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협의회
정회원국
크라스나야 대공국 카스캐디아
크라스나야 대공국
Красивая Великого княжества
국기 휘장
위치
역사
루스도시동맹 1290년 9월 11일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 1385년 10월 23일
크라스나야 공국 1856년 2월 24일
크라스나야 대공국 1860년 11월 16일
주권선언 1917년 6월 17일
결정 1918년 1월 8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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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크라스크
행정수도 아프릴리우스
면적 532,200 km2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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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68,523,750 (2020년, 21위)
민족구성 41.0% 크라스나야계
14.0% 사할린계
13.3% 중국계
12.0% 러시아계
8.7% 한국계
5.0% 일본계
6.0% 기타
인구밀도 128.75명/km2 (71위)
출산율 1.74명
공용어 크라스나야어
사할린어
공용문자 키릴문자
라틴문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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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연방제 양원제
크라스나야식 입헌군주제
차르 안드레이 크라스나야
수상 니콜라이 큐니르
부수상 세르게이 리
황실평의회 의장 엘리자베타 크라스나야
최고평의회 의장 엘리자베타 소마네치
군대 크라스나야군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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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수정자본주의
GDP 3,325,114,968,750 달러
1인 GDP 48,525 달러
외환보유액 397,516,000,000 달러
신용등급 무디스 A1[20]
S&P AA[20]
Fitch AA[20]
공식화폐 크라스나야 루블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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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9 ~ +10

크라스나야 대공국(영어:Grand Dukedom of Krasnaya/노어:Красивая Великого княжества Krasivaya Velikoye Gertsogstvo)은 동북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유즈노 크라스나야 제도를 비롯하여 오딘제도, 사할린 섬, 쿠릴 열도, 스더니츠키 제도, 프리모르스키 지방 및 속령인 세베로 크라스나야 제도, 아이리스 제도, 달니아(다롄)를 점유하고 있으며, 국토의 대다수가 오호츠크해에 있어, 러시아 연방에 둘러쌓여 있는 형태이다. 서쪽으로는 아무르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육로로 맞다아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보고 있으며,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남부에 있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쪽으로는 소야해협과 네무로 해협을 기준으로 일본과 마주보고 있으며, 동쪽은 태평양과 마주하고 있다. 수도는 유즈노 크라스나야 제도에 위치하고 있는 '크라스크'(Краск, Krask)이며, 사할린섬의 중부에 위치한 '아프릴리우스'(Aprilius)가 행정수도로써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극동아시아에 속해 있으나, 문화, 정치, 사회적으로는 유럽과 훨씬 가까워서 아시아의 유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크라스나야는 1930년대 후반부터 경제학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케인스키 학파의 본고장으로서 현대 주류 경제학의 중심지이자 거시경제학의 시발점이라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크라스나야는 케인스키의 경제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미국의 자유방임 시장경제와 소련의 중앙계획 공산경제에 맞서는 혼합자본주의 체제를 현대적으로 개발한 국가이기도 하다.

케인스키에 따르면 자유시장체제에서 소비의 과잉 도는 과소가 요동을 치고 그것이 경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여 시장의 결점을 보완해야 한다. 즉 국민의 과소 소비는 공장 자동화 등에 의한 기업의 대량생산물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생산 부분의 고용 및 투자부진이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진단에 따라 케인스키와 크라스나야 정부는 생산과 소비, 화폐, 고용, 금융 등을 동시에 고려하는 거시경제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개발을 주도하는 혼합자본주의 체제에 힘입어 크라스나야는 극동의 변방소국에서 20세기 경제 혁명의 중심지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개발된 국가중 하나가 되었다.

지리

동북아시아의 지형도

크라스나야는 국토의 절대다수가 오호츠크해와 그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 둘러쌓여 있는 형태이다. 서쪽으로는 아무르강을 경계로 러시아 연방과 육지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쪽으로는 소야 해협과 네무로 해협을 경계로 일본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쿠릴열도와 스더니츠키 제도의 동안은 태평양과 마주보고 있는 형태이다.

