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 연습장 (헤르메스 역사 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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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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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나일리아는 기원전 7세기경 우수한 전술과 압도적인 물량, 철제 무기를 활용해 클레이시아 문명의 대부분을 통일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시작된 봉건제의 실패와 피정복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자원 수탈 등의 문제로 나일리아 왕조는 곧 쇠퇴기에 이르며 다시 작은 도시국가가 되었다.

이후 기원전 6세기경 고대 가이아가 이전 나일리아보다 훨씬 많은 물량과 발전된 기마 전술로 다시 문명 재통일에 성공한다. 나일리아와 달리 서부의 도시국가들에까지 진출하고, 정치적으로도 20개의 주로 통치구역을 분리해 주를 통치하는 '주주'와 주주의 통치를 감시하고 왕명을 주에 전달하는 중앙정부 소속 '감찰관'을 파견하여 효율적인 국정 관리를 시행한다. 반대로 나일리아는 남아있던 영토마저 반 이상을 뺏기며 쇠퇴해간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가이아가 이전의 왕정 체제에서 공화정 체제인 가이아 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입법부는 국민들로 구성된 민회가 맡았고 모든 공직들은 추첨으로 뽑았으며 국가의 정책들도 민회에서 투표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는 발견된 기록상 '역사상 최초의 민주 정치' 였으며, 이후 인구가 대폭 증대하면서 기원전 202년 민주정을 폐지하고 제정 체제인 가이아 제국을 건립한다.

가이아 세계는 기원전 195년 서이스톨리아 전쟁에서 승전하고, 기원전 183년 레트로폴리스 지역까지 정복하면서 가이아 제국 시기에 역대 최대 전성기를 맞는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이아 제국은 제2차 서이스톨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며 국력을 소모한 것을 기점으로 전체적인 혼란에 빠지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순차적으로 레트로폴리스, 서이스톨리아, 남서이스톨리아 지역을 조금씩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나일리아 왕국이 쇠퇴기에서 벗어나고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며 가이아 제국은 벼랑 끝까지 떨어지게 되고, 원기 475년 이스톨리아의 키오피 왕국가이아 정복을 실현하면서 1,100년 간 존속했던 가이아 세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가이아의 대를 이으려 클레이시아 동부에 동가이아 제국이라는 작은 국가가 생기긴 했지만, 이마저도 100년도 채 가지 못하고 자멸하였다.

그 이후 클레이시아의 패권은 키오피 왕국나일리아 왕국의 양분할 체제로 유지되어 간다. 키오피 왕국은 고대 폴리네시아 전체를 집어삼키고 남서·남중이스톨리아, 클레이시아 지역까지 정복하면서 가이아 제국 이후 또 하나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으며, 나일리아 왕국은 남쪽으로 조금씩 진격하다가 지금의 아케론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넓히면서 ㄴ자의 영토로 클레이시아의 패권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먼저 무너지는 쪽은 키오피 왕국이었다. 945년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에서 대패하면서 보헤미안 북부와 그레이터리시움, 센트럴 스테이트 지역까지 나일리아에게 내주게 되고,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사이 이스톨리아에선 너무나 넓은 영토로 인한 비합리적인 자원 및 세금 수탈과 계급 간 차별 문제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고, 여기에 이어 982년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으로 키오피 왕국은 아예 클레이시아 전역에서의 철수를 선언한다.

나일리아 왕국은 그 후로도 전성기를 300년 이상 유지하면서 왕국은 물론이고 나일리족 역사상 최전성기를 일궈낸다. 고대 가이아키오피 왕국의 전례를 보고 대륙 간 진격은 일절 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본토인 클레이시아를 더 발전시키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지금의 엘리시움의 18주(위클리, 나일리아까지 포함한다면 20주) 체제의 유래가 바로 나일리아 왕국이었다. 아케론을 둘러싼 노던웨스 지역(리트보아-보리스트빌-알로스키)을 신도시라고 명명하며 크게 발전시키고, 수도는 그레이터리시움으로 고정하되 행정도시를 센트럴 스테이트로 옮기며 수도 집중화 문제도 해결했다.

약 500년 간의 침묵을 깨고 지금의 아케론 지역에서 엘리스족의 독립된 왕정인 엘리시움 왕국이 독립하게 되고, 나일리아가 견제해봤으나 민병대 체제였던 엘리스족은 크게 저항하며 결국 나일리아는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엘리시움 왕국은 점차 세력을 넓혀가면서 아케론 전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나일리아 왕국이 건설하고 있던 신도시를 바탕으로 왕정은 점점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루이스 3세루이스 4세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더 발전한 중앙집권체제 전제군주국이 형성되었다. 반면 나일리아 왕국은 레트로폴리스 원정에서 크게 패배하며 팍스 나일리아 종결 후 정체기를 맞게 된다.

