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국 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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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무송천제
毅宗 武松天帝
武松九年御眞
武松九年御眞
홍룡의기세정승국표장문
홍룡의기세정승국표장문
지위
만화국 제 20대 천제
재위 1881년 9월 21일 ~ 1903년 8월 21일
즉위식 1881년 12월 23일
전임자 순조 화선천제
후임자 무종 요란천제
총리
이름
홍광찰 제화영패 (弘廣察 製和寧覇)
별호 무송대제(武松大帝)
연호 무송(武松)
묘호 의종(毅宗)
존호 경철건곤돈의홍륜근의광렬대천황제
(慶哲健昆敦義洪倫勤毅光烈大天皇帝)
능호 요릉(曜陵)
신상정보
출생일 1826년 2월 21일
출생지 만화국 신도 경세궁
사망일 1903년 8월 21일
사망지 만화국 경도 어응궁
능묘 요릉(曜陵)
매장지 만화국 성경부 상춘구
왕조 만화국 황조
가문 경내궁 홍씨
부친 순조 화선천제
모친 소려황후(蘇黎皇后)
배우자 수원황후(秀鴛皇后)
자녀 무종 요란천제
정조 수문천제
종교 에리스교

今至世存如何列强不及對吾邦也
이젠 세계 어떤 열강도 우리에게 대적 할 정도조차 되지 아니하니라.

 
— 무송천제찬록화(1890)


의종 무송천제(毅宗武松天帝)만화국의 제 20대 천제이다.

휘는 광찰(廣察), 어호는 제화영패(製和寧覇). 무송(武松)라는 연호는 그가 천제로서 재위했을 때 사용하였다. 만화국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명군(明君)으로 꼽힌다. 같은 섬나라인데다 치세가 겹친다는 점에서 일본의 메이지 덴노와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메이지덴노가 실제 개혁에 앞장선 자들이 이토 히로부미 등 하급 무사 출신의 신정부의 정치인들이었음에 비해, 의종은 선대천제였던 순조 화선천제의 뒤를 이어 앞장서서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전제정을 포기하는 등 살신성인적이고 능동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만화국 군주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로서, 무송대제(武松大帝)라고도 불린다.

생애

무송천제는 1826년 순조와 소려황후 사이의 외동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서부터 즉위 전 까지 계속하여 신도의 운양별궁에서 살았으며, 황태자에 책봉된 것은 20세 성년을 맞은 1847년부터였다. 성년을 맞은 이후 15년간 프로이센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은 천제 즉위 후의 무송천제의 정책의 방향성을 잡게 해주었다. 당시 만화국은 상당한 혼란의 상태로, 영국의 HMS피나포어호 사건 이후로 서양과 영본군체제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붕괴한 사회체제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여러곳에서 영본군체제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때였다.

그가 47세가 되던 1873년, 양씨정권의 복궁과 더불어 임신천환으로 천제중심정치가 복구되자, 의종의 아버지인 순조는 주변열강의 체제와 산업구조를 본따 사회전체를 개혁하는 [[변국]을 실시하게 되면서 만화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8년간의 변국이 이어지던던 중 순조 화선천제가 붕어하자, 1881년 55세의 늦은 나이에 천제로서 즉위하였으며, 이후 변국의 범위를 넓혀 본격적인 내각관료제를 실시하기에 이르고, 국무경을 비롯한 여러 정치관료들과의 협치 아래 수신자강개혁을 실시한다.

개혁군주로서

그의 치세 때 이뤄진 수신자강개혁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온 지배층의 개혁중에서도 정말 파격적이기 그지 없는데, 대표적인 예가 몇몇개 있다. 제 1차 수신자강개혁에서 만화국은 신분제의 페지를 실시하였다. 지금까지 공공연하게 있어온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황실만을 특권계층으로 남겨둠으로서, 천제의 권위를 드높임과 동시에 사회적차별의 명분이 되어온 신분제가 사라짐으로서 국민들로 하여금 지지를 얻었다.

제 2차 수신자강개혁에서는 더욱 더 파격적인 개혁이 실시되었다. 본격적인 산업혁명을 실시함과 동시에 도서지역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였으며, 습양풍제오(習洋風題吾) 정책을 실시함으로서 서양양식의 대대적인 수용을 시작하였다. 또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함으로서 확충된 교육시스템에 '구어학의무교육'을 실시함으로서 구미외교에 있어서의 인재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본의 폐번치현을 본따 기존의 반봉건적 행정구역체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이며 수직적인 지방자치를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 현과 4개의 부가 설치되었다.

1899년에 이뤄진 제3차 수신자강개혁은 정치적인 개혁과 더불어 제도개혁인데, 국무경과의 확실한 공생관계가 확립되자 영국을 본따 의회민주주의를 적극수용함으로서 제도적이며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시작하였으며, 1899년 총선거가 실시되어 보국당(補國黨)의 총재인 왕명의가 최초의 정당출신 국무경으로서 선출되었다. 수신자강운동을 통해 그의 치세 아래 만화국은 20년도 채 안되는 시기에 조선후기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 일본의 뒷꽁무니를 쫓을 정도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고, 제국주의의 강대국 후발주자로서 국제사회에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1901년이 들어서면서 의종은 치매가 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75세로 상당한 장수에 속했으나 역시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1902년에는 사실상 천제로서의 집무를 못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 당시 황태자였던 홍등롱 제섬어은에게 사실상의 섭정을 맡긴 상태였다. 이후 1903년 치매로 인해 붕어하면서 무송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개인

무송천제는 역대 천제 중 최초로 일부일처제를 실시한 황제이다. 후궁등의 일부다처제가 당연시 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황후인 수원황후만을 평생 바라보면서 살아왔기로 유명하다. 즉위 후 4년이 지나고 1885년 수원황후가 훙거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궁이나 새 황후를 들이지 않고 남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또한 즉위식과 1900년대의 어진 이외의 사진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당시 군주의 모습을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 동아시아의 풍조도 한몫 하지만, 무송천제 본인이 카메라 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자신의 영상이나 사진등을 남기는데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종에게 섭정을 맡기기 시작한 1900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진을 찍었었는데, 이 때 찍은 사진은 유일무이하면서도 가장 널리 쓰이는 무송천제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만화국의 1환, 5환 동전에서도 이러한 1900년 어진의 모습이 박혀있다.

뒤를 따르는 무종에 비해, 몸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의 치세인 무송시대는 은근 짧은 편에 속하나, 무송천제의 즉위가 그의 나이 55세의 고령 때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긴 편이다. 안타깝게도 황후인 수원황후는 몸이 안좋아 1885년에 4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이러한 병약체질은 무송천제에게 유전되었다. 무송천제는 60세에 붕어하였는데, 1919년 붕어 전 까지 심한 천식에 시달리어 경세궁 밖을 나가지 못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궁내원의 기록에 따르면 검술에 약하고 궁술에 능하다는 기록이 있다.

평가

그는 2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재위를 하였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과 개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에도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점 덕분에 만화국은 짧은기간동안 과거 영본군 치국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딛고 열강의 후발주자로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으며, 덕분에 그의 붕어 후 그에 대한 평가는 전 만화적으로 열광적이었다. 이러한 그에 대한 만화국민의 경애심은 호국전쟁 종전 이후에도 이어져 장조 오행천제와 함께 둘이 묶여 근현대사의 대제로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