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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국가

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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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통일세계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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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안 합중제국

일본

첨관

미야시로
첨관 공화국
尖冠共和国
국기 국장
태평양에 우뚝 솟은 자존심
太平洋にそびえ立つ自尊心
상징
국가 원양의 낙도
국조
첨관파랑까치
국화
백합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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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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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

  • 센칸청 1870년 2월 11일
  • 미군정 1945년 5월 1일
  • 제헌절 1952년 8월 30일
  • 독립 1952년 10월 1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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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센칸토 도
최대 도시
센칸토 도
면적
108,000km²
내수면 비율
1%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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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35,054,900명
밀도
325명/km2
인종
첨관인 81%, 중국인 8%, 일본인 6%, 한국인 3.5%, 기타 1.5%
출산율
1.96명 / 세계 129위
공용어
일본어
지역어
나루미어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한자
종교
국교
국교 없음(정교분리)
분포
기독교 35.7%, 불교 20.6%, 첨관 신토 11.4%, 무종교 32.3%
군대
첨관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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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
직할시
6직할시
6현
특별자치현
1특별자치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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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대통령제, 다당제, 단원제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11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 원수 (대통령)
미케츠카미 소시
정부
요인
국무총리
미나미 미레이
국회의장
시이나 히요리
대법원장
나루호도 류이치
여당
민주당
원내 야당
자유당, 유신의당, 신진당, 민중승리연대, 녹색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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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유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1조 5850억
1인당 GDP
$45,214
GDP
(명목)
전체 GDP
$1조 2600억
1인당 GDP
$35,944
무역
수입
$2천 390억
수출
$2천 4250억
외환 보유고
$5천 443억
신용 등급
무디스 Aa2
S&P AA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첨관 엔 (SE¥)
ISO 4217
SE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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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 +9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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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57년
북한: 1993년
UN 가입
1955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광화문 빌딩 6층
ccTLD
.se, .尖冠
국가 코드
390, SE, SEK
전화 코드
+89
여행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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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여행주의보
전 지역[1]


諸和樂土 모두가 화하여 즐거운 땅[2]
萬民治土 모든 백성이 다스리는 나라[3]

첨관 공화국(일본어: 尖冠 共和国 센칸쿄와코쿠[*], 영어: Republic of Senkan 리퍼블릭 오브 센칸[*])은 서태평양 첨관해 해상에 위치한 도서국가로 인구는 약 4300만명이다. 4년 중임제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수도는 센칸토이고 영토는 첨관 본도와 주변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첨관 공화국은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미군정의 산하에 들어간 후 1952년 미군정에서 벗어나 수립된 공화국이다. 첨관은 일본계 국가이지만 일본과는 다른 첨관으로써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엄연히 일본과는 별개의 문화권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첨관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뛰어난 경제력과 기술력을 보유한 선진국이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군사강국이기도 하며, 많은 대기업이 소재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통화는 첨관 엔을 사용중이며, 약 1000 첨관 엔이 1 미국 달러와 비슷한 수준의 환율을 가지고 있다.

현재 첨관은 남국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성장을 통하여 세계 11위의 경제대국 지위에 올라와 있으며 첨관군도 세계 군사력 순위 10위의 강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첨관 공화국은 대통령제 공화국이며, 1960 ~ 80년대에는 군부의 독재를 겪었으나 1992년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민정부가 들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첨관은 현재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민주주의"(20위, 8.01) 지위에 오를 정도로 정치적으로 발달한 국가이다. 현재 대통령은 2016년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주당 소속의 미케츠카미 소시이다.

국호

현재 첨관 공화국이 국호로 쓰는 첨관(일본어: 尖冠 센칸[*])이란 명칭의 유래는 섬에 상륙한 이마가라가 섬의 최고봉 천관산(일본어: 天冠山 텐칸잔[*])의 모습이 뾰족한 관과 같다고 말한 것에 유래한 것이다. 그 뒤 첨관 해방군, 첨관 임시정부 등 첨관의 일제강점기 당시 첨관인들이 첨관이라는 명칭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하며 첨관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1952년 독립 당시 국명이 첨관 공화국으로 확정되며 마침내 첨관이라는 명칭은 국명으로까지 굳어졌다.

