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난의 역대 대통령
신센 시대
신센 막부 역대 쇼군
1대 2대 3대 4대
나가야 쿄타 오토리 아시스케 타가와 미에나리 오누치 시다요리
난세이 시대 역대 대통령
오토리 아시스케
(일본어: 大鳥足助)
파일:大鳥足助.png
나가야 쿄타의 모습
인물 정보
본명 오토리 아시스케
(大鳥足助)
주요 직책 타이난 공화국 대통령 大統領
신텐구미 지휘관 新天組
생몰연도 1833년 4월 6일 ~ 1904년 6월 11일
임기 기간 타이난 공화국2대 대통령
(1877 ~ 1882)

오토리 아시스케(일본어: 大鳥足助)는 타이난 공화국의 정치인으로서 신텐구미의 지휘관, 나가야 쿄타 정권 국무부 장관 및 2대 대통령을 지냈다. 공화 혁명 당시 나가야 쿄타와 함께 핵심 주동자로서 공화정 수립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초기 생애

1833년 4월 6일 난세이 도의 의사였던 오토리 나오스케(大鳥直輔)의 아들로써 태어났다. 1842년 신센 도의 미츠타니 학교에서 한학, 양학, 한의학 등을 수학했다. 1848년에 난세이 도 우라다케켄(裏竹縣)으로 돌아와, 당시 공화주의 사상에 거두였던 카가 아시타루의 조수로 일했다. 1851년 5월 21일 양학 수행을 위해 도카이 도로 가서 양학과 서양 의학을 배운 후, 1854년 도카이 도에서 사귄 지인들과 함께 난세이 도로 다시 돌아갔다. 카가 아시타루가 주도하던 서적 번역 등을 돕는데 힘쓰다가 조정에서 제의한 교문관(敎文官)의 직책에 올라 군사학, 공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막부의 미나미 도요노부(南豊喜) 쇼군이 "퇴양수국"(退洋守國) 정책을 추진하자, 막부의 행동에 실망한 그는 교문관 직책에서 사임한 뒤, 카가 아시타루를 통해 잠시 만났던 나가야 쿄타를 다시 만나 공화파로서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해 줄것을 요청했다. 쿄타가 이를 거절하려 하자 당시 시대적 상황과 공화주의에 필요성을 여러 번 역설하자 쿄타의 마음을 바꾸는데 성공하면서 공화파를 이끌 지도자를 찾는데 성공했다. 그는 공화파의 2인자로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

1871년, 신센 막부를 타도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반 공화정을 주장하는 이들이 조정파와 합세하여 무력 항쟁을 주도할 것을 우려하여 쿄타에게 신센의 기습(新川の奇襲)을 제의하였다. 이에 쿄타가 받아들이고서는 당시 테이쿤(帝君)이었던 야마다 사다이츠(山田定逸)를 몰아내면서 막부-조정을 타도하는데 성공, 제1대 대통령 선거에 나가야 쿄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도움을 주었다.

쿄타 정권 시기

나가야 쿄타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아직도 남아있는 잔존 반 공화파를 카이몬 전쟁(開門 戰爭)을 통해서 몰아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불안감과 불안정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준군사조직이었던 신텐구미를 창설하고서는 이를 이끌기 위한 적합자로서 아시스케를 임명했다. 신텐구미의 지휘관이었던 아시스케는 텐부토 사건(天武黨 事件)을 일으켜 반 공화파의 거두였던 카리자모 세와를 암살하면서 공화 정권의 유지에 기반을 다졌다. 이후 신텐구미의 역할을 공화국 경찰청이 담당하게 됨에 따라 쿄타는 아시스케를 국무부 장관으로 임용하였다.

국무부 장관의 오른 아시스케는 지속적으로 대미수호통상조약에 불평등한 항목이었던 일방적 최혜국 대우, 거류지 제도를 파기하고 개정하기 위하여 교섭에 나섰으며, 이전 막부의 개정 정책을 교훈 삼아 일괄타결 방식에서 개별 교섭으로 방식을 바꾸어 미국, 영국, 러시아의 조인 확약을 받고서 최혜국 항목을 폐지시킬 수 있었다.[1] 한편으로는 암약청(暗約廳)을 휘하의 정부 기관으로 설치하여 지속적인 정보 수집 및 국제 정세 파악을 기도하였다.

2대 대통령 취임

1877년, 나가야 쿄타의 5년 단임 임기를 마치고 실시된 제2대 타이난 대통령 선거에서 80%의 높은 득표율로 아시스케가 당선되었다.[2] 대통령으로 선출된 아시스케는 민본주의에 기조를 유지하고 당시 공화파 중심의 관료제를 혁파하기 위하여 엽관제(獵官制)를 실시하였다. 엽관제는 많은 폐해를 낳았던 정책이었으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여겨져 많은 비 공화파 인물들이 정계에 진출하거나 심지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했다.[3] 그러는 한편, 산업 혁명을 통한 근대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난세이 도신센 도를 연결하는 철도가 정식 개통[4]되었으며 난세이 국립 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대외적으로 타이난의 국위를 높이는데 노력하였다.

외교면에서는 강경 태세와 온건 태세를 동시에 휘잡던 인물로서 나가야 쿄타의 줄기 찬 주장으로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1860년대부터 추진되었던 오가사와라 현지민 시민권 발행 및 본토민 이주 정책을 통하여 대외적인 타이난의 관할 구역임을 과시하였다. 일본은 이에 대해 항의하였으나, 대외적으로 타이난의 영토로서 미국, 영국의 인정을 받음에 따라 일본의 노력은 무산되었다.[5] 반대로 타이난의 지속적인 영토 확보와 개척으로 사실상 미니 국가로 전락한 브루나이에 대해서는 타이난-브루나이 조약을 체결하여 타이난인들이 브루나이의 국민권을 추가로 부여받을 수 있으며, 타이난의 외교적-군사적 권한을 위임한다는 내용에 그칠 뿐, 브루나이에 깊숙히 내정 간섭은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상 멸망 직전인 술루 술탄국에게도 마찬가지.

사후와 평가

1904년 6월 11일, 정계에서의 실권을 잃게 되면서 고향이었던 우라다케켄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던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루어졌으며, 타이난 공화국의 공화 제도에 기틀을 다지고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대립을 통한 국위 신장 및 국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나가야 쿄타와 함께 고평가 받고 있다.

각주

  1. 이름으로 존재하던 거류지 제도는 이후 5대 대통령인 다케우에 미노루때 폐지되었다.
  2. 학계에서는 나가야 쿄타가 아시스케를 당선시키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시도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3. 재밌는 건 엽관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했던 다케우에 미노루는 재임 시기에 엽관제를 폐지하는 아이러니를 가져온다.
  4. 사실은 나가야 쿄타 정권 시기에 개통 작업이 시작되어 아시스케 대통령 취임 당시에 우연히 정식 개통되었다.
  5. 실제로 일본은 에도 막부 시기 부터 1675년, 1727년 두 차례에 걸쳐 섬들의 개척을 계획했으나 모두 실패한 전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