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의원 (강남구 갑)
20대
이종구
21대
최태곤
현직
제19대 노동부장관 (김대중 정부)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 (노무현 정부)
제4대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 (문재인 정부)
제21대 국회의원
최태곤
崔泰坤 | Choi Taegon
출생
1961년 3월 16일(1961-03-16) (63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압구정동[1]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본관
경주 최씨 사성공 예파 37세손
학력
대왕국민학교 (졸업)
은성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경제학 / 제적)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 석사)
가족
아버지(1929년생, 1999년 작고)
어머니(1935년생, 2008년 작고)
배우자 유난희, 슬하 2남 1녀
신체
169cm, 55kg
종교
가톨릭교 (세례명 : 베드로)
병역
면제 (수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1
지역구
강남구 갑
소속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
현직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강남구 갑 위원장
약력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평화민주당 창당 발기인
민주당 통합협의회 위원
제19대 노동부 장관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
열린우리당 대변인
국민참여당 수석대변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제4대 기획재정부 장관

개요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 진보진영 최악의 험지라고 불리는 강남에서 11번의 낙선을 거듭하였으며 송철호, 노무현과 함께 '낙선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에서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하였다. 강남갑에서 최초로 진보 성향 정당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군으로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정치적으로는 동교동계로 분류된다. 신고 재산은 총 1038억 4315만원으로,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중 가장 재산이 두번째로 많은 국회의원이다.

생애

1961년 3월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압구정동(現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태어났다. 생가 터가 현재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위치해있으며, 현재 살고있는 집은 개발할때 1976년에 현대아파트가 지어질때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땅을 넘길 수 없다며 가산을 털어 산 집이라고 한다. 조상들은 무려 고려시대때부터 강남 지역에서 살아왔으며, 강남구에 가지고 있었던 전답이 상당히 많았던 관계로 부친이 땅의 일부만을 팔고도 떼돈을 받을 수 있었다.[2] 그래서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도 돈이 상당히 많은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우수한 성적으로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980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을 하다가 1학년도 채우지 못하고 제적되었으며 1982년 다시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1993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운동권

신문에 자주 회자될만큼 강성 운동권이었으며, 1980년대 운동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학교 선배에 이끌려 1980년 서울의 봄에 동참했다가 심재철 학생회장의 연설을 듣고 동요되어 적극적으로 운동권에 동참하였다. 1981년 1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시위에서 경찰에게 잡혀가 3개월동안 고문수사를 당하였고[3]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기까지 하였다. 징역 2년 5개월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강남구 전답 하나를 팔아서 돈을 마련해 겨우 그를 감옥에서 빼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운동권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1986년 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다시 열성적인 운동권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1987년 6월항쟁 당시에는 성균관대학교를 대표하여 시위에 동참하였다.

정치 행보

1988년 사실상 대학을 졸업하고[4] 김대중의 영입 제안을 받아 평화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종로구 차출이 예상되었으나, 자신의 고향인 강남구에서 출마한다고 선언했으며 결과적으로 18.8%를 득표해 3위로 낙선했다. 당선자는 통일민주당황병태 의원. 이후 신민주연합당에서 당직 생활을 하다가, 1991년 민주당을 창당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통일국민당 김동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4대 총선 직후 김대중의 총재비서로 일했다. 이런 경력 때문에 동교동계의 막내라고 불린다.

김대중 총재를 따라서 1995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갑 선거구에 출마했고 또다시 낙선했다. 서상목 후보와 표차이가 꽤 나서 다른 지역에 차출될 것이라는 말이 많았고 종로구 재보궐 선거에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설이 돌았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차출되었고 자신은 계속 강남구에서 정치생활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6.4%를 얻어 2위로 또다시 낙선했다. 낙선 이후에는 대북특사로 방북하였고, 6.15 정상회담에서 협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6.15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1년 김대중 정권의 마지막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으로서 기대할만큼의 성과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무난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만에 고용 유연화와 삼성그룹 무노조 눈감아주기 의혹은 논란이 많다.

