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청저우 직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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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청저우
직할시
중국어: 瀛城州直轄市
민난어: 瀛城州直轄市
하카어: 瀛城州直轄市
粵語: 瀛城州直轄市
우어: 瀛城州直轄市
언어 오류(jliu): 瀛城州直轄市
일본어: 瀛城州直轄市
오키나와어: 瀛城州直轄市
영어: Yingchengjhou Metropolitan City
프랑스어: Ville métropolitaine de Yingchengjhou
독일어: Metropolstadt Yingchengjhou
백천황화기(白天黃花旗).png
시기
별명 海上之麗都(바다 위의 어여쁜 도시)
행정
나라 잉청저우 제도 연방 잉청저우 제도 연방
행정구역 11구
시청소재지 잉청저우 직할시 중정구 징제다루 408
시장 허위칭
지역어 잉청저우어, 광둥어, 대만민난어, 하카어, 오월어
역사
설립 1887년
인구
인구 10,598,442 명 (2020년)
인구밀도 4804.01 명/㎢
광역인구 14,560,323 명
지리
면적 2202 ㎢
해발 15 m
기타
시간대 YWST (UTC+8)
지역번호 +83 01

잉청저우 직할시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북서단 지역에 있는, 소속 도서 중에서 가장 큰 잉청저우 섬의 북단과 잉청저우 섬의 중서쪽에 있는 잉청저우국제공항인공섬에 위치한 도시이다. 잉청저우 제도 연방 인구의 2/3이 사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명실상부한 최대 도시이다.

지리

  • 편의상 신잉청현과 같이 서술한다.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신잉청현의 향진 지역과 옛 피란 섬에 해당하는 잉청저우 직할시 지역(중, 둥, 난, 중, 베이, 시, 기타요시, 주오, 중정, 주산, 아키나카 10개구)을 제한 매립지와 간척지(잉청저우 직할시 완잉구, 신잉청현 장이 시, 신자이 시, 리샤오 시, 저우제 시)가 잉청저우 섬의 30%, 옛 피란 섬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북잉청 평야가 약 30% 하여 잉청저우 섬은 약 60%가 평야(매립지/간척지+옛 피란 섬을 합친 잉청저우 대평원)로서, 현재의 신잉청현 내륙에만 산이 좀 있는 하나의 평야 위주의 섬으로 존재한다. 그 있다는 산은 남잉청산지가 있는데, 400만년 전에 판과 판이 충돌하여 화산활동으로 생성되었다. 그러나 심해였던 점으로 인해 2천 미터 가까이까지만 올라가고, 이마저도 침식 작용과 여러 차례의 화산 붕괴(240만년 전, 185만년 전, 117만년 전, 72만년 전, 44만년 전, 13만년 전, 6만년 전, 기원전 4000년, 기원후 39년, 782년, 1322년, 1983년)과 잇따른 수많은 화산의 화산활동 중지로 인해 주양산(珠陽山), 밍시산(明溪山), 구서우산(孤壽山) 등의 몇몇 활화산을 제외하고는 분화구가 붕괴하고 이에 침식 작용까지 더해져 일반적인 산같이 남아 현재의 1200m~1600m의 산지가 되었다. 북태평양과 남중국해의 경계에 있고, 위치 상 아열대기후인 점까지 작용하여 비가 많이 내리며,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자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심지어 동쪽 아키나카 구와 신잉청현 저우제 시 전체와 신잉청현 잉청저우 섬 남부 부분, 기타요시구 동부, 신잉청현 장이 시 남동부는 이들이 접해있는 바다가 잉청저우 섬 윗부분에서 바로 앞바다가 바로 난카이 트로프서 이어지는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의 경계로 인해 형성되는 해구이고, 잉청허와 남방 제도들을 통해 난 대단층(잉청저우 거대단층 또는 영란중(瀛蘭重) 대단층)이 형성되어 지진 다발 지역으로서 유명하다. 이는 잉청저우 지역의 내진설계 고강도화 의무-강제화에 영향을 주었다. 신잉청현 도서지역, 즉 바시 제도의 경우에는 전부 판 경계 근처에다 대단층에 위치한 탓에 잉청저우 제도에서 가장 생성이 늦었으며, 잉청저우 제도 서남부의 길게 늘여져 놓인 5개 섬들(바시제도(巴士諸島)와 난링다오(藍陵島))의 경우에도 잉청저우 섬에서 시작되는 열점 선을 따라 300만년 전을 전후하여 격렬한 화산 분출을 통해 바다에서 솟아 나왔으며, 대부분 최고 해발고도가 1000m를 넘지 못한다. 그래도 난링다오에는 칼라울릿 산이라는 해발고도 1092m의 활화산이 존재한다.

