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잉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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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신잉청현
중국어: 新瀛城縣
민난어: 新瀛城縣
하카어: 新瀛城縣
粵語: 新瀛城縣
우어: 新瀛城縣
일본어: 新瀛城県
오키나와어: 新瀛城縣
영어: New Yingchengjhou County
프랑스어: Nouveau comté de Yingchengjhou
독일어: Neue Yingchengjhou Provinz
언어 오류(ycj): Faeloh Sepannah Sien
타갈로그어: Bagong Yingchengjhou Probins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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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기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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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나라 잉청저우 제도 연방 잉청저우 제도 연방
지역 잉청저우 섬 지역, 바시제도 지역
지역어 독일어, 프랑스어, 대만민난어, 하카어(客家語), 월어, 오어, 산둥관화, 일본어, 한국어, 류큐어, 잉청저우어, 필리핀어
면적 8,516 km2
지역번호 +83 03
시간대 UTC+8
인구 8,849,507명
(2020년 기준)
하위 행정구역 14시 8진 31향 {{{정}}}정 {{{촌}}}촌 {{{군}}}군
상징
행정구역 상징목 맹그로브
행정구역 상징화 매화
행정구역 상징어 상어
행정구역 지방자치체
현지사 양춘싱 (민주당)
행정구역 정부 소재지 왕칭 시
행정구역 의회 소재지 시왕 시
행정구역 감찰원 소재지 왕칭 시
행정구역 고시원 소재지 시왕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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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잉청현은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현이다. 잉청저우 섬의 남부와 바시 제도, 난링다오를 관할 구역으로 삼고 있다.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최남단과 최서단이 이 현 소속의 카시얏 진에 소재하고 있다.

지리

  • 편의상 잉청저우 직할시와 같이 서술한다.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신잉청현의 향진 지역과 옛 피란 섬에 해당하는 잉청저우 직할시 지역(중, 둥, 난, 중, 베이, 시, 기타요시, 주오, 중정, 주산, 아키나카 10개구)을 제한 매립지와 간척지(잉청저우 직할시 완잉구, 신잉청현 장이 시, 신자이 시, 리샤오 시, 저우제 시)가 잉청저우 섬의 30%, 옛 피란 섬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북잉청 평야가 약 30% 하여 잉청저우 섬은 약 60%가 평야(매립지/간척지+옛 피란 섬을 합친 잉청저우 대평원)로서, 현재의 신잉청현 내륙에만 산이 좀 있는 하나의 평야 위주의 섬으로 존재한다. 그 있다는 산은 남잉청산지가 있는데, 400만년 전에 판과 판이 충돌하여 화산활동으로 생성되었다. 그러나 심해였던 점으로 인해 2천 미터 가까이까지만 올라가고, 이마저도 침식 작용과 여러 차례의 화산 붕괴(240만년 전, 185만년 전, 117만년 전, 72만년 전, 44만년 전, 13만년 전, 6만년 전, 기원전 4000년, 기원후 39년, 782년, 1322년, 1983년)과 잇따른 수많은 화산의 화산활동 중지로 인해 주양산(珠陽山), 밍시산(明溪山), 구서우산(孤壽山) 등의 몇몇 활화산을 제외하고는 분화구가 붕괴하고 이에 침식 작용까지 더해져 일반적인 산같이 남아 현재의 1200m~1600m의 산지가 되었다. 북태평양과 남중국해의 경계에 있고, 위치 상 아열대기후인 점까지 작용하여 비가 많이 내리며,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자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심지어 동쪽 아키나카 구와 신잉청현 저우제 시 전체와 신잉청현 잉청저우 섬 남부 부분, 기타요시구 동부, 신잉청현 장이 시 남동부는 이들이 접해있는 바다가 잉청저우 섬 윗부분에서 바로 앞바다가 바로 난카이 트로프서 이어지는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의 경계로 인해 형성되는 해구이고, 잉청허와 남방 제도들을 통해 난 대단층(잉청저우 거대단층 또는 영란중(瀛蘭重) 대단층)이 형성되어 지진 다발 지역으로서 유명하다. 이는 잉청저우 지역의 내진설계 고강도화 의무-강제화에 영향을 주었다. 신잉청현 도서지역, 즉 바시 제도의 경우에는 전부 판 경계 근처에다 대단층에 위치한 탓에 잉청저우 제도에서 가장 생성이 늦었으며, 잉청저우 제도 서남부의 길게 늘여져 놓인 5개 섬들(바시제도(巴士諸島)와 난링다오(藍陵島))의 경우에도 잉청저우 섬에서 시작되는 열점 선을 따라 300만년 전을 전후하여 격렬한 화산 분출을 통해 바다에서 솟아 나왔으며, 대부분 최고 해발고도가 1000m를 넘지 못한다. 그래도 난링다오에는 칼라울릿 산이라는 해발고도 1092m의 활화산이 존재한다.