대통령 경선에서는 한화갑 후보가 아닌 김근태 후보를 지지했고, 김근태 후보가 사퇴한 이후에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해 경선 승리를 도왔다. 장관을 지낸 뒤 몸값을 키워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남구청장으로 출마했으며, 야권의 분열과 노풍으로 잠깐 여론조사에서 앞서기도 했지만 투표율 저조로 인해 생각보다 큰 표차로[5] 패배했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때 천정배와 함께 가장 먼저 열린우리당으로 당을 옮겼다. 노무현 탄핵 소추 의결 당시 탄핵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탄핵 역풍으로 잠시 강남구 갑에서 당선 확률이 높았으나,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지지율이 하락해 초접전 끝에[6] 또다시 낙선하고 만다. 2004년 12월 윤진식 장관에 이어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일은 역시나 뛰어난 행정가답게 무난하면서도 잘한다는 평가. 2006년 3월 개각되었으며 후임은 후일 국회의장이 되는 정세균. 장관을 두번이나 지낸 만큼 천정배 법무부장관과 함께 2006년 서울시장 후보군으로 낙점되기도 했지만 경선에서 강금실 후보에게 패하여 나가지 못하였고, 대신 강남구청장 선거에 나갔지만 처참했던 대통령 지지율 때문에 20%도 넘기지 못하고 참패했다. 2007년 대북특사로 북한에 방문하였으며,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재정이 입각함에 따라 무산되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갑 지역구에 출마해 또다시 낙선했다. 이후 이재정, 유시민이 창당한 국민참여당으로 당을 옮겼다. 다른건 몰라도 비노, 동교동계로 분류되었던 그가 국민참여당으로 당을 옮긴 것은 의문이었는데, 손학규 대표와의 갈등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국민참여당 내에서는 '야당같은 야당'을 내걸며 동교동계와 친노계의 화합을 강조했지만, 당 내에서 소수파에 그치며 그리 많은 지분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장관을 두번이나 지낸 중진이었기에 서울시장 출마설이 누누히 나오긴 했었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였고 국민참여당 후보로 경선에서 승리해 출마했으나, 진보 단일화 경선에서 패배[7]하였다. 이후 2011년 하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국민참여당 소속으로 서울시장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무소속 박원순 후보와의 경선에서 또다시 패배하였다.[8] 2011년 진보대통합을 위해 국민참여당을 탈당하고 이재정과 함께 민주통합당에 입당하였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고 또다시 큰 표차로 낙선하였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며 당선이 어렵다는 여론조사 결과[9]가 나왔으나 정작 출구조사에서는 두 후보가 5%p 내외의 초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와[10] 선거 캠프에서 환호성이 나오기도 했다. 최종 결과는 이종구 51.8%대 최태곤 48.2%로 초접전 끝에 패배하였지만, 강남구 역사상 민주당 최대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강남구 을에서 전현희 후보가 당선되면서 하마터면 강남에서 민주당 소속 의원이 두명이나 나올뻔 하였다.

2017년 문재인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로 임명되었다. 험지인 강남갑에서 꾸준히 도전하였으면서도 강경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에서 같은 운동권 출신 험지 출마자인 김부겸과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제부총리로서 경제 실적을 악화시켰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며, 장관으로서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때처럼 좋은 평가를 듣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중진인만큼 노련한 인사 장악력을 보이기는 했다는 평가. 2019년 3월 도종환 문체부장관과 함께 개각되었고 후임 인사는 홍남기로 정해졌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경선 참여를 고려했으나, 장관직을 사퇴하지 않아 자동적으로 자격이 박탈되었다.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상대는 탈북 외교관 출신의 태영호. 해당 지역에서 60 평생을 살아왔다는 점을 강조한 최태곤 후보가 꾸준히 여론조사에서 앞섰으며, 설상가상으로 미래통합당 이종구 의원이 컷오프에 반발하여 무소속 출마하면서 최태곤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올라갔다. 태영호 후보는 탈북자 학생 장학금 등 실속 없는 공약을 내세워 민심을 잃었으며, 그 결과 최태곤 후보가 51.2%를 득표하면서 40.1%를 득표한 태영호 후보와 8.5%를 득표한 이종구 후보를 크게 앞지르면서 당선되었다. 전현희 후보가 재선에 성공한것도 최태곤 의원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강남구 갑은 선거구 획정 이후 최초로 진보성향 정당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게 되었으며, 최태곤 역시 정계입문 32년만에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게 되었다. 종로나 영등포같은 어중간한 수도권 선거구에서 출마했다면 최대 8선까지 가능했을수도 있지만, 최태곤 개인이 고향을 떠날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한다. 당선 확정 이후에는 32년만의 당선이 감격적이었는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임종석, 이인영 등과 함께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고려되고있다. 노웅래 의원이 발의한 통일부장관 부총리 승격안이 통과되고 통일부장관으로 임명될시 무려 부총리를 두번이나 지내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민주당 정권 시절에 장관을 다 지내본 사람은 최태곤이 유일하다.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장관 경력으로 그마나 그와 비슷한 체급의 정치인은 김진표 정도.

