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영토(지도의 청색 영역)
중화민국
中華民國 / Zhōnghuá Mínguó / Republic of China(Nanjing)
중화민국 국기 중화민국의 연방기[1]
국명 중화민국
통칭 중국, 민국, 남중국, 난징 정부
정치체제 삼민주의 공화국 / 유사 연방제, 의원내각제
의회 체제 단원제 또는 양원제 의회
경제 체제 민생주의(사회민주주의)
국가의 표어 민족, 민권, 민생
설립 연도 1907[2]
국가 ISO 코드 RCH
수도 난징南京
국가 삼민주의가
세계관의 국가 상징색 #1870bc
화폐 단위 중화민국 위안/RCY
현재 인구수 약 14억 2410만 명
중화민국 정부인사 목록
현직 국가원수 대총통 차오쉬안曺玄[3]
현직 정부수반 민국수상 한비안더韓汴得
오성五省의 장관진
현직 재무성 장관 선창푸申昌蒲
현직 방위성 장관 장쿠이將奎
현직 내무성 장관 난후이인南慧誾
현직 외무성 장관 진다오金導
현직 농림성 장관 리수안용李蒜永
팔부八部의 장관직
현직 노동부장 리롱커李龍克
현직 복지-후생부장 장더쉬안姜德玄
현직 국영공사부장 젠춘톈甄春田
현직 국토개발부장 차이잉리엔蔡英聯
현직 교통부장 타오잉陶膺
현직 교육부장 궈송우郭松悟
현직 가정평등부장 우샹위吳香玉
현직 환경부장 저우보셴周伯鮮

개요

중화민국中華民國가상지구 BF 세계관의 중국권 국가 중 하나이며, 현재 중국권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본 세계관 중화민국의 모티브는 명백히 현실의 '중화민국'이고, 역시 흔한 대체역사 중 하나인 "중화민국이 여전히 대륙에 남아 있었다면"의 변주곡 중 하나이다. 다만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현실의 중국 군벌이자 사상가였던 '천중밍'의 연성자치론도 주된 하나의 모티브로 삼고 있다. 현실의 천중밍은 쑨원과 대립한 끝에 중국 정치계의 권력에서 밀려났고 그의 자치론은 망국적, 퇴보적 사상으로 취급되었다가 최근에야 재평가되는 현실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일정부분 연방제적 성격을 띈 중화민국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또한 현실 역사의 중국 국민당에서도 왕징웨이(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일본과 손잡은 매국노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천두슈와 같은 좌파적 경향성을 보였거나, 좌파 출신이었던 인물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고, 국민당 내에서도 국민당 우파와 좌파가 꽤 큰 세력을 형성했던 적이 있었다. 본 세계관은, 현실 세계의 국민당에서 '국민당 좌파가 주도권을 잡고 국민당이 일정부분 좌파적 노선을 걸었다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가상지구 BF 세계관에서 가장 큰 사회주의 국가로서 그 인구가 13억에 달한다.

정치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은, 초대 대총통이자 국부인 쑨이셴孫逸仙이 주창한 사상인 삼민주의 영향을 받아 오권분립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분열기 시기의 군벌 리진쿤李進坤은, 단일 국가[4]가 아니라, 각 지역이 자치를 누리며 이 지역들이 연합하여 있는 연성 자치론을 주장하였고, 하나의 국가를 주장한 쑨이셴과 충돌하였지만, 역시 중화민국의 국부이자 건국 영웅으로 꼽히는 저우자오위안周敎援의 이들 둘 사이를 중재하고 타협하여 결과로 리진쿤이 주장한 연성자치론이 중화민국의 헌법과 오권분립 체제에 융합되어 있어[5],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각 성들을 구성원으로 두는 연방제 국가이다. 가상지구 BF 세계관의 설정 상 송나라 붕괴 후의 혼란기에 남경의 중앙정부가 거대한 중국 대륙의 수억 인구를 일일히 중앙집권으로 통제할 여력이 없고, 설령 통제하려 하더라도 지방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 우려되어, 높은 수준의 지방자치-연방제를 택한 것은 필수불가결이라는 견해가 있다.

중화민국은 국제적으로 형식적, 제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널리 실행되고 있는 국가로 인정되고 있으며, 애국심이 넘치는 어떤 중국인들은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인 중화민국'이라는 것에 아주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정치가 결코 덮어놓고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체제는 아니다. 각 성들은 제각기 반독립적인 자치의회 즉 국민대회를 구성하고, 자체적인 행정권과 (형법을 제외한)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성의 이익관계에 따라서 알력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중앙정부의 주된 과제는 이들의 등쌀에 휘말리며 각 지방자치단체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타협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중화민국 입법원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선거'에 의해 선출되는데, 이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이 몇 억명이나 된다'는 말 또한 성립한다. 중화민국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를 중앙정부인 입법원에 반영하고 싶어하는 지역정당들이 해당 성 거주자들의 상당한 지지로 입법원 의석을 달성하고, 특히 자치공화국의 경우에는 중화민국 '본토'의 거대 정당들이 자치공화국에 진출하여 해당 지역의 민심을 석권하지 못하고, '자치' 공화국 답게 중화민국 본토에는 없는 정당들이 자치공화국에 배정된 권역별 비례대표 의석을 석권하며, 주요 정당들은 집권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치구역의 정당의 이해관계를 맞춰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화민국 입법원에는 웬만한 다당제 국가들보다도 많은 정당이 입법원의 '원내정당'이며, 이는 입법원에서의 논의와 입법과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연정을 꾸릴 때도 2개 정당의 연정이 아닌, 그보다 더 많은 정당들이 연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국민대회國民大會

리진쿤의 연성자치론이 중화민국 체제에 받아들여진 결과로, 국민대회國民大會(National Assembly)는 각 성 단위로 존재하는 지방의회의 총회이다. 4년 단위로 중화민국 전역에서 국민대회총선거가 진행되고 이 선거를 통해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각 성의 국민대회원을 선출한다. 국민대회원은 자신이 속한 성의 지방자치를 담당하며, 해당 성에 적용되는 '성법城法'을 제정한다. 그러나 국민대회가 단순한 '지방의회' 내지는 미국식 '주 의회'와 구분지어지는 특별한 점은, 전 국민대회원으로 구성된 국민대회의 총의, 국민대회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지방의회이자, 그 지방의회가 모인 중앙정부의 헌법기구의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민대회를 중화민국의 '하원'이라고 간주하는 측면에서는 중화민국을 양원제 국가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헌법 개정 등 일부 권한을 제외하면 중앙정부의 법을 제정할 권한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을 하원이라고 보지 않는 측에서는 중화민국을 단원제 국가라고 주장한다.

중화민국의 국민대회는 다음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 중화민국의 총통 선출

국민대회총선거를 통해 전 중국의 국민대회원이 정해지면, 그 즉시 국민대회총회가 소집되어 국민대회원들의 간선을 통해 중화민국 총통을 선출한다.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발의권

중화민국 헌법 상, 국민대회에서는 필요하다고 인정될 시 임시 국민대회총회를 소집하여 개헌안을 논의할 수 있고, 국민대회원들의 의결을 통해 개헌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킬 수 있다. 이후 이 헌법안은 입법원에서의 의결을 거친 후, 총통의 명의로 국민투표에 회부된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만 국민대회에 발의권이 있을 뿐,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에서 국민대회의 주도로 개헌안의 발의된 적은 없다.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의결권

중화민국 헌법 상, 개헌안을 발의할 권한은 국민대회와 입법원 양쪽에 있으며, 입법원이 먼저 개헌안을 발의 후 입법원에서 가결했을 경우, 해당 개헌안이 총통의 명의로 국민투표에 회부되기 위해서는, 입법안에서 가결된 후에 신속히 임시 국민대회총회를 소집하여 해당 개헌안에 대해 국민대회원 총원의 60% 이상이 동의한 다음에 국민투표로 넘어가 다수의 찬성을 얻으면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


  • 중화민국의 성법 제정

각 자치단체(성 또는 특수 광역 행정구역) 의 지방의회로서, 각 지역의 국민대회원은 해당 지역의 자치적 민법인 성법을 제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형법'을 제정할 권리는 없으며, 형법은 전적으로 중앙 의회인 입법원에서 전 중화민국에서 단일하게 적용되는 형법을 제정한다. 국민대회에 주어진 권한 중에서 가장 주된 업무가 지방의회의 측면으로서 각 성들의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국민대회는 각 성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기본이나, 민국수도 남경을 포함한 특별시(상해 등)들은 성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광역 행정구역이므로 이러한 지역은 별도의 국민대회를 조직하며, 소수민족 자치구도 자체적인 국민대회를 조직한다.(단, 특별시, 자치구의 국민대회에서 제정한 지방자치법도 '성법'으로 지칭된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지정된 특수한 자치 구역의 경우에는 국민대회가 존재하지 않고, 별도의 자치 기구를 조성할 수 있다.

입법원立法院

입법원立法院(Legislative Yuan)입법원은 연방제 국가 중화민국의 '연방의회'에 해당하며, 연방법에 해당하는 '민국법民國法'을 제정한다. 입법의원들은 다른 의회제 국가의 국회의원에 완벽하게 대응되며,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진행되는 입법의원선거가 4년마다 진행되며, 이를 통해 입법의원들을 선발한다. 입법의원선거를 통해 중화민국의 정부수반이자 실질적인 국가통치자인 민국수상을 선출하고, 민국수상이 내각을 구성한다. 국민대회의 경우 특별자치구의 국민대회는 존재하지 않으나(대신, 별도의 자치기구를 설립할 수 있다), 입법의원의 경우 각 자치구의 민의를 대변할 입법의원이 존재한다.

입법원의 권한은 다음과 같다.