한편, 잉청저우와 신잉청현의 유일한 강이자 잉청저우 섬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잉청허(瀛城河)는 약 190Km의 길이로 신잉청현을 굽이치다 잉청저우 시내와 그 근교 위성도시들 지역의 직선화된 수로로 흘러들어 둥구(東區)와 기타요시구(北吉區)의 육상 경계의 끝인 하구에서 동중국해(잉청북해)로 흐른다. 잉청허는 본래 짧았으나, 간척사업의 결과로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게 흐르게 되었고, 잉청저우 시내 구간과 그 근교 위성도시들 구간은 1915년, 1949년, 1986년 3차례에 걸쳐 치수사업에 의해 직선화된 결과로, 현재와 같이 흐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잉청저우의 고질병인 물난리(홍수)가 사라졌으나, 잉청허의 길이가 20~30Km 가량 단축되었으며, 환경파괴가 수반되었다. 그 외 큰 강은 난링다오(남릉도)의 산 카를로 강과 펀완허(分灣河)가 있다.

그 외에도 잉청저우 국제공항을 위성도시의 개발 진행에 따라 논밭, 공공시설로 환원하기 위하여 이전하기 위해 잉청저우 섬 중서부이자 시역 남서부 연안에 만든 잉청저우국제공항인공섬은 그 특성에 맞게 해발 20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교통

화루선이 도시의 북부를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구이서우역, 시잉청저우역, 잉청저우역 등의 주요 역을 필두로 광역전철역까지 포함한 14개 역이 존재하고, 화루선에서 분기하는 잉추선 등의 전국적인 간선 철도 노선이 잉청저우 광역권 일대에서 광역전철을 운용하면서, 이러한 간선철도 노선의 광역전철 구간이 1차적인 시민의 발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러한 간선철도들이 타 지역 및 타국과 잉청저우 제도 연방 및 잉청저우 직할시의 관문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으며, 방대한 잉청저우 직할시의 면적에 사는 1060만 시민의 시내교통을 수용하기 위해 잉청저우 첩운을 11개 노선 759.6km의 방대한 규모로 시 당국에서 운용하는 상태에서 사설철도인 잉톄가 4개 노선을 운용, 그로서 2차적인 시민의 발 역할을 담당 중에 있다. 그러나, 철도 교통만으로는 최대한의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는 있어도, 이를 감당할 인프라에 대해서는 한계가 존재하기에, 잉청저우 직할시 시내버스가 249개 노선으로 운용되고 있다.

역사

  • 편의상 신잉청현 잉청저우 섬 부분과 같이 서술한다.

16세기 이전의 잉청저우 직할시의 역사에는 구석기시대에 대만섬보다 늦은 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기원전 2500년 즈음에 현재의 잉청저우 원주민의 조상이 되는 원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넘어왔다. 그들은 2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잉청저우 지역의 고립된 환경에 놓여있었고, 그로 인해서 대만 원주민과 다른 민족인 잉청저우 원주민으로 분화하였다. 한편으로, 《삼국지(三國志)》에서 오(吳)나라가 종종 이주(夷洲)(현재의 중화민국 대만성, 잉청저우 섬)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며, 《수서(隋書)》에는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 현 또는 현재의 중화민국 타이완성 또는 현재의 잉청저우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젠안(建安)군(현재의 중화민국 푸젠성(福建省))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 라 하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590년에는,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 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르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타이완 섬을 보고 "포르투갈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란 뜻)라고 서양식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타이완 성을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 때 포르투갈인 등의 여러 서양인들이 타이완 근처의 잉청저우의 두 섬까지 도달하여 탐험하면서, 아니면 중국인들에게 소문을 들으면서 현재의 지명인 "영성주", 즉 잉청저우가 알려졌다. 물론 이때부터 영성주를 瀛城州와 贏城州로 혼용해서 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서구에서는 잉청을 각각의(두개의 각) 표기인 赢城 혹은 瀛城을 음차한 "뷰티풀 캐슬"이나, "씨 캐슬" 이라고도 가끔씩 불리고는 한다. 하지만 현재 영성주, 그러니까 잉청저우의 표기는 瀛城州이다.

