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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5세
George V
원어명 George Frederick Ernest Albert
제위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과 아일랜드의 왕
인도제국의 황제
(1910 - )
출생 1865년 6월 3일
대영제국 런던 (만 70세)
상태 생존
소속 캐나다 자치령 (카이저라이히) 캐나다 자치령
정당 무소속 (윈저 가문)

조지 5세는 1910년부터 영국 자치령의 왕이자 인도의 황제이자, 동시에 1910년부터 1925년까지 영국의 왕이었다.

조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중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인 앨버트 빅터 왕자에 이어 세 번째로 왕위를 계승 받았다. 그는 1877년부터 1892년까지 왕립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형이 예기치 않게 사망하여 왕위 계승 서열에 올랐다. 1901년 그의 할머니가 사망하자 그의 아버지는 에드워드 7세에 따라 왕위에 올랐고 조지는 웨일즈의 왕자가 되었다. 191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황제로 즉위했다.

조지의 재위기간은 독일과의 대전쟁에서 영국의 패배, 1920년대의 경제 위기, 대영 제국의 붕괴, 1925년의 영국 혁명이 모두 존재한 격동의 시기였다. 반독일 정서에 따라 작센-코부르크 고타 가문을 나와 윈저 가문을 세우기도 했다. 1919년 명예로운 평화에 서명한 후 조지는 경제 침체와 쇠퇴에 직면하여 분열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는 1925년 영국 혁명 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 캐나다 자치령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후계자는 웨일스 왕자 에드워드 알버트이다.

생애

어린 시절

조지 프레드릭 어니스트 앨버트는 1865년 6월 3일 런던의 말버러 하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과 작센 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왕자 사이의 장남인 웨일스 공(후에 에드워드 7세)이다. 어머니는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인 웨일스 공녀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로 태어난 조지는 웨일스 공 조지 왕자로 불렸다. 웨일스 공의 차남으로서, 형인 앨버트 빅터 왕자가 아버지 다음으로 왕위 계승 서열 2위였기 때문에 조지가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조지가 형보다 겨우 15개월 늦게 태어났다는 점을 감안하여, 왕실은 두 왕자를 함께 교육하기로 결정했다. 1877년 9월, 두 형제는 다트머스에서 훈련선 HMS 브리타니아에 합류했다. 그들의 아버지는 해군이 "어떤 소년에게도 가능한 최고의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1879년부터 3년 동안 왕실 형제들은 HMS 바칸테에서 조련사로 일했고, 카리브해, 남아프리카, 호주의 식민지를 방문하면서 대영제국을 순회했다.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형 앨버트 빅터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녔고 조지는 영국 해군에 계속 있었다. 그는 세계를 여행하고 대영제국의 많은 지역을 방문했고, 1891년 그의 형제 앨버트 빅터가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해군에서 활동적으로 복무했다. 이후 그의 해군 계급은 대부분 명예직이다.

요크 공작 시절

1892년 5월 24일,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를 요크 공작, 인버네스 백작, 킬러니 남작위에 봉했다. 조지가 빅토리아 메리와 결혼한 후, 그녀는 요크 공작부인으로 불렸다. 요크 공작 부부는 주로 노퍽주 샌드링엄에 있는 비교적 작은 집인 요크 코티지(York Cotty)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삶의 방식은 왕족보다는 편안한 중산층 가정의 생활 방식을 따랐다. 조지는 부모님과는 확연히 다르게 단순하고 조용한 삶을 선호했고, 잘 알려진 우표 수집가였으며, 왕실 우표 수집가를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영국과 제국 우표 수집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웨일스 공 시절

요크 공작 부부로 조지와 메이는 다양한 왕실 구성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이 붕어하자 아버지 앨버트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했다. 조지는 콘월 공작 작위와 로테세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그 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조지는 콘월 공작과 요크 공작으로 칭해졌다. 1901년 조지와 메이는 대영제국을 대표하여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다. 그들의 순방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캐나다, 뉴질랜드가 포함되었는데, 오클랜드의 콘월 공원은 당시 오클랜드 시장이었던 존 로건 캠벨에 의해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01년 11월 9일, 조지는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이 되었다. 에드워드 7세는 그의 아들이 미래의 역할을 하기 전에 더 많은 준비와 경험을 갖기를 바랐고, 따라서 조지는 국가 문서와 서류에 대한 폭넓은 접근권을 얻었다. 그는 아내의 조언을 소중히 여겼고 그녀는 종종 그의 연설문을 쓰는 것을 도왔다. 1906년 조지는 인도를 방문하여 인종 차별에 혐오감을 느꼈고 인도 정부에 더 많은 인도인들의 참여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왕과 황제 즉위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면서 웨일스 공은 왕위에 올라 조지 5세가 되었다. 조지는 공식 문서와 편지에 "빅토리아 메리"라고 서명하는 그의 아내의 습관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가 이름 중 하나를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지와 메리 모두 빅토리아 여왕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메리 여왕이 되었다. 그들의 대관식은 1911년 6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대관식은 런던의 제국 축제에서 거행되었다. 1911년, 왕과 왕비는 델리 더바르를 위해 인도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그들은 인도의 황제와 황후로서 인도의 고위 관리들과 왕자들의 모인 청중들에게 소개되었다. 조지는 그 의식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인도 제국의 왕관을 썼다. 그 후 황제와 황후는 그들의 새로운 신하들을 방문하면서 인도 전역을 여행했다.

