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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ασίλειον τῆς Ἑλλάδος
엘라다 왕국
국기 국장
표어 전통적인 표어
Ἐλευθερία ἤ Θάνατος
(자유냐 죽음이냐)
왕실 표어
Ἰσχύς μου ἡ ἀγάπη τοῦ λαοῦ
(국민들의 사랑은 왕의 권력이다.)
국가 자유의 찬가 파일:Hymn to liberty instrumental.oga
수도 아테네 북위 37° 58′ 00″ 동경 23° 43′ 00″
최대 도시 테살로키니
정치
공용어 엘라다어
군주 콘스탄티노스 2세
내각 총리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역사
독립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 독립 선언 1821년 3월 25일
 • 독립 승인 1830년 2월 3일
 • 맥마흔-사마라스 합의 1832년 8월 30일
 • 제헌절 1843년 9월 3일
 • 제2공화국 1924년 3월 25일
 • 제1차 왕정복고 1935년 11월 3일
 • 추축국 점령 1941년 4월~1944년 10월
 • 제3공화국 1953년~1959년
 • 제2차 왕정복고 1959년 8월 16일
지리
면적 131,957km2 (96 위)
내수면 비율 0.8669%
시간대 EET (UTC+2)
DST EEST (UTC+3)
인구
1959년 어림 8,541,920명
1955년 조사 8,301,387명
경제
GDP(PPP) 1960년 어림값
 • 전체 113.8억£ (23위)
 • 일인당 1,350£ (18위)
명목 1,198£ (23위)
통화 엘라다 드라크마 (Δρχ.)
기타
ISO 3166-1 300, GR, GRC
국제 전화 +30

엘라다 왕국(Kingdom of Hellada)은 남부 유로파 대륙의 발칸반도에 위치한 의원 내각제 입헌군주국이다.

역사

고대 엘라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은 미노아 문명으로, 미노아는 크레타 섬에서 기원전 2700년경부터 기원전 1450년까지 존속하였던 문명이었다. 미노아 문명은 오늘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미노아 문명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해양을 기반으로 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미노아는 기원전 1400년경 미케네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는데, 미케네 문명은 고대 엘라다의 청동기 시대라고 하며, 후기 헬라스 문화라고도 한다.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00년경까지 존속하였으며, 미케네인들은 엘라다 본토와 에게 해의 자잘한 섬들에 거주하였다. 미케네 문명 시기의 엘라다는 띄엄띄엄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에브로스, 메시니아 등이 그 예이다.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경까지 엘라다에는 도리아인의 침입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미케네 문명은 붕괴되었다. 도리아인들이 엘라다에 거주하게 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기원전 9세기 무렵에는 도시국가가 차츰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미케네 문명이 붕괴하게 된 시점에는 철기로 무장한 해양인들이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도리아인들도 역시 철제 무기로 무장하여 미케네 문명을 사실상 붕괴시켜벼렸다. 정체의 시기가 끝나자 엘라다 문명은 흑해 연안 등에 전파되었고, 암흑기를 마치고 황금기를 맞게 된다.

고대 엘라다 문명은 서구 문명의 시발점이 되었고, 로마 제국을 비롯한 유로파 전역에 전파되어 유로파의 문화혁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엘라다의 기본적인 정치 단위는 폴리스로, 세력이 큰 메시니아와 테스프로티아와 같은 폴리스는 이들 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기원전 500년경부터 448년까지 벌어진 엘라다-페르시아 전쟁은 고대 엘라다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메시니아는 이 시점 트라키아 동맹을 결성하였고, 이에 맞서 테스프로티아는 포키스 동맹을 결성하여 이로 인하여 기원전 431년 동맹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메시니아는 멸망하였고, 곧 아에로스 왕의 루산키아 왕국에 의해 정복된다.

아에로스 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에서 기원전 146년까지 기간에는 엘라다 본토의 중요성이 급락한다. 기원전 323년 메시니아와 구 트라키아 동맹국들은 루산키아 왕국에 대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파르나소스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기원전 198년에 루산키아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엘라다 지역에 대해 확고한 통제력을 가지게 된다.

