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세계관
아메리카 전쟁
Pan-American War
날짜
2047년 8월 22일 ~ 2050년 3월 10일
장소
북아메리카 대륙 전역
카리브해, 콜롬비아 일대
원인
미합중국의 쇠퇴, 분열
파시스트 아메리카의 북미 대륙 무력 통일 야욕
교전 세력
아메리카 과도위원회
멕시코
파나마
온두라스
니카라과
쿠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파시스트 아메리카
미합중국
북미 연방(~2049)
캐나다(~2049)
콜롬비아(~2049)
지휘관
대니얼 맥클레이브
윤주용
키어런 체임버스
윌리엄 스펜서
대니얼 애스틴
조지 래슬로
앤소니 클린트
아서 조지 랜돌프
에드워드 모리스
조지 베스터
로버트 패트릭슨
스티브 테리
필리프 뷔소
병력
550만명 210만명
피해규모
과도위
- 사상자 15만 6천여명
- 포로 400여명
파시스트 아메리카
- 사상자 28만 7천여명
-포로 2만 3천여명
북미 연방
- 사상자 5천여명
캐나다
- 사상자 300여명
결과
과도위의 승리
영향
북아메리카 대륙 공산화
세계 각지 연쇄 공산화 촉발

개요

범아메리카(Pan-American)라는 거창하지만 순진한 단어가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
윌리엄 A. M. 스펜서
우리는 이 전쟁에서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곳에서 싸우는 우리는 미국 인민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인민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할머니와 아이들의 비참한 절규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윤주용

2047년부터 2050년까지 약 3년 가량 아메리카 대륙 각지에서 일어난 전쟁. 북미에만 한정하면 남북전쟁 이후로 북미대륙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전쟁이다.

혁명,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이 혼합된 전쟁이었으며 현대 역사학자들도 하나의 성격만을 지닌 사건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중들은 2차 남북전쟁(2nd Civil War)나 2차 미국 혁명(2nd American Revolution)으로 부르며 아메리카 전쟁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학술적으로는 ‘아메리카 전쟁’이 공식 표제어이며 사전에는 세가지 단어가 모두 실려있다.

배경

혁명 당시 윤주용의 등장으로 미국 통일공산당(CUP)가 혁명정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늘어났고 CUP의 주도로 어느정도 단일 대오를 구성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혁명정부 이하의 주와 인민들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었다. 주방위군이나 몇몇 연방군들은 CUP에 협조하자는 파와 무조건적 협조보다 비판적 견제가 필요하다는 파가 나뉘었으며 뉴욕주 북부에서 구 미합중국 연방정부(이후 북미연방)는 비록 남부정부와 갈라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건재했다. 2047년 4월경 혁명정부 주석이었던 대니얼 맥클레이브는 우선 혁명정부가 분위기상으로, 상당수의 인민과 주의 협조를 통해 다른 정부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했으니 이제 안정화와 타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윤주용은 타협이 아닌 구정권의 복원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맥클레이브의 민생 안정화 내정에는 동의했다. 우선 혁명정부는 윤주용의 주장을 받아들여 애번스턴 회의를 개최, 각 주의 주방위군과 혁명정부를 지지한 연방군을 아우르는 ‘통합혁명군(Unified Revolutinary Army)’를 출범시키고 혁명군사평의회를 설치했다. 더 나아가 윤주용은 이 회의에서 한시적 징병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국방위원 해리 메이슨에 의해 무시되었다. 어쨌거나 혁명정부는 2047년 5월부터 8월 초순까지 기업화된 농업을 철폐하고 국가가 직접 농업 생산을 책임지고, 각종 산업시설의 노동자를 다시 불러모으는등 국가 경제의 기반을 사회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여러 정책을 발표했다. 아울러 맥클레이브의 의견에 따라 혁명정부는 북부정부와는 달리 남부정부에 대해 상당히 유화적인 입장을 고수했고 같은 나라의 또다른 정부라는 틀을 벗어나 다른 나라라고 인식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펼쳤다.