한편, 잉청저우와 신잉청현의 유일한 강이자 잉청저우 섬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잉청허(瀛城河)는 약 190Km의 길이로 신잉청현을 굽이치다 잉청저우 시내와 그 근교 위성도시들 지역의 직선화된 수로로 흘러들어 둥구(東區)와 기타요시구(北吉區)의 육상 경계의 끝인 하구에서 동중국해(잉청북해)로 흐른다. 잉청허는 본래 짧았으나, 간척사업의 결과로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게 흐르게 되었고, 잉청저우 시내 구간과 그 근교 위성도시들 구간은 1915년, 1949년, 1986년 3차례에 걸쳐 치수사업에 의해 직선화된 결과로, 현재와 같이 흐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잉청저우의 고질병인 물난리(홍수)가 사라졌으나, 잉청허의 길이가 20~30Km 가량 단축되었으며, 환경파괴가 수반되었다. 그 외 큰 강은 난링다오(남릉도)의 산 카를로 강과 펀완허(分灣河)가 있다.

그 외에도 잉청저우 국제공항을 위성도시의 개발 진행에 따라 논밭, 공공시설로 환원하기 위하여 이전하기 위해 잉청저우 섬 중서부이자 시역 남서부 연안에 만든 잉청저우국제공항인공섬은 그 특성에 맞게 해발 20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

잉청저우 섬

16세기 이전의 잉청저우 직할시의 역사에는 구석기시대에 대만섬보다 늦은 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기원전 2500년 즈음에 현재의 잉청저우 원주민의 조상이 되는 원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넘어왔다. 그들은 2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잉청저우 지역의 고립된 환경에 놓여있었고, 그로 인해서 대만 원주민과 다른 민족인 잉청저우 원주민으로 분화하였다. 한편으로, 《삼국지(三國志)》에서 오(吳)나라가 종종 이주(夷洲)(현재의 중화민국 대만성, 잉청저우 섬)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며, 《수서(隋書)》에는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 현 또는 현재의 중화민국 타이완성 또는 현재의 잉청저우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젠안(建安)군(현재의 중화민국 푸젠성(福建省))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 라 하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590년에는,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 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르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타이완 섬을 보고 "포르투갈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란 뜻)라고 서양식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타이완 성을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 때 포르투갈인 등의 여러 서양인들이 타이완 근처의 잉청저우의 두 섬까지 도달하여 탐험하면서, 아니면 중국인들에게 소문을 들으면서 현재의 지명인 "영성주", 즉 잉청저우가 알려졌다. 물론 이때부터 영성주를 瀛城州와 贏城州로 혼용해서 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서구에서는 잉청을 각각의(두개의 각) 표기인 赢城 혹은 瀛城을 음차한 "뷰티풀 캐슬"이나, "씨 캐슬" 이라고도 가끔씩 불리고는 한다. 하지만 현재 영성주, 그러니까 잉청저우의 표기는 瀛城州이다.

