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 (신질서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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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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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다이쇼 쇼와 아키히토 나루히토
신대 통치 · 야마타이 국왕 · 북조 천황 · 추존 및 비정통 천황

대일본제국 제124대 천황
쇼와 천황 | 昭和天皇
출생 1901년 4월 29일
일본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 어소
(現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어용지)
즉위 1928년 11월 10일
교토부 교토시 교토 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교엔)
사망 1989년 1월 7일 (향년 87세)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 후키아게 어소
(吹上仙洞御所)
능묘 무사시노 능(武蔵野陵)
재위 대일본제국 황태자
1912년 7월 30일[1] ~ 1926년 12월 25일
대일본제국 섭정
1921년 11월 25일 ~ 1926년 12월 25일
제124대 천황
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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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쇼와 천황은 일본의 제124대 천황이자, 제국 3번째 천황이었다. 치세의 연호는 쇼와(昭和)

상세

그의 치세 64년간 일본은 1930년대의 확장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서 철혈의 승리를 이루어 냄으로서 초강대국에 등극하여 냉전의 3대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통치는 일본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감독했다. 그를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아들이자 현인신으로 숭배하는 신하들의 열광적인 숭배를 받는 천황은 일본 국가와 국민의 상징이며 이러한 감정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최종 승리 이후로 더욱 커졌다. 그의 명령에 따라 일본인들이 기꺼이 불 속에 몸을 던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비유가 아니었다.

메이지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천황은 항상 국가 정치에서 강력한 역할을 했으며, 쇼와는 항상 그 역할을 부드러운 손길로 수행했다. 즉, 단결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는 항상 제국의회에 제출된 후보자를 받아들였다. 어떤 일본인도 그의 선택으로 인해 잘못되었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느리지만 거침없는 대정익찬회의 붕괴로 인해 일본 정치가 날로 과열되는 가운데, 천황은 일본 안정의 유일한 원천이었다. 정치판의 조용한 역할인 쇼와는 항상 공정하고 정의로운 국가의 통치자로서 정치적 논쟁은 선출된 대표에게 맡겼다.

그러나 진실은 조금 달랐다. 천황은 일본 정치의 퇴보를 크게 우려하고 있으며, 대정익찬회가 마침내 무너지면 대동아공영권 안팎의 적들에 의해 나라가 정치적 혼란 상태에 빠지고 신속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익찬회와 군부의 부재가 오히려 일본을 끝없는 혼란으로 빠트릴 것을 우려한 쇼와는 군부와 익찬회를 용인하며 대신 자신은 표면적 지위를 보장받는 식으로 "자진해서" 끌려다녔다. 쇼와의 권위는 신적이라 사실 본인이 전제군주정이라도 하려 한다면 가능할 정도였지만, 스스로 그렇게까지 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본의 안정은 군부와 익찬회의 균형에서 나온다고 확신하였다.

이 때문에 정치적 실권을 위정자들로 위임하고 조용한 그림자 통치자로서 일본에 군림하던 쇼와는 1989년 십이지장암으로 인해 붕어했고, 그의 장남이자 황태자인 아키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했다.

생애

평가

당연히 쇼와에 대한 존경과 우상화 역시 일본에서는 천황의 생전부터 이어져 왔다. 쇼와 천황은 오늘날 일본을 이끌어 승리와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영웅이자 군주로 인식되며, 제국을 개창한 메이지 천황의 생일이 메이지의 날로 공휴일인 것과 함께 그의 생일 4월 29일도 쇼와의 날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이다.

가족 관계

쇼와 천황은 다이쇼 천황데이메이 황후의 장남이며, 동생으로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親王, 1902년 ~ 1953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宣仁, 1905년 ~ 1987년),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三笠宮崇仁, 1915년 ~ 2016년)가 있다.

쇼와 천황은 정비인 고준 황후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두었다.

  1. 책봉식인 입태자례(立太子ノ禮/立太子の礼)는 1916년 11월 3일에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