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 내전
月本 內戰
Wubon Civi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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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하는 월본국군
날짜
1943년 7월 21일 ~ 1945년 9월 2일
장소
월본 월본
배경과 원인
구해민 내각의 항복에 대한 군부 과격파의 반발
결과
연합국의 승리
  • 시드니 조약 체결
  • 상징군주제 채택
  • 제2전월본제국 가담자 중 중요 인물 전범으로 처벌
교전국
연합국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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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본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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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월본제국
나치 독일
지휘관
연합국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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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민
박수태
부용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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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류 천황 (←)[1]
조의치
안장희
고노후
쿠르츠 레벤슈타인[2]
병력
연합국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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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00명
250,000명
20,000명
총합 67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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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00명
4,500명[3]
총합 704,500명
피해 규모
연합국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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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사망 약 250,000명
군인 부상 약 125,000명
민간인 사망 약 145,000명
민간인 부상 약 30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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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사망 약 285,000명
군인 부상 약 200,000명
민간인 사망 약 225,000명
민간인 부상 약 370,000명
각주
  1. 소류 국황은 군부내각을 해임하고 구해민 총리를 임명, 항복케 하였으나 이에 일부 군부 세력이 반발하여 소류 국황을 북부의 별궁에 감금하고 제2전월본제국을 참칭하였다. 이후 소류 국황은 만월을 찾아서 작전으로 구출된다.
  2. 당시 월본에 체류하고 있던 나치 독일 군사고문지원단의 단장이다. 내전 이후 제2전월본제국에 가담하여 그들을 지원하였다.
  3. 월본에 체류하고 있던 나치 독일 군사고문지원단과 대사관 및 영사관 호위병력, 기타 주둔병력을 규합해 제2전월본제국을 지원하였다.


월본 내전(月本 內戰)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월본에서 발생한 월본국과 제2전월본제국간의 전쟁이다.

1941년 월본은 대부분의 태평양 군도 및 동남아 점령지를 상실하였으며, 미군은 산암도에 상륙하여 월본 본토를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결국 국황사(소류 국황)는 1943년 7월 15일 군부내각을 전원 해임하고 연합국에 항복, 구해민 총리를 임명한다. 구해민 내각은 연합국에 항복했고, 전쟁의 중단을 명령했다. 그러나 과격파 군부세력은 이에 불복하고 소류 국황을 북부의 별궁에 감금한채로 쿠데타를 선언하였으며, 북부와 중부 일부에 제2전월본제국(통칭 제2제국)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북부와 중부에는 반전주의자가 많았기에 반발이 심했는데, 이를 군부세력들은 무자비하게 총칼로 진압했다.

제2전월본제국은 대부분의 병력과 물자, 장비를 점유하고 있던 상태였으며 우수한 병력 자원도 많았고, 나치 독일의 군사고문지원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월본국은 장비의 노후와와 병사들의 질적 문제가 겹쳐 밀리기 시작하여 1943년 9월 수도 도유를 빼앗겼으며 11월 말에는 청하부까지 밀리며 패퇴 직전까지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1943년 12월부터 전선을 가다듬고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 미국의 우수한 무기와 군사고문, 연합군의 파병 지원을 받은 월본은 다시 역습에 들어가 1944년 초부터 북진하였고, 12월에는 수도 도유를 탈환하였다. 이후 연합국의 압도적인 화력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당한 제2전월본제국은 밀리기 시작했으며 승기를 잡은 연합국과 월본은 공세를 지속해 1945년 중부 전역을 탈환하고 북부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1945년 3월부터 북양도를 최후방어선으로 삼은 제2전월본제국은 격한 저항을 하였으며, 이에 따라 북양도와 관본도의 최북단인 관북군 사이 해협에서 소모전이 발생하였고 양측간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8월 북양도에 상륙한 연합군에게 고산시와 수복시를 빼앗긴 제2전월본제국은 마침내 항복하였으며, 9월 시드니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완전히 종결된다.

이 내전으로 인하여 월본의 지역 감정과 정치 성향이 심화되었는데,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진보적이던 북부와 군국주의를 지지하고 보수적이던 남부간의 대립이 심화된 것이다. 남부 출신의 군부 인사들이 북부에 제2전월본제국을 세워 주민들을 탄압하고 군국주의를 이어갔기에 당연히 북부 주민들이 남부에 좋은 감정을 가질래야 가질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북부와 남부간의 지역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군사 정권 시절에는 남부 출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북부에 대한 차별을 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북부는 진보 성향의 정당의 텃밭이 되고 남부는 보수 성향 정당의 텃밭이 되는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 중도적이였지만 반전 여론이 많았던 중부는 남북대립을 중재하며 정치에서도 캐스팅보트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