한편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산지지역에서는 타이완의 다두왕국과 같은 연합왕국인 세판 왕국이 성립했다가 이것이 중앙집권화를 거치면서 중세 왕조같이 되었다. 세판 왕국은 언어 통합 작업을 벌여 언어를 통합하고, 각 부족간의 통혼을 장려해 잉청저우 원주민들을 민족화된 여러 부족에서 한 민족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 17세기 명나라 대(明代) 말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타이완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타이완 이주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잉청저우를 알게 된 일부 한족들이 넘어갈 대로 잉청저우로 넘어가면서 현재의 시내에 해당하는 잉청저우 2개 섬 중 비교적 평평한 북쪽 섬, 피란 섬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본성인이라는 대만과 잉청저우의 중국인의 구분 분류가 탄생하게 되었다. 원래 잉청저우 섬은 현재의 신잉청현 신잉청군에 해당하는 땅만 물 위로 솟아있고, 지금의 시내에는, 역사설정에 계속 "북쪽의 섬"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하나의 평평한 큰 섬(피란 섬)이 있었는데 그 두 섬 사이의 바다를 강화도처럼 수백년 걸쳐 간척해 나가면서 1893년에 와서야 완전히 메꿈과 동시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다. 첫 간척은 1584년인데, 잉청저우 섬에 있었던 당시 세판 왕국의 백성들이었던 잉청저우 원주민들이 잉청저우 섬의 산지의 비율이 너무 높음으로 인해서 농지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간척작업에는 잉청허에 대한 준설 및 치수 공사에서 나오는 흙을 썼다고 한다. 그 평평한 섬에서는 1618년에서야 당시 이주해 정착한 한족에 의해 간척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1624년, 펑후 제도를 점거하던 네덜란드(和蘭) 상인과 명(明)나라 군대는 네덜란드이 동인도회사가 펑후 제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이완 섬의 서남부(현재의 중화민국의 타이난 시 일대)에 상업지구를 건립하는 데에 합의하였고, 네덜란드는 2차례 탐험을 통하여 잉청저우 섬 남단에 추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1626년~1642년에는 에스파냐인들이 타이완 섬에 들어와 타이완 섬 북부의 지룽(鷄龍, 훗날 한자명 基隆)과 서랴오섬(社寮島, 사료도, 현재의 허핑(和平) 섬 일대)를 차지하고, 산살바도르 성을 세웠다. 에스파냐는 이후에 점령지를 하쯔난(蛤仔難, 합자난. 현재의 중화민국의 이란(宜蘭) 현), 후웨이(현재의 중화민국의 신베이 시의 단수이 구) 까지 넓혔고 이 지역에 산토도밍고 성을 세웠으며, 이때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법을 썼지만 이제 막 한족들이 이주하는 북쪽의 섬에 식민지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진출한 네덜란드 세력과 에스파냐 세력 사이의 경쟁과 알력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642년, 네덜란드인들은 에스파냐의 타이완과 잉청저우 내의 점령지를 공격하여 빼앗고 에스파냐인들을 타이완 밖으로 몰아냈고, 이때 당시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를 점령해 식민지배한 목적은 중국, 한국,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우세를 점하고,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있는 식민지를 거점으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의 타이완 섬 및 잉청저우 지역 일부 통치는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1661년에 정성공은 타이완 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였고, 1662.2.1에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 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 섬의 모든 권리 이양, 그 뿐만 아니라 잉청저우 지역의 지배권까지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 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잉청저우에는 정씨왕국령과 세판 왕국이 공존하였다.