  • 입법의원선거를 통한 민국수상 선출과 내각 구성
  • 민국법 제정

민국법은 민국 민법과 형법으로 나뉘는데, 상기 '국민대회' 문단에서도 언급되었듯 형법은 오직 중앙정부의 입법원에서만 만들어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중화민국 초창기에 '단순한 생활 풍속은 선악을 따질 수 없기에 지방마다 다르게 해도 좋지만, 형법은 선악의 문제가 중요하기에, 각 지역에 맡겼을 경우 해당 지역의 악습이 형에 개입될 수 있기에, 형법은 전적으로 중앙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형법은 오직 입법원에서만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중화민국 초창기 쑨이셴 - 리진쿤 간의 "국체논쟁"에서 쑨이셴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발의권

국민대회 문단에서 설명되었듯 입법원에서 발의되고 통과된 개헌안은 국민대회에서 의결되어야 국민투표에 회부될 수 있다.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의결권

국민대회 문단에서 설명되었듯 국민대회총회에서 개헌안이 의결되었을 경우 입법원에서도 의결되어야 국민투표에 회부될 수 있다.

  • 중화민국 예산안 승인권 및 추경 권한
  • 내각불신임결의 및 총통에 대한 탄핵소추권
  • 내각 인사 승인권

중화민국의 입법원에는 타국의 국회의장에 대응되는 직책인 입법원장이 존재하며, 입법의원선거로 새로운 입법의원들이 선출되어 임기를 시작하면 원내 위원회들의 선출 과정과 동시에 입법의원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대부분 이런 절차를 통해 입법원장은 원내 1당에서 중진인 인사가 선출되나, 내각제 국가의 특성 상 나타나게 되는 연립정부에서, 같이 연립할 소수당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거래의 결과물로서, 소수당에서 입법원장을 배출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내각제 국가에서는 고도의 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총리의 임기 제한이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데, 중화민국의 경우 1972년의 헌법 개정을 통해 한 사람이 민국수상을 할 수 있는 기간을 일생 동안 누적하여 12년을 넘을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중화민국 초기, 실질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아 민국수상이 사실상 20, 30년 이상 집권하며 천자와 같은 권한을 누린다는 문제 때문이었다.


행정원行政院

행정원行政院(Excecutive Yuan)은 중화민국의 행정부이다. 행정원의 수장은 민국수상이며 행정원장은 행정원 관료들의 대표로써 수상이 입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한다. 행정원장은 민국 부수상을 겸한다.

중화민국은 내각제 국가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입법의원이 내각 관료를 겸하나, 팔청장의 경우에는 입법의원 신분이 아닌 사람이 임명될 수 있다.


오성장관

오성五省은 중화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부부서들로는 각각 재무성, 방위성, 내무성, 외무성, 농림성이 있으며 이들을 오성으로 통칭하고 그 수장들을 오성장관들로 호칭한다.

재무성 중화민국의 예산배정, 예산집행, 회계, 예산 사용 내역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수행한다.
방위성 중화민국의 국토, 영해 방어를 담당한다.
내무성 중화민국의 치안과 법의 집행을 담당한다.
외무성 중화민국의 모든 외교를 담당한다.
농림성 중화민국의 근간이자 최대 유권자인 농민[6]들과 농업의 관리, 연구, 개선, 개발과 포간도호법에 따른 토지분배와 관리 집행, 자원개발과 보호, 수목림들의 관리들을 담당한다.

십부장관

십부十部는 민생과 관계된 부서들을 5생, 민권과 관계된 부서들을 3권으로 부르며 이를 합쳐 5생3권의 8부라고 부른다. 여기에 5생 3권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부서 또한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기에 8부에 2개 부서들을 합쳐 '십부'라고 부른다.

  • 5생
노동부 전국의 노동자, 노동 관리들을 총괄하며 노동 개선, 노동권 보장, 노동문제 해결등을 담당한다.
후생복지부 전국의 복지, 보건 상황을 개선하고 관리하지만, 중화민국의 크기가 너무 크고 담당해야할 인구가 많기에 여전히 그들의 성과가 전 중국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후생복지부는 가장 낙후된 오지 지역이나 자치공화국 지역의 복지 개선을 최중요 업무로 지정하고 있다.
국영관리부 중화민국의 수많은 국영기업들과 소비재기업들을 총괄하고 생산을 담당한다.
국토개발부 중화민국 국토의 개발과 공공사업, 공공시설 유지보수를 담당한다.
토지부 중화민국 전역의 토지현황, 토지관리, 교통시설 부설과 관리를 담당한다.
  • 3권
교육부 중화민국 전민의 교육, 계몽, 교육환경 개선, 민주주의 의식과 현대적 시민의식 성장등을 담당하나, 실질적으로 중화민국의 끝없는 국토와 그 국토를 뛰어넘는 인구때문에,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도시화, 산업화된 남부 주요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 교육의 수준이 제한되어 있다.
가정평등부 전통적으로 뿌리박혀 있던 전통적 악폐습과 반동들을 교정하고 ,만민평등의 실현을 위해 설치된 부서로써, 엄격하고 가차없는 집행에도 불구하고, 북부와 변경에서 일어나는 악폐습 근절은 요원하다.
환경부 환경에 대한 관심과 자연재해의 폭등으로 신설된 부서로 전국의 환경 유지개선과 자연재해 예방을 위한 환경 복구를 담당한다.


  • 그 외 2부
해양부 중화민국의 영해와 해양자원 관리, 해양 사고 예방과 구조를 담당한다.
방첩부 중화민국의 방첩과 국제범죄자 추격, 삼민주의 체제의 수호를 담당한다.

팔청장

팔청八廳 '부' 보다는 일반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진다 여겨지는 행정기구들이다.

인권 규범청 인권규범들의 제정과 집행 그리고 반인권 문제들의 처리등을 맡는다.
조세청 중화민국의 세금 징수를 집행한다.
선전공포청 법률과 선거결과, 시행령, 규범, 조례등의 공포와 인권, 삼민주의등을 선전하고 정부 행사를 홍보한다.
소방청 중화민국의 화재 및 재난 구조를 담당한다.
경찰청 경찰 업무와 치안 확립, 군중 통제를 담당한다.
검찰청 범죄자를 기소하고 재판을 수행한다.
공정거래관리청 공정거래 확립과 시장에서의 위법 행위 적발, 소비재 통제를 맡는다.
문화예술청 중화민국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예술을 지원하며 국민 교양 교육도 담당한다.

사법원史法院

사법원史法院(Judical Yuan)은 사법원은 중화민국의 중앙 사법 기권이다.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에서는 법원 체계가 이원화되어 있는데, 이는 자치제를 실시하여 각 성의 국민대회에서 성법을 입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법은 중화민국 헌법에 의해 민국법으로 일원화되어 있어서, 민법의 경우 각 성/특별시/자치구 별로 상이하나, 형법은 전 중화민국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구조로 인하여 중화민국에는 각 성의 관할하에 있는 일반법원(성법에 따라 민사재판을 진행함)과, 사법원의 관할 하에 있는 형법원(민국법에 따라 형사재판을 진행함)과 민국법원이 있다.

일반법원, 형법원과 구별되는 민국법원의 독자적인 영역은 다음과 같다.

  • 일반적으로는 각 성의 성법으로, 일반법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민사재판이 법률상 특이점/사안의 중대성이 있을 경우, 민국법원에서 민국 민법에 근거하여 최종심급을 담당할 수 있다.
  • 민국법과 성법이 중화민국 헌법에 위배되는지의 여부를 심사한다.
  • 민국법과 성법이 상호간에 충돌될 경우, 충돌되는 법률 간의 중재를 담당하고, 두 법이 조화될 수 있도록 개선입법할 것을 국민대회와 입법원에 통보할 수 있다.

감찰원監察院

감찰원監察院(Control Yuan)은 중화민국 정부의 반부패기구로, 각 국가기관들을 감사하고 부패한 공직자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 감찰원장은 민국수상이 지명하며, 입법원의 동의로서 임명된다. 입법원은 민국수상이 지명한 감찰원장 후보를 거부하였을 경우, 입법원에서 자체적으로 감찰원장 후보를 지명할 수 있다.현실적으로 중화민국이 현실 중국처럼 모든 중화권을 모두 통치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거대한 나라로서 모든 지역에 대해 완벽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지방정부 등에서 부패가 쉽게 일어나는데, 이를 제약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중화민국의 감찰원이다.

고시원考試院

고시원考試院(Examination Yuan)은 중화민국 정부기구의 공무원에 대한 심사, 채용 기구로서, 모든 공무원에 대한 임용시험은 고시원에서 주관한다.

대총통大總統

현실의 중화민국 대총통大總統(President of China)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나, 이 세계관에서는 중화민국이 내각제 공화국이기 때문에, 중화민국 대총통은 상징적인 국가 원수의 역활과 제한된 권력만을 가질 뿐 실권자가 아니다. 중화민국의 총통은 '국민대회' 문단에서 설명된 것과 같이 국민대회 총선거에 의해 새로운 국민대회가 출범하면 그 즉시 국민대회총회를 소집하여 전 중국 국민대회원들이 참여하는 간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대총통의 임기는 국민대회원의 임기와 같은 4년이다.

중화민국의 총통은 연임 제한이 없으며, 이론상으로는 국민대회 총회에서 지속적으로 선출된다면 무제한 집권-연임이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국민대회 구성이 일당 우위가 지속적이지 않으며 국민대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이 항상 변한다는 점에서 무제한 연임 현상은 실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중화민국의 총통의 권한은 국가 원수로서의 권한으로서 다음과 같다.

