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의 오른손 - 1

소흥 14년(2019년) 5월 17일

1)
오늘은 예진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온 그녀는 가방을 책상 걸이에 걸어놓고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다. 나도 그녀를 따라 밖을 보았고, 등교하는 애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항상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두꺼운 노트와 필통을 꺼내고 무언가를 그렸다. 그림은 인물일 때도 있고, 때론 사물이었다가 풍경일 때도 있다. 수업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종례 시간이 다가오고서야 노트와 필통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과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이 사뭇 다른 것 같아 새롭게 느껴졌다.
뒷문이 열리고, 예진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다가간다. 옆 반의 애들은 의식인 것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 반을 찾아와 친구들을 본다. 그들은 우리 반에서, 혹은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이마다 인사하고 아는 척을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만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는 몰랐으리라.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예진은 정신이 든 사람처럼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친구들을 맞았다. 그녀의 자리가 세 명의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예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자애들의 늘어진 머리와 뒷모습만 보인다. 그림을 안 그리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예진은 “그냥 쉬고 싶다.”라고 말했다. 무리 중 한 명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자 예진도 무리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그제야 예진의 활발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무언가 안심되는 것처럼 긴장감이 풀렸다. 책상 서랍에서 제본 노트를 꺼내고 손바닥으로 겉표지를 한 번 문질렀다. 코팅된 표지의 감각이 이질적이다. 며칠 전 교문 앞에서 사람들이 나눠주던 미술 학원 홍보 공책이다. 겉표지엔 나선을 따라 비선형적으로 놓인 정물들이 그려져 있다. 장을 펴기 위해 구석을 보자 이화제국대학교 미술대학에 합격한 강다은 학생의 작품이라고 쓰여있다. 예진의 목표가 미대라고 했나. 언젠가 예진의 옆자리였을 때 친구들과 하는 대화를 살짝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때가 그때가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선뜻 내게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는데, 내가 본 그림은 흰 두건을 쓴 여인이 처량한 표정으로 자신이 안고 있는 아기를 쳐다보는 그림이었다. 나는 그 그림에서 장악력을 느꼈다. 사람을 그림에 빨려들게 하는 그런 흡입력과 장악력 말이다. 나는 그녀가 꼭 미대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빈 장을 펼치고 펜을 집었다. 고고한 그녀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한 여자의 일러스트를 그리고 싶었다. 그녀의 이미지를 캐릭터에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지만, 내가 그려낸 건 얼굴 부분의 뭉툭한 덧칠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을 조금 멀리서 보았다. 내 머릿속에 그려졌던 그림과 흰 종이에 그려낸 그림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 덧칠을 빡빡 지우기 시작했다. 검게 번지는 흑연이 그녀의 존재를 지우는 것 같았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에 한 가닥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아홉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종이를 찢어먹었다. 허겁지겁 들어 온 예진은 종이가 찢기는 소리에 내 공책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나를 빠르게 훑더니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녀가 내 그림을 보았을까. 괜스레 민망해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애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모두 휴대전화를 보거나 옆자리 아이와 떠들었다. 나는 한 장이 찢긴 공책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찢긴 흔적 탓에 공책은 붕 떠서 서랍의 공간을 차지했다. 나는 그 위에 교과서를 두어 공책을 완전히 덮었다.

