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예스코 폰 푸트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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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빅 군관구 장군상급참모감
카를-예스코 폰 푸트카머
1900년 3월 24일 ~ 1981년 3월 4일
이름
본명 독일어. Karl-Jesko Otto Robert von Puttkamer
중국어. 卡尔-耶斯科·奥托·罗伯特·冯·普特卡默(kaěr-jiǎn yēsīkē àotuō luóbótè féng pǔtèkǎmò)
한국어. 카를-예스코 오토 로베르트 폰 푸트카머
신상 정보
출생 출생일 1900년 3월 24일
출생지 독일 제국/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
사망 사망일 1981년 3월 4일 (향년 80세)
사망지
사인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
최종 국적 대게르만국
가족 부모, 누나 1명, 남동생 3명, 자녀 2명
종교 고트글로이비히
당적 NSDAP 1933년 ~ 1981년 3월 4일
서명
이력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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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카리빅 군관구 장군상급참모감
1944년 11월 23일 ~ 1972년 11월 20일
전임 신설
후임 폐지
군사 정보
군 이력 복무 황립해군 1917년 ~ 1918년
국가방위군/국가해군 1918년 ~ 1935년
독일 국방군/전쟁해군 1935년 ~
최종 계급 독일 전쟁해군 중장
주요 보직
참전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개요

카를-예스코 오토 로베르트 폰 푸트카머(독일어: Karl-Jesko Otto Robert von Puttkamer, 1900년 3월 24일 ~ 1981년 3월 4일)는 대게르만국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생애

1944년 발키리 작전이 실행되었을 당시, 푸트카머는 히틀러의 부관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폭발로 인해 4명의 참석자가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은 상황 속에서, 푸트카머는 슈파이델과 함께 가장 먼저 히틀러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어 회의실에 침입한 괴한과 푸트카머는 총격전을 벌였으나, 외부에서 대기 중이던 무장친위대가 진입해 괴한을 제압했다. 푸트카머는 이 사건으로 왼쪽 다리가 절름발이가 되었고 퇴역을 신청했으나, 히틀러는 그에게 푸에르토리코 영토의 관리를 맡겼다. 카리빅 군관구은 히틀러가 충성을 다한 그에게 준 보상으로, 명목상 독일의 군정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푸트카머의 개인 휴양지와 다름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과거 지휘했던 구식 함정, 마찬가지로 부상으로 더 이상 복무가 불가능하게된 측근들, 그리고 해역 관리를 위한 본토에서 파견된 크릭스마리네에게 해군 기지를 내어주고 은퇴 생활을 보내고 있다.

히틀러 사후 하이드리히 정권에서는 푸트카머의 카리빅 군관구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지시했고, 퓌러가 직접 현지를 시찰하며 푸트카머와 해군 관련 회고를 하기도 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1]

푸트카머는 그가 죽기전까지 잔 후안을 거점으로 전직 해군 상호부조협회(독일어: Hilfsgemeinschaft auf Gegenseitigkeit der ehemaligen Marineangehörigen)를 운영하며 협회장을 맡았다. 그의 사후 카리빅 군관구는 주둔하던 크릭스마리네 사령부에 배속되어 군정청으로 재구성되었다.

참고

외부 문서

  1. 실리적인 부분보다는 선전 소재로 훌륭한 경우이기에 게르마니아는 후에도 그의 정권에 대한 회수 조치를 계획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