  • 외국과의 조약체결권
  • 외교사절의 파견 및 접수권
  • 법령의 서명 및 관보를 통한 공포권
  • 연방 입법원에 대한 수상 후보 추천권
  • 연방 입법원에 의해 수상으로 선출된 자에 대한 임명권
  • 민국 수상의 제청에 따른 내각 각료 임면권
  • 연방판사, 연방공무원, 군장교 및 하사관의 형식상 임면권
  • 사면권
  • 민국 수상의 제청에 따른 입법원 해산권

정당

중화민국의 정당
中華民國之 政黨
여당 (893석)
삼민당
554석
민주연합회
231석
민권당
108석
야당 (757석)
국민당
430석
공산당
73석
태화당
77석
중앙당
61석
근로인민당
27석
전중국 불교연합
30석
중화불심개혁회
12석
건안동맹
14석
기독교 강성회
12석
장인 민족연합
9석
위구르 자치주의당
4석
대만 민주진보당
8석

[7]

  • 삼민당三民黨 Sanmintang / Sanmin Party

삼민당은 중화민국의 가장 오래된 정당이며, 국부 쑨이셴이 직접 창당한 정당이다. (실질적으로 당시 중화민국이 일당제/일당 우위제나 다름없었다는 증거도 되지만) "초기 중화민국(남중국)의 역사는 삼민당의 역사나 다름없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초기 중화민국 시기의 건국과 체제설립 유공자들인 쑨이셴, 저우자오위안, 왕후란, 왕룽, 리진쿤(공식적으로는) 등이 모두 삼민당원이었기 때문이다.

민국 초기 삼민당의 제 1 실권자이자 1대 민국 수상이었던 왕륭이 좌파적 경향성을 띄고 있었고, 포간도호 정책과 같은 복지정책, 빈민구제 우선 정책을 폈던 적도 있고, 60~70년대의 삼민당 분당 이후 삼민당내 우파가 후술할 '국민당'으로 이탈한 것도 있기 때문에 삼민당의 정치적 스탠스는 대체적으로 중도좌파 - 중도파의 빅텐트 정당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21세기에 가까워질수록 상황에 따라 타협적으로 시장우선정책, 우파적 경향성을 띄는 정책을 펼친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8]극단적인 좌파 계열 운동가들에게는 삼민당은 '국민당 좌파의 이름을 깎아먹는 정당'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민국 초창기에는 삼민당이 곧 여당이었지만, 삼민당의 분열로 인한 국민당의 등장 및 우경화 경향으로 인한 인기 상실로 인하여 70년대 이후로는 타 당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야당 신세를 지는 일이 많아졌지만, 현재는 확연한 좌파적 경향성을 보여준 현임 민국수상 한비안더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원내 1당을 탈환하고, 연립정권을 세워 여당 지위를 탈환하였다.

  • 국민당國民黨 Kuomintang / Kuomin Party

국민당은 60년대 삼민당에서 '신 삼민당 우파'들이 분당하여 나온 정당이며, 국민당은 자신들의 이념이 '쑨이셴의 진짜 이념에 가장 가까운 정당'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들은 민국 내의 민족주의적 중도파~중도우파 정당이며, 현 정치지형에서는 중화민국 우파 세력의 대표를 맡고 있다. 삼민당이 분당하는 큰 사건에 의해 당시 내각이 버틸 수 없어 입법원을 총해산하고 입법원 총선거를 실시했을 때, 당시 삼민당 1당 우위제에 질렸던 유권자들이 국민당과, 기타 야당들을 선택함으로서 국민당 주도 연립내각이 형성, 중화민국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다.

이 시기에 중화민국(남중국) vs 북중국(베이핑 정부)+미시온 왕국+대한국(가상지구 BF) / 중화 사회주의 공화국 등이 열려든 동아 전쟁이 있었고, 이 시기 국민당 정부가 큰 전략적인 이득을 거두고 현재의 중국 판도(본 문서 최상단의 지도)를 만듦으로서 국민당의 인기가 크게 올랐고, 중화민국의 다당제 체제가 이 때쯤 정립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이들은 삼민당의 '좌경화'를 비판하며 대체적으로 우파적인 의견을 주장하지만, 그들도 쑨이셴의 삼민주의 이념을 따르며, 쑨이셴의 사상도 공지주의 등 일정부분 진보적 면모가 있었기에, 기본적인 삼민주의 노선 자체는 삼민당과 동일하다. 다만 이들은 90년대 이후로는 쑨이셴의 본래 계획을 따라 현 중화민국의 내각제 체제에서, 총통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이원집정부제 내지는 대통령제 국가화를 꾀하고 있다.

  • 민주연합회民主聯合會 The Democratic Union

삼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정당이라고 하면 국민당도 있지만, 그 이전에 "민주연합회" 또한 삼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정당이다. 이 정당의 시조가 되는 인물은 중국 광서-광동 지역의 군벌이자 연성자치론을 주창한 '리진쿤'이다. 리진쿤은 북벌 시기에 쑨원과 협력하여 북벌을 진행하였고, 리진쿤이 스스로의 정치조직인 공민회公民會를 삼민당에 합당시킴으로서 그 스스로도 삼민당의 당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리진쿤이 북벌의 후반기에 있었던 결정적 전쟁인 '중원 대전'에서 전사하고, 그 후 삼민당의 당권을 왕룽이 장악하고 당 내에서 삼민당 우파(이들은 상기한 삼민당-국민당 분열에서의 '신 삼민당 우파'와 구별하기 위해 '구 삼민당 우파'로 통칭되기도 한다)들을 쫓아내면서, 리진쿤 계열과 삼민당 우파 계열이 연합하여 생겨난, 민국의 최초 야당이다.

이들은 오랫 동안 (정권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능력은 있었지만)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삼민당-국민당 분열에서 국민당이 정권을 창출하였을 때 국민당과의 연립을 창출함으로서[9] 최초로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국민당-민주연합회는 대체적으로 우파 정당이라는 점에서 오랫동안 협력적이었지만, 90년대 이후로 국민당이 총통 우위제를 확립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하면서, 리진쿤 이후로 계속 연성자치론의 충실한 지지세력이었던 민주연합회는 국민당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현재는 과거의 대립 세력이었던 삼민당과 연정하여 여당을 구성한 상황이다.

  • 공산당共産黨 Communist Party of China

공산당은 첸징슈陳敬受가 1920년대 창당한 정당이다. 이 시기 중화민국에는 공산주의 서적들이 많이 중국어로 번역되었고, 중국인이 직접 작성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서적이 많았지만, 대다수는 유럽의 사회주의 이념을 그대로 소개하거나 반복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레티시아 마르크스의 사상은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를 전제하고 쓰여졌기에[10] 송나라 말기에 근대식 공장이 많이 건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활한 영토가 산업화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여전히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다. 첸징슈는 레티시아 마르크스의 노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중국의 현실이 맞지 않다고 느꼈고, 농업인들을 사회주의의 한 축으로 삼은[11] 중국식 공산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현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크게 대립하고 내전까지 벌였지만, 본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국민당 좌파가 당권을 장악하고 일정부분 첸징슈와 '중국식 공산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벌였기에 그와 같은 대립이 벌어지지 않았고 공산당은 중화민국의 야당 중 하나로 현재까지 남을 수 있었다.

  •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Working Peoples` Party

근로인민당은 중화민국의 사회주의 정당이지만, 공산당이 농촌이나 저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수정주의' 노선을 수용했다면, 근로인민당은 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정통적' 마르크스주의 계통에 가까우며, 노동조합의 분권과 중앙에서의 약한 통제를 지향하는 정당이다. 근로인민당의 주요 활동가들은 대부분 첸징슈의 노선에 반대한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당시 중화민국이 완전히 서구식으로 산업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고 농민들의 수가 상당했기에 많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위 '수정주의' 적이었으며, 미텔란트 코무네 식의 공산주의 체제를 이행하는 것은 현지 사정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였기에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삼민당 내에서 비교적 강성한 좌파들이 삼민당이 '우경화' 되고 있다면서 삼민당을 비판하고 탈당하면서, 이들과 비 공산당계 강경 좌파들이 연합하여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 근로인민당의 주 지지 계층들은 공업도시의 노동자 계층이며, 미텔란트 코무네식 생디칼리슴을 지지한다.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산업노조들이 근로인민당의 강한 지지자들이다. 공산당과는 국가통제적인 공산당의 노동 이념과 조합분권적인 근로인민당의 노동 이념이 반대되기에 대립중이고 서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다툼을 벌이고 있다. 비교적 노동자 이득 우선적인 근로인민당은 하층 공장 노동자들의 지지면에서 우세하고 통제적인 공산당은 노동조합 간부들이나 상급자들에게 우세를 보이고 있다.

  • 중앙당中央黨 Chinese Central Party

중앙당은 중화민국 정계의 강성우파 성향 소수 정당으로(다만 극우주의 정당이라고는 할 수 없다),이들의 당명이 '중앙'당인 이유는 그들의 중앙집권적 성향 때문이다. 이들은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힘이 지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지방정부간 분쟁이 중화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아주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며, 국민대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원, 행정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당이 90년대 이후 대통령제의 강화와 중앙정부의 정권 강화를 주장하면서 국민당과 중앙당의 사이가 친밀해졌으며, 현재는 국민당-중앙당이 국민통합연맹이라는 입법원 내 동맹전설을 구축하고 있다.

  • 건안동맹建安同盟 Jian'an Alliance

건안동맹은 중화민국의 신흥 극우 정당이다. 건안동맹의 성향은 대체적으로 유럽의 현대 극우 정당들과 유사하며, 반이민, 반소수자, 반이슬람[12]. 반기독교[13], 반사회주의, 반생디칼리슴[14] 등의 노골적인 선전, 선동정책을 내세운다. 건안동맹은 중화민국의 하층 청년 계층을 주 지지층으로 삼아 성장하고 있다.