영어로는 센칸(영어: Senkan 센칸[*])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첨관의 일본어 발음인 센칸을 당시 들은 서양인들이 그것이 첨관의 국명이라고 인식하며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서방 국가들이 첨관을 센칸이라고 지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첨관을 센칸이라고 표현되어 졌으며 1902년 미국 국무부의 문서에서도 센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미 1900년대 이전부터 그러한 명칭이 사용되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첨관의 선사시대

나루미 고다이 국립공원의 유적지

첨관 섬에 인류가 거주한 것은 기원전 2천년전으로 추정하며 그 때는 동남아에서 건너온 선주민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부족국가를 이루고 어업과 기초적인 농업을 일구며 살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고립된 문명이었음에도 여느 문명들 못지않게 찬란한 문명과 수준높은 문화와 기술을 일궈냈다. 또한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과 교류한 흔적도 2005년 발견되었으며, 카누로 보이는 물체와 타 섬과 주고 받은 선물이 그것이다.

그러나 700년경을 정점으로 인구수는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천년경 한명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 많게는 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첨관 선주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지금도 인류사의 주요 미스테리로 거론된다. 현재도 많은 인류학자들이 첨관을 방문해 첨관 선주민들의 흔적을 찾고 있으며, 나루미 제도의 세이카 왕립박물관에 선주민들이 거주했던 움막의 기둥석들과 계단식으로 쌓여진 제단, 마스타바형 무덤, 물고기 조각 등이 보전되어 있다.

첨관의 형성기

185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첨관의 부락
첨관저항군 오핵심

첨관 섬이 다시 역사에 나오게 된 계기는 17세기 중반 아가모토란 어부가 자신의 표류한 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남방에 거대한 무인도가 있다고 했고 둘레를 7일 밤낯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발견된 오가사와라 제도와는 달리 터무니없다는 이유로 세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남방의 환상의 섬이란 생각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 첨관 섬의 존재가 확실해진 것은 이후 여러 어부들의 발견에 의해서이다. 첨관 섬의 실존이 확인되기도 했지만 당시 총감부에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순히 남방의 큰 섬으로 이렇다할 자원이 없을 뿐더러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지금도 센칸토에서 도쿄까지 비행기로 2~3시간은 잡아야 한다.) 중앙정부의 권력이 닫지 않을 것이란 점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놔두기엔 아까웠던 총감부는 봉금령을 내려 접근을 금지하도록 했다. 그러다 19세기 초 들어서 이미 오래 전에 사농공상의 계급 제도가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사회적으로 인간 이하로 차별받던 망나니, 장의사 같은 비인(非人, 히닌)들의 차별이 심하던 차에 정부 고관중 한명이 피살당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비인들에게 돌려 대규모 처형이 일어났다. 하지만 진범이 붙잡히자 비인들은 이러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커져갔고 결국 비인중 한명인 이마가라(今柄, 1780? ~ 1855)가 비인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료들을 이끌고 1807년 이마가라의 난 (今柄の乱, 금병의 난)을 일으켰다. 이마가라를 필두로 한 비인들의 행렬이 에도 시내로 쏟아지고 관군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사무라이들이 동원되었다. 결국 이마가라의 난은 대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마가라는 자살을 하기 직전 붙잡히고 처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일본의 개국총리인 카스미가오카 노구치가 7.27 사태로 암살당하는 사건이 생긴다. 그러자 서구의 위협에 전념해야 된다는 판단을 한 막부는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서 막부는 특단의 결정을 내렸는데 부락민 반란주동자들을 첨관 섬에 유배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부락민의 이주는 1780년대부터 지역 다이묘들에 의해 부락민이 자신들의 지역에 살고 있던 것을 싫어하던 다이묘들이 행한 부락민의 첨관 이주로 암암리에 행해졌고 첨관 섬에는 어느 정도 부락민의 소규모 촌란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마가라를 위시한 1,000여명의 부락민들은 짐칸에 짐짝으로 실리다시피 해서 첨관섬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배안은 열악했고 불결한 환경과 고된 항해, 굶주림으로 인해 절반 이상의 부락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마가라도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했지만 그가 여기서 죽을 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한 선원이 이런저런 편의를 봐줘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막부의 배는 부락민들을 섬에 내려 보낸 다음 식량만 실고 돌아갔다. 말그대로 버린 짐짝처럼 다뤘던 것이다. 도착한 부락민들은 불과 400명 정도였고 그들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이전에 도착했던 부락민들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이마가라는 본토에 있었던 일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고 이러한 차별에 분노한 한편 그러한 저항운동을 이끈 이마가라에 경의를 표하며 이 촌락의 지도자가 될 것을 간청했다. 이마가라는 그들의 요청을 수용하고 이 섬을 부락민들의 왕국을 세우겠다고 선언했고 그의 지도에 따라 이 넒은 섬을 개간하고 수렵과 어업을 병행하면서 나름대로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갔다. 그들에겐 차별이 없다는 것에 가장 큰 기쁨을 느꼈고 첨관섬의 소식을 들은 부락민들도 위험한 항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첨관섬으로 향했다. 첨관섬에는 부락민들만의 평등사회가 구현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더 이상 부락민이 아닌 자유민인 첨관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양선들이 자주 출몰해 관측을 했고 첨관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우려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 본토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점차 국력을 불려가기 시작하자 제국주의가 대두했고 근대적인 민족 개념이 잡히면서 주변의 류큐, 아이누 같은 이민족들을 자신들과 동일시하며 그들의 영토를 집어삼키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첨관도 이러한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 조정은 일본 본토에서 살던 부락민들이 이주한 것을 이유로 첨관 섬을 자국 영토로 주장했다. 그리고 근대적인 군함을 타고 1855년 첨관섬에 상륙해 첨관 섬 일대가 센칸청에 편입되었음을 첨관인들에게 선언했다. 류큐왕국과는 달리 이렇다할 국가가 아닌 지역공동체 규모였기 때문에 일방적인 선포였다.

