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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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中華民國
국기 국장
三民主義,吾黨所宗
삼민주의는 우리들이 따를 길
상징
국가 中華民國國歌
국화
매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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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해혁명 1911년 10월 10일
  • 건국 선언 1912년 1월 1일
  • 계엄령 발령 1951년 1월 12일
  • 계엄령 해제 1990년 6월 18일
  • 총통 직선제 개헌 1992년 5월 2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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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난징
최대 도시
상하이
면적
5,591,640km2
구성국
중화민국, 홍콩 특별자치구역, 마카오 특별자치구역
접경국
만주-몽골 인민공화국, 티베트국, 동투르키스탄 사회공화국, 버마, 라오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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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990,382,000명 (2위)
밀도
177.1명/km2명/km2
민족 구성
한족 94.5%, 좡족 2.4%, 기타 3.1%
출산율
2.5명 (2019년)
기대 수명
79세 (2020년)
공용어
중국어 (만다린)
공용 문자
한자
종교
국교
없음 (정교 분리)
분포
불교 53.2%
도교 10.5%
기독교 7.5%
이슬람교 5.3%
기타 4.3%
무종교 19.2%
군대
중화민국 국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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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4개 시
2급
24개 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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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이원집정부제, 대륙법계, 양원제, 일당우위정당제, 공화제, 민주제
민주주의 지수
5.83 (혼합된 체제)
국가 원수 (총통)
쑤인저
정부
요인
부총통
샤오리환
행정원장
진메이펑
여당
중국 국민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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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23조 7,691억 6,800만 (2위)
1인당 GDP
€24,000
GDP
(명목)
전체 GDP
€18조 5,201억 4,340만 (2위)
1인당 GDP
€18,700
외환 보유고
€3,005,000,000,000
신용 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중화민국 위안
ISO 4217
CH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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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 기원, 민국 기원
시간대
GMT+05:00~09:00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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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수교 : 1947년 8월 15일
UN 가입
1949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길 27
ccTLD
.cn
국가 코드
CHN, 中國
전화 코드
+023
여행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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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여행주의보
전 지역 (코로나 19)

개요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상징

국호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며, 줄여서 중국(中國)이라 한다.

중국은 풀어쓰면 "세상의 가운데에 있는 국가"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적인 이름이다. 이 이름은 시경에 최초로 등장한 이름이다.

국가


역사

국민당 일당 독재의 수립

1948년, 중국 공산당과의 협정을 통해 국공내전이 종료되었다.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총 500석중 363석, 공산당이 97석을 얻어 공산당과 국민당의 양강 체제가 두드러졌으며, 초대 총통 선거에서도 국민당 장제스가 59.2%, 공산당 마오쩌둥이 36.7%를 득표해 공산당의 지지율이 국민당과 비교할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러한 공산당의 매서운 추격에 1951년, 장제스 총통은 1948년 공산당과의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공산당 금지령과 계엄령을 내렸다. 공산당의 유격부대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대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국민당은 민국당, 자유당 등 기타 야당들을 하나 둘씩 금지하면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경제 발전과 냉전

중국은 일본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해져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 주도의 강력한 공업 정책을 통해 중국은 1960년대 급속도의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나 국유화, 정부 주도 등에서 사회주의 색체를 띄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 중국의 경제 성장률은 10% 이상을 기록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 영국 등에서는 중국의 급성장을 우려하는 "차이노포비아" 정서가 퍼지기도 했다.

1970년대 중국의 경제 발전은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급속도의 발전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지지를 보냈다. 68혁명의 영향으로 1970년대 초반 중국 내에서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민주화

1975년 장제스 총통이 서거한 이후, 1988년까지 그의 아들인 장징궈가 총통직을 물려받아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중국은 점차 불경기에 접어들었다. 실업률이 점차 오르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에 반발하며 집단 파업을 일으키면서 대부분의 국가 경제 시스템이 마비되었다. 지속적인 파업으로 경제가 사실상 마비 상태였음에도 중국의 노동자 인권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민당 대신 노조를 지지했고, 현재까지 중국 내 최대 야당인 자유노동당이 창당된 것도 이때이다.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중국의 경제가 침체되고, 프랑스-영국과 중국의 격차가 너무나도 확연히 벌어져 국민당의 지지율도 그만큼 떨어졌다. 무엇보다 제1세계의 소프트파워가 중국에 유입되자, 이럴바에는 민주주의를 하는게 낫겠다며 자유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늘어났다. 1988년, 장징궈 총통이 서거하였고, 이후 정권을 잡은 리쯔원 총통은 자유 조치를 발표하며 계엄령을 해제하고, 자유 투표를 실시하였다.

1990년대 이후

1990년대에도 경제 사정이 악화되자 중국은 국제통화기금에 경제 신탁통치를 받는 신세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1996년 총통 선거에서 중국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국민당계 후보인 자유노동당의 장웨이타오가 47.5%로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국민당의 기세를 꺾기는 힘들었는지 지지율이 폭락하며 재선에는 실패하긴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경공업 및 금융업 중심으로 경제가 다시 발전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와 다시 냉전을 시작하였다.