  • 태화당太和黨 Taihe Party / Great Harmony Party

태화당은 민국의 신흥 민족종단인 '상청교'에서 기반한 정당이다. 상청교는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에서 발흥한 신흥 민족종교이며, 중국의 도가 사상과 현대의 철학, 그리고 기독교적 교리가 혼합된 종교이다. 상청교는 중화민국 내에서 수천만의 신도를 두고 있는 큰 종교 중 하나이며, 교단 내의 조직력은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상청교는 교단에서 발원한 정당인 태화당을 두고 있으며, 일부 성의 국민대회에서 주요 세력을 차지하고 있고, 입법원에도 의석을 배출한다. 그러나 민국 내의 세속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은 태화당의 이념이 중화민국의 헌법 정신을 해치며, 즉시 정당을 해산하고 상청교가 종교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태화당의 이념은 상당히 복합적인데, 종교 교리를 기반으로 정치적 의견을 개전하다 보니, 이들의 종교적 성향에 의해 특정 정책은 극보수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동시에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좌파적인 교리를 내는 등 상당히 기묘한 행보를 보이는 정당이다.

  • 전중국불교연합全中國佛敎聯合 Chinese Buddhists` Party

전중국불교연합은 중화민국의 불교 정당으로 소림사 계열 승려들을 주축으로 한 불교 우파들[15]이 정치세력화한 정당이다.

  • 중화불심개혁회中化佛心改革會 Reformative Buddhist Union

중화불심개혁회는 세속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여 일부러 주요 정당에 대한 지지를 회피하면서 전중국불교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 민주주의 및 불교계 좌파들이 정치세력화한 정당이다. 전중국불교연합과 티베트에서 온 티베트 불교인들의 지지를 두고 다투고 있기도 하다.

  • 기독교강성회基督敎强盛會 Christian Power Party

초창기 중국 공화주의 세력들은 서구에서 공화주의 이념 등을 배우면서 서구의 기독교 사상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고, 중화민국의 건국유공자 중 하나인 저우자오위안의 일가도 기독교인일 정도로, 삼민당은 기독교에 우호적인 정당이다. 그러나 기독교 우파~극우세력들은 기독교 강성회라는 극단주의 정당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건안동맹과 유사하나 건안동맹이 강경한 반기독교 정당이기에 둘의 사이는 매우 매우 나쁘다. 한편 이들이 대한국(가상지구 BF)의 기독교 우파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 민권당民權黨 People`s Right Party

민권당은 후이족[16] 출신의 신흥 정치인 마허롄馬赫聯이 창당한 정당이다. 후이족 출신의 무슬림이지만, 간혹 돼지고기를 먹는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세속적인 무슬림이었던 그녀는 무슬림 사회 내부에서는 이슬람의 계율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단시되었고, 또 주류 한족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정통 중국인'이 아닌 무슬림 후이족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마허롄은 민권의식, 평등의식과 차별철폐 운동가가 되었고, 민권당을 창설하여 당수가 되었다.

민권당은 진보적, 좌파적 경향성이 있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삼민당의 이념과 비슷하지만, 삼민당은 중화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데 비해 민권당은 탈민족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 관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며, 중국의 고도 산업화에 따른 환경오염 문제가 점차 대두되자 민권당 내의 '녹색주의 파벌'(환경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민권당은 중국 내의 환경문제에서 주로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의 진정한 평등을 주장하며 이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민권당은 중국의 여러 소수정당들 중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정당들 중 하나에 속하며, 현재 삼민당 정권이 연립여당까지 될 정도로 그 위세가 커진 편이다.

  • 장인민족연합壮人民族聯合 Zhuang People's Union

장인 민족연합은 중화민국 내 자치공화국인 '광서 자치공화국'[17]내의 의석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 민족 정당이다. 중화민국의 초대 건국영웅 중 하나인 리진쿤의 혈통이 장족이기 때문에 이들은 민주연합회와 우호적인 편이며, 대체적으로 민주연합회의 주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 위구르 자치당维吾尔自治黨 Party for Uyghur Autonomy

위구르 자치당은 중화민국에 신생 편입된 위구르 자치공화국[18]내에서 주로 의석이 배출되는 정당이다. 위구르인들은 이슬람교도가 많기 때문에, 이들의 정책 중에서 이슬람주의적 정책이 많은 편이며, 간혹 '이슬람 극단주의'적 정책을 주장하는 강경 이슬람계 입법위원들이 존재하며 이것 때문에 타 정당들과 마찰을 빚는 편이다.

  • 대만 민주진보당臺灣民主進步黨 Democratic Progressive Party

대만 민주진보당은 중화민국의 대만 자치공화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는 정당이다. 대만 민주진보당은 다른 정당에 비해 독립 대만국을 주장하는 여론이 강한 편이다.


이 정당들은 입법원에 의석이 있는 정당만이 열거된 것이다. 이들은 국민대회에서도 많은 의석을 배출하지만, 국민대회에서는 특정 성, 광역시에만 의석을 갖고 있는 소규모 군소정당까지 합치면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역사

제국의 멸망

가상지구 BF 세계관의 중국권 지역에서, 중화민국의 바로 전에 존재했던 국가는, 15C경 건국된 한족국가 송나라宋이다. 당시 중국권의 천자국으로 군림하던 몽골 제국의 붕괴기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들 중 가장 강성한 세력을 이루고, 최종적으로 새로운 천자국이 된 나라가 송나라이다. 이후 이 송나라는 17세기 중엽에, 동북부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중국을 침략하러 한 '주르첸 족'에 의해 위기를 겪었으나, 이 위기도 극복해냄으로서 계속 중원의 패자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전통에 뿌리박힌 '천하' 개념 바깥에서, 이 천하를 뒤흔드는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세력들이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서구 유럽의 열강들이었다. 처음에 유럽의 각 열강들은 '평화적'으로 접근하여, 단지 중국의 물건들을 사가고 자신들의 물품을 교역하려 하였고, 이는 '오랑캐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신기한 것을 팔고 우리 것을 사 가는 것'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끝내 중국이 이들의 마음에 들지 않자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을 벌였다.

1842년에, 차 무역 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중국-알비온 전쟁은, 중국이 어찌저찌 이기기는 하였으나, 당시 알비온의 '최첨단 해군'과 '최첨단 병사'들은 한참 기술 수준이 낮은 송나라의 군대, 목제 군함을 손쉽게 격파했고, 이 전쟁은 송나라가 약 1,000 명의 병사를 이기기 위해 수만명의 군대를 투입하고, 때마침 알비온이 유럽에서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리면서 어쩔 수 없이 '철군'해야 했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승리 아닌 승리'에 불과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에게 각인된 서양은 '오랑캐'지만, '무섭고 끔찍한, 두려운 오랑캐'였던 것이었다.

제국의 수도 '베이핑北平'의 천자와 대신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수구적인 신료들은 현실을 아득바득 부정하려고 했지만, 당시 어린 황제의 섭정이었던 효숭현태후는 그나마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다. 태후는 즉시 천자국으로서의 위세를 내버리고 서구에 사절과 견학단을 보내, 머리를 조아리다시피 하며 서구 열강들의 문물을 배우려고 했다.

제국 말기에 명목상의 군주가 아닌 진짜 천자는 태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거의 100살 가까이까지 살면서, 명목상으로 존재하는 황제들을 꼭두각시처럼 부리고, 제 마음대로 황제를 교체하기도 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권력으로서 쓸 수 있었던 국가의 역량을 자신이나 측근들의 사치에 거의 쓰지 않고[19] 제도와 군대 등에 사용하기만 하였다.

송나라는 거대한 중국을 배경으로 한 나라였기에, 이렇게 국가역량을 총동원하면서 거의 '멱살잡고 캐리하기' 수준으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한 결과, 송나라는 어떻게든 외견상으로는 서구 열강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1891년, 일본의 함대가 송나라 인근 영해를 침범함으로서 발발한 '중국-일본 전쟁'에서, 제국의 함대가 일본 함대를 격침시키고 전쟁에서 승리 함으로서, 이 근대화가 전적으로 헛것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그 승리가 얼마 가지 않아 효숭현태후가 병사했을 때부터 송나라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근대화는 철저히 황제(실제로는 태후)의 권위로서 국민들의 불만을 억눌러가며, 철저히 위로부터 멱살잡고 끌려온 근대화였기에 백성들의 불만, 그리고 구체제를 추종하던 신료 계층의 불만이 넘쳐났다. 태후가 살아 있을 때는 태후가 직접 순방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때로는 제압하기도 하면서 나라를 통제했지만, 마지막 제국인이었던 태후가 죽고 나자, 억눌린 불만을 통제할 수 있는 유능한 이들이 없었다. 또 태후가 죽자 권력을 잡은 신료 당파들이 부패와 사치, 향락에 빠져들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이미 많은 수탈을 당한 송나라 백성들의 불만은 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서구 문물과 제도를 배워오는 과정에서 '공화주의'나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이념들이 들어오면서 중국인들 사이에 왕조 자체를 반대하는 기운까지도 늘어갔다.

제국의 마지막 심장이었던 태후가 죽고 나자, 급속도로 그 심장은 꺼지기 시작했고, 끝내 1907년, 제국의 국채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납세액을 늘린다는 정책에 반발한 백성들의 시위에 군벌,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다양한 세력이 얽힌 혼돈 끝에 제국은 붕괴해버렸고, 그 자리에는 그 당시 힘이 있던 군벌들이 난립하며 혼란에 빠지고 만다.

삼민주의와 삼민파

이 시기, 정말로 공화주의의 이념에 투철했든, 단지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을 뿐이건, 아니면 적당히 할거하고 싶었을 뿐이건, 혹은 자기가 새 천자가 되고 싶었던 간에, 송나라에 반대하던 각 세력들은 명목상으로는 공화주의를 수용한다는 선언을 하였고, 이들 중 몇몇 명망가들(반란 군벌, 송 제국의 멸망을 필연으로 받아들인 구 대신들, 공화주의 혁명가, 기타 반란가들 등)이 '한양漢陽'에 모여서, 민국 선언을 한다. 이는 현재 중화민국 정부의 공식 사관에서 제국시기의 종말, 민국시기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중화민국의 공식 건국시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민국을 만들자라는 합의는 있었으나, 정작 민국이라는 이름이 존재했을 뿐, 민국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시 서구의 공화주의 체제를 모방하여 구 제국 수도였던 베이핑北平에 '민국 입법회'를 만들자는 합의까지는 어찌저찌 진행되었고, 각 세력, 군벌들, 일부 명망가들이 적당한 대표자를 보내어 172명의 '입법 의원'들을 구성한 회가 생겨나기는 하였으나, 이들 중 몇몇 뜻 있는 이는 어떤 형식으로든 신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자기 세력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골몰하였으며, 군벌들은 노골적으로 입법회를 무시하였다.

