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제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1989년 3월 26일
13대 총선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
투표율 77.31% 감소 4.60%p
선거 결과

민주연합 143석 (47.9%)
(31.4%) 94석 민주정의
정당 지역구 전국구 총합 비율
민주연합 101석 42석 143석 47.9%
민주정의당 67석 27석 94석 31.4%
통일국민당 43석 17석 60석 20.1%
신정치개혁당 1석 0석 1석 0.3%
무소속 1석 - 1석 0.3%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또는 14대 총선대한민국 제14대 국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이다. 1992년 3월 24일에 실시하였고, 각 지역구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소선거구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213명을, 비례대표인 전국구에서 86명을 총 299명을 선출하였다.

이번 총선은 지난 총선거가 실시된지 불과 3년만에 실시되게 되었다. 1991년 국회는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의 기간을 맞춰 정부와 국회의 동조율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13대 국회의 임기를 1년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표면상의 이유가 그런 것이고 이것에 동의한 이유에는 정당마다의 셈법이 작용했다. 먼저 여당인 민주연합은 당시 사실상 대권 후보인 김대중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했다. 김대중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지난 약속이 있었지만, 김영삼이 반드시 다음 대권 경선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기 전인 1992년 초에 자신이 당권을 가진 상태에서 당을 동교동계 중심의 의회로 재구성하길 원했다. 김영삼 역시 비슷한 이유였는데, 자신이 다시 대권에 출마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상도동계에서는 파다하게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당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있는 13대 국회보다는 어느 한쪽으로 쏠린 새 국회에서 재선 출마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 훨씬 정치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1]

민주정의당의 경우에는 지난 대선 이후 축소된 노태우 총재의 위상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런 변수 없이 92년 대선을 치르기에는 정권교체 가능성이 너무 희박했다. 하지만 노태우 총재는 이 시기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태우는 지난 89년 총선에서 이미 정치적 후계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노태우는 말 그대로 흐름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기 위해서 13대 국회의 조기 종료라는 승부수에 패를 던진 것이다.

신민주공화당과 김종필은 89년 총선 이후 눈에 띄게 정치력을 잃고 있었다. 보수 야당이라는 포지션은 민정당이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고, 민정당을 구 군부의 연장이라고 공공연히 비판하기에는 김종필 자신의 출신 또한 군부였기 때문에 정통성에서도 흠결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은 1990년 정계 입문을 선언하며 국민당을 차렸고, 남들보다 한발 앞서 미래를 이야기 하는 기업인이라는 신선함은 정계에 새바람을 불게하기에 충분했다. 김종필은 당장 정주영이 가지지 못한 원내에서의 영향력을 늘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국민당과 합당을 추진했다. 이로써 통일국민당이 91년 6월 성사되었다. 김종필은 대권을 정주영에 양보하는 대신 당권을 요구했고, 정주영은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김종필은 대선 전에 통일국민당 내에서 입지를 다져놓기 위해서 13대 국회의 임기 단축에 찬성했다.

결국 원내 3당이 모두 임기를 1년 단축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국회의 압도적인 찬성을 통해 13대 국회는 1992년 총선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선거는 무난하게 민주연합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물론 민주연합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을 향해 불편한 발언을 쏟아냈다. 김대중은 과반 확보 실패는 뼈아픈 실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동교동계를 전체 의원의 70%가 넘는 수준으로 확보했기 때문에 당내 질서 재편에는 만족했다. 민주정의당은 원내 2당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노태우의 노력에도 반등에 실패했으며, 오히려 의석이 줄며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통일국민당은 무려 60석을 확보해 92년에 예정된 대선에서 여당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선거 이후 민주연합 대통령 경선 직전인 92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재선 출마 의지를 확고히 하자, 민주연합은 내분에 빠졌다. 김대중은 약속을 종잇조각처럼 여기는 사람은 국민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8월에 진행된 민주연합 경선은 김대중의 무난한 승리로 끝났지만,[2] 김영삼 대통령은 경선 결과에 불복 상도동계를 이끌고 탈당을 감행해 노태우를 만나 민주자유당을 창당 후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선거 정보

  • 총유권자수 : 43,891,201명
  • 대통령 : 김영삼 (민주연합)
  • 의석정수 : 299의석 (지역구 213석 + 전국구 86석)
  • 선거제도 : 소선거구제 + 비례대표제
  • 투표일 : 1992년 3월 24일

선거 결과

정당별 당선자 수

지역구 국회의원 결과

비례대표 국회의원 결과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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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만약 동교동계가 당을 장악한다면, 김영삼은 그러면 그거대로 경선 불복과 탈당 명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2. 민주연합 내에서도 대통령이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반감이 굉장했기 때문에 김대중은 생각보다 큰 격차로 승리했다. 물론 92년 총선에서 얻은 동교동계 의원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얻어낸 성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