지리

중국은 북쪽으로는 한대 기후인 만주 지역에서, 남쪽으로는 열대 기후인 광둥까지 걸쳐있어 그 영토가 매우 방대하고 기후도 다양하다. 이 때문에 중국은 냉전 종식 이후 서방권 시민들에게 관광지로 애용되어왔다. 매년 GDP 생산의 10% 가량이 관광업과 관련되어있을 정도. 이 때문에 코로나 19 이후 경제에서 타격을 입었다.

행정구역

중국의 1·2급 행정구역 지도. 1급 행정구역은 난징시, 상하이시, 베이징시, 충칭시 4개의 독립시를 뜻하고, 2급 행정구역은 나머지 24개의 일반 성을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는 총 28개의 성이 존재한다. 28개의 성 밑에 기초자치단체에 해당하는 3급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정치


중화민국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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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계엄령 선포로 중국 국민당이 유일무이한 집권 정당이 되었으며, 1988년 자유 선언 이후에도 중국은 일당우위체제를 유지했다. 1996년 총통 선거에서는 국제통화기금 구제 사건으로 인해 여론이 돌아서 수십만표 차이로 자유노동당이 승리한 적도 있지만, 2000년 이후 다시 국민당이 장기 집권 중이다. 의회의 70%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 국민당이 곧 중국이라는 소리도 나올 정도의 매우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

국민당 이외에는 사민주의 정당인 자유노동당, 중국 공산당 등을 비롯해 여러 야당들이 존재하지만 그 세력은 자유노동당을 제외하면 매우 미미하다. 자유노동당도 선거에서 30% 이상의 득표를 얻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 때문에 사실상 중국은 국민당의 독주 체제나 다름이 없다.

또한 자유 선언 이후에도 언론의 자유 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다. 자유노동당 치하에서 이런 점을 개선하려고 하였으나 의회 다수당이었던 국민당에 의해 무산되었다. 오히려 2000년대 이후 독재가 더욱 강화된다는 평가다.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국민당에 대한 국민들의 굳건한 지지를 보아, 섣불리 현 체제가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2020년 중국 총통 선거에서는 쑤전창 총통이 51%정도밖에 얻지 못하면서 사실상 패했다. 이는 코로나19에 대한 부실대응으로 인해 시민들의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는 분석이다. 샤오커 자유노동당 당수 역시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하였다.

경제

중국은 한때 프랑스, 영국과 1대 1로 경제 전쟁을 벌인 적도 있을만큼 강성하다. 프랑스와 영국이 드넓은 제국주의 식민지의 영토로 그 국력을 유지한다면, 중국은 국민의 다산성과 근면성으로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총 인구는 9억명인데 프랑스의 식민지 인구 총합이 3억명이 조금 넘으니 얼마나 내수 시장이 큰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나라 시절때부터 중국은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고, 심지어 송나라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과학 발전이 정체되고, 농본주의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부패한 관료들로 인하여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에 뒤쳐졌다. 결국 20세기 초 청나라가 제국주의의 군대에 의해 짓밟히고 경제적 수탈을 당하는 가슴 아픈 일도 일어났다. 더군다나 1930~4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영토가 황폐화되어 경제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중공업을 주요 산업으로 내세운 국민당 정부의 주도로 경제가 착실히 발전되었으며, 1970년대 중국의 경제 성장은 정점에 다달아 프랑스-영국 연방과 양극 체제를 구성했을 정도였다. 중국은 막대한 내수시장과 값싼 노동인력 등으로 경제력을 키워 한국, 일본, 인도, 소련 등 주변 국가들을 전부 영향권 내로 편입시키면서 냉전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도 잠시 1980년대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사회가 혼란해지고, 경제 역시 정체되면서 1990년대에는 국제통화기금의 경제신탁통치를 받는 굴욕을 맛본다. 2000년대 국민당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긴축 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는 곧바로 효과를 보아 중국은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특히나 관광업, 금융업, 경공업 등의 산업이 발전하였다. 이 결과 2010년대 들어 중국은 전성기만은 못하더라도 영국-프랑스의 거의 유일한 대적수로 떠올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중국은 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빈곤층에 의한 시위가 빈발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다. 또한 관광업에 의존하는 지역이 많아졌다가, 코로나19로 인하여 급속하게 관광업이 쇠퇴하며 이 지역들도 무너져내렸다는 점도 중국 정부의 고민이다.

문화

사회

외교

한중관계

한국은 프랑스 쪽의 진영에 속한 제1세계 국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중립국으로 분류되는 만큼 중국과도 친선 관계를 맺어왔다. 이는 프랑스와 영국 양국의 간섭을 받았던 일본이 반중 정책을 유지한 것과는 차별화된다. 다만 한국은 일본과 중국 양국과 모두 친하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193~40년대 중국 국민당은 대한 독립군의 최대 물주로 한국이 독립할 수 있게 도왔다. 또한 대한 독립군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국을 도와 일본과 맞서 싸웠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은 1948년 한국이 통일된 국가로 독립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때문에 1950년대 이후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또한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1990년대 양국의 민주화 이후 활발히 교류되었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로는 한중 시민들도 매우 친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과 한국 양국에서 관광객 통계에서 가장 많은 파이를 차지하는 것이 각각 한국과 중국일 정도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 내에서 반중 정서가 생겨났고, 또 조선족 관련한 문제 등 불편한 관계는 있지만 여전히 한중 관계는 정치, 군사적으로만 동맹을 맺지 않았을 뿐이지 제1세계와 2세계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사이가 좋다.

여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