국토의 절대 다수는 신생대 제3기 마이오세기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으며, 빙하기 당시의 유즈노 크라스나야 제도등의 오호츠크의 섬은 육지와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으다. 홀로세기의 시작시기인 약 1만년 전, 마지막 빙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대다수의 국토가 산악지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평야를 제외한 국토의 절대다수가 산악지형이다. 대륙부인 프리모르스키 지방에는 1,300km 길이의 시호테알린 산맥이 있으며, 절대다수의 평야는 해안가와 아무르강 인근 지역에 펼처저 있으며. 해양부 중에서 가장 큰 섬인 사할린 섬에는 서(西)사할린 산맥과 동(東)사할린 산맥이 섬의 양쪽으로 펼처저 있으며, 그 사이에 거대한 평야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형을 가지고 있다.

하천의 유량은 1년내내 일정한 편이며, 가장 큰 강으로는 대륙부에 속해있는 아무르강과 그 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이 있다. 해양부에서 가장 큰 강은 사할린 섬의 포로나이 강과 팀 강(Tym River, Sakhalin)이 있다. 하천은 정비가 잘 되어있기는 하지만 겨울에는 결빙으로 인하여서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크라스나야는 일부 속령을 제외한 영토의 대다수가 북위 42도~북위 56, 동경 130도~ 동경 155도 사이에 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대륙부는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c, 동계 한랭 건조, 선선한 여름)이며, 해양부는 오호츠크 기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냉대 습윤 기후(Dfb, 동계 한랭, 따뜻한 여름, 건조기 없음)를 띈다. 연간 강수량은 약 500~1000mm 사이이며, 1년내내 강우량/강설량이 일정한 편이다.

기원

이 지역에 루스인이 정착한 것은 13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땅에 최초로 성립된 국가는 크라스나야 도시동맹/루스 도시동맹이다. 허나 도시동맹은 고대 그리스와 비슷한 느슨한 연합의 체제였지, 중앙집권의 국가가 아니기에 결국 내분으로 망하였고 실질적으로 이 땅에 최초로 들어선 중앙집권 국가는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이라고 불리우는 국가이다.

명나라의 '고이서기'(苦夷書記)에서는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과 조선을 비교하여, '조선은 순종적인데 반하여 고이는 반항적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청나라의 '고엽서기'(庫葉書記)에서는 사할린 공화국을 '새로운 질서에 반발한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명이 적은 고이서기와 다르게 청이 작성한 고엽서기에서는 수 많은 마찰로 청나라가 수차례의 무력을 행사하였고, 청과의 마찰로 하여금 사할린 공화국이 급격하게 쇠퇴한 상황에서 제정 러시아의 장군인 '렌코비치 크라스나야'(Lenkovichi Krasnaya Ленковичи Красная)가 군을 이끌고 공격을 해오면서 이 땅의 국가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

근대 크라스나야의 뿌리는 제정 러시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1854년에 성립된 크라스나야 공국으로 시작하여 1890년에 크라스나야 공작이 대공작이 되면서 성립된 크라스나야 대공국으로 이어지는 이 땅의 국가의 역사는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제정 러시아 역사의 일부분이었으며, 10월 혁명으로 하여금 러시아라는 국가가 실질적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되고, 크라스나야 대공국이 주권선언을 함으로써 자주국가로써의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역사

이 땅에서 루스인이 주류민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3세기 전후로써, 당대 유럽의 최강 국가였던 킵차크 칸국이 원나라에 조공으로써 보낸 루스인이 그 시작이다. 원의 조정이 이 지역의 개척에 루스인을 동원하였고, 그 과정 처음으로 이 땅의 주류민족으로써 자리를 잡는 도시동맹(Rus Grad Alliance : 1290~1385)이 건국되게 되었다. 도시동맹은 그리스의 도시와 같은 참주정 체제의 민주국가를 만들어 냈으며, 초기에 이 참주정의 체제로 하여금 공정한 국가의 운영이 이루어졌다. 이후 크라스크의 참주자리 독점이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참주정에 불만을 가진 세력인 동부동맹(Esatern Grad Alliance : 1320~1385)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동서분규(Grad Crisis)가 발생하였고, 동부동맹과 서부동맹(Western Grad Alliance)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동부동맹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참주의 자리를 크라스크가 독식하는 크라스크 일극체제(Krask Era/Krask Grad Alliance : 1385~1420)로 재편되지만, 크라스크 일극의 도시동맹체제는 그래 오랜 시간 지속되지 못하였고, 결국 같은 서부동맹의 일원이자 크라스크의 파트너였던 톰스크(Tomsk)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해백전쟁(海白戰爭 : Krask-Tomsk Civil War : 1420~1425)이 일어나게 되고, 도시동맹은 결국 지속된 내전 이후 국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Republic of Sakhalin/Kui Theocracy : 1435~1720)에 침공을 받아, 정복당하게 된다.

