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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틀:역대 일본 내각 (민국 38)

쇼와 시대
헌정제한기
憲政制限期 | Constitutional Restriction Period
1960년 12월 17일~1970년 12월 17일
출범 이전 출범 이후
스즈키 모사부로 내각 이케다 하야토 내각
내각총리대신 하야시 게이조 / 제59-61대 총리 (초대 민주자유당 대표, 제29~32대 중의원 의원)
야마다 마사오 / 제61-62대 총리 (제2대 민주자유당 대표, 제30~32대 중의원 의원)
여당 무소속
연립 여당


이외 기타 5개정당
국가건안시기를 선언하는 오하라 마사요시 총리 대리

개요

... したがって、現在の警察兵力だけでは国家の治安を維持しにくいと判断されるため、本人は軍の最高指揮監督権者として政府の統治権が及ぶすべての地域に国防軍の治安出動を命令するところです。
... 따라서, 현재 경찰병력 만으로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기에 본인은 군의 최고지휘감독권자로써 정부의 통치권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 국방군의 치안출동을 명령하는 바입니다.
오히라 마사요시 당시 외무대신 겸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第1条 総理は、国家建安時期において、国家と国民の緊急の危難を回避し、又は財政経済上の重大な変故に対応するため、閣議の議決を経て緊急処分を行うことができる。 これは憲法第59条又は第69条に規定する手続の制限を受けない。
제1조 총리는 국가건안시기에, 국가와 국민의 긴급한 위난을 회피하거나 재정경제 상의 중대한 변고에 대응하기 위하여 각의의 의결을 거쳐 긴급처분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헌법 제59조 또는 제69조에 규정된 절차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국가건안시기임시조항 제1조

공식명칭 헌정제한기(憲政制限期, Constitutional Restriction Period) 혹은 통칭 쇼와 경찰 막부(昭和警察幕府, Showa Police Shogunate) 1960년 일본 국회의사당 테러사건과 이로인한 스즈키 모사부로 총리의 암살 이후 1970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 성립까지 정확히 10년간 유지되었던 일본의 정치체제이다.

명칭

일본 정부와 학계에서 이 시기를 일컽는 공식적인 명칭은 '헌정제한기'로 말 그대로 일본의 헌법과 헌정질서가 국가건안임시조항에 의해 제한되던 시기라는 뜻이며 1996년 NHK와 요미우리 신문이 공동 발간한 '일본 대백과사전'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현재 정부와 교과서등의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래에 열거된 속칭들이 아닌 헌정제한기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구 일본의 무신정권을 가리키는 말인 막부에서 착안한 '쇼와 경찰 막부'라는 명칭을 주로 쓰는 편이며 글자 그대로 경찰이 주도한 군사정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국방 막부같은 명칭이 아니라 경찰 막부인 이유는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막부'를 주도한 인원들이 구 일본군 장교 출신의 쇼와군벌이 아니라 경찰·관료 출신들로 이루어진 내무군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2015년 이전까지는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 헌정중단기라는 공식명칭으로 불렸으나 2015년 이후 채택된 일본 교육과정에서는 교과서에 헌정제한기와 쇼와 경찰 막부를 혼용하도록[1] 하고있다.

한편 헌정제한기가 현재진행형이던 60년대에는 주로 국가건안시기(国家建安時期)라고 불렸는데 이는 '국가를 안정되게 다시 건설하는 시기'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헌정제한을 뒷받침 해주던 법률인 국가건안시기임시조항에서 비롯되었다. 현재에는 6,70년대에 나온 일부 문건들을 제외하면 잘 쓰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60년 체제, 교토 막부, 내무 군벌 집권기 일본등의 명칭이 있으나 실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배경