제각기 나뉘어져 있는 군벌들의 목표는 단순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간에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그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이로 인하여 제각기 군벌들마다 자신이 '중화민국 정통 지도자'를 내세우며 민중들의 복종을 강요하거나, 반항하는 군벌이나 소규모 세력과 전쟁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어떤 세력은 '자신이 중화민국의 정통 지도자라고 국제적으로 승인받고 지원을 받기 위해' 외국에 이권을 팔아넘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에 중화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가 될 이'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쑨이셴孫逸仙은 송나라의 한 지역 유지이자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송나라의 '마지막 제국인' 효숭현태후의 근대화 정책에 의해, '외국 유학생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본래 유학생단은 '무기, 과학, 관료제'등을 배우라고 보낸 것이지만, 이셴은 그런 것들엔 크게 흥미를 두지 않은 대신, 철학이나 정치학 등에 더욱 흥미를 가졌다. 그는 근현대 유럽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역사, 그리고 당대 유럽을 떠도는 망령인 '레티시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 등에 매료되었다. 나라가 원하는 것을 배우지 않았던 쑨이셴이 아니꼬왔던 제국 조정은 쑨이셴을 유학생단에서 추방시켰지만, 그는 그곳에서 하류 노동자로 일하며 직접 도서관 등을 전전하며 독학하였다.

그가 자신만의 공부를 끝내고 (거지꼴로) 나라로 돌아왔을 때, 애국주의와 충정심이 엿보였던 과거의 쑨이셴은 없었고, 대신 철저한 공화주의 이념에 투철한 혁명가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송나라의 붕괴가 임박했을 때, 그는 처음에는 열렬하게 '제국의 붕괴'를 지지하였다. 제국이 붕괴되면 곧 공화국이 들어설 것이며, 반란자들이 바른 정부를 세워서 곧 서구의 공화국과 같은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다. '민국'의 이름은 있었지만 민국의 정부는 없었으며, 단지 왕, 황제, 천자의 행세를 하지 않았을 뿐 각지를 점거한 군벌 세력가들은 왕과 다름이 없었다. 적극적으로 입헌과 의회, 민치를 주장하던 쑨이셴은 전제적이던 군벌 세력가들에게 눈엣가시였으며, 심지어 이들은 쑨이셴을 체포하려고 하거나, 암살을 시도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래서 쑨이셴은 잠적하였다가, 밀항하여 일본국으로 도망갔으며, 거기서 '중국의 공화주의 이론'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저작에서 현 중국의 공식 이념인, 삼민주의, 즉 민족, 민생. 민권오권분립체제가 완성된다.

쑨이셴은 일본에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으나, 자신에 대한 군벌들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다시 돌아온다. 중국에서 그의 삼민주의와 오권분립을 담은 저서를 팔아먹으면서 그는 '민국을 정말로 만들자' 라며, 삼민주의의 당, 삼민당을 만들기 시작한다. 삼민주의가 중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군벌들을 붕괴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 당시 쑨이셴이 강남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여기서 봉기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자는 북벌론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현대 중화민국의 국체가 정해지다

그러나, 삼민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중국권에 많이 퍼졌다고 해서, 그들의 수가 많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수만 많았지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힘을 가진 것은 중국에 할거하고 있는 군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쑨이셴은 일종의 필요악으로, 당시 군벌 중 한 사람을 북벌의 동맹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당시 군벌들 중 리진쿤李進坤은 중국 대륙 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광서-광동 지역을 석권한 군벌이었고, 당대의 '무식한' 군벌들 중에서 현대적인 사상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며 단순히 힘을 탐하는 군벌이 아니라, 개요 문단에서도 언급되었든 연성 자치론을 주장하여 각 지역들이 자신들의 풍속에 따라 자치를 누리며 이들이 느슨하게 연합된 '중화 합중국'을 구성하자는 계획을 세울 정도로 사상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쑨이셴은 삼민주의를 주창한 투철한 공화주의자기는 했지만, 그가 생각한 공화주의자는 베이핑에 있던 '황제'를 '공화국 대총통'으로 바꾸고 황제의 황권 통치를 민국의 민권 통치로 바꿀 것을 생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쑨이셴이 주창한 삼민주의의 원안은 엄연히 중앙정부가 각 지역을 통제하는 '단일국가' 였다. 따라서 이들이 군벌을 무찌르고 하나의 중국을 만들자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 외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화합할 수 없었으며 서로 공개적으로 논쟁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중국의 지식인들, 그리고 다른 군벌들은 '삼민주의 나부랭이' 쑨원과 '멍청한 자치론자' 리진쿤의 연합이 곧 붕괴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예상은 제 3의 '중화민국 건국영웅'에 의해 멋지게 빗나갔다.

저우자오위안周敎援은 쑨원만큼 카리스마있고 연설력과 선동력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고, 리진쿤처럼 군재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는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에 진중한 무게와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쑨이셴이 삼민주의를 설파하는 저작과 연설로서 중국 대중들의 마음을 샀다면, 저우자오위안은 중국의 지식인들과 학자, 그리고 외국의 일부 지식인들 계층에서도 호감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제국의 대학자 집안 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전통적 사상보다는 서구의 현대적 공화주의를 더욱 지지하였고 그렇기에 쑨이셴의 편에 서게 되었다. 다소 이상주의적 몽상가로 끝났을 지도 모르는 저우자오위안을 쑨이셴이나 리진쿤보다 더욱 높이 사는 중국인들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다소 격정적이고 모호했던 삼민주의 이념을 실질적으로 체계화하고 정치적 적용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 저우자오위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신중한 태도와 무게감 있는 발언은 격정적으로 대립하던 쑨이셴과 리진쿤 사이를 중재하고 화해시킬 수 있었으며[20]또 대통령제를 지지하던 쑨이셴보다는, 저우자오위안의 내각제 지지와 내각제 계획이 리진쿤의 연성 자치론과 융합될 수 있었다. 저우자오위안의 노력에 의해 현재의 중화민국 체제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중국 남부를 석권하다.

리진쿤이 북벌의 포고문을 읽고 진군할때쯤, 쑨이셴은 병사하고 말았다. 리진쿤은 당대의 주요 군벌 중 하나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북벌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한 인망은 없었고, 저우자오위안은 지식인들과 명사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다소 모호한 사상가로나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북벌과 삼민주의의 상징이었던 쑨이셴이 병사했을 때, 그 뒤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면 북벌은 붕괴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그러나 북벌의 의기를 이어감과 동시에, 삼민당을 현재의 민족주의적 좌파 정당으로 이끌어간 새로운 아이콘이 나타났다.

왕후란王虎蘭왕룽王隆은 광서 지방 빈민가의 이름없는 '어느 왕씨'에게서 태어났으며, 태어나서 10대 중반까지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지만 당대의 '근대적 자선기관'을 통해서 운 좋게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이들의 야학에서 왕씨 남매는 '그들이 가난하고, 또 멸시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질서가 아니라, 타파해야 할 죄악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정의감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더더욱 공부해 들어가면서 이들은 '레티시아 마르크스'와 '카를라 엥겔스'의 공산주의 서적까지도 접하게 되면서 이들은 강경한 좌파 사상가로 변모해 있었다. 쑨이셴이 '삼민주의'를 주창하며 삼민당을 창당했을 때, 왕씨 남매는 즉각 삼민당에 입당했고 열성적인 당원이 되었다.

이들이 삼민당의 당원이 됨으로서 그들에게 엄청난 정치적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왕후란은 여성의 몸으로. 편견에 가득했을 중국의 남성들까지 홀릴 수 있는 데마고그적 선동 능력이 있었으며, 왕룽은 당이라는 하나의 조직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들의 천부적인 재능은 사망한 쑨이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리진쿤이 자신의 군벌 군대를 동원하여 다른 군벌을 격파하고 복속시킨다면, 왕후란은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삼민주의를 따르라는 연설을 하였고, 또 '그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인들의 절반인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여, 삼민주의와 삼민당에 동조하는 여성회, 부인회들을 결성하고 이들이 (남성들만 주목하고 있는 현상에서) 물밑에서 삼민당에 우호적인 현지 공작 세력이 되었다. 이 여성회들은 자발적으로 북벌군에게 물자를 제공하거나, 부인회의 인맥을 통해 군벌 휘하의 하위 장교층이나 병사층을 분열시키는 등 북벌군의 '제 5열'[21]이 되었으며, 왕룽은 쑨이셴의 권위가 부재했을 때 삼민당의 들끓는 혁명가들을 안정시키고 분열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중국 북쪽에서도 중국의 구 수도 베이핑을 근거지로 한, 구 제국군 중앙부를 근원으로 두는 베이핑 군벌 또한 주변의 군벌들을 타협, 정복 등으로 흡수해가며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베이핑 군벌 또한 자신들을 중화민국 정통 정부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삼민당과 베이핑 군벌 양쪽은 결국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삼민당의 왕룽은 그래도 베이핑 군벌과의 협상과 공동 정부를 제안하는 회담을 제안하였지만, 이 회담이 이해 차이로 결렬됨으로서 평화적 타협의 기회는 사라졌다.

1928년, 중원대전이라고 일컬은 삼민당 - 베이핑 군벌간의 전쟁은 상호간 무승부로 끝났다. 이 전쟁에서 삼민당 측은 리진쿤이 전사함으로서 3축의 한 핵심이었던 '군사적 재능'이 소실되었고, 베이핑 군벌 또한 많은 피해를 내서 '남벌'을 할 여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핑 군벌의 수장이었던 위안커푸元可普가 식중독에 의해 급사함으로서 남벌 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된 측면도 있었다. 이렇게 혼란기에 빠졌던 중국 대륙은 북쪽의 베이핑 군벌, 남쪽의 삼민당으로 양분된 채 대치하게 된다.