대전쟁 기간

1914년 8월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영국 대중들에게 전쟁의 모든 공포를 상징하게 되었지만, 그는 왕의 사촌이었다. 메리 여왕은 어머니처럼 영국인이었지만 독일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후손인 테크 공작의 딸이었다. 국왕에게는 영국 신민이었던 테크 공작과 공작부인, 바텐베르크 공주와 공주, 라인 공주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손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주와 같은 독일 칭호를 가진 처남과 사촌들도 있었다.

1917년 7월 17일, 조지 5세는 영국 왕실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들리는 작센 코부르크-고타 왕가에서 윈저 왕가로 바꾸는 칙령을 공포했다. 그는 특히 윈저를 빅토리아 여왕의 모든 후손들의 성으로 채택했다. 마침내, 영국 신민이었던 그의 다양한 친척들을 대표하여, 그는 모든 독일식 직함들과 양식들의 사용을 포기하고 영국식으로 들리는 성을 채택했다. 조지는 그의 남성 친척들 중 몇 명을 영국식 성으로 만들기 위해 보상을 쥐어주기도 했다.

전쟁 중에, 막내 아들 존이 짧은 기간 동안 병치레를 한 후 1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망명

명예로운 평화 조약에 서명한 후, 왕은 제국의 형태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의 창설과 같은 많은 어려운 결정에 직면해야 했다. 1925년 영국혁명이 일어나자 왕족들은 모두 대영제국에서 유일하게 혁명적 물결의 손길이 닿지 않은 캐나다로 도망쳐야 했다. 캐나다 총리 매켄지 킹이 영국 망명 정부가 캐나다 정부를 대체하는 것을 거부하자, 조지 자신은 총독의 직위를 교체하고 캐나다 국왕의 직책을 맡았다. 자신의 지위를 위하여 그는 캐나다 내정에 개입하여 본토 재건을 추진할 보수적인 정부를 지지하였다. 특히 자유주의자들과 킹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조지의 건강은 대전쟁과 본토에서의 혁명에 큰 타격을 입었고, 캐나다로 가는 비행은 조지의 건강 문제를 악화시켰다. 그는 오랫동안 폐기종, 기관지염, 만성 폐쇄성 폐질환, 늑막염을 앓았다. 1928년, 그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이후 2년 동안 그의 아들 에드워드는 그의 많은 임무들을 이어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와 후계자와의 관계는 최근 몇 년 동안 악화되었다. 조지는 에드워드가 왕실의 삶에 정착하지 못한 것에 실망하고 유부녀들과의 많은 불륜 행각을 보이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대조적으로, 차남 앨버트 왕자를 좋아하고 그의 큰 손녀 엘리자베스 공주를 눈에 들이고 있다.

개인사

조지 5세는 테크 공작 프랜시스 왕자와 케임브리지 공작 메리 애들레이드의 외동딸인 빅토리아 메리 드 테크 공주와 결혼했다. 조지와 메이의 결혼식은 1893년 7월 6일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에 있는 채플 로얄에서 열렸다. 그들은 6명의 자녀를 두었다.

  • 에드워드, 웨일스 공, 1894년 6월 23일 출생
  • 앨버트, 요크 공작, 1895년 12월 14일 출생,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1900년 8월 4일 출생)
    • 엘리자베스 공주, 1926년 4월 21일 출생
    • 마가렛 공주, 1930년 8월 21일 출생
  • 메리, 프린세스 로열, 1897년 4월 25일 출생, 헨리 조지 찰스 라셀리스와 결혼(제6대 헤어우드 백작, 1882년 9월 9일 출생)
    • 조지 헨리 휴버트 라셀리스, 1923년 2월 7일 출생
    • 제럴드 데이비드 라셀리스, 1924년 8월 21일 출생
  • 헨리, 글로스터 공작, 1900년 3월 31일 출생, 앨리스 몬테구 더글러스 스콧과 결혼(1901년 12월 25일 출생)
  • 조지, 켄트 공작, 1902년 12월 20일 출생, 마리나와 결혼(그리스와 덴마크 공주, 1906년 12월 13일 출생)
  • 존, 1905년 7월 12일 출생, 1919년 1월 18일 발작으로 사망

재위 기간의 수상들

  • H. H. 아스퀴스 (1908-1916), 자유당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1916-1919), 자유당
  • 보나르 로우 (1919-1923), 보수당
  • 램지 맥도널드 (1923-1924), 노동당
  • 오스틴 체임벌린 (1924-1925), 보수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