그 뒤인 1662.2.1 이후로 정성공은 타이완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자로 东都, 중국어 정체자로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온 푸젠 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고, 잉청저우에서 세판 왕국을 정복하여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662.6.23에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정경이 그 뒤를 이었으며, 1664년에 정경은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고, 정성공의 반청(反清)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三藩之亂)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 성의 일부를 공격하여 장악하고서는 세판 왕국까지 멸망시켜 점령하는 데에 성공(1675.3.29)했으나, 결국 1683년에 정경이 죽으면서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타이완 통치는 21년 만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21년동안 이어진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타이완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그 뒤 청나라 푸젠성의 일부로 존속하다가, 1891년 독일제국의 탐험선이 잉청저우 섬의 중부로 들어가서 탐험하던 도중, 당시 중국계(내성인) 및 잉청저우인(잉청저우 원주민)과 싸움이 붙으면서, 청나라가 이를 해결하느라 잉청처우 섬 자체를 할양해줘야 했고, 그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독일제국령 잉청저우 섬으로 존재하였다. 이 당시 독일어를 비롯한 독일 문화가 대규모로 유입되었고, 철근구조 등의 근대식 건축구조와 신문을 비롯한 근대 문물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제정 일본이 산동반도와 남양군도라 불리우던 미크로네시아 일대를 점령한 이후 잉청저우로의 남진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그 때 영국과 프랑스의 지속적인 병력 파병 요청의 거부를 이유로 들어 영국과 프랑스의 밀실 합의로 인해 제정 일본에서 잉청저우 섬을 공략하기 1주일 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일대에서 군을 차출해 잉청저우 섬으로 진격하면서 간발의 차이로 프랑스가 잉청저우 섬을 점령했으며, 결국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패망하고 그 결과인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국제연맹이 설립될 때에, 국제연맹에서 잉청저우 섬을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지정했으며, 1920년에는 중화민국과 잉청저우에서 별도의 합의를 맺어서 50년 조차 계약을 맺고, 조계지로서의 수명이 다하는 1970년 이후에 중화민국으로의 반환 혹은 잉청저우 섬 일대를 영토로 하는 독자적 독립국가 수립 둘 중 하나를 최종적인 목표로서, 이를 이루는 과정으로 인식되게금 자력갱생을 위한 프랑스의 통치가 이뤄졌으며, 이는 식민통치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수준의 높은 자치로 이행되어 국제연맹이 당초에 의도한 위임통치의 모범이 되었고, 기존의 유입되었던 독일어, 독일 문화의 보존이 보장됨과 함께, 프랑스어, 프랑스 문화도 적극적으로 유입되었으며, 반체제 인사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유입되고, 제정 일본의 통치를 받던 류큐인들이 먹고 살고자, 언어, 부 등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대거 이주해왔다.

그러나,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잉청저우 섬을 고작 이권 챙기는 걸로 요청을 무시한 댓가랍시고[1]프랑스에게 뺏긴 한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는 결국 일제가 군국주의의 길을 밟으며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에 포함되며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일제는 홍콩, 마카오를 점령하기 2일 전 잉청저우 섬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며,결국 1941년 잉청저우 섬을 점령한 일제는 잉청저우를 군수기지로 만들어 탈탈 털어서 전쟁을 진행하였고, 학살과 강간, 성노예 징발, 생활물자 강제징발 등의 잔학 행위를 시도했으나, 결국 이는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항일 저항운동을 역으로 불러일으켰다. 말 그대로 수탈과 저항의 연속이었으며, 레지스탕스는 전술과 병력의 한계 상, 잉청저우 섬에서 비교적 산이 있던, 남부 산간지역을 해방하고 이를 중추로 활동하였다. 상기한 잔악행위로 탄생한 '암흑의 피(暗黑之血)' 역시 4만명 정도 탄생하였다.[2][3] 그러면서 잉청저우 시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의 중심지가 되어 철저히 파괴당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잉청저우 일대에 2차로 일본인이 대거 이주해왔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 등을 경험한 잉청저우는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중화민국이 잉청저우 섬을 영토로 수복 할 것을, 미국이 바시 제도와 이스트코스트를 수복하고, 바시 제도를 이스트코스트에 연합시킬 것을 확약받는 등, 연합국 간의 협의에 따라 1945.10.25일에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한 직후, 그 다음날인 1945년 10월 26일에서야 일제 잉청저우 점령방면군의 항복을 받고, 프랑스와 저우산 협정을 맺고, 중화민국이 잉청저우를 접수한다. 그 후 국민당의 국공내전 와중에 화북에서 밀리는 과정에서 광둥, 산둥, 저장-장쑤-상하이 출신의 잉청저우 지역 내의 외성인이 400만의 민간인과 곳곳에서 탈출에 성공한 패잔병 100만명이 잉청저우 일대로 몰려들며, 잉청저우의 일본인들은 집단으로 귀환을 거부하며 집단으로 본성인으로 위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벌어진 2.28 항쟁은 대만을 넘어 잉청저우로 확산,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결국 외성인과 본성인으로 분류되던 잉청저우 선주한족-신 본성인이라고 불리던 본성인 위장 일본인-잉청저우 원주민 간의 갈등이 깊어져 갔으며, 이는 수차례 열린 대규모의 시민들의 독립 봉기로 이어진다. 본래 잉청저우섬은 대만과 역사적 궤적을 같이 했던 하나의 지역이었으나, 식민지배를 대만은 일본에게 받았으나, 잉청저우 섬은 독일 식민지를 거쳐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식민지배를 받았었고, 그에 따라 미세한 역사적 차이,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했으며, 미세한 역사적 차이는 더 커졌다. 결국 이스트코스트의 독립 여론과 맞물려 연방화 독립 방안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지지가 급증하는 등의 독립 여론의 강화 및 격화는 계속되었고, 잉청저우는 중화민국의 골칫덩이가 되어갔다. 이미 이스트코스트와 하나의 도시권으로 기능하고 있었기에,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국 1954년부터 계속된 미국-중화민국-잉청저우-이스트코스트 4자 대표 간 독립협상이 1956년 7월까지 이어졌으며, 1956년 7월 20일, 단수이 협정으로 잉청저우 섬은 1945년 중화민국의 잉청저우 섬 접수 이후 힘겨운 독립의 길[4]을 걸은 지 11년 만에 독립하였다.

