도 공식적으로 해소되지 않다가 2022년 7월 15일 일본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그자리에 참석한 파벨 그루디닌 유라시아 연합 공산당 제1부위원장과 에다노 유키오 일본공산당 의장이 양당의 화해를 선언하며 종결되게 되었으나 아직도 양국 관계는 북방영토 분쟁등과 관련하여 조금 껄끄러운 편이다.

배경

원래 일본공산당을 일본에서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일제의 패망 이전까지 일본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1922년에서 1924년까지의 단 2년에 불과했고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과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는 극심한 탄압으로 인하여 국내의 조직은 몇몇 점조직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괴멸된 상태였다. 일본공산당과 소련이 지도자로 선출한 노사카 산조 일본공산당 의장조차도 국내 공산주의 투쟁이나 최소한 소련과 일본을 오가는 활동조차 하지 못하고 해외에서 활동을 해야했던 처지였다.

그렇기에 똑같이 소련의 영향을 받았어도 한때 원내 3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 공산당이나 게릴라 활동을 했던 불가리아 공산당, 아예 자력으로 집권한 몽골 인민혁명당(現 몽골 인민당)이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과는 달리 소련의 간섭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1948년 일본공산당이 북일본 일대에서 집권한 이래의 여러 시책들과 이후 일본인민공화국의 헌법, 국가행정기관, 인사또한 소련의 의중이 깊게 반영되어 이루어 진 것이었다.

상당수의 일본공산당 당원들과 당 지도부는 소련이 당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이런 상황을 못마땅해 했으나 당의장인 노사카 산조와 이하 당 간부들 대부분이 소련에 망명한 전적이 있고 일본공산당이 그 흔한 파르티잔 활동 하나 벌인 전적이 없어 집권을 위한 필수요소인 대중적인 지지도와 무력 둘 다 없었던 일본공산당은 소련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에 결국 소련의 간섭을 수용 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의 영향력 증대는 1948년 초대총선에서 일본공산당이 전체 397석 중 과반확보에 한참 미달한 138석만을 획득하며[2] 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냉대를 확인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건국 이후에는 아예 "공화국의 정책은 크렘린에서 결정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일본인민공화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가히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의 그것에 필적 할 정도였다. 일본공산당은 소련의 무력을 등에없고 국민당과 노농당을 강제해산시켰고 이는 일시적으로 일본공산당의 권력을 강화시켜주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공산당에 대한 인민의 지지를 약화시켜 다시 소련군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인민공화국은 1948년부터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이어진 일명 스탈린 막부(スターリン幕府)시대동안 소련공산당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으며 실질적인 소련의 괴뢰국으로 기능하였다.

전개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이후 절대적 권위를 가진 공산권의 황제위는 공석이 되었고 흐루쇼프가 집권하여 황제위가 폐지될 때까지 소련공산당의 극동에 대한 간섭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에 일본공산당과 노사카 산조 국가원수는 탈 스탈린 정책과 더불어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책들을 입안시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 몇가지만 보자면 집단농장 정책의 폐지와 토지개혁으로의 대체, 신민주주의 이론에 근거한 소지주와 소자본가, 지식인 계층간의 정치연합과 제한적 다당제 허용등이 있었으며 실제로 공산당에 대한 여론은 위와같은 정책 덕분에 꽤나 우호적으로 변하였다.

스탈린을 이어 집권한 흐루쇼프는 일본인민공화국 측의 이러한 변화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공산당 측이 스탈린 격하운동에 참여하자 공산당을 지지하며 개혁정책을 옹호하였다. 그러자 이에 고무된 일본공산당 지도부와 노사카 산조는 주북일본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결말

해소

2022년 일본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에다노 유키오 일본공산당 의장과 파벨 그루디닌 유라시아 공산당 제1부위원장, 양당의 화해를 선언하고 포옹하고 있다.

  1. North Japan-Soviet Split 이라고 하기도 한다.
  2. 당시 제1당은 일본공산당이었으나 제2당은 중도우익 농본주의 정당인 일본국민당(116석)이었고 그 뒤로는 의석순으로 노농당(51석, 중도좌익·협동조합주의), 일본사회당(29석, 좌파·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23석, 극좌·스탈린주의), 기타·무소속(40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