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아시아 태평양 전쟁
Asia-Pacific War
450
기간
1938년 6월 29일 ~ 1945년 8월 10일
장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전역, 동인도양 및 서태평양
원인
대한국 및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의 정치외교적 충돌
교전 세력
연합국 추축국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지휘관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병력
1,400만명 900만명
피해 규모
사상자 700만명 사상자 450만명
결과
연합군의 승리, 일본 제국 패망
영향
한국의 아시아 패권 확보 추구
3강 시대 개막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선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 아시아, 서태평양 일대에서 대한국과 미국, 일본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동북아-서태평양 전선과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난징정부가 대치한 중국 전선, 호주가 중심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선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일본제국이 서방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국가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제국이 한국의 영향력을 꺾어버리고 아시아에서 배타적 패권을 행사하려 벌어진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기까지도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 공명하여 많은 서방국가의 식민지인들이 일본제국의 편을 들었으며 1942년경부터 전황이 기울어지고 일본제국의 가혹함을 경험한 식민지인들은 이들에게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한국의 편으로 기울어졌다.

중국 전선은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과 임시적인 동맹을 맺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일본의 약속을 믿고 장제스와 척을 지던 군벌들이 모여 결성한 중화민국 난징정부간에 벌어진 전쟁이었으나 중국 내부에서는 내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배경

전쟁 이전 일본의 상황

소련-일본 불가침조약

1937년 9월 3일 일본 사절단은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 이면에는 일소 양국이 한국을 침공하여 분할할 구상이 숨어있었다. 오호츠크 해전에서 한국이 참패하는 것을 본 소련은 한국이 상당히 약체화되었다고 판단했고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판이라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한국 해군은 분명히 약화되었지만 소련은 그렇게 높지 않은 수준의 첩보을 통해 군사력 전체가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오히려 한국은 소련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징집령까지 내리며 북방 주요 전선에 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전개

한국 전선

1938년 6월 29일 발발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 중국 전선과 더불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투입된 전선이다.
오호츠크 해전의 여파로 전쟁 초기 한국 해군은 사실상 황해 북부에서만 활동이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는 해안, 항구수비와 육상 전선을 위주로 전투가 벌어졌으나 1939년 중순부터 일본에 비해 압도적인 한국의 공업력과 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한국쪽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1940년 5월에는 한국이 약 2년만에 조선반도 전역을 수복하였고 이 시기부터 한국은 해군을 재정비하여 일본을 압도하는 속도로 새로운 함정들을 생산했으며 1941년 중순에는 황해, 동중국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본을 불안감에 빠뜨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다는 최악, 그러나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게 만든다.
1943년에 한국은 대만을 수복하였고 필리핀을 해방시켜 일본의 인도양 남중국해 함대를 고립시키며 일본의 해군 전력을 두동강 내어버렸으며 일본의 짙어지는 패색에 쐐기를 박는다. 이에 일본 해군은 한국이 촉발시킨 인도양과 남중국해에서의 고립을 막기 위해 필리핀 민도로 해협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고 남중국해 일본 해군 전력은 궤멸된다. 43년 12월 한국은 해남섬을 회복하고 일본 상륙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중국 전선

필리핀 전선

인도차이나 전선

태평양 전선

논란

중국 전선은 아태평양 전쟁의 일부인가?

중화민국 국민정부+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중화민국 난징정부+일본제국이 대치한 중국 전선은 아태평양 전쟁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국제전의 간판을 달았을 뿐인 중국 내부의 내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추축국에게 선전포고하였고 한국의 요구로 승전국으로 인정은 받았으나 정작 서울 강화조약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중국 내전이 여전히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중화민국 난징정부에 참여했던 주요 군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한채 각지방에 할거하고 있었고 전후에도 중국을 통일하려는 국민정부와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