그와 동시에, 앞서 언급한 이스트코스트와의 유기적 권역이 도시권을 넘어 국가 간의 통합을 조율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국 이스트코스트와의 연방화는 불가피했으며, 결국 제헌임시의회를 선출하여 연방 수립을 결의하고, 헌법 제정 및 선거를 통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수립한다. 그 과정에서 본성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이에 대비한 법률을 제정해 그간의 탄압을 중지하고 인종적인 차별과 탄압을 절대로 못 하도록 막았다. 이를 기점으로 잉청저우의 인종 차별/탄압과 그 잔재는 1960년대 초반까지 급속도로 사장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잉청저우 현에서 잉청저우 시, 저우산 진, 베이지 진, 쉬서우 진, 잉서우 진, 슐수이광 향만 남고 웨이팡 현과 시낭 현이 1963년에 분할된다. 이유는 잉청저우 시와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인구로 인한 잉청저우 현의 인구 과다로 인한 생활권 분절 문제로 인해 헌법에 명시된 절차의 실시가 불가피 해서이며, 그런 분리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잉청저우현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급속히 증가하면서 잉청저우 시의 인구가 1977년 직할시 승격기준선인 100만을 넘었으며, 잉청저우 3개 현의 인구는 1980년 1000만을 넘어선다. 결국 잉청저우 시가 1982년 주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으로 직할시로 승격하여 잉청저우 현에서 분리되었으며,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도 이전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식량안보의 안정적 확보 목적도 갖출 겸 하여, 인공섬 해청위(海淸衛, 하이칭위, 카이세이에이)를 만들어, 이를 1991년 완공 후 해청위 섬 전체를 통째로 연방특별구로 만들어 수도를 이로 옮기었으나, 오히려 국토의 균형 성장의 고도성장화만 촉진하여, 성장세는 좀처럼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1995년 당시 잉청저우 시의 인구는 583만 명에 다다렀다.

하지만, 잉청저우는 과포화상태에 치달았고, 잉청저우의 광역권은 1995년 기준 약 1200만의 인구를 가졌을 정도로 어마어마 하였고, 결국 1990년 3월에 잉청저우현 전역이 주민 투표를 통해 잉청저우 시에 편입되는 식으로 잉청저우 시와 통합했으며, 1998년 9월에는 또 주민투표를 통해 웨이팡 현의 허슝리(和雄里) 시, 우이칭(唔依清) 시, 웨이팡 시와 시낭 현 완잉(宛英) 시, 아키나카(秋中) 진이 잉청저우 직할시로 편입되었고, 이도 또 주민투표로 웨이팡 현(스거우 진, 허량(河浪) 진, 시커우(司寇)진, 샤오왕 시, 민셩 진, 시왕 진, 왕칭 시, 양누 진, 틴샤 진, 나부샤 진, 양칭 향, 우싱 향)과 시낭 현(시낭 시, 장이 시[5], 저우제 진, 원잉(溫迎)진, 우샨 진, 스기 향, 세이란 향, 펀완 진, 마카타오 향, 망알로반 진, 비피비피 향, 카시얏 향, 먄피바티 향, 웨이칭 향, 커칭 향, 이린 향, 잉펑 향, 타갈로그 향, 부키드 향, 비사야 향, 이바탄 향, 아피얀 향, 이피만탄 향, 칼리마타 향, 마킬로스 향, 제네랄핑카밍테 향, 탄카만 향, 낭 마르테스 향, 마카타요 향, 낭 이스토치나스 향, 오리엔테 향, 난다시 향) 각 2개 현의 잔존부를 합쳐 신잉청현을 만들어냈다.