원래 첨관도 일대는 행정권 밖에 있는 외부였기 때문에 첨관인들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센칸청의 설치는 다시 일본인들에게 차별받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첨관인들은 첨관인들은 버릴땐 언제고 이제와서 주인행세냐며 반발하였고 일본은 이러한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결국 첨관인들은 무장봉기를 시작했고 이미 노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마가라는 일본인에 대한 저항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855년 10월 31일 농기구를 개조한 무기를 든 첨관인 전사들은 야밤에 센칸 현청을 습격해 현지사와 현직원등 100여명을 살해하고 현청에 방화를 함으로 강력한 저항의지를 표출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3천명을 파견해 이마가라의 첨관저항군의 진압을 명했다. 어차피 부락민을 인간으로 보지 않은 일본군에겐 이것은 진압이 아닌 사냥이었다. 이마가라와 저항군은 첨관의 지리를 이용해서 일본군을 압박했고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증원되지만 첨관저항군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마침내 천여명의 전사자를 낸 끝에 저항군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저항은 막을 내렸다. 이마가라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고 그를 따라 여러 전사들이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남아있던 저항군은 일본군에게 붙잡히자 모진 구타와 고문을 당한 끝에 참수되고 목이 진열되는 등의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남은 첨관인들은 한동안 일본 헌병의 감시하게 놓였다.