남중국기: 왕룽 체제, 군정에서 훈정으로 이행하다

중화민국(삼민당 정부)의 총통 자격으로 의전상 국가원수로서 제 1인자의 대접을 받았던 리진쿤이 사망하고, 오랫동안 밖으로 돌아다니며 연설과 선동을 했던 왕후란이 그동안 고생했던 것의 반동으로 금세 병사하자, 삼민당의 권력 축 내에 왕룽만이 남았다.

이 때 일시적으로 총통의 자리를 쟁취하거나, 3축에 자신을 끼워넣으려고 하거나, 혹은 왕룽을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 존재했지만, 탁월한 내부정치와 행정 능력을 가졌던 왕룽에게 조용히, 또는 요란하게 깨져서 떨어져나갔고, 왕룽은 잠재적 적수들을 모두 숙청해버린채 삼민당의 최고 1인자가 되었고, 저우자오위안의 내각제 계획을 받아들여 왕룽은 삼민당 정부를 총통제에서 내각제로 개편함으로서 왕룽은 중화민국의 초대 민국수상이 되었다. 저우자오위안은 왕룽의 지도체계를 받아들이고 명예직에 가까운 총통직을 받아들였다. 이 때 삼민당 내에서 이탈한 나머지 게파들이 현재 중화민국 내의 야당의 기원이 된다.

왕룽이 삼민당 내 확고한 1인자가 된 1930년부터, 북중국 베이핑 군벌이 일본국과 손잡고 삼민당 정부를 침공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남중국기라고 일컫는다. 이 시기는 '북벌이 중단되고 내치에 중심하다' 라는 모토로 국가가 운영된 시기였다. 왕룽 주석이 말한 대로 농민을 안정시키고 공업을 육성시켜 양쪽 모두 굳건해지자인 것이다.

현실 중국과는 다르게 송 제국 시기, '마지막 제국인' 태후의 국가주도 근대화 정책에 따라 중국 전역에는 기본적인 산업 인프라와 현대적 농업 인프라는 비교적 많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제국 붕괴와 군벌 난립기 시기에 이 인프라들이 더 발전되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파괴되기도 하였다. 왕룽 정권의 제 1차 목표는 이 인프라를 복원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사회에 만연한 빈민(빈농과 빈공)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국제 세계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핏빛 수요일이라는 대공황 사건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황에 빠졌지만, 중화민국(남중국)은 이 혼란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착실하게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미텔란트 코무네의 도움 때문이었다. 생디칼리슴적 사회주의 국가인 미텔란트 코무네는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부터 배척되었고 다른 나라의 경제블록에서 소외되었기에, 역으로 대공황의 피해에서 비껴갈 수 있었으며, 동아시아에 새로이 선 (이념적 노선은 다르기는 하지만) 신생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민국'에 대단히 친근감을 느끼고 상호 협력했기 때문이다. 미텔란트 코무네에서는 중화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기술자와 자금을 지원했으며, 반대로 중화민국에서는 국내의 자원 인프라를 개발하여 미텔란트 코무네의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고, 또 어떤 품목들은 중화민국에 공장을 지어서 외주 생산을 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화민국 - 미텔란트 코무네는 상호 협력을 통해 서로 이득을 보았으며, 미텔란트 코무네의 도움으로 인해 왕룽이 내세웠던 '농민을 안정시키고 공업을 육성시켜 양쪽 모두 굳건하게'는 큰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왕룽은 지나치게 내치에 치중한 나머지 외교 및 국방을 소홀히 하고 있었고, 이 시기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극단주의의 조류, 그리고 복수의 칼과 침탈의 칼을 갈고 있던 두 나라(북중국과 일본국)를 망각하였다. 그리고 이 망각의 댓가는 1939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호되게 치르게 된다.

대전쟁-세계의 참화: 위기의 시기

북부 중국(베이핑 정부) 또한 자신들이 '정통 중화민국'이라고 주장하는 군벌들 중 하나였다. 제국 붕괴 후 혼란기에는 여느 군벌과 다를 바 없이 할거하는 세력 중 하나였던 베이핑 군벌이었지만, 중앙군 출신이라는 이점 때문에 결국 다른 군벌보다 조금 더 역량상 우위에 설 수 있었고, 북부 중국의 수장인 위안커푸元可普가 타 군벌들을 무릎꿇리거나 직접 분쇄하면서 베이핑 군벌이 중국의 '질서'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위안커푸는 '새로운 공화국'을 선언하면서 뛰쳐나온 남쪽 중국의 리진쿤, 쑨이셴, 왕룽, 저우자오위안 등을 결코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위안커푸가 직접 지휘한 '중원대전'에서 베이핑 군벌이 삼민당군의 리진쿤을 살해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운이 나쁘지 않았다면' 베이핑 군벌이 남벌을 상행, 삼민당을 붕괴시키거나 남쪽 끄트머리에 유폐시킬 수 있었겠지만, 얄궂은 운명에서 위안커푸가 식중독의 합병증으로 급사하면서 일이 깨지게 된다.

위안커푸 사후 누가 군벌의 수장이 될 것인지 권력 승계에 혼란이 왔고, 중원대전의 후속 전투는 '남벌'이 아니라 '화북전쟁'이 되었다. 군벌들 중에 누가 질서를 잡을지를 두고 싸운 그들만의 내분이었다. 이 내분을 틈타 삼민당은 지금까지 진출했던 남 중국 지역을 확고한 삼민당 정부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왕룽 주석 체제가 출범하면서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화북전쟁의 승자는 '투원시途文系'라는 반(半)관료, 반군부인사였고, 그가 베이핑 정부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절반쯤은 관료였기 때문에 행정 관료들에게 인망이 있었고, 그 인맥을 통하여 다른 군벌들보다 탄탄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국가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투원시는 위안커푸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남벌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에 집착했다. 하지만 화북전쟁에서 그가 다른 경쟁자들을 꺾는 동안 남중국은 체제를 안정화시키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는 몇 차례 남중국에 대해 소규모 교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렇게 되면 남중국의 경제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북중국은 점차 밀려나고 말 뿐이라는 생각에,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국은 '황도파'라 불리는 청년 군벌들의 쿠데타를 황제가 직접 승인하면서 '황도파의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 황도파들은 일본 황제의 위광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는 팽창주의에 가득 차 있었다. 투원시는 일본과 비밀 회담을 통해 북중국에 무기를 지원하고, 또 일본군과 북중국군이 합동으로 중화민국을 무찌른 다음 베이핑 정부가 중국을 통일하고, 일본국의 자본이 남중국에 진출하여 이익을 분점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1939년, 일본국 함대가 중화민국의 영해에서 시비를 일으키고, 이에 분개한 중화민국이 '외교적으로 무례하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중화민국에 선전포고하고, 베이핑 정부 또한 '일본국의 동맹'으로서 중화민국에 선전포고한다. 이 전쟁은 1939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1940년에 일어난 세계의 참화보다 빠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세계의 참화'의 일부로 간주된다.

왕룽 정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줄을 예상하지 못했고, 당시의 우호국인 미텔란트 코무네는 이 침공을 격렬히 비난하며 일부 지원을 시도했지만,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1940년 새해에 그들도 프랑스 불의 쌍둥이 십자 정권과 대 라이클란트 합중국의 '파시스트 동맹'인 신성동맹의 침공을 받음으로서 자신들의 앞가림이 더 급한 상황이 되었다. 초창기 전황은 파죽지세로 밀리기 시작했고, 해안도시 중 하나인 광저우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광저우 학살을 벌인 것은 이 전쟁에서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왕룽 주석은 급히 난징을 비우고 서부 내륙 지역으로 임시수도를 옮겼으며, 이곳의 공업지대를 군수기지화 하여 최대한 저항할 것을 천명하였다. 삼민당 정권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해안 인근 지역의 공업지대를 철거하여 내륙으로 옮겼다. 이들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는 않았다. 대신 중화민국은 '우리가 다 죽는 그 상황을 최대한 늦추고 그때까지 저항하자'라는 발악을 내세웠다.

한편, 전황의 변화를 부른 나비효과는 일본국 측에서 시작되었다. 일본국은 남중국의 해안 지대를 점거한 다음, 병력의 상당수를 중국에서 철수시킨 다음 북진을 천명하며 미시온 왕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로서 일본군은 대부분 해안지대를 점거 후 천천히 진군하는 전략을 입안했으며, 실질적인 전쟁은 '북중국 대 남중국'으로 흘러갔다. 일본국과 투원시의 북중국 모두 이 전술이 크게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전략적 우위를 확보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일본보다 더 동쪽에서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그 거인은 바로 북아메리카 커먼웰스였다.

일본국과 북중국은 신성동맹의 가맹국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는 신성동맹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이들 또한 '자유를 위협하는 적'으로 취급받았고, 따라서 이들의 적이었던 중화민국 또한 북아메리카 커먼웰스의 지원 대상이 되었다. 당시 알비온의 식민지였던 인도권을 통해 중화민국은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았고, 대전 내내 중립을 지키며 세력을 가리지 않고 식량을 팔았던 대 맹방국 또한 북아메리카 커먼웰스의 지원물자에 중화민국으로 식량을 끼워 팔았다. 비록 대부분의 지원은 유럽의 알비온이나 미텔란트 코무네로 흘러들어갔지만,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약간의 지원만으로도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미시온 왕국도 여력이 되는 한 '중화민국군이 일본-북중국 동맹을 최대한 잡아놓기 위한' 목적으로 중화민국을 지원하였다.

