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필제 (趙弼濟, 1910년 11월 27일 (음력) ~ 2013년 8월 15일)는 아키시오의 정치인, 기업인이다.

개요

아키시오의 정치인, 기업인이라고 서술해 놓았지만,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던 관계로 한국계 아키시오인이 아니라 재조한국인이다.[1] 경상남도 창원군 출신.[2]

집안은 대대로 마산의 항구에서 일했으나, 1933년 일본의 극심해지는 수탈을 피해 아키시오후지시로로 이주한다. 후지시로 항에서 항구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수입이 보다 안정적인 해군으로 입대하였다. 지상 근무지에서 병 생활을 하다가 하사관 (지금의 부사관)으로 전환해 오장 (伍長; 대한민국 국군의 하사에 상당)으로 복무하던 중 제2차 닛초 전쟁이 발발 (1941년), 난페이급 전함 3번함 미치노쿠 호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하였다. 1943년 해군 상륙특전대 (아키시오 해병대의 모체)로 자원 이적하여, 신페이 제도 전역, 니시아키시오 제도 전역, 센다이 시 침투 작전에 참전하였다. 1944년 2월, 신페이 제도 전역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나카야마·히이로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왼쪽 네번째 손가락을 잃기도 했다. 종전 후, 대통령으로부터 아키시오의 훈장 중 최고 훈장인 공화국 영웅 훈장을 받았는데 한국계 중에서는 유일하였다. 1946년에 전역하였고, 전역시 계급은 조장 (曹長; 대한민국 국군의 상사에 상당).

전후 한인들이 많이 사는 후지시로 니시 구 지역구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국민당 후보였던 아지카와 히로무 (安治川 弘)에 이어 2등으로 당선되었다.[3]

생애

이주 이전의 삶

군인 조필제

거류민단장 조필제

국회의원 조필제

북웅파의 조필제

조 영감

만년과 죽음

2000년 북웅파왕자의 난의 종식과 더불어 김동우에 의해 공식 해체되고, 대부분의 식구들은 조필제가 대주주로 있던 키타구마 그룹 (북웅 그룹)에서 거두어들였다. 2003년 조필제는 자신이 갖고 있던 지분을 김동우에게 넘겨주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후지시로 한인협회에서는 그를 명예 협회장으로 위촉하였으며, 2007년 여러 재조한국인 공동체를 규합한 재조한인회의 결성 당시 고문(顧問) 위원으로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담배를 즐기면서도 100세가 되도록 장수하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에 다다랐다. 2010년 주치의로부터 폐암을 진단받아 담배를 끊었지만, 금단 증상과 더불어 겉잡을수 없이 커진 폐암으로 인한 고통은 그를 옥죄어왔다. 그의 외증손녀이자 성우인 미나미 아키라 (南海あきら)는 2011년 외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을 두고 "인사하고 돌아선 순간, 외할아버지가 행여 돌아가셔있진 않았을까, 하고 몇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고 술회하였다.

2012년 조필제는 후지시로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그곳에서 의사로부터 "삶을 정리할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준비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었다.[4] 2013년 8월 15일 새벽 4시에 10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재산을 모두 재조한인회에 기부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이야깃거리

  • 별명은 조 영감. 한인의 권리 신장을 위해서 로비를 비롯한 검은 수단도 가리지 않은 냉혈한이었지만[5] 나이 들어 북웅파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러 방송에 출연하거나 전국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면서 선거에 나선 한국계 인사들을 지원 연설해주는 등으로 마음씨 따뜻한 옆집 할아버지 이미지를 굳혔다. 이것도 자신을 호치민에 빗대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 했던 정치적 큰 그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각주

  1. 대한민국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키시오 공화국의 시민권을 취득하면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
  2. 지금의 창원시 성산구 가음정동. 창원군 내서면 (마산회원구 내서읍) 출신이라는 증언도 있었으나, 본인의 회고록에서 '가음정리'를 언급하는 부분이 나와 일단 이쪽으로 서술한다.
  3. 아키시오는 1개 선거구에서 최대 2~3명까지를 선출하는 탄력적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4. 조지 푸스키 (G.Pushky), <Our Great Grandpapa> (2014), 229쪽.
  5. 그러나 이러한 시선은 김영휘, 양동현을 비롯하여 "무력으로 차별을 극복하자"고 주장하던 강경파 인사들 때문에 도매금으로 까는 것도 있으니 유의할 것. 사실 몇몇 '교사죄'로 기소되긴 했지만 조 영감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서(..) 적어도 문서 상의 전과는 없다. 그리고 상술하였듯 이 사람은 정치와 타협이라는 수단을 통해 차별을 극복하자고 주장한 온건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