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코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Коре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파일:Flag of Empire of Japan.png
1948년1991년
국기 국장
국가 KSSR의 국가
수도 프헤니안 (Пхеньян)
정치
공용어 러시아어, 조선어
정부 형태 사회주의 공화국
역사
 • 설립
0 • 해체
1948년
1991년
인구
1991년 어림 29,575,000명
기타
통화 루블

코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어: Коре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 Корея CCP 코레아 소베츠카야 소치알리스티체스카야 레스푸블리카[*])은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이루었던 16개 공화국 중 하나로, 현재의 러시아의 자치국인 코리아 공화국에 있던 공화국이다.

코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함께 소련과는 별도로 유엔에 가입되어 있었다.

역사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 지상락원 구현'을 표방하였다. 대부분의 공산권이 몰락하던 1980년대 말까지도 소련 내에서 가장 잘살면서 성장하고있는 공화국으로 여겨졌다. 말 그대로 사회주의의 최전선이었다. 하지만 1991년 고르바쵸프에 의한 소련 붕괴러시아 연방으로의 편입을 겪으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본국이 안정될 때 까지 별다른 지원이 나오지 않아서 성장에 치명타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대기근이 겹치면서 잃어버린 10년을 겪게된다.

소련 편입 과정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 북쪽에는 소련이 남쪽에는 미국이 각각 진주하게된다. 이후 김일성 등이 소련에 남부 미군에 대항할 새 공화국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소련역시 이에 동감하고있었다. 그러나 승전국의 회담에서 스탈린의 원래 목표였던 일본 분할점령은 미국의 GHQ에 원천 봉쇄당하고, 한반도를 38도선으로 완전히 나눠버리게되자 회담에서 스탈린은 불안을 느끼게된다.

여기에 당시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소련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사회민주주의 계열 인물들을 포섭하게된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사민계열 구성원들은 1947년 9월 평양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당시 주석이었던 이승만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미군정과 미의회에 긴급 타진한다.

이승만은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상원의원들과 접촉하며 남한지역의 미합중국 편입을 역설하였다 상원에서는 8000km밖에 떨어진 남한지역이 과연 미합중국에 어떤 안보·경제상 이득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에 이승만은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 NATO와 남쪽끝인 남아공과 더불어 미국이 굳이 당시에 안보상 이유를 제외하고 매우 무가치했던 땅인 알래스카를 매입한 이유와 같이 동쪽 끝인 한반도가 유일하게 소련에게 족쇄를 채울 수 있는 위치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상원은 이러한 주장에 미온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1950년 중국이 공산화되고나서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방어선이 후퇴했음을 전 세계에 퍼트렸고 이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세력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설상 가상으로 미국에선 매카시즘이 불면서 반공기운이 거세지면서 이승만의 또 한 번의 연설을 통해 1950년 7월 17일 미군정 한반도가 미합중국에 편입되었다.

소련에서는 미합중국 본토가 아시아에까지 넓혀졌다는데 심각한 불쾌감을 표출하였으나, 이것으로 소련은 태평양으로 향하는 부동항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었고 일본 전역이 소련의 동북아 방위라인으로 설정될 수 있었다. 이내 북한지역에 코리아 소비에트 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1950년 10월 13일 정식으로 코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고 소련에 가맹하도록 하였다.

미·소 한반도 영유권 협정

1951년부터 사우스코리아와 코리아소비에트 간에 국경 문제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 38도선을 기준으로 나눈 탓에 사우스코리아는 서북부의 월경지를 방어하기 어려웠고 코리아소비에트는 코리아소비에트의 역사적 거점인 개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1953년 7월 27일까지 16번의 회담을 통해 양 당사자는 현재와 같은 국경을 유지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인근 거주민들은 양 체제 중 어느곳이라도 원하는 곳으로 편입될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은 미·소의 체제의 우위를 평화적으로 증명하는 첫 국제무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코리아소비에트에서 22만 3천명이 사우스코리아에서 14만 7천명이 상대지역으로 넘어가 소련의 자존심을 구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소련은 이들의 결정이 옳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세계에 다시한번 우위를 보여주기위해 코리아소비에트에 막대한 지원을 퍼붇게 된다.

계속되는 지원과 사회주의의 최전선

1953년 소련은 곧바로 코리아산업위원단(Корейская промышленная комиссия)을 KCCP내에 설치하고 경제의 주도권을 넘기도록 조치하였다.

KIC(코리아산업위원단)는 와 를

화려한 불꽃과 소련 해체

러시아 연방 편입

역대 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