하지만 북부와 남부정부는 애번스턴 회의 개최 이후 혁명정부를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하고 밀월관계에 들어갔다. 혁명정부가 북부정부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데다가 구 미국 영토의 절반 이상, 인구의 2/3가까이를 점유한 혁명정부가 각종 사회주의적 정책을 발표하자 위기감을 느낀것이다. 아울러 혁명 진압에 무력으로 답한 에드워드 모리스 북미연방(구 미합중국)대통령은 혁명정부에 단단히 찍힌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혁명정부를 반드시 타도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맥클레이브 주석은 이들의 밀월은 알아챘지만 전쟁의 위협까지는 감지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2047년 5월 15일 북부와 남부는 비밀리에 혁명정부의 중심지가 있던 시카고로 진공할 것이며 북미연방 대통령 에드워드 모리스를 양국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하고 일단의 공동전선을 형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시기 윤주용은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 머물며 오하이오주의 산업 부흥과 연설에 힘쓰는 동시에 북부정부의 동향을 여러 정보원을 통해 남북이 동맹을 맺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윤주용은 곧바로 맥클레이브 주석에게 과도위원회 소집을 요구했고 이 사실을 공표했다. 아울러 자신이 제안했던 징병제와 전시 산업체제 실시, 국방위원과 그에 관련된 모든 인사의 경질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6월 3일, 여러차례의 격론 끝에 맥클레이브 주석이 윤주용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윤주용이 국방위원에 취임함과 동시에 안보 관련 인사는 모두 군부측 인사로 교체되었으며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캘리포니아주를 위시로한 태평양 연안지역과 친혁명정부 지역에서는 총 25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장병들이 군사훈련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징병에 대한 거부는 높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시민들은 혁명정부에 호의적이었고 혁명정부가 무너지면 자신들에게 어떤 비참한 결과가 닥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남북연합군은 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80만명이라는 대군을 편성해 침공을 계획하였고 7월 중순에는 D-Day를 8월 11일로 잡았다. 그러나 남북동맹군의 무기의 질은 이 당시만 해도 과도위에 뒤처지지 않았고 오히려 소총장비등의 기초장비등의 생산량과 공군 전력은 과도위를 능가했다. 이를 말미암아 동맹군은 혁명군이 100만명에서 160만명 가량일 것이라고 예측하며 급습하여 주요거점을 빠르게 점령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반면 과도위측은 첫번째 공세를 막으면 전쟁 전체에 승기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동맹군은 첫번째 공세가 성공해야지만 혁명을 종결시키고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론적으로 양측 모두 장기전으로 갈 때에는 과도위가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전개

1차 오대호 공세, 서부 전역 개전

2047년 8월 11일 북부군은 오대호 연안을 따라서 남부군은 내슈빌에서 루이빌,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하지만 북부군의 공세는 시작부터 삐걱였다. 워싱턴을 탈환했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과도위가 점유하고 있었던 워싱턴 DC 방면에 과도하게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만 것이다. 8월 11일 13시가 채 지나지 않아 북부군은 워싱턴을 탈환했지만 이미 도시는 텅 비어버리고 난 뒤였다. 과도위는 6월 중순부터 이미 이 지역에 소개령을 내려 모든 주민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로 피난할 것을 권고했고 수백명을 제외한 주민들은 이미 피츠버그나 콜럼버스 등지로 피난한 뒤였다. 한편 약 14만명의 북부군 병력이 이리호 연안을 따라 8월 13일 애슈터뷸라 인근에서 소규모 교전을 벌여 서부군을 격파하였고, 8월 15일에는 클리블랜드 5km 앞까지 당도하였다. 그러나 북부군은 적진 한가운데로 깊숙하게 들어왔다는 것을 망각한채로 동부 방면 지휘관이었던 윤주용의 포위기동 계획에 말려들었고 8월 23일까지 5차례의 전투를 벌이다 10만명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대패를 기록하고 만다. 이로써 북부군의 공세는 싱겁게 끝이 나버리고 말핬다.

그러나 남부군은 루이빌을 함락시키고 인디애나폴리스로 북진하였으나 후퇴 및 포위망에 걸려들게 하려는 서부군의 유도라는 것을 간파하고 북진을 멈춘뒤 주공을 둘로 쪼개어 하나는 세인트루이스로 빠르게 서진, 하나는 블루밍턴으로 진격하는 부공과 함께 인디애나폴리스로 곧장 진격했다. 남부군 야전지휘관인 아서 조지 랜돌프의 예상대로 인디애나폴리스의 방어선은 매우 촘촘했지만 세인트루이스의 서부군은 형편없는 수준이어서 세인트루이스는 8월 17일 함락된다. 랜돌프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정면으로 진격하는 주공으로 서부군과 전투를 벌여 그린우드까지 진격한뒤 남쪽으로 후퇴하여 서부군이 쫓아오면 블루밍턴으로 우회한 부공으로 서부군의 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따라 8월 17일 저녁부터 8월 23일까지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서부군의 막대한 인력과 물량은 랜돌프의 예상외였고 작전을 수정하여 부공으로 도시의 서쪽, 인디애나폴리스 국제공항 방향을 압박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부군 남부전선군 사령관인 윌리엄 A. M. 스펜서는 남부군의 부공이 서쪽을 압박할 것을 간파했고 예비대를 우회시켜 반대로 부공의 후방을 노리기로 했다. 한편 세인트루이스를 점령한 남부군은 8월 19일 보급을 마치고 곧바로 시카고로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