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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마천루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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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루 제국
鸭緑帝国 | ᠶᠠᠯᡠ ᡤᡠᡵᡠᠨ
[[파일:|]]
국기
2423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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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 2423년
  • 얄루 전쟁 2439~2442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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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단둥
최대 도시
주요 도시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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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주류 문화
얄루
소수 문화
언어
조선어, 만주어, 만다린 등
종교
국교
텡그리
소수 종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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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체제
유목제
지도자 (대칸)
정일남

개요

얄루 제국은 한반도 북쪽과 요동 반도, 요서 회랑 동쪽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 위치한 유목 국가이다.

역사

부서진 마천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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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2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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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 발생
2137 신안 문명
2189 러시아 공산당 출현
2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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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백두산 화산 분화. "신의 징벌"
2234 정교회의 정비
2235 아르세니예프 공의회
2235 - 2395 프리모리예 군벌 시대
2298 신안 제국 형성
2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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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4-2327 신안의 인천 정복
2317 신성 복음 연합 건국
2322 - 2324 제1차 신안-복음 전쟁
2327 고려국 선포
2332 제2차 신안-복음 전쟁
2349 - 2365 인천 독립 전쟁
2351 신미년의 역
2365 인천 연합 출범
2371 - 2374 1차 강화도 전쟁
2377 - 2381 2차 강화도 전쟁
2383 서해안 연합 형성
2387 - 2402 인천 제 1 군정
2395 - 2396 대 조국 전쟁
2396 동해 제국 건국
2399 - 2415 동해안 식민 계획
2399 제3차 신안-복음 전쟁
25세기 - 본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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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 - 2413 대반란
2402 기계교 반란
2405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2410 경오정난과 대요 건국
2416 - 2418 1차 화북 원정
2419 요양 조선족 폭동
2420 - 2421 2차 화북 원정
2421 - 2422 묵던 원정
2423 얄루 제국 건국
2427 - 2439 인천 제 2 군정
2428 - 2432 주체교도의 난
2432- 신성혁명
2439 - 2442 얄루 전쟁
2440 대진의 분열
2440 인천의 봄
2444- 인천 내전
244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등장
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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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동해 제국의 분열
24?? 얄루 제국의 분할
2666? 스포일러의 등장

만주의 농경민족

사건 이후 무너진 만주의 질서 속에서 조선족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척박한 만주에서 열심히 쌀을 재배하는 그들을 만주족과 한족 군왕들 모두 신민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조선족은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인정받아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남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흥안령 동쪽에서 솥발의 형세가 갖춰지고, 흥안령 서쪽에서 한족과 만주족의 안정적인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족의 쓸모는 줄어들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점차 차별받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족은 독립된 국가를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주 거주지인 단동, 요양, 심양 지역에는 이미 강력한 왕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이때 환인 정씨의 제안으로 잊혀졌던 옛 졸본성의 전설에 따라 탐색을 시작하였다. 2337년 졸본성이 발견되었고 10개의 조선족 대가문이 뭉쳐 고려국을 선포하였다. 본계 박씨의 박계춘이 태왕으로 등극하였다. 이후 졸본성 아래 작은 마을을 만들고 성을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막 주변지역 개간을 시작하였기에 보급은 요양 근교의 조선족 마을에서 가늘게 이어졌다.

이들의 행동은 주변 건주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건주연맹은 그들의 영토 주변에 국가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족과 동질성이 강한 조선족의 국가가 생긴다면 한족이 흥안령을 넘어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졸본성이 개축된 2338년 4월 건주부의 대족장이 직접 찾아와 그들에게 퇴거를 요청하였다. 이에 태왕은 거부하였으나 건주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보급로까지 막히게 되었다. 이에 태왕의 처소는 요양으로 옮겨졌다. 요양으로 이동한 태왕은 모든 조선족의 왕이라는 상징적인 권좌에 앉게 되었고, 이후 요양시를 넘어 요양, 요동, 심양 일대의 조선족까지 지배권에 넣게 되었다. 조선족은 처음으로 탄생한 자신들의 태왕에게 열광하였고 태왕의 통치 아래 제대로 된 국가 체계를 갖게 되었다. 점차 조선족은 그들만의 계획적인 집단 거주촌과 행정 체계를 갖게 되었다. 이들에게 조금씩이나마 걷어 들인 세금은 태왕부에 모였고 군사력을 양성하게 되자 일대에서 조선족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대막리지와 신미년의 역