그 뒤엔 잉청저우 직할시가 1999년 7백만을 돌파하였으며,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인구가 1천만 선에서 소폭 느는 등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현재는 그 작은 1만 제곱킬로미터의 연방국가의 최대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인구에 비해 균형잡힌 녹지 비율을 지니고 있으나, 교통문제가 존재하여, 지하철을 10호선까지 개통했음에도 사설철도, 광역전철까지 혼잡도 200%대를 기록하고, 도시 곳곳이 출퇴근 시엔 버스의 가축수송으로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정도로 심각하다. 신잉청현에 속하는 잉청저우섬 남단의 경우 잉청저우 직할시 근교에 위치한 12개 현할시의 사회적 인구 증가의 지속이 있었고, 그 외는 이촌향도 등이 겹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으나, 위성도시들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기에, 상기한 행정구역 편입으로 인구 성장세가 꺾이나 싶었으나, 1990년데 중반에 증가 폭이 급격히 가팔라졌으며, 2018년에는 약 885만까지 회복하였다.

바시제도-난링다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도서지역, 소위 바시 제도(巴士諸島) 은 북으로는 잉청저우 섬 바로 남단에서부터 필리핀 북단의 바탄제도(바타네스 제도) 근방까지 뻗어있으며, 옆에는 난링다오가 존재한다. 이들을 넓은 의미의 바시 제도라고 칭하며, 이들도 이스트코스트 지역과 같이 1세기 즈음에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필리핀을 통해 태평양과 마다가스카르 땅까지 곳곳으로 뻗어갈 즈음에 잠깐 거쳐간 땅에 불과하였다. 19세기까지 잉청저우와 필리핀에서 근접하는 지리적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던 이 땅은 19세기 후반 미서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 삼을 때 섬의 개척을 통한 식민화 가능성을 확인, 미국이 1913년 본격적인 개척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스트코스트 속령의 일부로 편입하였고, 이때부터 1933년까지 20년동안 필리핀인 개척단을 무려 160차에 걸쳐, 10만을 선발하여 보내서 개척케 하였고, 펀완과 난다시에 농민을 비롯한 한족 이민자들을 1935년부터 1940년까지 30차례 동안 총 6만명을 받았으나, 제 2차 세계대전에 의해 일제에 의해 강점됨과 동시에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인한 바시 제도 수호 전쟁으로 인해 1만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상기한 카이로 선언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 자치령으로의 편입 대신 이스트코스트 속령에 재편입하는 식으로 이스트코스트 속령과 연합해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 제도 속령으로 개편, 그와 함께 전후 복구에 매달리며 인구는 베이비붐의 여파로 1949년에, 경제는 1954년에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으며, 1956년 이스트코스트와 바시 제도 속령이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으로 독립한 직후 잉청저우 섬과의 연방으로의 통합이 이루어지며 잉청저우 제도 연방이 되고 나서는 1956년 주민투표에서의 근소한 찬성 우세에 의거해 웨이칭 현에 편입되었다가, 상기한 대로 1990년 잉청저우 2차 확장 당시의 주민 투표에 의한 행정구역 대개편에 의거해 잉청저우 현의 잔존부 전체와 시낭 현과 웨이칭 현의 일부가 잉청저우 시로 편입되는 대확장을 통해, 시낭 현과 웨이칭 현의 각 잔존부가 통합되며 신잉청현이 조직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때문에, 전부 스위스의 쥐라 주 설치 이전의 베른 주 본토-쥐라 산맥 지역과 같은 민족/언어권 간 갈등이 신잉청현 잉청저우 섬 부분과 바시제도 간에 벌어지고 있어, 간간히 바시 현(또는 동부 바타네스 현) 설치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

  • 잉청저우 직할시의 근교 12 현할시의 경우에는 잉청저우 직할시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니, 잉청저우 직할시의 문화 파트를 참고할 것을 권장한다.