'세계의 참화' 대전쟁은 결국 반극우 연합군이 신성동맹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그러므로 중화민국도 승전국이었다. 북중국은 결국 중화민국군에 밀려서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후 협상 과정에서 중화민국(난징 정부)는 북 중국을 합병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20년 뒤의 동아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동아전쟁: 현재의 판도 수립

중화민국은 그 전쟁에서 국체를 수호하고 승전국이 되었지만, 그들 스스로의 상처가 너무 컸고, 또 북 중국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민국수상이었던 왕룽은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후에 총리가 된 이는 대일-대북 전쟁의 군인 출신이었던 양쭝정樣中正이었다. 그는 전쟁영웅으로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 집권하기는 하였지만, 전후 불거진 왕룽 총리의 전쟁대비 문제(그가 경제 성장에만 집중하여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등한시하였고, 결국 전쟁 초창기에 크나큰 피해를 불러온 것) 및 양쭝정 행정부의 무능함 문제 때문에, 난징 정부 설립 이후 굳건했던 '삼민당 우위' 체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만년 야당이자 제 1 야당이었던 민주입헌회의 공세는 매서웠고, 또 삼민당 내에서도 계파 갈등이 일어져 삼민당은 '하나의 당명을 내의 여러 정당'인 상황이었다. 결국 1960년에 삼민당 내의 '신 삼민당 우파'들이 대거 삼민당을 이탈하여 국민당을 세웠고, 이 때문에 삼민당은 의회 해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으며, 재총선 결과 국민당이 집권하게 된다.

전쟁에 참패한 북중국 정부는, 전쟁의 책임을 모두 투원시와 그 측근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거리에서 조리돌림시키고 총살시키는 것으로 책임을 대충 덮어씌웠으며, 편을 바꿔서 가장 인접한 전쟁의 승전국이자 강대국인 미시온 왕국의 세력권에 편입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미시온 왕국 측에서도 명목상 대전쟁의 승전국으로 인정받고 강국이라고 보자면 볼 수 있는 중화민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였으며, 완충국 측면에서라도 북중국 정부의 존속을 원했기 때문이다. 북중국 정부는 난징 정부와의 도발을 일차적으로 접어 두고(공식적으로는, 남중국이 자신들의 정당한 영유권이 있다는 입장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내부 수복 및 경제 성장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 중국 정부의 서쪽 지대에서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혁명 시기 후이족 지구를 포함한 북 중국 서부는 삼민당을 지지하고, 삼민당 영역으로 편입되려는 여론이 강하였다. 그러나 현지 군벌이 삼민당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고 투원시의 북중국에 순종하는 것을 택하였기에 그 당시에도 친 삼민당 운동을 폭력으로 강경진압하였던 것이었다. 이 시기 남중국의 삼민당은 중원 대전에서 전략적으로 실패한 후 북벌을 '유예' 하고 왕룽 체제 하에서 지배력이 미치는 곳에서의 근대화를 우선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형식적으로만 규탄했을 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한 차례 무력으로 억압받았다고 해서 이곳의 여론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투원시 이후로도 베이핑 정부 세력권 내에서 서쪽 지역은 상당히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고, 반면 남중국은 왕룽 체제 및 대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 지역의 거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북중국의 군사 정부를 증오하고 중화민국에 편입되는 것을 원하였다.

1964년, 결국 불씨가 터졌다. 북중국 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공장 폭발 사고로 인하여 2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들의 구조 및 보상이 미약하다며 제대로 된 보상을 추구하는 시위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지역 갈등이 결합되어 북중국 정부 및 북중국 중앙과 결탁하는 현지 행정부에 대한 규탄과, 오래전부터 주장했던 중화민국으로부터의 편입을 주장하는 북중국 분리주의-중화민국 통합이라는 정치적 항쟁으로 변하였고, 이번에는 중화민국 행정부도 적극적으로 해당 지역민들을 도울 생각을 하였고, 아예 국민대회 설립 절차까지 밟기 시작했다. 대놓고 이곳을 중화민국 지역으로 삼겠다고 작정한 것이었다. 이에 북 중국에서는 이것이 베이핑 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발 행위라고 항의하였고, 북중국을 지원하는 미시온 왕국대한국(가상지구 BF)는 중화민국이 주권국의 내정을 침해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북중국 정부의 서부 지역에 대한 무력진압 시도가 이어지며 서부 지역민들의 항쟁, 그리고 점차 군사개입의 가능성을 높여 가던 남-북 중국은, 북중국 공군기에 대한 중화민국군 방공기지의 격추 시도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다.

북 중국 행정부는 지난 대전쟁 이후로 본격적인 전력에서 자신들이 중화민국에 대해 열세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미시온 왕국과의 우호체계를 통한 군사적 지원을 받는 것을 전략의 핵심 요소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대단히 불행하게도 미시온 왕국은 전폭적으로 자신들의 동맹국을 지원할 생각을 세워놓았지만, 이 시기 미시온 왕국에서 벌어진 전면적인 경제혼란 때문에 군사적 지원을 할 여유가 없었고, 단지 대한국(가상지구 BF)을 대리자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대한국군은 잘 훈련되고, 또 동시에 잔인무도했지만, 전황을 뒤집을 만큼의 전략적 가치를 하지는 못했다. 반면, 중화민국은 전쟁 이후, 비록 무능했을지언정 양쭝정 행정부도 군비 증강에 매진했으며, 미텔란트 코무네로부터 공군력을, 그리고 북아메리카 커먼웰스로부터 육군 기갑전력을 도입하여 인근 지역 내의 지역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전쟁의 최후 승자는 중화민국이었으며, 북중국을 상대로 2전 2승의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미시온 왕국의 팽창을 경계한 위구르국이 자발적으로 중화민국의 자치공화국으로 편입되는데 동의하여, 중화민국의 세력권이 그만큼 확장되는 이득을 얻었다.

국기와 연방기

가상지구 BF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22]와 "연방기"(별다른 별칭 없음)가 동시에 존재하는 나라이다. 청천백일만지홍기에서 좌측 상단의 '청천백일' 부분은 본래 쑨이셴이 송 제국 말기, 반체제 공화주의 인사로 활동하던 시절, 그가 몸담고 있던 어느 혁명조직의 비밀 상징이었다. 현재의 중화민국은 그 혁명조직의 비밀 상징을 국기와 연방기 양쪽에 모두 등장할 정도로 청천백일 문양은 매우 중요한 중국의 상징기호이지만,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23] 다만, 알려진 역사에 따르면 청천백일 문양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쑨이셴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쑨이셴이 삼민당을 만들었을 때, 기존의 청천백일 문양에 붉은 바탕을 더해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만들고 이를 삼민당의 상징으로 삼았다.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청색(군청색) 부분은 민족을, 태양을 묘사한 하얀 부분은 민권을, 그리고 적색 바탕은 민생을 뜻한다, 즉 청천백일만지홍기는 민족, 민생, 민권의 삼민주의를 이미지화한 것이었다.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만들어진 이후, 삼민당과 삼민당의 동맹 세력이 중국 남부를 석권하고 어엿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을 때, 당시 삼민당 정권의 민국수상 왕룽이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중화민국의 국기로 공식화하였다.[24]

본래 쑨이셴이 생각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의 국가였지만, 세계의 참화 전쟁 이후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명목상 중화민국의 영토 대만 섬을 반환받고, 중화민국(남중국) 영토 내 소수민족이었던 장족이 북중국 및 일본 침략자 세력에게 맞서 싸우면서 용맹한 전과를 올린 것에 대한 댓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여론이 중화민국 내에서 들끓으면서 국기에 대한 반대 여론도 끓어올랐다. 중화민국 내 소수민족들과, 삼민당을 제외한 여타 정파들은 중화민국이 삼민당만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했으며, 모든 중국인들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국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한동안 중화민국 정계를 강하게 끓어오르게 한 이 논쟁 끝에, 타협안으로 다음과 같은 사안이 정해졌다.

  • 중화민국의 국기는 청천백일만지홍기로 유지하며,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의미는 삼민당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이 공유하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 중화민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뿐만 아니라, 중화민국내 제민족, 그리고 자치공화국 모두를 포함할 수있는 '연방기'를 제정한다. 중화민국 연방기는 오색 선 중앙에 청천백일 문양이 자리잡은 것으로, 오색의 선은 중화민국을 이루고 있는 여러 민족들과 자치공화국들의 화합을, 그리고 청천백일 문양은 그들이 삼민주의의 이념으로 하나로 단결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화민국의 일반 지방자치구역(성과 특별시) 관공서에는 중화민국의 국기로써 중앙정부를 상징하는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고(해당 지역의 성법에 따라서 성/특별시의 상징기가 동시에 게양될 수도 있다), 중화민국의 특수 자치구역(자치공화국 등 특수행정구역/소수민족 자치구)에의 경우에는 각 특수자치구역의 깃발과 중화민국 연방기가 동시에 게양된다. 그리고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기관(각 정부청사, 입법원, 형법원과 민국법원 등)에는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와 중화민국 연방기를 동시에 게양한다.[25] 중화민국의 주요 경제 도시 중 하나이자. 일자리를 찾아서 여러 자치공화국, 소수민족 자치구에서 이주해온 타 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국민대회의 다수파인 진보주의자들의 표결에 의해 '상해 특별시의 상징기 +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관할을 나타내는 국기 + 상해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들의 화합의 상징인 연방기' 모두를 게양해야 한다는 성법이 제정되어 있다.