당시 요양왕 량 치양(梁濟央)은 조선족의 왕을 우호적으로 대하여 장차 그를 자신의 휘하에 구속시키고자 하였다. 조선족의 왕을 번왕으로 삼는다는 상징성으로 권위를 높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양이 죽고 왕위에 오른 량 구이샹(貴香)은 조선족의 태왕이 요양의 왕권에 도전하는 중대한 위협이라 판단하였다. 이는 구이샹이 태자이던 시절 요양 안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큰 불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조선족에 그는 은근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요양 일대에서 이미 태왕의 통제력은 굳건하였고 그를 따르는 군대도 있었으며 요양 안의 한족들에게 두루 여론이 좋았다. 섣부르게 개입 한다면 요양이 흔들려 자신의 왕위까지 흔들리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고, 그럼 북쪽 심양의 칸이 개입할 여지가 생길 것이었다. 그렇기에 구이샹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2345년 박계춘이 사망하고 아들인 박웅이 태왕으로 등극하였다. 구이샹은 태왕의 장례식을 요양왕에 준하여 성대하게 치뤄주었다. 이 시기 구이샹은 박웅과 대립하는 조선족 가문들에게 은근히 힘을 실어주며 조선족 사회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태왕부의 재상 고덕배의 가문이자 요양에 오래 세거한 고씨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박웅이 태왕직을 안정적으로 승계할 즈음에는 태왕과 대막리지 고덕배를 중심으로 한 두 파벌이 형성되었다. 태왕은 한족의 지배 체제 아래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평화를 지키며 조선족의 권익을 향상 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반면 대막리지는 조선족의 완전한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태왕의 주장은 현실적이었으나 대막리지의 주장은 실로 낭만적인 것이었다. 혈기 왕성한 많은 조선족 청년들이 대막리지의 편에 섰고 차별 받은 경험이 아직 남아있던 많은 조선족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태왕의 편을 따르는 이들은 현실을 볼 식견이 있는 소수의 지식인과 현상 유지를 바라는 부호 등 한 줌에 불과하였다. 대막리지를 따르는 파벌은 조선족 구역 내에서 배타적으로 변해가며 집단 거주촌 주변의 한족을 쫓아내고 마을의 경계를 점차 넓히기 시작했다.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던 조선족과 한족의 통혼을 반대하게 되었고 한족과 결혼한 조선족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선족 사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태왕은 열 가문의 대표자를 의원으로 한 제가회의를 열었다. 제가회의의 의장은 태왕의 본계 박씨, 부의장은 대막리지의 요양 고씨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과반수 의결을 원칙으로 하는 회의는 번번이 결렬되었다. 어느 한쪽에서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과반수의 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태왕은 네 가문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고덕배 역시 네 가문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나머지 두 가문은 중립을 선언하며 아예 회의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태왕은 대막리지를 따르는 이들의 과격 행위를 제지할 수 없었고 한족들 사이에서 조선족의 평가는 점점 나빠져 갔다. 이 와중에 량 구이샹은 의도적으로 조선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며 한족들이 조선족에게 분노를 품도록 유도하였다.

2351년, 요양왕 량 구이샹은 충분한 여론의 흐름을 파악하고 요양의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조선족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태왕을 위시한 수뇌부를 체포함으로써 신미년의 역을 일으켰다. 구이샹은 친림재판에서 태왕이 조선족의 왕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한 민족 지도자로 격하시켜 위신을 깎아내렸다. 이미 조선족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사라졌기에 이를 제지할 수단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 재판에서 박웅과 본계 박씨 가문은 조선족을 이끄는 지도자로써 종족의 과격한 행태를 통제하지 않고 이를 방조하였으니 이는 결국 량 가문을 제거하고 요양왕이 되어 한족을 지배할 반역의 뜻을 품은 것이라는 죄상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면서도 조선족 전체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며 박웅의 본계 박씨와 그를 따르던 세 가문만을 숙청하였다. 이후 조선족 사회에는 왕이 없게 되어 남겨진 6가문의 대표자들이 제가회의를 통해 조선족 사회를 이끌게 되었다.