첨관의 일제 강점기

센칸청 청사
1898년 첨관 만세운동

1980년대와 함께 첨관 최악의 시기

첨관저항군의 패배로 인해 첨관은 일제강점기를 겪어야만 했다. 일본은 첨관저항군의 항쟁 이후 센칸청을 폐지하고 첨관총독부를 두어 가혹한 철권통치를 시작했다. 철권통치는 1855년부터 1898년까지 계속되었다. 1855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통치는 무려 1945년까지 90년이나 이어졌으며 그 동안 첨관은 암흑의 시기를 겪었다. 일본인들은 첨관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단지 노예로만 여겨 각종 부역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새로히 발견된 남쪽 섬의 구아노 광산의 소유권을 얻은 광산재벌 구하라(히타치의 창업자)는 혹독하게 첨관인을 다뤘다. 이 시기에 첨관 섬에는 일본이 각종 인프라와 시설을 설치하고 기술과 의료 등을 개선하였지만 이것은 철처히 첨관의 일본인들과 친일파를 위했던 것이였다. 일본은 대다수의 첨관인들을 사람으로 취급안했기 때문에 첨관총독부를 통해 가혹하게 통치했으며 당연히 인권 문제는 심각했고 결국 이러한 억압은 1898년 첨관 만세운동으로 표출된다. 이는 첨관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비폭력운동으로 첨관인은 자신들을 사람으로 봐달라고 외치며 가두행진을 했다. 특히 사나에(현 사나에 시)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타카나시 쿠도는 현재까지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첨관총독부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삼국 간섭으로 가뜩이나 외부적으로 심란한 상황에 일본군은 더욱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결국 학살극까지 가서 당시 일본군은 이를 진압이라 하지 않고 비인사냥이라 칭하는 악랄함을 보였다. 결국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첨관에서 근무하던 프랑스인 교사에 의해 전세계에 폭로되었다. 일본은 맹비난에 직면한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첨관인의 인권대책을 수립했고 문화통치로 어느정도 자유를 인정해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첨관인을 어느정도 풀어주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첨관인에게 의무교육과 의료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지원했고 산업 진흥을 통해 첨관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교육은 철저한 친일적인 것이었다. 사실 첨관인 자체가 일본에서 건너간 부락민인 만큼 내선일체 같은 것은 강조할 필요는 없었지만 반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부락민 차별에 대한 것을 지우고 일본이 보호자인듯이 역사를 왜곡했다. 독립성 말살을 위한 문화정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내지나 해외로 유학을 한 유학파 첨관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으면 안되는 것을 알았고 자식들에게 첨관인의 유래와 정체성을 교육시켜 첨관인 고유의 독립성을 보존하도록 노력했다. 이는 무려 90년이나 이어진 일본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첨관이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힘으로 평가받는다. 문화통치는 1898년부터 1931년까지 이어진다.

첨관 광복군 특수전전단
강제 징용되어 노역을 하던 첨관인들

이마가라의 후손이던 시온(詩音)과 노하라 야츠모토(野原安元)를 필두로한 일부 저항세력은 1870년 필리핀으로 망명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구상한 독립된 조국을 위한 첨관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면서 미국과 선을 대는 등 다방면에서 첨관 독립에 힘을 썼고 어느정도 자금력을 갖추자 미국과 중국, 호주에 해외사무소를 설치해 일제의 동향을 지켜보았다. 시온과 야스모토는 첨관 독립운동을 총지휘하였으며 효과적인 전술로 첨관인들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노하라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사나에 반자이 운동의 참극을 보고 평화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그래서 첨관독립군을 1868년 창군하여 첨관 내외에서 비밀리에 군사를 모집해 1885년에는 약 1만명에 달하는 군사를 모아 자주적인 첨관 해방을 준비했으며, 독립운동가 도조 사토시(塔城敏)는 첨관총독부 철도실과 개간실을 폭파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다른 독립운동가 리에 미즈키(理恵瑞希)는 1905년 첨관총독부의 천장절 행사식때 청소부로 위장해 잠입한 다음 친일파들을 들고온 대검으로 죽여 첨관인들의 독립 의지를 보었다. 중국 해외사무소는 상하이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있었다. 해외사무소는 비슷한 처지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선을 해 교류를 가졌고 일본 타도란 뜻으로 일치단결한다.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문화통치로 인하여 그나마 일제 강점기 중 자유로웠던 시기이며 이 시기의 첨관인들은 주로 무장투쟁보다는 '펜을 이용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첨관인만들의 언론을 만들어 비밀리에 독립운동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소설가나 시인들은 저항의식을 드러내는 글을 쓰며 저항하였다. 첨관독립주의도 이때 등장하였으며 철학도 성장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는 병참기지화 통치가 시작되었다.