한편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산지지역에서는 타이완의 다두왕국과 같은 연합왕국인 세판 왕국이 성립했다가 이것이 중앙집권화를 거치면서 중세 왕조같이 되었다. 세판 왕국은 언어 통합 작업을 벌여 언어를 통합하고, 각 부족간의 통혼을 장려해 잉청저우 원주민들을 민족화된 여러 부족에서 한 민족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 17세기 명나라 대(明代) 말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타이완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타이완 이주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잉청저우를 알게 된 일부 한족들이 넘어갈 대로 잉청저우로 넘어가면서 현재의 시내에 해당하는 잉청저우 2개 섬 중 비교적 평평한 북쪽 섬, 피란 섬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본성인이라는 대만과 잉청저우의 중국인의 구분 분류가 탄생하게 되었다. 원래 잉청저우 섬은 현재의 신잉청현 신잉청군에 해당하는 땅만 물 위로 솟아있고, 지금의 시내에는, 역사설정에 계속 "북쪽의 섬"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하나의 평평한 큰 섬(피란 섬)이 있었는데 그 두 섬 사이의 바다를 강화도처럼 수백년 걸쳐 간척해 나가면서 1893년에 와서야 완전히 메꿈과 동시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다. 첫 간척은 1584년인데, 잉청저우 섬에 있었던 당시 세판 왕국의 백성들이었던 잉청저우 원주민들이 잉청저우 섬의 산지의 비율이 너무 높음으로 인해서 농지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간척작업에는 잉청허에 대한 준설 및 치수 공사에서 나오는 흙을 썼다고 한다. 그 평평한 섬에서는 1618년에서야 당시 이주해 정착한 한족에 의해 간척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1624년, 펑후 제도를 점거하던 네덜란드(和蘭) 상인과 명(明)나라 군대는 네덜란드이 동인도회사가 펑후 제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이완 섬의 서남부(현재의 중화민국의 타이난 시 일대)에 상업지구를 건립하는 데에 합의하였고, 네덜란드는 2차례 탐험을 통하여 잉청저우 섬 남단에 추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1626년~1642년에는 에스파냐인들이 타이완 섬에 들어와 타이완 섬 북부의 지룽(鷄龍, 훗날 한자명 基隆)과 서랴오섬(社寮島, 사료도, 현재의 허핑(和平) 섬 일대)를 차지하고, 산살바도르 성을 세웠다. 에스파냐는 이후에 점령지를 하쯔난(蛤仔難, 합자난. 현재의 중화민국의 이란(宜蘭) 현), 후웨이(현재의 중화민국의 신베이 시의 단수이 구) 까지 넓혔고 이 지역에 산토도밍고 성을 세웠으며, 이때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법을 썼지만 이제 막 한족들이 이주하는 북쪽의 섬에 식민지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진출한 네덜란드 세력과 에스파냐 세력 사이의 경쟁과 알력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642년, 네덜란드인들은 에스파냐의 타이완과 잉청저우 내의 점령지를 공격하여 빼앗고 에스파냐인들을 타이완 밖으로 몰아냈고, 이때 당시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를 점령해 식민지배한 목적은 중국, 한국,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우세를 점하고,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있는 식민지를 거점으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의 타이완 섬 및 잉청저우 지역 일부 통치는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1661년에 정성공은 타이완 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였고, 1662.2.1에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 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 섬의 모든 권리 이양, 그 뿐만 아니라 잉청저우 지역의 지배권까지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 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잉청저우에는 정씨왕국령과 세판 왕국이 공존하였다.

그 뒤인 1662.2.1 이후로 정성공은 타이완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자로 东都, 중국어 정체자로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온 푸젠 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고, 잉청저우에서 세판 왕국을 정복하여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662.6.23에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정경이 그 뒤를 이었으며, 1664년에 정경은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고, 정성공의 반청(反清)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三藩之亂)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 성의 일부를 공격하여 장악하고서는 세판 왕국까지 멸망시켜 점령하는 데에 성공(1675.3.29)했으나, 결국 1683년에 정경이 죽으면서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타이완 통치는 21년 만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21년동안 이어진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타이완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그 뒤 청나라 푸젠성의 일부로 존속하다가, 1891년 독일제국의 탐험선이 잉청저우 섬의 중부로 들어가서 탐험하던 도중, 당시 중국계(내성인) 및 잉청저우인(잉청저우 원주민)과 싸움이 붙으면서, 청나라가 이를 해결하느라 잉청처우 섬 자체를 할양해줘야 했고, 그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독일제국령 잉청저우 섬으로 존재하였다. 이 당시 독일어를 비롯한 독일 문화가 대규모로 유입되었고, 철근구조 등의 근대식 건축구조와 신문을 비롯한 근대 문물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제정 일본이 산동반도와 남양군도라 불리우던 미크로네시아 일대를 점령한 이후 잉청저우로의 남진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그 때 영국과 프랑스의 지속적인 병력 파병 요청의 거부를 이유로 들어 영국과 프랑스의 밀실 합의로 인해 제정 일본에서 잉청저우 섬을 공략하기 1주일 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일대에서 군을 차출해 잉청저우 섬으로 진격하면서 간발의 차이로 프랑스가 잉청저우 섬을 점령했으며, 결국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패망하고 그 결과인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국제연맹이 설립될 때에, 국제연맹에서 잉청저우 섬을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지정했으며, 1920년에는 중화민국과 잉청저우에서 별도의 합의를 맺어서 50년 조차 계약을 맺고, 조계지로서의 수명이 다하는 1970년 이후에 중화민국으로의 반환 혹은 잉청저우 섬 일대를 영토로 하는 독자적 독립국가 수립 둘 중 하나를 최종적인 목표로서, 이를 이루는 과정으로 인식되게금 자력갱생을 위한 프랑스의 통치가 이뤄졌으며, 이는 식민통치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수준의 높은 자치로 이행되어 국제연맹이 당초에 의도한 위임통치의 모범이 되었고, 기존의 유입되었던 독일어, 독일 문화의 보존이 보장됨과 함께, 프랑스어, 프랑스 문화도 적극적으로 유입되었으며, 반체제 인사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유입되고, 제정 일본의 통치를 받던 류큐인들이 먹고 살고자, 언어, 부 등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대거 이주해왔다.