제가회의는 요양 고씨 가문이 의장을 맡으며 요양왕의 어용집단으로 전락하였다.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했던 민족의 염원이 폭력적이고 음험하게 박살난 이후 조선족 사회는 모험을 원하지 않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사회로 변화했다. 조선족 군대는 해산 당해, 단 50기의 기마병만이 허용되었지만 제가회의가 자체 세금을 걷을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이 군대 마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일남의 등장

이런 조선족 사회를 일신한 것이 정일남이었다. 정일남은 2382년 환인 정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씨는 본계 박씨 왕조를 지지하는 가문이었기에 요양왕에 의해 요양에서 숙청되었고, 조선족 사회에서 권위까지 잃게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세거지인 환인지역에서의 지도력도 거의 한계에 다다르던 실정이었다.

그가 두각을 드러낸 때는 18세였다. 2400년이던 이해 건주부의 대대적인 약탈이 있었다. 한족들의 지역은 요양왕의 군대와 한족 자경대가 수비 했으나, 조선족에게는 기병이 허가되지 않았고 한족은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기에 자연히 건주부의 약탈 목표는 그들이 되었다. 이 약탈에서 환인 정씨 가문의 남자들은 조선족을 지키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느 때와 같이 무기를 들고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 약탈은 매우 거세었고, 정씨 가문원들은 대부분 다치고 죽어 정일남 만이 남게 되었다. 정일남은 건주 기병 5기를 홀로 무력화 한 뒤 홀로 살아남았다. 건주부가 물러난 이후 정일남은 열댓개에 이르는 위패의 상주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환인들과 인근 지역의 조선족들은 모두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사진을 이뤘고 정씨의 고택은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정씨 가문의 몰살은 한족들에게도 상당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한족들도 조문을 하며 정일남을 위로했다. 그는 석달동안 장례식을 치뤄 마지막 날에는 만여명에 이르는 인원이 군집하여 정씨가문의 입관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후 정씨의 마지막 후예인 정일남에게 조선족과 한족 모두의 지원이 이어졌다. 물적인 지원도 있었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정일남은 자신이 관리할 수 없는 대부분의 토지를 조선족 소작농에게 헐값으로 넘겼고 고택의 방치된 방들에 집 없는 이들에게 세를 내 주었다. 이런 조치에 많은 조선족 청년이 자발적으로 정일남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일남은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고 말을 구해 기병대까지 양성하기 시작했다. 대의 명분은 건주부에게 조선족이 더이상 죽어나가는 것을 방조할수만은 없다는 이유였다. 환인의 촌주 위 베이펑은 그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묵인하였다. 그의 기병대는 환인을 위협하는 여러 야인들을 물리치며 인심을 얻게 되었다.

건주부의 침략으로부터 3년 째 되던 2403년 정일남은 단오날 박씨 성을 가진 한 조선족 처녀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결혼식은 정씨 가문의 부흥의 효시로 받아들여져 수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기꺼이 축하해 주었다. 이듬해 2404년 기병 100기 규모로 건주부가 침략해왔다. 이때 정일남의 50 기병대가 출진하여 3명이 죽고 8명이 다쳤으나 50기 이상의 만주기병을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소식은 금새 주변 지역으로 알려져 더 많은 조선족들이 그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요양왕 량 둥마오는 이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이민족끼리 싸워서 알아서 죽어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별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왕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조선족 사회에 알려지자, 요양왕이 그를 묵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2405년에는 그를 태왕으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때가 되자 제가회의는 정일남을 소환했다. 제가회의에서 정일남은 사사로이 병력을 육성하여 조선족 사회를 분할하여 민족을 파탄 내려는 음모를 획책 하였고 비공인 무력으로 건주부와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켜 민족에 위기를 가져왔다는 죄명을 받게 되었다.

의장 고방흥은 이 대로 판결을 내리려 하였으나 정일남은 자신이 제가회의의 참석권이 있다 주장하며 다시 회의를 열 것을 요청했다. 제가회의는 조선족의 왕을 옹립한 열 가문의 회의체이기에 환인 정씨의 대표자인 자신도 의원이라는 것이었다. 의장은 이를 거부하고자 했으나 나머지 다섯 가문이 그 의견에 동의하였다. 다섯 가문은 원래 고씨의 조선족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에 찬성했던 이들이고 한족의 어용기관이 된 이후 고씨에게 실망한 상태였다. 역시 그들을 따르는 조선족들이 상당했기에 고씨에게는 다섯 가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큰 부담이었기에, 곧바로 일곱 가문의 제가회의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거수기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다섯 가문은 조선족 사회의 새로운 희망에게 찬동하여 회의 결과 6표의 반대로 정일남의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리고 정일남은 곧바로 제가회의에 안건을 상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박향매가 본계 박씨의 마지막 후손이자 태왕의 손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여섯 가문의 찬성으로 제가회의 의장직이 태왕의 부마인 정일남에게 돌아갔다. 량 둥마오는 이 회의 결과에 당황하여 힘을 쓰려 했으나 고씨 가문이 완전히 실각한 상황에서 그가 조선족 사회에 간섭할 수단은 극히 적었다. 이후 정일남은 고통받고 있는 조선족 동포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조선족에게 허가된 기병의 수를 두배로 늘린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즉시 100기의 기병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본래 제가회의가 관리하던 기마병 50기에 정일남의 기병 50기가 더해진 수였다. 요양왕 량 둥마오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묵인하였다. 100기의 기병은 곧 조선족의 성금이 더해져 철갑을 두른 개마기병이 되었다.