이어서 담임이 앞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왔다. 애들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일제히 앞을 보았다. 땅딸막한 담임은 한 손에 노트북을 안은 채 잰걸음으로 걸었는데, 담임이 걸을 때마다 종아리까지 닿는 치마의 폭이 줄었다 늘기를 반복했다. 담임은 노트북을 내려놓더니 교탁에 서서 애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담임의 시선이 예진의 자리에서 정지했다.
“예진이가 오늘은 책상에 아무것도 없네.”
담임은 답을 원하지는 않는 것처럼 재빠르게 말하고 반장의 이름을 불렀다. 반장은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나 차렷, 선생님께 인사를 외쳤다. 애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를 말했다. 나와 예진도 그랬지만 일부 애들은 하는 둥 마는 둥 성의가 없었다. 나는 다시 북적거리는 교실 안에서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잠을 청하는 예진을 보았다. 예진은 무언가 불안하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자세를 바꿨다. 머리를 쓸어 넘기기도 하고, 왼쪽으로 얼굴을 향했다가, 오른쪽으로 돌리기도 했다. 나는 내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목제 책상의 나무 무늬를 좇으면서. 첫 교시는 한국사 시간이었다. 바깥에선 새 지저귀는 소리와 체육 수업을 받는 애들의 구령 소리가 들렸다. 키가 큰 남자 선생님은 칠판에 대충 한반도를 그리고, 역사의 배경을 설명했다. 만주가 어쩌고 하는 선생님의 설명과 바깥의 소리는 그저 백색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교과서를 펴 놓고 공책을 꺼내려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한 손으로 책을 들고 교실을 서성거리며 교과서를 읊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반대편에 큼직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나는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 예진을 보았다. 그녀는 필기하지 않고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살짝 열어 둔 창문에서 바람이 들어왔고, 커튼이 휘날렸다.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간질였고, 그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교과서에 오른손을 올려놓았다.
선생님이 자는 아이를 깨우는 사이, 나는 서랍에서 공책을 꺼냈다. 찢긴 부분이 펴지며 반만 남은 소녀의 얼굴이 지워진 흔적을 보았다. 순간 아침에 그림을 망치고 예진과 눈을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예진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 이로써 조선은 서구 국가에 열강으로 인정받고,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간 거야. 그리고 청과 조선의 군신 관계도 끝이 났다는 거지. 현수야.”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호명에 고개를 치켜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과서를 덮은 아이도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모든 아이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내 대답에 수업이 끝날지, 계속될지 결정되는 모양이었다. 예진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신이 드니? 현수야. 오늘 수업 내용이 뭐라고? 요약해 봐.”
“어…… 신사왜란이요?”
곳곳에서 애들의 탄식이 들렸다. 대부분 내 대답을 듣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나는 예진을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자 예진에게 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수업은 예상과는 다르게 일찍 끝났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찢긴 그림을 살짝 빼 보았다. 예진을 본 따 그리려 했던 그림은 이제 지우개로 지워진 처참한 흔적만 남았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을 떠올렸다.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나. 그녀를 향한 관심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 아직 아무도 모르는 데도 민망했다. 교실엔 나와 예진, 잠을 자는 애들과 여럿이 모여 이야기하는 애들이 남았다. 무엇을 해야 할까. 한숨을 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인스타그램에 접속하고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하자 전국의 ‘천예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내가 아는 예진을 검색결과 제일 상단에서 찾을 수 있었다. 프로필에 들어가자 피드에 그녀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친구가 그녀를 찍은 사진인 것 같은데,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V자를 만든 손을 내놓은 사진이었다. 나는 무심코, 아무런 생각 없이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해서 예진이 맞팔로우 버튼을 누른다면, 친하게 지내자는 암묵적인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굴려 예진을 슬쩍 보았다. 예진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진에게 갔다. 자리 앞에 서자 인기척에 천천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기……”
그녀의 몸짓에 내가 순간적으로 입 밖에서 말을 꺼냈다. 내 목소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웠다.
“오늘은 그림 안 그려?”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고, 무슨 말이라도 붙이고 싶었다.
“오늘은 그냥 하루 쉬려고.”
예진은 하품하며 책상에 다시 머리를 박았다.
“나 그림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 말을 듣자 그녀가 솔깃한 듯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시큰둥한 표정과 흥미를 느끼는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 그린 거 있어?”
그녀가 물었다.
“아니…… 그리려고 하는데 잘 안 그려져서,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너무 저돌적으로 말했나, 황급히 말을 수습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교실엔 전보다 애들이 많아졌고, 그들의 시선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뭐 그린 게 있어야 봐 주지. 점심시간까지 아무 그림 하나 그려와.”
그녀와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내가 예진의 자리를 떠나기 무섭게 그녀의 친구들이 자리로 향했다. 내게 몇 명의 남자애들이 다가왔다.
“뭐야, 갑자기?”
남자애들이 나를 둘러싸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남자애들에게서 약간의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무리 중 한 명의 귀에 걸린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나도 원래 그림 그리는 게 취미였어.”
아무렇게나 둘러댔고, 물린 반응이라 생각했는지 남자애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갈 길을 갔다. 지나가던 일행 중 한 명이 실실 웃는 표정으로 주먹을 쥐며 “화이팅.”이라고 내게 말했다. 내가 예진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진짜로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맥이 빠진 채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앉아서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하나 골몰했다. 그러다 2교시를 알리는 종이 쳤다.


소흥 9년(2014년)

2)
중학교 1학년 즈음, 턱 밑에 수염이 갓 자라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버지와 함께 동네 이마트에서 내 생애 첫 면도기를 샀던 해와 그 일이 같은 해에 일어난 기억은 확실해서, 중학교 1학년 때가 맞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애들은 새로워진 환경과 처음 보는 애들을 무척 어색해했다. 몇몇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해, 새 학기가 시작되고 반의 부산스러움은 전부 그 몇몇 애들의 몫이었다. 나는 좋은 쪽으로 애들의 주목을 받거나, 유별난 애라서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저 그런 아이였고,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려고 알게 모르게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유진이는 중학교 1학년 때 나와 같은 반 아이로,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같은 날 같은 구역의 청소 당번을 맡게 되었다. 그녀가 쓸기 담당, 내가 닦기 담당이었고, 우리는 매주 금요일마다 열심히 교실을 쓸고 닦았다. 그녀는 종종 청소가 끝나고도 집에 가지 않았는데, 교실로 친구들을 불러 음악을 틀고 그림을 그리거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처음에 그랬을 땐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5월의 첫째 주 금요일이었다. 나와 유진은 청소를 마치고 담임에게 검사를 맡았다. 담임은 유진에게 오늘도 문은 네가 잠그라는 말을 남기며 교무실로 향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담임에게 인사를 드리고 교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교실 문을 잠근 유진이 나를 불러세우며 떡볶이를 먹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처음에 드는 생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앞으로 1년을 볼 애한테 매정하게 구는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함께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갔다. 분식집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명 하나만이 내부를 비추는 분식집은 저녁이 되자 어스름했다. 천장에 달린 실링팬만이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있었고, 분식집 아줌마는 유진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살갑게 맞았다. 옆의 나를 보고 남자친구냐 묻자, 그녀는 아니라고 생색을 내며 아무렇지 않게 떡볶이 이인분을 주문했다. 그리고 내게 더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고, 물론 계산은 N빵이었다. 나는 양념 떡꼬치를 시켰다. 우리는 그나마 밝은 자리에 앉았다. 선풍기와 텔레비전이 바로 위에 있었고, 텔레비전에선 두 정치인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