그러나,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잉청저우 섬을 고작 이권 챙기는 걸로 요청을 무시한 댓가랍시고[1]프랑스에게 뺏긴 한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는 결국 일제가 군국주의의 길을 밟으며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에 포함되며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일제는 홍콩, 마카오를 점령하기 2일 전 잉청저우 섬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며,결국 1941년 잉청저우 섬을 점령한 일제는 잉청저우를 군수기지로 만들어 탈탈 털어서 전쟁을 진행하였고, 학살과 강간, 성노예 징발, 생활물자 강제징발 등의 잔학 행위를 시도했으나, 결국 이는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항일 저항운동을 역으로 불러일으켰다. 말 그대로 수탈과 저항의 연속이었으며, 레지스탕스는 전술과 병력의 한계 상, 잉청저우 섬에서 비교적 산이 있던, 남부 산간지역을 해방하고 이를 중추로 활동하였다. 상기한 잔악행위로 탄생한 '암흑의 피(暗黑之血)' 역시 4만명 정도 탄생하였다.[2][3] 그러면서 잉청저우 시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의 중심지가 되어 철저히 파괴당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잉청저우 일대에 2차로 일본인이 대거 이주해왔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 등을 경험한 잉청저우는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중화민국이 잉청저우 섬을 영토로 수복 할 것을, 미국이 바시 제도와 이스트코스트를 수복하고, 바시 제도를 이스트코스트에 연합시킬 것을 확약받는 등, 연합국 간의 협의에 따라 1945.10.25일에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한 직후, 그 다음날인 1945년 10월 26일에서야 일제 잉청저우 점령방면군의 항복을 받고, 프랑스와 저우산 협정을 맺고, 중화민국이 잉청저우를 접수한다. 그 후 국민당의 국공내전 와중에 화북에서 밀리는 과정에서 광둥, 산둥, 저장-장쑤-상하이 출신의 잉청저우 지역 내의 외성인이 400만의 민간인과 곳곳에서 탈출에 성공한 패잔병 100만명이 잉청저우 일대로 몰려들며, 잉청저우의 일본인들은 집단으로 귀환을 거부하며 집단으로 본성인으로 위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벌어진 2.28 항쟁은 대만을 넘어 잉청저우로 확산,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결국 외성인과 본성인으로 분류되던 잉청저우 선주한족-신 본성인이라고 불리던 본성인 위장 일본인-잉청저우 원주민 간의 갈등이 깊어져 갔으며, 이는 수차례 열린 대규모의 시민들의 독립 봉기로 이어진다. 본래 잉청저우섬은 대만과 역사적 궤적을 같이 했던 하나의 지역이었으나, 식민지배를 대만은 일본에게 받았으나, 잉청저우 섬은 독일 식민지를 거쳐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식민지배를 받았었고, 그에 따라 미세한 역사적 차이,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했으며, 미세한 역사적 차이는 더 커졌다. 결국 이스트코스트의 독립 여론과 맞물려 연방화 독립 방안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지지가 급증하는 등의 독립 여론의 강화 및 격화는 계속되었고, 잉청저우는 중화민국의 골칫덩이가 되어갔다. 이미 이스트코스트와 하나의 도시권으로 기능하고 있었기에,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국 1954년부터 계속된 미국-중화민국-잉청저우-이스트코스트 4자 대표 간 독립협상이 1956년 7월까지 이어졌으며, 1956년 7월 20일, 단수이 협정으로 잉청저우 섬은 1945년 중화민국의 잉청저우 섬 접수 이후 힘겨운 독립의 길[4]을 걸은 지 11년 만에 독립하였다.