경오정난

정일남은 요양 성 밖에 태왕부를 재건하고 스스로를 권지국사로 삼아 조선족의 통치체계를 확립했다. 이후 조선족의 집단거주촌을 기병대와 함께 순회하며 세금을 걷고 보호하며 지지를 얻었다. 그러자 요양왕은 정치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공격과 불리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조선족의 한족에 대한 원한을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러던 중 정일남은 2409년 랴오 쑹즈라는 장군을 만나게 되었다.

랴오 쑹즈는 요양 근교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보잘것 없었으나 쑹즈의 능력 하나 만으로 일어나 귀족이라 자칭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그의 출신 문제는 계속하여 그의 출세길을 붙잡게 되었다. 당시 요양 군문의 고위 관직은 량 가문과 왕에게 찬동하는 소수의 가문들에게만 허락되어 있었다. 그는 보여준 능력에 비해 낮은 자리를 전전하였다.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은 것은 그보다는 그의 부하들이었다. 쑹즈는 그의 부하들을 잘 다독이고 병사와 지속적인 교감을 나누며 이들을 잘 다독이는 역할로 그의 쓸모를 증명하였다. 그러나 불혹이 되던 날, 초원으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한족의 고향 중원 땅으로 들어가는 꿈이 었었다. 그가 처음 군문에 들어설 때는 그 선봉에 서고 싶었지만 지금의 요양은 량 가문의 오랜 지배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그는 늙어 죽는 날까지 이런 삶을 지속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면 죽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데 생각이 닿은 쑹즈는 하루라도 더 늙기 전에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세력을 끌어들였고, 요양군의 하급 장교와 병사 대다수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량씨의 눈 밖에 나 벼슬 길이 막힌 많은 귀족 가문 역시 이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조선족의 지도자 정일남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개마기병은 요양군에도 위협이 될 정도로 위명을 떨치고 있었고 조선족이 량 가문에 대해 가지는 원한은 유명한 것이었다.

그들의 동맹은 성공적이었다. 2410년 정월 대보름, 요양에서 상원절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에 요양왕 량 둥마오와 태자 량 차오반이 참석하였고 고관대작들과 함께 술독에 빠지듯 연회를 즐겼다. 그날 밤 랴오 쑹즈와 차별 받던 귀족들, 요양군, 그리고 조선족이 합세한 반란이 일어났다. 모든 량씨는 죽거나 나포되었고 잡힌 이들도 다음날 아침 목이 달아났다. 량 가문의 모든 이들을 죽였는데 그중에는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열 명이나 있었지만 그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량씨와 그를 따르던 가문을 제거한 뒤 요양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상원절로부터 여섯 달이 흐른 뒤, 중원절에 랴오 쑹즈는 스스로를 대요 제국의 황제로 선포하고 연호를 천의라 하였다. 혁명에 동참한 조선족은 왕을 세울 권리를 얻게 되었고 당연히 정일남을 조선족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추석날 28살의 나이에 태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태왕에 오른 이후 황제는 그를 고려왕으로 다시 봉작하여 번왕으로 삼았고, 졸본과 환인을 그의 영지로 분봉하였다. 이는 비록 번왕이지만 조선족의 왕이라는 직책이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때 졸본은 이미 건주부의 영토가 되어 있었고 환인은 정일남의 영역이었으므로 사실상 준 것은 없었다. 이후 조선족은 대요의 일원으로 자치권을 보장 받으며 차별 받지 않고 살 수 있어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이 즈음 조선족의 종교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무속이고 하나는 천도교이다. 무속은 특별한 종교가 없는 조선족들이 모두 신봉하는 것으로 졸본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본격적인 종교로 격상되었다. 천도교는 남쪽 단둥에서 유입되었는데, 천신과 한울님을 동일시하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대요의 부흥과 몰락