사할린 공화국/쿠이법국(Republic of Sakhalin/Kui Theocracy : 1435~1720)은 작게 본다면 동부동맹의 패잔세력, 크게 본다면 원나라 시기부터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루스인 이주정책으로 사할린에 이주한 루스인, 토착민족이었던 아이누 민족과 일부 만주의 유목 세력들이 통합되면서 성립된 동아시아의 역사에서는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정교회 국가였으며,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최초로 성립된 공화국이었으며, 동시에 세계 역사에서 유일하게 공화제 체제에서 신정제 체제로 전환한 신정국가이기도 하다. 쿠이 법국은 최초로 크라스나야 제도와 그 부속도서,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을 비롯한 외만주, 알단 고원, 캄차카 반도와 아이누 모시르(현대의 홋카이도), 스더니츠키 제도 등의 현재의 크라스나야에 강역과 거의 유사한 곳들을 자신의 강역으로 만든 최초의 국가이다. 명, 조선, 일본등과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유교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정교회에 접목되게 되면서, 이는 극동 정교회(Far East Orthodox)만의 상징으로써 자리를 잡게 된다. 특히 공화정체제의 종식을 통한 신정체제 전환이래에 쿠이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가 쿠이의 전성기를 명백한 증명는 동방십자군(The Eastern Crusades)일 것이다. 명나라와 쿠이의 세력이 직접적으로 수 차례나 충돌하였으며 이는 실제로 이 전쟁으로 하여금 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아시아의 질서를 상당히 흔들렸다. 이후 장군들의 시대(The Age of Generals)가 개막되게 되고, 추가적으로 강행된 명나라 원정,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지원등으로 국력이 급감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국력의 감소는 누르하치의 후금 건국으로 이어졌으며, 후금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명청교체시기, 후금과의 전쟁으로 하여금 대륙부의 영토를 잃게 되면서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꾼 이후에는 수 차례의 쿠이 원정을 강행하였고, 결국 쿠이는 지속적인 전쟁으로 하여금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후 제정 러시아의 장군인 렌코비치 크라스나야(Lenkovichi Krasnaya : 1639~1701)가 코사크 기병을 이끌고 와서 쿠이의 수도였던 아프릴리우스에 무혈로 입성하였으며, 결국 쿠이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러시아의 차르가 전쟁에서 활약한 렌코비치 크라스나야 장군이 가문의 시조였던 블라디미르 로즈니키가 이반 뇌제에게 하사 받았던 가문의 성의 따와서 처음으로 이름 없는 루스인들의 섬을 크라스나야 제도라고 명명하게 된다.

제정 러시아 통치시기(Ruling Time of Russian Empire/Before Dukedom of Krasnaya : 1701~1856)는 이 지역의 루스인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과도기적인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러시아인들이 일부 유입되면서 러시아인과 지역 토착민들과 루스인들을 구분하는 개념인 사할린 민족(Kuirish)이 생겨났다. 제정 러시아 점령 초기, 사할린 지역의 토착교회로써 자리를 잡고 있던 극동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의 사이에서 알력다툼이 있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극동정교회를 이단으로 지정하고 이를 탄압하기에 이른다. 제정 러시아의 이러한 탄압에 반하여서 만주, 연해주, 사할린등의 각지에서 동방십자군(The Eastern Crusades/Order of Saint Basileus : 1711~1717)이 소집되게 되고, 일련의 사태로 하여금 모스크바에서 열린 자치공의회 극동 정교회를 총대주교좌 산하의 독립교구로써 인정하게 된다. 특히 극동 정교회가 자치교회로 인정받게 된 이후 지역의 통치를 제정 러시아로부터 일임받게 되었고, 주교회의가 지역의 통치권을 되찾게 되면서 이 시기 사할린과 크라스나야 제도 일대 지역을 과거 법국 시절만큼이나 안정적으로 통치하기에 이른다. 제정 러시아의 통치시기는 사실상 장군들 시대 이전의 법국의 재림이었으며, 사실상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

