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陽 북광양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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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국 완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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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 隆毅皇帝 효종 융의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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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3년 6월 3일 | |||
남경부 숙인궁 만복전 | ||||
즉위 | 1755년 1월 29일 | |||
남경부 강덕궁 중문 | ||||
사망 | 1776년 5월 3일 (52세) | |||
남경부 강덕궁 천금전 | ||||
능묘 | 영릉(寧陵) | |||
재위 | 원고국 완디 | |||
1755년 1월 29일 ~ 1776년 5월 3일 (21년) | ||||
연호 | 와유탄(爲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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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원고 효종(元高 孝宗)은 원고국 제21대 군주이자 제15대 완디이다.
선선대부터 시작된 원고국의 최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로, 명종의 사망 이후 시작된 마코라-오아루 연맹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랴오 고원을 유린하는 등 군사적으로는 꽤 높게 평가받을 만한 황제였다.
그러나 정치적 능력은 전성기의 다른 황제들보다 현저히 떨어졌고, 자신과 가까웠던 무신들과 그 무신들이랑 친분이 있었던 문신들을 카운테에 대거 등용해 이른바 '무신 정권'이라고 불리는 기형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어냈다.[3] 이로 인해 현대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에 기대어 가까스로 전성기를 유지한 무능한 군주로 평가된다.
이러한 위태로운 전성기는 후대인 세조 때 명주 전투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또한 효종 때 형성된 무신 정권은 세조를 넘어 신종 때까지 이어졌으며 신종 치세 말기 마이시코의 난이 벌어지고 중종 때 신관파 정권이 집권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 효심이 깊어 랴오 고원의 아버지의 업적을 칭송하는 비를 새기고 정기적으로 아버지의 묘를 찾아와 직접 풀을 뽑는 등 정치적 행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이로 인해 효종이라는 묘호가 붙었다. 그의 재위시절 발표한 연호마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한다는 뜻의 와유탄(위천, 爲天)이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