그와 동시에, 앞서 언급한 이스트코스트와의 유기적 권역이 도시권을 넘어 국가 간의 통합을 조율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국 이스트코스트와의 연방화는 불가피했으며, 결국 제헌임시의회를 선출하여 연방 수립을 결의하고, 헌법 제정 및 선거를 통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수립한다. 그 과정에서 본성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이에 대비한 법률을 제정해 그간의 탄압을 중지하고 인종적인 차별과 탄압을 절대로 못 하도록 막았다. 이를 기점으로 잉청저우의 인종 차별/탄압과 그 잔재는 1960년대 초반까지 급속도로 사장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잉청저우 현에서 잉청저우 시, 저우산 진, 베이지 진, 쉬서우 진, 잉서우 진, 슐수이광 향만 남고 웨이팡 현과 시낭 현이 1963년에 분할된다. 이유는 잉청저우 시와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인구로 인한 잉청저우 현의 인구 과다로 인한 생활권 분절 문제로 인해 헌법에 명시된 절차의 실시가 불가피 해서이며, 그런 분리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잉청저우현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급속히 증가하면서 잉청저우 시의 인구가 1977년 직할시 승격기준선인 100만을 넘었으며, 잉청저우 3개 현의 인구는 1980년 1000만을 넘어선다. 결국 잉청저우 시가 1982년 주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으로 직할시로 승격하여 잉청저우 현에서 분리되었으며,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도 이전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식량안보의 안정적 확보 목적도 갖출 겸 하여, 인공섬 해청위(海淸衛, 하이칭위, 카이세이에이)를 만들어, 이를 1991년 완공 후 해청위 섬 전체를 통째로 연방특별구로 만들어 수도를 이로 옮기었으나, 오히려 국토의 균형 성장의 고도성장화만 촉진하여, 성장세는 좀처럼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1995년 당시 잉청저우 시의 인구는 583만 명에 다다렀다.

하지만, 잉청저우는 과포화상태에 치달았고, 잉청저우의 광역권은 1995년 기준 약 1200만의 인구를 가졌을 정도로 어마어마 하였고, 결국 1990년 3월에 잉청저우현 전역이 주민 투표를 통해 잉청저우 시에 편입되는 식으로 잉청저우 시와 통합했으며, 1998년 9월에는 또 주민투표를 통해 웨이팡 현의 허슝리(和雄里) 시, 우이칭(唔依清) 시, 웨이팡 시와 시낭 현 완잉(宛英) 시, 아키나카(秋中) 진이 잉청저우 직할시로 편입되었고, 이도 또 주민투표로 웨이팡 현(스거우 진, 허량(河浪) 진, 시커우(司寇)진, 샤오왕 시, 민셩 진, 시왕 진, 왕칭 시, 양누 진, 틴샤 진, 나부샤 진, 양칭 향, 우싱 향)과 시낭 현(시낭 시, 장이 시[5], 저우제 진, 원잉(溫迎)진, 우샨 진, 스기 향, 세이란 향, 펀완 진, 마카타오 향, 망알로반 진, 비피비피 향, 카시얏 향, 먄피바티 향, 웨이칭 향, 커칭 향, 이린 향, 잉펑 향, 타갈로그 향, 부키드 향, 비사야 향, 이바탄 향, 아피얀 향, 이피만탄 향, 칼리마타 향, 마킬로스 향, 제네랄핑카밍테 향, 탄카만 향, 낭 마르테스 향, 마카타요 향, 낭 이스토치나스 향, 오리엔테 향, 난다시 향) 각 2개 현의 잔존부를 합쳐 신잉청현을 만들어냈다.

그 뒤엔 잉청저우 직할시가 1999년 7백만을 돌파하였으며,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인구가 1천만 선에서 소폭 느는 등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현재는 그 작은 1만 제곱킬로미터의 연방국가의 최대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인구에 비해 균형잡힌 녹지 비율을 지니고 있으나, 교통문제가 존재하여, 지하철을 10호선까지 개통했음에도 사설철도, 광역전철까지 혼잡도 200%대를 기록하고, 도시 곳곳이 출퇴근 시엔 버스의 가축수송으로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정도로 심각하다. 신잉청현에 속하는 잉청저우섬 남단의 경우 잉청저우 직할시 근교에 위치한 12개 현할시의 사회적 인구 증가의 지속이 있었고, 그 외는 이촌향도 등이 겹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으나, 위성도시들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기에, 상기한 행정구역 편입으로 인구 성장세가 꺾이나 싶었으나, 1990년데 중반에 증가 폭이 급격히 가팔라졌으며, 2018년에는 약 885만까지 회복하였다.

문화

전통문화와 대중문화

류큐문화, 일본문화 그리고 타이완-푸젠-광둥으로 대표되는 중국 남방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역사로 인해 전통문화에서는 그 셋의 전통문화가 혼재되어 나타나거나 퓨전된 문화가 나타난다. 다다미방(육첩방)에 대만식 도교 제단이나 대만식 불단이 놓여있다던가, 우육면에 중국당면 대신에 라멘 생면이나 소바 면을 넣어먹는 문화처럼 말이다. 그 때문인 지, 대중문화에서는 이런 역사 속에서 J-POP과 대만 대중음악, 일본과 대만의 대중문화 등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며, 서브컬쳐가 강세를 나타낸다. 특히, 중국계가 70%를 넘는 잉청저우 특성 상, 중화권 음악시장에서 대만 다음으로 큰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0.2%를 차지하는 한국계와 그 외 소수의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한류가 영향을 끼친다. 써닉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장후이메이(阿妹)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장국영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BTS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모무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AKB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트와이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뽕모창도 있고 심영물 즐기는 얘들도 있고 덕후분들도 있고 그냥 다 섞여있다. ㄹㅇ ㄷㄷ