기원전 168년 로마가 엘라다를 정복하였으나, 엘라다 문화는 로마인들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로마는 엘라다를 네 개의 작은 공화국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고, 정복되지 않은 엘라다의 도시국가들은 조공을 바쳐 살아나게 된다. 또한,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코르넬리우스 칙령을 선포하자 엘라다는 환영의 입장을 밝힌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노미스마를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게 되고,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이 된다. 동로마는 존속이 되어 번영한다. 동로마 제국은 엘라다 본토와 아나톨리아 및 청해 동부 연안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610년 제위에 오른 미하일 5세는 공용어를 고대 문어에서 엘라다어로 바꾸기까지 하였고, 황제의 명칭도 엘라다어로 변경하였다. 9세기 중반 엘라다인들은 엘라다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1453년, 결국 셀주크 제국의 침략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셀주크 제국이 엘라다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지식인들이 서부 유로파 대륙으로 이주했고, 평야 지대에서 살던 사람들이 산지로 숨어들어 정착하게 되는 두 유형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엘라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에도 자신들의 종교와 언어 등을 지키게 된다.

19세기까지 셀주크 제국은 엘라다를 지배하게 되는데, 엘라다인들은 1821년 3월 25일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829년까지 독립을 이루지 못하게 되나,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엘라다는 수차례 셀주크 제국과 싸우면서, 전쟁을 벌이게 된다. 또한,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인 발칸 전쟁으로 엘라다는 루산키아 지방의 남부와 이라클리오스 섬, 에게 해 제도를 병합하게 되었고, 결국 현대의 영토를 1947년에 갖추게 된다.

제1차 대전쟁에서는 엘라다는 협상국 편에 섰는데, 대전쟁에서 승리하자 협상국은 니코시아를 제외한 셀주크 제국령 청해 지역의 도서 지역을 엘라다에 할양했고, 제2차 대전쟁에서는 연합군에 가담하여 연합군의 주요 물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로마냐 왕국의 침공으로 인해 대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1941년 5월 20일 오스트마르크는 이라클리오스 섬에 공수부대를 투입, 침공하였으나 심각한 손실로 인해 이라클리오스 섬에서 철수한다. 1946년부터 1949년 사이에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인한 엘라다 내전이 일어났는데, 엘라다 공산당의 군사조직인 엘라다 인민해방군과 정부군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내전으로 당시 엘라다의 정계는 양극단으로 달리게 되었고, 엘라다는 미합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 그 이후 유로파 방위 협약기구(Europa Defense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하게 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엘라다는 급속도록 성장하게 된다. 초창기에는 마셜 계획으로 지원금과 차관을 받게 되었고, 점점 갈수록 관광업의 발달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1953년 엘라다 군부가 정변을 일으켜 중도 우파 정부를 전복하고 엘라다 군사 정권을 건립하였다. 엘라다 군사 정권은 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하여 경제 개발 정책을 선도하였으며, 이 기간동안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대기업들이 생겨났으나, 민주주의는 후퇴하였다. 1958년, 군사 독재자인 아르만도 콜로코트로니스가 에쉬르 연방과의 협상으로 차관을 받는 등의 친에쉬르 행보를 보이자, 1959년에 미합중국의 국무장관인 존 덜레스의 주도로, 굴뤽스부르크 왕정 복고를 추진하는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 정권이 종식되었다. 그에 따라 히스파니아에 망명해있던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복위했다.

그리고 1959년 11월, 그동안 비상 시국을 근거로 중단되었던 총선이 재개되었고, 망명했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전 총리가 창당한 신민주주의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 중이다.

정치

엘라다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한 입헌 군주국이다. 군주는 주로 상징적인 역할이며, 모든 권한과 실권은 총리가 가지고 있다. 엘라다의 총리직은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한 여당 대표가 맡으며, 의회에 신임 투표를 얻을 수 있다. 입법권은 300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서 행사한다. 의회에서 통과한 법령은 국왕이 반포한다. 의회 선거는 4년마다 실시되나, 특별히 중요한 국가적인 문제 때문에 내각의 제안이 있으면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게 되어 있다. 야당이 불신임 결의를 통과하려 할 때 국왕은 그 전에 의회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사법부는 3심제도로서 대법원, 고등법원, 하급법원으로 구성되며, 행정부의 위헌여부 및 행정권 남용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따로 있다.