힘을 키운 엘리시움 왕국은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을 펼치기 시작한다. 1489년 3월 18일 나일리아 전쟁을 일으키며 1491년 4월 3일 지금의 리트보아, 보리스트빌, 알로스키 지역을 탈환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바로 4년 뒤인 1495년 6월 29일 클레이시아 전쟁을 발발시킨다. 12년 간 지속된 전쟁에서 엘리시움 왕국은 그야말로 '자이언트 킬링'을 실현하면서 노스트리아, 센터에리어, 케이커스 지역을 전부 가져오고 나일리아 왕국을 다시 나일리아 반도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렇게 나일리아 왕국은 총 500년 간 유지했던 클레이시아의 패권국 자리를 엘리시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나일리아는 다시 1,800년 전의 나일리아 반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대항해시대에 들어서며 엘리시움 왕국은 이스톨리아 국가들과도 순조로운 교류를 펼치고, 넓은 영토를 통해 주요 산업인 농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엘리시움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반면 두 차례의 전쟁으로 대륙 패권국에서 반도 하나를 겨우 점령하는 중견국이 된 나일리아 왕국은 필리피프 왕조 아래 성장은 커녕 정체만을 반복했다.

나일리아 전쟁클레이시아 전쟁을 이끈 이칼루스 왕조 이후 즉위한 패트릭 1세는 정치·경제·문화 전반부에 걸쳐 근대화를 시도하는 매우 파격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이는 엘리시움을 기술적으로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국토가 산업도시화되면서 기존 엘리시움의 주요 산업이었던 농업, 특히 자영농민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급성장했던 엘리시움의 경제도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 개혁은 패트릭 2세 시대 자영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아케론 혁명을 야기시켰고, 패트릭 2세의 퇴진 이후 자연스레 공화정 체제가 들어서게 되었다.

반면 나일리아 왕국은 정체를 거듭하던 중 리스피아누 디아블로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 제국혁명위원회10.14 나일리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왕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제국인 나일리아 제국을 건립한다. 주동자인 리스피아누 디아블로는 자신을 황제 디아블로 1세라 명명한다. 제국시대 이스톨리아 지역 일부를 침공하기도 했으나, 당시 남중이스톨리아와 남서이스톨리아 남부를 휘잡던 리스본 제국이 '거슬리는 존재' 나일리아 제국을 발견하곤 1843년 나일리아를 침공해 점령에 성공한다. (리스본 점령하 나일리아) 이 식민지 체제는 약 70년 간 이어졌고, 1912년 리스본 제국이 패망하고 나서야 나일리아는 독립에 성공, 나일리족 최초의 공화정 체제인 나일리아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엘리시움의 정치사에 대해선 엘리시움 민주당, 아케론주 같은 문서들을 참조.

제국시대 종말 이후, 1917년 엘리시움의 위클리주에서 위클리 공화국이 독립했다. 제2차 이스톨리아 전쟁으로 지쳐가던 엘리시움은 위클리의 독립을 그대로 방치한다.

이렇게 클레이시아에는 세 개의 국가, 엘리시움, 나일리아, 위클리가 남아있게 되었다.

이스톨리아사

주요국들은 볼드체.



고대

이스톨리아에서 처음으로 도시 문명이 창궐한 지역은 지금의 리스보니아, 이스톨리아 동남부 리스본족들의 리스본 문명이었으며, 이후 폴리네시아 지역의 고대 폴리네시아와 북이스톨리아 전 지역을 아우르는 고대 갈라트가 창궐하며 '이스톨리아 주요 3대 문명'이 성립되었다.

기원전 19세기부터 철 제련 기술이 신속하게 전파되었으며, 이는 14세기 고대 리스본인들이 더욱 더 발전시키며 완전한 철 제련 기술이 이스톨리아에 정착되었다. 한편 갈라트인들은 문명의 영향반경을 넓혀 동이스톨리아의 리스톤족을 정복시키며 북이스톨리아 전역에 영향을 주게 된다.

남서이스톨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로 나뉘어져있던 고대 폴리네시아는 기원전 800년경 두 개의 큰 도시국가인 브뤼스페르티아 진영으로 분열된다. 이 시기의 도시국가를 '파트리움'이라고 한다. 파트리움들은 방어를 위해 세운 성벽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지면서 형성되었으며, 처음에는 왕정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국가 자체의 생산력이 증가하고 기존의 신분층이 붕괴되어가기 시작하면서 평민들이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파트리움들이 공화정으로 넘겨가게 되었다.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던 브뤼스와 페르티아는 기원전 464년 브뤼스-페르티아 전쟁을 통해 브뤼스가 페르티아를 정복하며 폴리네시아 세계는 통일되었다.