1960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안보투쟁으로 실각한 이후 치뤄진 29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전쟁 이후 세력이 크게 붕괴한 일본사회당이 제1당으로 떠올랐으며 사회당 좌파의 스즈키 모사부로가 총리로 집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당은 1당이 되었지 다수당이 되지는 못하였으며 사회당 자체도 좌우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표면상으로는 사회당과 민주당, 실질적으로는 사회당 좌우파와 민주당의 연립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사회당 내부는 좌우파로 분열되어 자신들이 선출한 스즈키 총리를 흔들고 있었고 민주당은 애초에 우파정당 이었으나[2] 사회당 측이 각료의 3/1을 내주고 중의원 의장을 양당 합의하에 임명하기로 하면서 겨우겨우 모셔온 상태였기 때문에 이 연정이 안정되어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자유당 요시다 총리의 장기집권 이후 지속되는 정치혼란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사회 풍조에 좌우익의 극단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체제전복을 주장하는 시위가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었다. 안보투쟁이 안보 조약 개정에 대한 반대운동에서 무능한 기성정당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성격이 변화하여 '기득권 정당'중 하나인 민주당이 포함된 연립정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와중 스즈키 총리는 국회의사당에서 직접 좌우익의 시위대 수뇌부와 만나 상황을 타계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대부분의 각료들과[3] 전체의 약 5/1에 달하는 중의원 의원들, 야당의 거물급 정치인들과 좌우 시위대의 지도부가 1960년 9월 28일 교토의 국회의사당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비교적 조용하게 토론이 진행되었으나 이윽고 고성이 낭자하기 시작했으며 국회의사당 내부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것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나 시위대 수뇌부와 정치인들의 충돌을 방지하기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국회 경호원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유조차가 국회의사당과 충돌하면서 국회의사당 내부의 인원 전원이 폭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극단주의 시위대가 내각몰살을 기회삼아 체제전복을 부르짓자 이에 위기를 느낀 오히라 마사요시 당시 총리대리가 '임시수도'인 교토를 비롯한 남일본 전역에 국방군의 치안출동(사실상의 계엄령)을 명령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치안유지를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제1야당이자 국회 제1당인 자유당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기에 이른다.

한편 이러한 정계혼란과 더불어 남미와 일부 남아시아 국가에서 일어나는 여러 군사정변에 영향을 받은 남일본 군부의 일부 구 제국군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일명 쇼와군벌이 쿠데타를 시도, 교토의 국회의사당과 총리관저를 점령하나 오히라 총리대리의 동의하에 주일미군이 출동하여 시가전이 벌어지고 쿠데타 세력과 사이가 나빴던 내무군벌 출신인 하야시 게이조 통합막료장이 오하라 총리대리와 방위청 장관의 지시를 이행하면서 국방군 부대를 동원해 교토를 포위하며 쿠데타는 진압되었다.

한편 이 사건이후 일본국 내에서는 문민통제 강화에 대한 목소리가 더 커지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칼을 잡은자가 문민을 무시하고 정권을 차지하던 일본의 역사를 볼 때 이런 정치혼란이 지속되다 보면 결과적으로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거나 최소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서게 된 문민정부와 미국은 문민정부의 수장인 총리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러자 오하라 총리대리는 전시체제를 명분삼아[4] 국가비상대권을 다룬 법률인 국가건안시기임시조항의 통과를 국회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물론 중의원 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자유당은 비상대권 특별법의 실시 자체는 지지했으나 오하라가 총리가 되어 강력한 비상대권을 휘두르는 꼴을 보고싶지가 않았기에 법안통과 직후 중의원 해산이라는 조건을 걸었고 이에 오하라 총리대리가 동의하여 법안통과 5분 후 중의원은 해산되게 되었으며 남일본은 선거국면에 돌입하게 되었다.

상세


  1. 정확히는 헌정중단기(쇼와 경찰 막부)같은 식이다.
  2. 현재 민주당의 리버럴한 이미지와 달리 당시의 민주당은 자유당보다도 보수적인 우익성향의 정당으로 분류되었다.
  3. 발목 부상으로 쉬고 있던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 등 3명 제외
  4. 1951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는 하였으나 1998년 종전선언 이전까지 남북일본은 공식적으론 전시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