자치공화국

중화민국은 각 성들이 지방자치의회에 해당하는 국민대회에서 자체적인 성법을 만들고, 그것을 행사하는 자치적인 행정부가 있는 연방제적 국가이지만, 그보다 더욱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받는 특수한 단위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중화민국 내의 자치공화국Autonomous State이다. 이들은 중화민국 본토에 영향력이 미치는 민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중화민국 헌법에만 구속받는 자치적인 법을 제정하며, 본토의 성 및 행정부와는 다른 형태의 통치기구 및 자치의회를 조성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이 중화민국의 다른 행정구역과 비교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이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도록 자치공화국 지역에 할당된 입법원 의석이 배정되어 있으며 입법원 총선거를 통해 입법원 의원을 배출한다. 나라 안의 나라 라고 요약될 수 있는 방침에 따라서 이들은 중화민국 헌법상의 기본권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구역내에서 국가급의 위상을 갖는다. 이들은 자체 국기를 제정하며, 연방기와 함께 자체 국기를 계양한다. 현실 세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홍콩/마카오처럼, 이러한 자치공화국들은 중화민국 '본토'와 별개의 여권을 발행하고, 일부 국제기구에서 중화민국과 별도의 명의로 활동한다. 하지만, 이들은 중화민국 헌법에 의해 삼민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 체제를 따를 의무가 있다.

대만 자치공화국

[26]

대만 자치공화국의 국기[27]

대만 자치공화국Taiwan Autonomous state는 중화민국 최초의 자치공화국이다. 대만 섬은 구 제국 시기 명목상 제국에 속했을 뿐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은 지역이었고, 제국이 반란으로 붕괴되던 시기 일본 해군에 의해 점령되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비록 대만 섬이 중국 본토의 행정력이 한정되어 있었지만, 일단은 중국의 영토로 간주되었기에 중화민국 헌법 상 대만 섬 또한 중화민국의 고유한 영토였고 일본이 이곳을 불법으로 침탈했다는 것이 중화민국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세계의 참화' 대전쟁 이후 전후 협상 과정에서 대만 섬은 중화민국 영토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일본 식민지 시기 대만 지역이 급속도로 근대화되고 경제적 발전을 겪었기에, 대만 거주민들은 일본 체제에 우호적이었다. 그 이유에서 '대만 섬 지역의 국민대회 설치' 및 '친일 관료 청산' 작업은 지지부진하였으며, 결국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연합회' 측의 '확장된 연성자치론' 제안을 따르게 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 성'에 대한 직속 통치(다른 성과 동등한 행정구역화)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일제시대부터 유지된 현지인 관료 조직을 유지하고, 자체적인 제도를 유지하는 자치공화국을 두었다.

대만 자치공화국은 중화민국 내 자치공화국 중 가장 부유하고 발전된 지역이다. 중화민국인 개개인의 삶의 질을 비교했을 때, 대만인의 삶의 질이 평균적으로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대만은 어느 자치공화국보다도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크고 대만의 자체적 위상도 높다. 다만, 자치공화국 계획이 중화민국 본토 및 대만 거주자(중국인과 구별되는 대만 원주민을 포함한다)들의 타협을 이루어내기는 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아서, 대만의 높은 경제력을 토대로 독립 대만국을 구성하려는 대만 독립파의 기세가 강하며, 입법원에서 대만 자치공화국으로 배정된 몫의 과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대만의 지역정당 '대만 민주진보당' 중에서도 상당수가 입법원에서 공공연히 독립 발언을 할 정도이다.

남녕 자치공화국

[28]

남녕南宁 자치공화국Nanning Autonomous state는 중화민국 광시(광서)성 지역에 위치한 자치공화국이며, 장족의 자치를 배려하여 만들어진 중화민국의 두 번째 자치공화국이다. 장족들은 중국 내의 소수민족 중에서도 수가 많고 또 삼민당의 북벌 시기부터 많은 이들이 혁명에 동참하였고 항일 전쟁에서까지 수많은 피를 흘렸고 그만큼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중화민국사의 중요 인물이었던 리진쿤 또한 혈통적으로 장족 혼혈이었다. 대만 자치공화국이 세워지자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장족들은 독자적인 자치공화국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남녕 자치공화국이라는 그들의 자치공화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남녕 자치공화국은 중화민국 내 자치공화국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자치구역이다.

남녕 자치공화국 내에서는 장족들의 고유 언어인 장어가 복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서량 자치공화국

[29]

서량 자치공화국기

서량西凉 자치공화국Xiliang Autonomous state은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서북쪽의 돌출부 지역에 존재하며, 회족들이 주류인 자치공화국이다. 서량 자치공화국은 동아전쟁 이후 중화민국(남중국)이 새로 획득한 영토 지역에 성립되었다. 본래 서량 지역[30]은 북벌 시기부터 노골적으로 삼민당과 쑨이셴 등을 지지하고 자체적으로 국민대회를 수립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며, 서북 지역민들이 계속 가지고 있던 북중국 군벌 정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결국 동아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회족들은 주로 이슬람교도들이 많기에 서량 자치공화국의 주 종교는 이슬람이다. 중화민국의 주요 정당 중 하나인 '민권당'을 설립한 마허롄이 회족(후이족) 태생이며 서량 자치공화국에서 태어났다.

투르케스탄 자치공화국

[31]

투르케스탄 자치공화국기

투르케스탄東突厥 자치공화국Turkestan Autonomous state는 현실의 신강-위구르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자치공화국으로, 중화민국의 네 번째 자치공화국이다. 본래 투르케스탄 지역은 1960년대까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미시온 왕국의 세력 확장 야욕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북 중국과 미시온 왕국, 그리고 친 미시온적인 몽골(가상지구 BF) 사이에 포위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아전쟁에서 중화민국이 승리하면서, 중화민국령 서량 지역과 투르케스탄이 육로로 인접하게 되었고, 미시온 왕국이 대혼란기에 빠져들게 되자. 투르케스탄의 위구르 인들은 미시온 왕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중화민국과 외교적 협상 끝에 중화민국의 자치공화국이 되는 것에 동의하였다.

투르케스탄 지역의 위구르인들은 회족처럼 이슬람교도이지만, '민족적' 관점에서 한족과 거의 유사한 회족과 달리 한족과 고유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했던 사람들이기에, 투르케스탄 자치공화국의 젊은 20~30대들은 자치공화국으로의 편입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다시 독립해야 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게다가 최근 발흥하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 물결에 투르케스탄인들이 동조하는 경우가 많아(회족에 비해서 그 비율이 높은 편이다) 중화민국 내 이슬람 혐오를 조장한다는 우려가 있으며, 그 혐오를 기반으로 극우정당인 건안동맹 등이 지지를 늘리고 있다.

각주

  1. 본 이미지에 대한 출처: 해당 페이지
  2. 제국 붕괴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3. 의원내각제적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대총통은 실권이 없다.
  4. 나라 1개란 뜻이 아니라, 중앙 정부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나라. 한국 또한 지방 자치를 실행한다고 하지만 중앙정부의 권력이 지방보다 막강한 단일국가의 일종이다.
  5. 이 때문에 저우자오위안이 중화민국의 건국 영웅들 중 실질적으로 중화민국을 설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높다.
  6. 중화민국은 지속적으로 산업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농업의 비중이 매우 높으며 그만큼 인구에서 농민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7. 표 최초 제작:Communist 1968 / 내용 업데이트: Creative
  8. 현실에서의 현대 독일 사민당의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9. 단순히 확보한 의석으로는 삼민당이 여전히 1위였지만,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국민당-민주연합회의 의석이 50%를 넘김으로서 국민당-민주연합회가 주도하여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10. 미텔란트 코무네가 계승한 레스카티에 연방 왕국도 산업화가 많이 진척된 나라였다.
  11. 현실의 공산주의에서도, 카를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오히려 농민들은 공산주의 혁명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12. 특히 중화민국 내에서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신강 자치공화국은 이들의 주된 증오선전 대상이며, 현실 세계에서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일베저장소가 전라도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드립의 노골적인 강화판이라고 볼 수 있다.
  13. 기독교 또한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의 끄나풀로 간주하고, 중국의 기독교 신도들 또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첨병이라고 배격한다.
  14. 2010년에 건안동맹을 지지하는 20대, 30대 청년들이 난징에 위치한 미텔란트 코무네의 대사관을 습격하고 외교관들을 폭행함으로서 외교적 문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
  15. 본 세계관 중화민국 불교 우파의 구심점이 소림사라는 설정이다
  16. 현실 중국에도 존재하는 소수민족으로, 중국에 정착하여 한족화된 무슬림 또는 무슬림으로 개종한 한족들을 일컫는다.
  17. 현실이 광서 장족(좡족)자치구에 대응
  18. 현실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응
  19. 심지어는, 함대를 만들기 위해 자금이 부족하자고 하자, 황실의 의전 비용을 축소할 정도였다.
  20. 다만, 쑨이셴이 설득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쑨이셴의 장인어른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1. 현실 스페인 내전에서, 쿠데타군 수괴 프랑코가 자신에게 4개의 부대뿐만 아니라 적의 뒤에서 호응하는 제 5열이 있다고 발언한 데서 유래함.
  22. 현실의 중화민국-대만이 사용하는 청천백일만지홍기와 동일하다
  23. 이 내용은 가상지구 BF 세계관의 가상국가 중화민국에서의 설정일 뿐, 실제 역사의 청천백일 문양의 역사와는 다르다.
  24. 이후 한동안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삼민당의 당기이자 중화민국의 국기로서 사용되었지만, 후일 삼민당은 당 상징을 개정하여, 청천백일 부분만을 삼민당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삼민당에서 분열해 나간 국민당 또한 청천백일 문양을 포함한 상징을 당기로 사용한다.
  25. 이에 대해서, 소수민족의 자치구역과 자치공화국에서는 자신들의 깃발 또한 모두 동등하게 게양할 것을 요구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26. 원본 출처: [[1]]
    저작자: Jeff Dahl
    저작권: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International
  27. 이 깃발은 현실 역사에 존재했던 '타이완 민주국'의 국기이기도 하다.
  28. 출처: [2]
    저작자: Hosmich
    저작권: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Unported
  29. 출처: [3]
    저작자: Xuma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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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서량은 중국 고대사 때 서북 지역을 일컫는 단어였는데, 동아전쟁 이후 자치공화국을 수립할 때 옛 역사에서의 명칭을 다시 꺼내서 명명하게 되었다.
  31. 출처: [4]
    저작자: Tarkan
    저작권: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 3.0 Unp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