한편, 폴리네시아 옆 아르메노족들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과 내정 분열 끝에 기원전 316년 파르탄 1세 세력에 의해 통일국가인 아르메노 왕국이 건립된다. 이 시기 남중이스톨리아 세계의 남중족들도 차차 도시국가들이 성립되기 시작한다.

압도적인 병력과 무장술로 나일리아 반도를 제외한 클레이시아 전역을 차지한 고대 가이아는 공화정 출범 이후인 기원전 195년 서이스톨리아 전쟁을 일으킨다. 비록 통일은 하였으나 남아있던 페르티아 세력과의 내전 등으로 결속력을 잃고 있던 폴리네시아는 단 2년 만에 멸망하고야 말고, 아르메노 왕국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가이아의 압도적인 병력에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189년 정복당했다.

이후 기원전 187년 제정 건립 이후에도 가이아 제국은 함대를 이끌고 스푸트니 제도베스트 제도를 시작으로 고대 갈라트의 세력권까지 침입하며 영향력을 넓혀갔다. 남서이스톨리아 지역을 가이아가 지배하며 이 지역의 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한 사이, 정복당하지 않은 남중이스톨의 남중족과 남동이스톨의 고대 리스본, 세인트루스 왕국 등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펼쳐나가며 성장을 거듭했다.

중세

223년, 남중족의 통일 국가인 키오피 왕국이 건립되었다. 키오피 왕국도 여느 강대국과 다름없이 처음에는 작은 도시국가였으나, 점차 남중족들의 다른 도시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남중이스톨리아 세계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3세기부터 가이아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며 클레이시아 세계와 남이스톨리아 세계는 가이아 제국키오피 왕국의 양분할 체제로 이어져간다.

349년 가이아 제국은 폴리네시아족과 아르메노족과의 제2차 서이스톨리아 전쟁으로 인해 남아있던 이스톨리아 지역에서 전부 철수하게 된다. 5세기 키오피 왕국은 잠시나마 독립했던 폴리네시아족과 아르메노족을 '다시' 정복하고 클레이시아 본토로 진격하여 475년 가이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킨다. 키오피 왕국은 클레이시아는 물론이고 이스톨리아에까지 패권국 자리를 쟁취한다.

그러나 수많은 민족들을 정복한 키오피 왕국은 얼마 가지 않아 수많은 민족들의 저항과 독립 투쟁을 맞게 된다. 거기에 더불어 나일리아 왕국의 두 차례의 침공으로 인하여 키오피 왕국은 클레이시아 철수 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1085년 끝내 멸망한다. 남이스톨리아는 물론이고 북이스톨리아 지역에까지 영향을 펼쳤던 초강대국 키오피 왕국의 멸망은 수많은 국가의 독립과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야기시키며 근세 이스톨리아 세계가 대항해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키오피 왕국의 멸망으로 인해 광복하거나, 독립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

근세

근세의 이스톨리아는 하나의 단어, 대항해시대로 요약할 수 있다.

근세 이스톨리아는 키오피 왕국의 멸망으로 인해 수많은 민족들이 한순간에 독립하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같은 남중족인 멘부르크 지역도 엘리트 왕국멘부르크 제1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가장 심각한 아르메노족부르비아 왕국, 북아르메노 왕국, 서남중국으로, 남중족남중 제국, 라트비아 왕국, 페로시마 왕국, 레스코피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키오피 왕국의 세력권이 아니었던 남동이스톨리아도 외침족인 로망시아족의 침입으로 로망시아 왕국, 세인트루이스 왕국, 리스본 제1제국으로 분열되었다.

로망시아 왕국은 비록 남동이스톨리아 북부를 침공하며 정착했으나 아직 내부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스톨리아 각지를 떠돌아다니다 드디어 정착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까지는 폴리네시아 왕국, 남중 제국, 리스본 제1제국 등에 밀리는 2류 국가였다는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정리가 된 후, 2류 국가에서 벗어나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 싶었던 로망시아 왕국은 (물론 세력 증폭만이 아닌 향신료나 다른 요인들도 많았다) 신대륙 개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자신이 신대륙의 위치를 알고 있다며 여러 국가에 지원 요청을 했으나 모두 거절당한 아스페리노 델피에로라는 탐험가가 있었고, 당시 로망시아의 국왕이었던 로망시아 2세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델피에로에게 지원을 해주었고, 델피에로는 1차 항해를 떠난다.

1차 항해에서 델피에로는 아스페리노 섬을 발견하고, 그 뒤에 신대륙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로망시아 2세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델피에로는 함선 15척과 1,000명의 선원들을 이끌고 아스페리노 섬을 지나, 엄청나게 큰 땅을 발견한다. 그 땅의 이름은, 웨스티시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