현대에 들어서서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크라스나야 가문/로즈니키 가문은 처음부터 이 지역의 영주였던 것이 아니다. 모스크바 대공국(Velikove Knyazhestvo Moskoyskoye : 1238~1547)시절부터 이어져온 러시아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유서 깊은 이 명문 귀족가문은 이반 3세, 바실리 3세, 이반 뇌제 등 러시아의 군주들의 심복으로써 그들을 보좌한 크라스나야 가문의 시조인 블라디미르 로즈니키(Vladimir Roseniki : 1472~1531)가 이반 뇌제로부터 크라스나야라는 성을 하사 받으면서 이어지게 된다. 크라스나야 가문은 로마노프 왕조의 개국 공신이며, 동시에 시베리아 정복의 선봉으로써 활동했었다. 특히 크라스나야 가문은 크림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새워 러시아가 불리한 상황에서 타파하게끔 하였고, 결과적으로 러시아에 손해가 없는 조약을 체결하게끔 함으로써 차르는 크라스나야 가문에게 크라스나야 제도를 비롯한 극동의 땅을 영지로써 수여하기에 이른다. 특히 영지를 수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준독립상태의 크라스나야 공국(Dukedom of Krasnaya : 1856~1860)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실질적으로 현재에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며, 통치하고 있는 크라스나야라는 국가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60년, 크라스나야 가문이 베이징 조약(Convention of Peking)의 협상을 주도하면서 러시아의 염원이었던 부동항을 확보하였고 이 공으로 하여금 왕족이외에는 전러시아에서 유례가 없는 대공의 작위를 받게되면서 크라스나야 대공국(Grand Dukedom of Krasnaya : 1860~)이 성립되게 된다. 특히 대공국의 성립 초기에는 크라스나야 대공(Grand Duke/Prince of Krasnaya/Velikiy knyaz' Krasnaya)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주하고, 장차 대공작위를 계승하게 될 사할린 변경백(Margrave of Sakhalin)이 영지를 전담해서 관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대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이후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비치(Maria Alexandrovich : 1874~1949)와 크라스나야 대공인 알렉산드르 크라스나야(Alexander Krasnaya : 1868~1932)와의 정략결혼이 성립되고 크라스나야 가문은 황가인 로마노프 가문만큼이나 러시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 1904~1905)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게 되면서, 전쟁을 주도적으로 지휘했던 크라스나야 대공의 입지는 위태로워졌고, 특히 이 시기 니콜라이 2세는 크라스나야 가문을 굉장히 위협적으로 생각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크라스나야 대공의 견제하고자 하였던 일부 귀족과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Yefimovich Rasputin : 1869~1916)이 크라스나야 대공이 역성혁명을 꾸미고 있다는 루머를 퍼트렸고, 제정이 오흐라나와 경찰을 동원하여서 이를 조사, 그 결과로 하여금 크라스나야 대공은 사실상 중앙정계로부터 추방(Exile from Saint-Petersburg : 1910)을 당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1st World War : 1914~1918)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지속되는 전쟁에서의 패전 인한 국내불만으로 하여금 2월 혁명(Fevral'skaya Revolyutsiya : 1917)과 10월 혁명(Oktyabr'skaya Revolyutsiya : 1917)을 거치면서 제정 러시아라는 국가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크라스나야 대공은 이러한 러시아 혁명의 여파에서 벗어나고자 주권선언/독립선언(Thus Spoke The Imperisky/Bellavion Speech : 1917)을 하면서 급격스럽게 독립국가로써 길을 걷게 된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공/차르(이하 '차르') 알렉산드르는 크라스나야가 서구 열강 수준의 입헌화를 이룩하기를 원했고 그가 보좌진과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서 발의한 대헌법(Velikaya Konstitutsiya : 1918)은 현대의 크라스나야 대헌법의 모태가 될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크라스나야의 독립은 쉽게 인정되지 않았다. 서구 열강은 주권선언을 하고 독립을 이룩한 크라스나야를 여전히 제정 러시아의 일부로써 판단하였고, 그 결과 일본제국의 시베리아 출병(Japanese intervention in Siberia : 1918~1922)의 과정에서 일본과 적일전쟁(1st Krish-Japanese War : 1918~1922)을 치루면서 일본의 주권침탈 야욕을 버텨내야만 했다.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CCCP, Soyuz Sovetskikh Sotsialisticheskikh Respublik :1922~1991)(이하 '소련')의 성립과 함께 크라스나야의 독립은 좌절을 맞이할 뻔하였다. 새롭게 전러시아(Vserossiyskiy)의 맹주로써 등극하게 된 소련은 크라스나야가 자신들의 괴뢰국이나 그에 준하는 수준이 되기를 바랐고, 실제로 러시아 내전(Grazhdanskaya voyna v Rossiyi : 1917~1923)이 끝나고 소련은 크라스나야를 점령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이러한 첩보를 사전에 입수한 크라스나야가 소비에트 연방과 동맹(Krish-Soviet Alliance : 1924~1991) 제안하고 그것이 기적적으로 성립됨으로써, 위기는 일단락되게 된다.