언론

중화권과 일본의 신문의 진출이 1880년대부터 지금까지 빈번하게 존재하고 있다. 특히 방송의 경우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절(잉청저우 섬) 및 2차대전 이전 미국령(이스트코스트-신잉청현 도서지역) 시절 개국하였고, 연방 성립과 함께 ARY로 정리된 공영방송 라디오와 연방정부에서 1957년 개국하고, 공영방송 정리 과정에서 ARY로 흡수된 공영 텔레비전 방송이 있음에도, 1960년대부터 중구난방 우후죽순으로 중화민국의 방송국들, 홍콩의 민간 방송국들, 일본 오키나와 지역 민간 방송국들이 편의를 위해 세워버린 중계소를 2014년에 합동송신소를 세워 송신소와 중계소들을 통폐합해 그 방송국들의 국외 지상파 송신소 형식으로 송신하고 있으며, 합동송신소에서 공영 텔레비전 방송도 송신 중이다.[6] 하지만, 케이블 SO의 경우에는 2009년에서야 겨우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케이블이 대만에 비해 늦게 활성화 된 것이다. [7]

그리고 잉청저우의 독자적 신문인 에이세이슈민포, 에이세이신문, 잉청저우일보, 잉청저우시보는 빈과일보가 잉청저우에 상륙한 2012년 이후로 죄다 빈과일보식 과다 멋꾸미기(...)에 물들어버렸다. 결국 신문도 타이완화 되어버렸다. 모든 일의 원흉은 빈과일보다. 그런데 그 빈과일보도 정작 홍콩에서 넘어온거다.

다문화에 기초한 도시문화

본래 잉청저우에는 다수의 중국인, 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그리고 잉청저우 원주민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다문화사회였으나, 2차대전 종전 이후에 중화민국의 국민정부는 중화문화를 제한 나머지를 탄압하고 강제동화를 시도했으나, 독립으로 무위로 돌아갔다.1990년대 잉청저우 원주민 문화의 재부흥이 일어나고, 국제도시화에 힘입어 일본인과 한국인의 문화를 재부흥 시키었고, 일본인 중 류큐인들은 국민정부시기 숨겨져 보존하던 류큐문화도 부흥하게 되었고, 다문화에 기초하여 도시 문화를 일구었는데, 수많은 전통문화와 대중문화가 3천 4백 제곱킬로미터 남짓한 도시국가에 펼쳐지고 있다. 이를 이용하여 잉청저우 다문화축제를 10월 중순 즈음에 연다. 이 축제는 가끔씩 대한민국의 이태원지구촌축제와 연계되기도 한다.(물론 가상의 설정이다. 실제로 알아들으면 모 위키 대문 안내에 나온 것처럼 심히 골룸하다.(...))

정치

틀:잉청저우 시의회 의석 틀:잉청저우 직할시 시장 도시 면적이 워낙에 넓다 보니, 중앙부인 중정구와 주오구의 경우에는 고위층의 거주가 두드러지는 특성으로 인해 자유당과 국민당의 표가 갈리며, 그 외 원잉청저우라고 불리는, 잉청저우 직할시에서도 서부인 둥,시,난,베이,중 5개 구는 진보 성향이 짙어서 주로 진보당 내지는 민주당을 지지하나, 자유당 혹은 국민당 지지층도 일정부분 존재한다. 남부에서도 완잉구의 경우에는 보수당과 진보당과 자유당/민주당이 선거때마다 1:1:1로 갈리는 곳이다. 일본계나 류큐인이 주로 거주하나, 주택/대학가지역의 특성을 띄는 기타요시구, 아키나카구의 경우 국가 분위기부터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류큐 공화국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진보당이나 자유당 혹은 민주당을 주로 지지한다. 한국계가 밀집한 주산구는... 그냥 국민당 아니면 진보당이다.