논란

조선일보 기자 폭언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조선일보 기자를 상대로 '신한국당 측에서 염탐왔냐. 여기엔 무신 볼일이냐' 라고 초면에 막말을 하였고 거기에다가 '조선일보는 신한국당 기관지 아니냐. 새정치민주연합과 김대중 선생님에게 한번만 더 주둥이 놀리면 고소해버릴태니 그런줄 알아라'라고 협박까지 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후 국민참여당 출신으로 서울시장에 출마하여 이것이 논란이 되자 '철 없는 젊은 시절의 실수였으며,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막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에 또 조심을 가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다만에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나라당 당직자 취중 막말 논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05년 역삼동의 한 횟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한나라당 당직자들을 싸잡아 비난한 것이 뒤늦게 논란이 되었다. 최태곤 장관은 박근혜를 '제대로 말도 못하는 어벙이' 오세훈 의원을 '아직 잘 모르는 5살 친구'라고 지칭하였는데 이것이 2014년 강남구청장 선거 직전에 뒤늦게 논란이 되어 크게 곤욕을 치뤘다. 결국 강남구청장 선거에서 생각보다 큰 표 차이로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에 대한 욕설은 오히려 재평가받는 분위기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 비판

종합부동산세 폐지 주장 및 1인 1주택 원칙 반대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지역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락 비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평화민주당
16,438
18.8%
낙선 (3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민주당
30,246
30.4%
낙선 (2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새정치국민회의
17,432
21.1%
낙선 (2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새천년민주당
32,532
36.4%
낙선 (2위)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강남구청장
새천년민주당
76,043
33.3%
낙선 (2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열린우리당
40,366
41.1%
낙선 (2위)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강남구청장
열린우리당
59,432
19.5%
낙선 (3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통합민주당
23,452
25.1%
낙선 (2위)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국민참여당
사퇴 (민주당 한명숙과 단일화)
2011년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국민참여당
사퇴 (무소속 박원순과 단일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민주통합당
41,121
40.3%
낙선 (2위)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강남구청장
새정치민주연합
80,432
42.1%
낙선 (2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더불어민주당
54,532
48.2%
낙선 (2위)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구 갑
더불어민주당
60,321
50.3%
당선 (1위)
초선
역대 선거벽보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2014년 지방선거
파일:2020 최태곤.png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무려 14전 11패 2무 1승이라는 대기록의 사나이. 그 한번하기도 어렵다는 장관을 무려 3번이나 역임했음에도, 강남에서 몇번씩이나 떨어지는 것이 인터넷에서 컬트적인 인기가 되어 '낙선의 아이콘'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죽하면 광주에서 출마해도 낙선할거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 다만에 2020년 32년만에 당선되어 드디어 13연패의 기록을 깼다.

아직 초선에 불과하지만 사실상 8선이나 다름없는 초선이라고 불리며, 꾸준히 서울특별시장 후보군 혹은 대권 후보에도 오르는 정치인이다. 거물중에 거물이라는 이해찬조차 최태곤에 비하면 난 세내기라고 낮춰 말할 정도이다. 동교동계임에도 불구하고 계파색이 옅고, 또 친화력이 높은 덕분에 당내 조직도 괜찮은 편이다.

낙선을 거듭해서 가산이 남아나질 않을것같다는 말을 많이 받지만, 재산이 무려 1000억원을 넘을 정도로 부유한 의원이다. 물론 그중 90% 이상이 부동산에 포함되어있는 금액이다. 최태곤 의원曰 아버지가 물려준 전답에 아파트들이 모조리 들어와서 집 한채만 팔아도 10년 선거자금 나온다라고... 1인 1주택 원칙에 거부하면서 욕을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기부를 많이 하는 국회의원으로도 유명하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평화민주당
1988년 - 1991년
정계 입문
신민주연합당
1991년
당명 변경
무소속
1991년
탈당
민주당
1991년 - 1997년
입당
무소속
1997년
국민승리21 창당을 위한 탈당
새정치국민회의
1997년 - 2000년
국민승리21 창당
새천년민주당
2002년 -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전까지 활동
열린우리당
2003년 - 2007년
창당
대통합민주신당
2007년 - 2009년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
무소속
2009년
국민참여당 창당을 위한 탈당
국민참여당
2009년 - 2011년
창당
민주통합당
2011 - 2012년
진보대통합을 위한 입당
민주당
2013 - 2014년
당명 변경
새정치민주연합
2014 - 2015년
창당
2015년 -
당명 변경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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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브

이름은 강남 지역 낙선자인 재성(송파을), 강(용산구), 김성(강남갑)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만든것이며, 사진속 인물은 전라남도 국회의원인 서삼석이다.

김부겸과 김영춘, 이정현, 김성곤 등 여러 인물을 본따서 만들었으며 가장 크게 모티브를 준 국회의원은 전현희와 이해찬이다.

각주

  1. 現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2. 당시 가지고 있었던 전답의 일부가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의 부지였다고 한다.
  3. 이 때문에 고문후유증이 조금 있는 편이다.
  4. 학점이 약간 모자라서 졸업은 못하던 상황이었다.
  5. 한나라당 후보가 45.3%를 득표했고, 최태곤 후보는 33.3%를 얻는데 그쳤다.
  6. 한나라당 이종구 44.3%, 열린우리당 최태곤 41.1%
  7. 한명숙 65.1%, 최태곤 34.9%
  8. 박원순 50.3%, 최태곤 32.1%, 박영선 17.6%
  9.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 이종구 60.3%, 더불어민주당 최태곤 22.1%
  10. 새누리당 이종구 52.9%, 더불어민주당 최태곤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