전간기(Interwar period : 1918~1939), 크라스나야는 적일전쟁 이후의 전쟁으로 인하여 국내상황을 정리하고 발빠르게, 경제계획을 수립하였다. 국가경제재건 4개년 계획(Four-year plans for the national economy reconstrucion : 1923~1955)과 군사개혁(1927 Krasnaya Military reform : 1927)을 시행하여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경제와 군사전반을 재건하고자 했다. 특히 이 시기 국가경제재건 4개년 계획을 경제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대공황(Great Depresson : 1929)으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들에 심각한 경제적인 불황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스나야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비한 수준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Mukden Incident : 1931)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군국주의적 확장에 나서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의 급작스런 군사적인 행동에 대비하여 해상전대 재건계획(Korolevskaya Krasnaya Flot Rebuilding Plan : 1934)을 수립하여 실행에 나서게 된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중일전쟁(2nd Sino-Japanese War : 1937~1945)이 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발발하고, 이후 유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 침공(Invasion of Poland : 1939)을 감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2nd World War : 1939~1945)가 일어나게 된다. 독일이 바로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 : 1941)을 실행하면서 본격적으로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크라스나야는 소비에트 연방의 요청에 따라서 독일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동원령을 선포하였다.이 과정에서 일부 파시스트 세력은 독일을 도와서 소련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주장(작전계획 666 : Operatsiya 666)이 있기도 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으며, 소련의 요청대로 1941년 7월 20일 대독선전포고를 발표하고 동부전선에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크라스나야군이 동부전선에 개입하면서 일본을 포위하는 것에 집중되었던 크라스나야군의 활동 역시 느슨해졌으며, 일본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진주만공습(Attack on Pearl Harbor : 1941.12.07)을 결행하였고, 이후 남방침공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가라후토 탈환전이라는 명목아래에서 코르사코프 공습(Attack on Korsakov : 1941.12.10)을 강행하면서 크라스나야와 일본 사이의 본격적인 전쟁 역시 개전되게 된다. 크라스나야는 일본과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독소전쟁 기간동안 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하고 운용하였는데. 이는 일본과 크라스나야의 전쟁의 양상이 기형적으로 사할린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의 관동군과 프리모르스키의 크라스나야군의 작전이 기형적일 정도로 방어전 위주로 계획되어 있고, 전투의 전반적인 양상이 참호전과 포격전 위주였으며, 소련군 역시 독일과의 전투로 하여금 만주지역에서 작전을 결행할 여유가 없었던 복합적인 이유로 하여금 만주에서의 전투는 산발적이고 국소적이었다.