헌법

행정구역

자치구 한자명 인구 최대다수민족 비고
시구 西區 1,044,409 한족-본성인-복로인
베이구 北區 1,192,226 한족-본성인-객가인
둥구 東區 1,060,315 한족-본성인-복로인
중구 中區 1,055,002 한족-본성인-객가인
난구 南區 1,173,229 한족-본성인-복로인
중정구 中正區 469,307 한족-외성인-오월인 친 중화민국 성향의 구명민 전 연방총통의 최측근이었던 궉쉥터이[8]가 잉청저우 시장으로서 재임하면서 1990년 잉청저우의 1차 대확장을 이끌어 낸 직후 실시한 행정 개편 당시에 투표를 통해 중구 몇개의 동부 리를 떼어 내어, 동시에 편입지 중에서 옛 잉서우 진의 남부 돌출부와 합치면서 이 구를 만들도록 할 때, 시민들에게 과도한 금액의 선물을 통한 회유를 통해 구명을 붙이도록 한 것이 드러나면서, 1998년 구명 개정 논의를 시작한 이후, 20년만인 2018년에 중립적이고 옛 지명을 살린 난잉서우(南英壽) 구로 개명할 구명을 확정짓고, 해당 개명을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할 예정이다. (2020 주민투표)
주오구 中央區 453,931 일본인
기타요시구 北吉區 1,112,150 류큐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계가 더 많이 살았으나, 아키나카 구 일대가 잉청저우로 편입되어 개발된 이후로 기타요시구 일대에 많은 수의 류큐계가 유입되고, 일본계가 아키나카 구나 신잉청현 북부의 스기 시, 세이란 시 등으로 대거 유출되면서 민족 분포가 류큐계 다수로 역전되었고, 결국 그에 따라 일본어 구명을 내리고 이를 대체할 류큐어 구명을 사용할 필요성이 생겨, 2015년 기타요시구의 구명을 류큐어로 의역한 니시시구로 개명을 확정짓고, 해당 개명을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할 예정이다. (2020 주민투표)
아키나카구 秋中區 1,155,250 일본인
주산구 州山區 923,780 한국인
완잉구 宛英區 958,843 한족-본성인-복로인
잉청저우 직할시 瀛城州直轄市 10,598,442 한족-본성인-복로인

경제

동북아의 남서방에 횡꽁[9]이 있다면, 동북아의 남동방에는 잉셴치우[10]가 있다.

잉청저우 직할시 자체는 중세 이전까지는 별 볼일 없는 화산대지 지형의 섬이었으나, 중세 이후 한족, 류큐인, 한민족 등의 이주를 통해, 전형적인 국제도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역업 중심, 상업 중심, 개방적인 특성 등이 갖추어졌고, 이를 이용해 근대 이후로는 잉청저우 직할시가 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간의 민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로 인해 홍콩을 보조하는 성격에서 잉청저우 시 일대의 근대시대가 출발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상황 속에서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중화권,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사이의 돈을 잇는 금융 허브이자, 남아도는 전기 등을 이용해 추진한 공업화가 성공함을 통해 동아시아의 여러 공업의 중심 기지 중 하나가 되어, 무역업 의존을 벗어나 금융업, 제조업, 2000만명대 중반까지 성장한 작은 내수시장을 이용한 여러가지 산업[11]까지 성장하여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는 산업 다각화의 성공 속에 수많은 돈을 벌고 있는 구조를 형성케 하고 있으며, 이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제가 경제위기를 회피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거치는 초장기 호황을 창출토록 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1인당 GRDP 5만불, 6만불, 7만불을 제일 먼저 달성한 곳으로 유명해지고 있다. (울산보다도 빠르거나 비슷하다,) 외국인을 상대하거나 회담, 세미나, 컨퍼런스, 전람회, 박람회 등을 관광과 연계시키는 MICE 산업, 첨단 하이테크 제조업과 오폐수 및 공해 정화장치가 잘 되어있는 친환경적인 중화학 공업 및 친환경적으로 발전한 경공업 등이 주력 산업이며, 최근에는 수백년의 노하우와 판 경게 코앞이라 지진과 맞서 싸워온 결과물인 탄탄하면서도 지진과 현피를 뜨면 그 어떤 유형이든, 그 어떤 지진 규모든, 그 어떤 진도든 상관없이 승리하는 잘 버티는 내진설계를 기초삼아, 주력 산업인 토목사업(건설업)이 기술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다만, 4차 산업혁명의 상황을 예의주시하여, 인공지능-드론 등의 첨단산업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다. 농림어업은 근대시대부터 시작된 도시화의 여파로 인해 대부분 신잉청현으로 이동했으며, 슐수이광 어업항(시구(西區)), 평순동 옥상 텃밭 클러스터(주산구(州山區)), 요츠자와 반농반어촌(아키나카구(秋中區)) 등만 등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잉청저우와 신잉청현 지역의 상업 특수

한편, 잉청저우 직할시와 신잉청현은 대만에서 독립해 나온 것과 일본계의 존재 때문인 지, 2.28 항쟁 추모제 및 위령제를 대규모 행사로 열고 있고, 심지어 시치고산이 다가오면 참배객들이 신사에 몰려든다. 이런 점 때문에 2.28 항쟁 추모제에 쓰일 용품, 2.28 항쟁 희생자 제사 용품 및 2.28 항쟁 희생자 묘지의 참배 공물 등이 대규모로 팔리는 특수가 존재한다. [12]

잉청저우 시 헌법

군사

비율 상으로도 완전한 종주도시이자, 한 국가의 최대도시인, 그러면서도 수도인 잉청저우 직할시 특성 상, 중요도가 높고 인구가 밀집하여,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군에서 육군의 리우밍촨부대(83군단), 잉청부대(88군단), 메이와부대(16군단), 나카가오카부대(68군단), 둥먼딩부대(9군단), 그리고 해군의 영련해협(瀛蓮海峽) 작전사령부와 공군의 잉청저우 항공방위부가 주둔하고 있다.