신잉청현에서 잉청저우 직할시의 근교에 있는 12 현할시를 제외하고, 잉청저우섬 남단과 도서지역을 나눠서 보면, 잉청저우 섬 남단은 잉청저우 섬의 본래 지역이었으며, 잉청저우 원주민들의 본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만에서 건너온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정착해 원주민들이 기원한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으로 원주민들의 전통양식이 국민당 정권의 탄압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을 정도로 산골 아니면 시골 그 자체여서, 전통문화는 원주민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 잉청저우 직할시의 잉청저우 원주민과는 도시문화를 잘 받아들인 점을 제외하면 다르지는 않다. 잉청저우어는 잉청저우에 있던 왕조의 멸망 이후의 기록과, 구어로만 이어지다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의한 일제 점령기 및 중화민국 귀속을 거치며 탄압받다가 독립기를 거치면서 문자표기가 로마자로 통일되었다.

잉청저우 섬 남단에는 한족 이주민도 상당히 있지만, 그들은 잉청저우 직할시의 한족들과 똑같은 양상을 보인다. 도서지역을 보면,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배 하고 이 도서지역을 개척할 적에 필리핀인을 보내 개척시켰으므로, 필리핀의 문화가 강하게 배어있다. 그래서 그런 지,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선진적인 생활수준에 걸맞지 않게 지프니 등이 보이기도 한다. 원래 생활수준이라면 그런 운송수단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되겠지만, 독립 이전엔 이스트코스트 속령 쪽에 속했던 도서지역으로서 전통문화로서 보존의 대상이 되었기에, 대체되지 않고 그대로 운행중이라고 한다. 물론 시대에 맞게 대기오염을 저감할 수 있도록 수없이 개조되고 있다.

교통

잉청저우 근교 12 현할시의 경우에는 잉청저우-이스트코스트 도시권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잉청저우 섬 남회선을 제외하면 철도를 이용하러 이웃 시향진으로 나가야 하거나, 도로교통 뿐이며, 난링다오의 경우에는 펀완에서 잉청저우, 카시얏, 망알로반, 마닐라, 이스트코스트, 나화 등으로 가는 여객선이 운행 중이다.

경제

애초에 자연환경만 봐도 농림어업이 최선이다. 그러나 잉청저우 근교는 죄다 베드타운이다. 8개 현할시가 30만~40만 사이, 신자이 시/장이 시/저우제 시/리샤오 시에서는 80만~100만 사이에서 베드타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외는 죄다 향진으로 지정될 정도로, 북부 12 현할시를 제외하고는 인구가 대부분 농림어업에 종사하고, 인구가 희박하다. 예외가 있다면 남방도서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한 펀완 시 정도이나, 이 경우에도 식품가공업이 주 산업일 정도니 말 다했다. 잉청저우의 혐오시설이 죄다 신잉청현에 자리한 탓에, 잉청저우와의 미묘한 소지역주의가 존재할 정도로, 농림어업과 인구희박지의 대명사이다. 여기서 알수 있는 부분은 잉청저우의 혐오시설들에 근무하는 사람들, 잉청저우 근교 8개 현할시 시민을 제외하고는 죄다 농림어업에 종사한다. 어업은 대부분 필리핀계가 바탄제도의 풍습이 퍼져 이루어진 전통 농업으로만 잡아서 생산량이 떨어짐에다가 양식이 2000년대 중반에 겨우 도입되었고(...), 농업은 농기계로 상당부분 대체되었지만 아직도 소규모 자영농의 비중이 어느 정도 높은(전체 농업에서 37%) 상태에서, 전통 방식과의 공존을 꿈꾼다. 생산량은 그로 인해서 더 높일 수 있는 여력임에도 정체중이다. 임업은 산지에서 이루어지는데, 1500m를 넘지 않는 환경으로 인해서 열대목 조림 농장만 있을 정도(...)다. 게다가, 기후로 봐도 신잉청현은 전부 열대기후로 들어가는 모양새라서, 인삼, 산양산삼이나 온냉대기후의 버섯종 등은 시설을 빼고는 재배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북부 12 현할시 지역에서도 식량 수급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농업이나 임업 중 버섯 재배업을 배려하여 고층 농장을 세워, 거기서 재배하도록 하였다. 이는 인구 급증이 예상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부터 장려되어 40년 가까이 되는 동안 성공적으로 정착한 성공적 도시 농업의 사례로서 기록되고 있으며, 이 고층 농장은 의외의 수익원이 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신잉청현의 부의 87%는 잉청저우로 출퇴근하는 통근객이나 북부 12 현할시 내부의 많은 고층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쥐고 있는, 말 그대로 도농 격차 자체가 아예 기울어진 운동장 그 자체인 대환장파티 빈익빈 부익부 그 자체라는 것이다(...)