사할린에서의 일본군과 크라스나야군의 전투는 알렉산드롭스크-사할린스키 전투(Battle of Alexandrovsk-Sakhalinsky : 1942.11~1943.01)로 하여금 분기점을 맞이하였다. 이 전투로 하여금 일본군은 사실상 더 이상의 공세를 지속할 여력을 상실하였으며, 크라스나야군은 유클리나 제독(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유클리나/Aleksey Petrovich Euclina/Admiral Flota Velikoye Knyazhestvo Krasnaya Euclina  : 1902~1978)의 제안하에서 진행된 쿠로팟킨 작전(Operatsiya Kuropatkin)으로 하여금 사할린 탈환을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게 된다. 쿠로팟킨 작전으로 크라스나야군이 대대적인 기동전을 강행하면서 일본군은 7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후퇴를 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크라스나야 해상항공대의 유리 보디비히(Yuri Lauravich Bodewig : 1907~1983) 소령이 제안한 제공권 탈환 작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남사할린 항공전(Battle of Yuzhnyy Sakhalin : 1943.01~1943.07)으로 일본군은 800기 이상의 항공기 손실을 입었고, 크라스나야군은 남사할린의 안정적인 작전을 위한 제공권을 탈환하게 된다. 쿠로팟킨 작전 이후 일본군은 사할린에서의 단계적 철수를 강행하고, 크라스나야에 대한 해상봉쇄로 전략을 변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쿠로팟킨 작전 이후 사할린을 탈환한 크라스나야군은 쿠릴열도, 스더니츠키 제도, 아이누모시르(홋카이도)의 점령을 목표로 하는 로제스트벤스키 작전(Operatsiya Rozhestvensky)을 구상하여서 결행하였으며 실제로 쿠릴 열도, 스더니츠키 제도, 아이리스 제도 등에 상륙하여서 이를 점령하였으며 홋카이도 상륙을 위한 공습을 강행하는 등의 전초전을 치르게 된다.

또한 동부전선에서는 바그라티온 작전(Operatsiya Bagration)으로 하여금 독일군은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베를린 공방전(Berlinskaya nastupatel'naya operatsiya)으로 베를린이 함락되면서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1945년 8월 소련군과 크라스나야군의 만주전략공세작전(Manchzhurskaya Strategicheskaya Nastupatelnaya Operatsiya)이 결행된다. 일본은 두 번의 핵공격과 만주에서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조약에 서명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주권선언이래에 크라스나야의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 제도는 황실평의회(Senate)와 최고평의회(Ecclesia)로 구성된 상원과 크라스나야 국가두마(Krasnaya Duma)로 구성된 하원이 입법부로써 역할을 수행하고, 민의에 의하여 선출된 수상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차르로부터 통치권을 위임을 받는 형태로써 유지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이후부터 냉전의 종결까지의 크라스나야의 역사는 크게 4가지로 나누어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흔히 전후과도내각(Poslevoyennoye Vremennyy Kabinet : 1945~1958/전시내각(Kabinet Voyennogo Vremeni : 1937~1945)의 연장선), 샤토프 내각(Shatov Kabinet : 1958~1970), 아나스타샤 내각(Anastasia Kabinet : 1970~1979), 아르샤빈 내각(Arshavin Kabinet : 1979~1994)이라고 부르며 아르샤빈 내각은 수상이었던 아르샤빈의 암살을 종료로 보는 견해와 이후의 사실상 아르샤빈 내각을 계승했다고 취급되는 아가샤 내각(Agatha Kabinet : 1994~2000)까지를 연상선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 이후 21세기에 들어서서 크라스나야는 국민당의 마오-나타샤 내각(Mao- Natasha Kabinet : 2000~2003)과 그 연장선상인 류-나타샤 내각(Liu-Natasha Kabinet : 2003~2008), 자유당과 국민당의 연립 내각이었던 아가샤-리 내각(Agatha-Lee Kabinet/2nd Agatha Kabinet : 2010~2012), 큐니르 내각(Quenir Kabinet : 2012~)등의 4개의 내각을 수립하고 국정이 운영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