주해

  1. 실제로 침공 명분에 이걸 내걸 정도로 제정 일본, 즉 일제가 잉청저우 섬을 침공할 명분은 진실이건 거짓으로 만들어내건 간에 해당 명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2. 이들 혼혈은 주로 한족 본성인 여성이나 류큐인 여성이 어머니인 경우가 많아, 2/3이 모계 정체성인 잉청저우 본성인 내지는 류큐인의 정체성을 택했고, 나머지 1/3만이 부계 정체성인 일본인의 정체성을 택했다. 실제로 국립 잉청저우 대학에서 1970년대에 이뤄진, 이들을 추적한 결과 모계 정체성을 택한 이들은 본성인이나 류큐인과 결혼하였으며, 부계 정체성을 택한 이들은 일본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다만 출산율은 전자(평균 2.1명(1976))보다 후자(평균 2.6명(1976))가 높았다고 한다.
  3. 전 총통 리우허핑(劉和平, 일본어명 후지와라 헤이와(藤原平和))도 이 케이스에 속한다. 그나마 잉청저우 제도 연방이 독립한 뒤에 1967년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 사연이 알려저 1969년 생물학적 아버지와 재회했으므로 그나마 나은 케이스이다. '암흑의 피'에 속하는 이들 상당수는 대학 입시 혹은 취업 과정에서야 알게 되고 정체성을 특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 리우허핑의 경우에는, '암흑의 피' 모두가 그러했듯이, 특성 상 자신이 그런 추악한 역사의 결과였단 점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일본인 혈통의 혼혈성을 잉청저우 제도 독립 전까지는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드러내기 쉽지 않았을뿐더러, 그간 잉청저우에서 산 세월이 길어 일본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이미 잉청저우의 선진적 민주주의 정치의 수혜를 입고, 배우고, 그 선진적 민주정치에 몸담으며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중진 정치인이 되었던지라, 결국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택한, 잉청저우 본성인 내지는 류큐인의 정체성(모계 정체성)을 택한 케이스이다. 그는 먼저 서술한 이유로 인해 상기한 일본어명도 생물학적 아버지와 재회하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4. 실제로 현실에서 메이리다오 사건(美麗島事件)에 대한 평가나 현실에서의 중화민국 민주진보당 창당 이후 대응만 봐도 장징궈 집권기라서 가능한 것이었지, 장제스였다면 다 사형시키고도 남았다 할 정도로, 장제스는 강경노선 그 자체였으니 말 다했다.
  5. 시낭 시와 장이 시는 시가지 연담화 문제로 인해 1992년 2월 주민투표에서 통합을 결의, 1992년 7월에 통합 장이 시를 출범하는 식으로 통합하였다
  6. 이것이 유지되는 데에는 동아시아에서 중화민국과 잉청저우 제도 연방만이 DVB-T2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임이 제일 크다.
  7. 대만에서 케이블 방송이 활성화 된 것은 산이 많아 난시청 환경에 놓인 지역이 상당하다는 점과, 외성인을 우대하고 내성인과 그 외 민족들을 차별하고 그들의 요소를 탄압하는 형태의, 헌정과 훈정을 섞었다(!)는 그 악명높은 국민당 주도의 3당 연정(사실상 일당독재) 때문이다. 그런데 잉청저우의 경우는 후자에는 속해도 전자에는 안 속하기 때문일 뿐더러, 외성인의 비율이 대만 평균보다 높다.(대만은 약 13~14%, 잉청저우는 약 16%) 그래서 필요성이 반감되니, 활성화가 더디었다.
  8. 郭箱邰. 일생동안 광둥어를 쓴 데서 알겠지만, 잉청저우 외성인 출신이다. 한국어로 곽상태, 대만민난어로는 퀘슌타이, 하카어(객가어)로는 곡숑타이
  9. 홍콩을 광둥어로 이르는 이름
  10. 잉청저우를 대만민난어로 이르는 이름. 하카어(객가어), 광둥어(월어)로는 잉싱자우
  11. 건설업, 운수업 등
  12. 물론 2.28 항쟁의 경우에는 뜻하지 않은 현대사의 암울한 부분으로 인해 일어나는 특수인 만큼, 상인들도 2.28 항쟁 희생자를 기리는 차원에서 2.28 항쟁 전후로는 검은 옷을 입으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에 맞춰 가게를 흑백의 추모 분위기로 꾸미며, 유흥업소의 경우에는 2.28 항쟁 기념일이 있는 주와 그 전주, 그 뒷주 하여 총 3주(2월 셋째 주~3월 첫째 주)동안 영업을 하지 않고 일시 휴업하는 관행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