잉청저우와 신잉청현 지역의 상업 특수

한편, 잉청저우 직할시와 신잉청현은 대만에서 독립해 나온 것과 일본계의 존재 때문인 지, 2.28 항쟁 추모제 및 위령제를 대규모 행사로 열고 있고, 심지어 시치고산이 다가오면 참배객들이 신사에 몰려든다. 이런 점 때문에 2.28 항쟁 추모제에 쓰일 용품, 2.28 항쟁 희생자 제사 용품 및 2.28 항쟁 희생자 묘지의 참배 공물 등이 대규모로 팔리는 특수가 존재한다. [6]

행정구역

각주

  1. 실제로 침공 명분에 이걸 내걸 정도로 제정 일본, 즉 일제가 잉청저우 섬을 침공할 명분은 진실이건 거짓으로 만들어내건 간에 해당 명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2. 이들 혼혈은 주로 한족 본성인 여성이나 류큐인 여성이 어머니인 경우가 많아, 2/3이 모계 정체성인 잉청저우 본성인 내지는 류큐인의 정체성을 택했고, 나머지 1/3만이 부계 정체성인 일본인의 정체성을 택했다. 실제로 국립 잉청저우 대학에서 1970년대에 이뤄진, 이들을 추적한 결과 모계 정체성을 택한 이들은 본성인이나 류큐인과 결혼하였으며, 부계 정체성을 택한 이들은 일본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다만 출산율은 전자(평균 2.1명(1976))보다 후자(평균 2.6명(1976))가 높았다고 한다.
  3. 전 총통 리우허핑(劉和平, 일본어명 후지와라 헤이와(藤原平和))도 이 케이스에 속한다. 그나마 잉청저우 제도 연방이 독립한 뒤에 1967년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 사연이 알려저 1969년 생물학적 아버지와 재회했으므로 그나마 나은 케이스이다. '암흑의 피'에 속하는 이들 상당수는 대학 입시 혹은 취업 과정에서야 알게 되고 정체성을 특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 리우허핑의 경우에는, '암흑의 피' 모두가 그러했듯이, 특성 상 자신이 그런 추악한 역사의 결과였단 점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일본인 혈통의 혼혈성을 잉청저우 제도 독립 전까지는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드러내기 쉽지 않았을뿐더러, 그간 잉청저우에서 산 세월이 길어 일본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이미 잉청저우의 선진적 민주주의 정치의 수혜를 입고, 배우고, 그 선진적 민주정치에 몸담으며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중진 정치인이 되었던지라, 결국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택한, 잉청저우 본성인 내지는 류큐인의 정체성(모계 정체성)을 택한 케이스이다. 그는 먼저 서술한 이유로 인해 상기한 일본어명도 생물학적 아버지와 재회하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4. 실제로 현실에서 메이리다오 사건(美麗島事件)에 대한 평가나 현실에서의 중화민국 민주진보당 창당 이후 대응만 봐도 장징궈 집권기라서 가능한 것이었지, 장제스였다면 다 사형시키고도 남았다 할 정도로, 장제스는 강경노선 그 자체였으니 말 다했다.
  5. 시낭 시와 장이 시는 시가지 연담화 문제로 인해 1992년 2월 주민투표에서 통합을 결의, 1992년 7월에 통합 장이 시를 출범하는 식으로 통합하였다
  6. 물론 2.28 항쟁의 경우에는 뜻하지 않은 현대사의 암울한 부분으로 인해 일어나는 특수인 만큼, 상인들도 2.28 항쟁 희생자를 기리는 차원에서 2.28 항쟁 전후로는 검은 옷을 입으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에 맞춰 가게를 흑백의 추모 분위기로 꾸미며, 유흥업소의 경우에는 2.28 항쟁 기념일이 있는 주와 그 전주, 그 뒷주 하여 총 3주(2월 셋째 주~3월 첫째 주)동안 영업을 하지 않고 일시 휴업하는 관행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