처음 대요가 세워질 당시 누구도 황제라는 명칭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초원에서 황제를 선포한 이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무리한 전쟁 끝에 초원의 한줄기 핏물이 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요는 달랐다. 황제는 내부 정비를 5년만에 끝마한 뒤 다롄과 요서를 1년만에 복속시켰다. 이후 북쪽의 몽골 차하르부와 호르친부와 친교하여 동맹을 삼아 즉위 6년째에는 산해관을 넘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황제는 조선족을 자신의 신민으로 여기며 태왕의 권위를 조금씩 침범하기 시작했다. 1차 하북 원정이 끝나고 이 움직임은 더욱 심해졌다. 2419년 태왕은 고려왕의 자격으로 황제를 알현하며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황제는 정일남의 고려왕 작위를 박탈하고 감옥에 가둬버렸다. 곧 개마기병을 무장 해제 시키려 하였으나 낌새를 눈치챈 조선족들에 의해 오히려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요양에서 일어난 이 혼란 속에서 정일남은 탈옥하여 개마기병과 조선족들을 이끌고 초원으로 떠나게 되었다. 폭동 진압 후 조선족들은 병사로 강제 징용되었다. 이들은 정처 없이 떠돌다 2420년 심양의 칸 원타이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때 심양에는 요 황제가 10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묵던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만연했다. 원타이는 대요 내부 사정에 정통하고 병력까지 있는 그를 용병으로 고용하였고, 제한적이지만 군대의 지휘권까지 맡겼다. 2421년 황제는 2차 하북 정벌에서 돌아오며 곧바로 심양을 공격했다. 오랜 원정으로 이미 지쳐있던 병력이지만 원타이와 그 동맹보다는 압도적인 수였고, 여차하면 북방의 차하르부와 호르친부가 그의 요청에 따라 묵던의 후방을 칠 수도 있었다. 원타이는 항복까지 고려하였으나 정일남의 강력한 주장에 항전을 결심했다.

몇번의 산발적인 국지전을 거친 끝에 심양군 2만, 대요군 5만이 성 앞 평지에서 대회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정일남은 기병과 보병을 이용한 망치와 모루 전법을 정석적으로 활용하였고, 미리 손을 써 대요군에 속한 조선족 병사들이 항명하게 하였다. 안에서부터 지휘 체계가 무너진 대요군은 기병 돌격에 대오가 무너졌고 참수 작전에 의해 수뇌부가 참살 당했다. 황제와 태자, 2황자가 몰살당한 대요군은 상장군 왕첸슈(王泉秀)가 겨우 병사를 추스려 요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군재가 없었기에 요양에 남아있던 3황자 랴오 지양은 급하게 황위 승계를 선포하고 부황에게 태조의 묘호와 시호를 내렸으며 자신의 연호를 명천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왕재 또한 아니었고 왕첸슈를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요양 일대에서 사람들을 긁어모아 5만의 군대를 다시 만들어 냈지만 대다수는 병사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이었다. 황제는 권위가 무너진 상황에서 지방에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미 상황을 파악한 점령지는 제국에서 이탈하였다.

마침내 요양 일대에서 지배력까지 흔들리게 된 황제는 길길이 날뛸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들은 정일남은 요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타이는 이를 반대하며 회군할 것을 명하였다. 이미 제국은 박살났고 요양을 정일남이 정복하게 될 경우 자신의 묵던 지배가 흔들릴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원타이의 명령은 전투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여 군대를 실망하게 하였다. 이에 정일남은 원타이의 심복들을 제거한 후 병력을 그의 것으로 온전히 삼게 되었다. 원타이의 동맹군 역시 정일남의 전술과 용병술에 감화되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지난 전투에서 흩어졌던 많은 대요 군들도 정일남의 군영에 속속 합류하였다.
이윽고 2422년 정일남의 군대가 요양성 앞에 진을 치게 되었을 때, 그의 군대는 3만에 육박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요의 황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금위대장 위안타오(元道)가 황제의 목을 치고 첸슈를 출옥시켜 협상 대표자로 삼았다. 첸슈는 정일남에게 대요의 옥새를 바치며 항복했다.