쿠데타 이전 1950년대까지의 엘라다 정치는 자유주의 보수정당인 신민주주의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범엘라다 사회주의 운동이 양당제를 이루고 있었으나, 군부독재가 종식된 왕정복고 이후 엘라다 공산당, 대중 정교회 연대, 59동맹, 독립 엘라다인, 생태 녹색당 등의 군소 정당이 약진하였다. 현재는 신민주주의당과 59동맹이 연정을 이루어 집권하고 있다. 현 총리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이며, 신민주주의당 소속이다.

자연

엘라다는 유로파 대륙의 동남부 끝자락에 있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국가로, 북서쪽으로는 중부 유로파,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아시아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토는 본토 외에 그 주위에 있는 자잘한 섬들로 이루어지며, 그 중 가장 큰 섬은 크레타 섬이다. 엘라다는 핀도스 산맥이 국토의 북서쪽에서 중앙으로 뻗어 있는데, 핀도스 산맥은 발칸의 디나르 알프스의 연장으로, 여기서 가장 높은 미티카스 봉은 높이가 엘라다에서 가장 높은 2,917m에 이른다. 산지와 분지, 구릉 등이 혼재하는 등 복잡한 구조의 지형이다. 서부 지역에는 호수와 습지의 수가 많은 편이다. 북동부 지역에는 로도피 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 부근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있으며, 테살리아와 트라키 지역은 넓은 평야가 위치하며, 엘라다의 최대 곡창지대이다.

기후로는 세 가지 기후가 엘라다 내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지중해성 기후과 고산 기후, 그리고 온대 기후가 그 기후이다. 서부 지역은 핀도스 산맥의 영향으로 동부보다 평균적으로 침윤하며,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엔 온난 다습하고 여름엔 고온 건조한 편이다. 이는 키클라데스, 도데카니사, 크레타, 펠로폰네소스와 중부 지역이 해당이 된다. 엘라다는 산지가 많은 편이라서 겨울에는 눈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지만, 해안 지역은 기온이 온화한 편이다. 북서부 지역은 고산 기후가 지배적이다. 핀도스 산맥의 영향이 있는 아하이아 등의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온대 기후는 에비아 및 트라키 지역에 영향을 주는데, 겨울엔 춥고 다습하며 여름엔 덥고 건조한 것이 특징이다. 수도인 아테네는 지중해성 기후와 온대 기후의 사이의 기후를 보인다.

주민

인구의 대부분이 엘라다인이며, 아르메니아인과 마케도니아인, 셀주크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존재하는 형태의 민족구성을 띄고 있다. 그 외에도 극소수의 집시가 존재한다. 언어는 엘라다어인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체와 고전 엘라다어인 문어체, 두 가지의 언어가 병행되가면서 사용되고 있다. 소수민족은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나, 20세기 이후 엘라다어 사용인구와 동화되면서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폭 줄어들고 있다. 영어와 오스트마르크어, 벨포르어는 관광지와 공공기관에서 통용된다.

또한, 헌법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인정하고 있지만, 국민의 98%가 엘라다 정교를 믿고 있으며 사실상 국교와 다름없는 편이다. 유럽 통계국에 따르면, 로마 정교를 신봉하는 엘라다인은 약 3만명이며, 이민자 출신의 로마 정교 신자는 약 26만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신성 국교회와 개신교 신자도 소수가 있다. 개신교의 경우, 엘라다예수장로회의 지부가 위치해 있고, 개신교 내부적으로 교세가 강하여 엘라다 내 개신교도들의 대부분이 장로회이다. 이슬람교의 경우, 약 12만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민자 출신의 수는 약 7만명에서 18만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 그 외에도 기타 유대교도가 존재한다.