얄루 제국

정일남은 일주일간 요양에서 머물면서 조선족 동포와 해후하고 요양의 지배권을 확실히 장악했다. 그런 다음 그의 창 끝을 심양으로 돌렸다. 병사들은 기꺼이 정일남을 묵던의 새로운 칸으로 추대하여 금의환향 하고자 했다. 대경실색한 원타이는 정일남에게 사신을 보내었으나 사신의 목이 말 꼬리에 매달려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성문은 안에서 열리면서 심양은 함락되고, 정일남은 묵던의 새로운 칸이 되었다. 대요에서 이탈한 지역들은 이 소식을 들은 이후 정일남의 새로운 제국에 합류하였다. 새로운 땅을 순수하고 통치 체계를 바로 세운 이후, 2423년 정일남은 압록강변의 단동에서 원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한족과 조선족의 황제이자 몽골과 만주의 카간으로 등극했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영주들이 참석하여 제국의 일원으로써 영관을 함께하였다.

이로써 요양, 요동, 요서, 심양에 걸친 압록제국, 얄루제국이 탄생했다. 건주부는 그의 통치를 두려워하며 선제공격을 취하였으나 무참히 박살나게 되었다. 건주부는 초원의 법도에 따라 수레바퀴가 굴려질 것을 두려워 하였으나, 정일남은 먼 옛날 환인 정씨를 학살한 만주 부락에만 수레바퀴를 굴렸을 뿐 건주부를 멸족시키지는 않았다. 이후 건주연맹의 절반에 달하는 영역이 제국에 편입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과의 전쟁

압록강 이북의 수천, 수만 부락들과 도시들을 복속시킨 정일남은, 압록강 남쪽의 따뜻한 땅이자, 조선인들의 원향(源鄕) 조선반도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뜻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정일남은 조선과의 교역을 장려하였으며, 북방에 새로운 강대국이 들어섰다 하여 경계하던 조선도 이내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조선 땅에 내전이 나는 동안에도 그는 가만히 기다렸다. 내전이 끝나고, 반역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이는 물론이고, 간접적 협력자들까지 전부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피의 시대가 이어졌다. 많은 이들은 얄루의 땅으로 도망쳤는데, 일남은 이들을 통해 현지 세력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2439년 12월, 얼어붙은 압록강으로 수만 기병대가 몰려왔고, 망명자들의 정보를 통해 저항하던 요새들은 맥없이 썰려나갔다. 그럼에도 조선의 항전은 끝나지 않았고, 자신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정일남은 청천강을 경계로 삼는 휴전에 합의한다. 새로 얻은 조선의 영토는, 그의 사랑스런 셋째 아들 만기에게 주어졌다.

위태로운 촛불

정일남과 그의 원정군은 수도로 귀환했지만, 일남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아들들 간의 갈등도 점차 수면 위로 올라갔다. 첫째 요동왕 형기, 둘째 요양왕 상기, 셋째 조선왕 만기는 그들의 아버지가 당부한 형제 간의 우애와는 정반대로, 자신들 형제의 땅을 뺏고 자신이 전 제국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생각뿐이었다. 정형기는 비록 공식적인 대칸의 계승자 위치에 있기는 했으나, 대칸의 부하들과 봉신들에게 좋은 평을 듣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능력은 아버지보다 뒤떨어지면서, 성질은 더러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형제들이 그에게 위협적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제국을 분할하는 대신 자신이 절대적인 위치에 서겠다는 뜻을 부친이 살아 있음에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상기와 만기는 큰형보다는 욕심이 덜했으나,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땅을 잃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는 되었으니, 신생 제국의 미래는 아주 어두웠다. 이러한 상황을 중재해야 할 대칸은, 수십 년에 걸친 그의 위업을 뒤로 하고 잠에 빠져가고 있었으니, 일남의 죽음과 함께 제국은 내전을 피할 수 없을 터이다.

시작 상황

정일남의 아들 3형제가 상당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고, 발해왕과 심양왕 등의 다른 권세 봉신은 혼인 동맹으로 맺어진 상태다.정일남이 죽으면 정형기가 땅을 다 차지하려고 하고, 이에 반발해 다른 두 형제는 반란을 일으키는데 상황에 따라 다른 봉신들이 독립을 요구할 수 있다. 내전이 일정 기간 내로 끝나지 않으면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고, 요동 땅은 다시금 전국시대로 접어든다. 주변 세력들에게는 땅을 크게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