인구는 1960년을 기준으로 8,301,387명으로 엘라다 국립 통계국이 1951년 조사한 이후로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고출산이 195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고 있다. 연령대로 파악을 해보자면, 4.71%의 인구가 65세 이상이었으며, 59.12%는 15세에서 64세 사이, 37.18%의 인구가 14세 이하였다. 또한, 인구의 60% 이상이 해안 및 도시 지역에 몰려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 엘라다의 큰 도시는 아테네와 테살리노키, 피레우스, 파트라 등이 있다.

경제

엘라다는 1950년대 현재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수준의 경제 고도 성장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군사정권 시기에는 제조업과 관광업, 해운업 등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연평균 10% 성장을 하는 일도 잦았다. 엘라다는 그 이후로도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성장률 11%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엘라다의 중심 산업은 관광업, 해운업, 농업 등이다.

엘라다는 1956년 아테네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하여 올림픽이 개최되던 1956년과 1957년에 각각 13.7%와 10.7%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였고, 그동안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화폐를 전면적으로 디노미네이션하면서, 빠른 물가 안정을 이루었다. 주요산업인 해운업과 관광업의 호황과 투자 촉진으로 호황기를 맞이하였으며, 앞으로 1970년대에는 안정 성장기로 들어서며 연평균 약 5~8%의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엘라다는 해운업을 통한 제조품과 자본재, 제조품과 석유 제품, 식품과 음료, 시멘트, 화학, 의약품 등을 수출하며, 식료품과 석유 등의 자원을 수입하는 국가이다.

교육 및 매체

엘라다는 사립학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무상교육이며, 교육 체계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공과대학교 5년, 의학대학교 6년)으로 구성된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며, 대부분의 중학생들이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대신 직업학교를 들어가 기술을 배운다.

또한, 엘라다는 연금제도와 국민 의료 제도 등의 복지정책이 잘 정착된 국가이고 군사정권 이후부터는 복지정책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편이다. 연금은 기본 연금과 추가 연금, 퇴직 일시금으로 구비되며, 연금을 수혜할 수 있는 연령은 남성은 65세, 여성은 60세이다. 그 밖에도 가족수당과 산업재해 수당, 실업수당 등이 존재한다. 국민 의료 제도로는 국민건강보험이 있으며, 모든 국민에 대한 의료 혜택 제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엘라다의 라디오 방송국은 1938년에 창립되었으며 1950년 초부터 텔레비전 방영을 시작하였다. 엘라다의 신문은 수도권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이 조간신문 10종, 석간신문 11종이 있고 지방신문이 100여 종이 있다. 엘라다의 언론 매체는 자유로운 표현에 제약을 받지 않으나 개인의 명예훼손이나 종교적 신념에 대한 비하내용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제제당할 수 있다.

최근 TV 보급 열풍에 힘입어 TV를 시청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문화

엘라다는 이전부터 엘라다 문명의 발산지로, 전국적으로 문화재와 문화유적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테네에는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가 존재하며, 근교에도 역시 다수의 역사적인 유적이 있다. 그 밖에도 청해 제도와 여러 섬들도 주요 관광지이다. 또한, 음식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엘라다는 벨포르, 로마냐와 함께 서양에서 가장 음식 문화가 발달된 국가로 손꼽힌다. 주로 올리브의 주산지라는 점을 이용하여 올리브가 많은 음식에 이용이 되며, 샐러드도 발달한 편이다.

엘라다는 올림픽의 발상지이며 오랜 스포츠의 전통을 지닌 나라이다. 아테네는 1896년 하계 올림픽1956년 하계 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엘라다 축구 국가대표팀은 현재 높은 축구 열기를 기반으로 인기를 얻고 있으며, 1962 FIFA 월드컵에 유럽 예선 1조 1위로 진출을 확정지어 현재 전국민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수페르리가 엘라다는 16개 구단으로 이루어진 엘라다 최고의 프로 축구 리그이다. 이 가운데 주요 구단으로는 올림피아코스 FC, 파나시나이코스 FC, AEK 아테네 FC, PAOK FC, 아리스 테살로니키 FC가 있다.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