1930년대는 일본 제국의 전쟁 확대가 지속되었던 시기였고, 이에 따라 일본 제국은 첨관의 자원과 물자를 공출하여 전쟁에 활용하기로 결정하고 자원 수탈을 시작했다. 첨관의 석유, 석탄을 강제로 일본으로 공출하고 산림의 나무를 베어 가져다 썼다. 또한 첨관의 공장에서 철재물품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첨관인들을 강제로 일을 하게 하였다. 임시정부도 첨관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는데, 첨관독립군은 첨관 내에서 1만명, 첨관 외에서 1천명이라는 총 1만 1천명의 병력을 1930년에 확보하여 훈련시켜 유사시 전장에 투입하여 즉시 일본군에 맞설 수 있는 전력을 갖추는데 성공하였고, 야스모토도 독립 첨관 설계서를 작성하여 추후 첨관 독립시의 국정 운영을 구상하였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개시된 태평양 전쟁은 일본 제국을 광기로 몰아갔고 첨관도 이러한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중일전쟁때만 해도 필리핀해 해상에 있는 사정상 첨관인들이 징용되는 것 외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전역이 동남아, 태평양으로 확장되면서 첨관도 그 중심에 들어가게 된다. 첨관 섬에 대규모 군 비행장이 들어섰다. 대륙에서 보면 후방이지만 태평양에서 보면 대양을 향해 날을 세운 칼날과 같은 입지조건상 첨관은 태평양 전쟁 전진기지가 되었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섬은 전진기지로 활용하기 충분했고 첨관 섬에 일본 최대의 군 비행장이 건설된다. 첨관 비행장에는 폭격기 부대가 배치되었고 미 본토 공습에 투입될 G10N 후가쿠 폭격기도 배치될 예정이었다. 일본군의 전초기지가 된 이상 첨관인들은 강제노동과 일본군의 횡포에 곤욕을 치뤘다. 첨관섬이 태평양 전쟁의 중심이 된 만큼 첨관인들은 각종 물자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첨관섬까지 미군이 진격하자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첨관 전투와 미군정

첨관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들
센칸토에 입성하는 미군들

미드웨이 해전에서 큰 패전을 겪었지만 잇따른 거점 확보로 1945년 경의 미국은 전쟁에서 상당히 유리해졌고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점차 일본 본토를 향해 미군은 진격했고 일본 본토로 가는 관문이 바로 첨관 섬이었다. 첨관 섬에는 일본군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가 있었고 태평양 작전의 용이성을 위해선 반드시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전진기지인 만큼 첨관 섬은 요새화되었고 일본군도 만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의 침략을 우려한 일본은 첨관인을 무려 15만명이나 강제징집하여 첨관수호대를 창설해 약간의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1만명의 학생을 학도호국단으로 강제징집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일본군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을 중심으로 한 10만명의 병력이 주둔하는 등 나름대로 병력 면에서도 준비를 갖추었다. 미국은 전함과 항모를 동원해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첨관독립군은 미국과 접선하여 공동으로 첨관에 진격하여 첨관해방작전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미군은 12만명, 첨관독립군은 1만명이 동원되었으며, 1945년 2월 19일 이들은 첨관을 공격하였다. 첨관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 있어 가장 치열한 접전이자 최초의 일본 영토에서의 전투였다. 이 첨관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잔인한 지옥도가 펼쳐졌던 전장으로 평가받으며,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에 양측 모두 섬을 차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타다미치 장군은 옥쇄돌격을 자제하고 예정된 희생을 미군과 첨관독립군에게 지옥을 보여주어 상륙전에 대한 경각심을 미군에게 심어주려고 시도하였다.

섬이 규모가 있었고 타다미치 장군의 전술로 인해 미군은 상당히 고전했지만 구형 네바다급 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 뉴멕시코급 전함들의 대구경함포를 이용한 상륙준비포격과 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하였다. 타다미치는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부임 직후 곧바로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점차 미군이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첨관인들도 해방을 위해 첨관독립군에 협조하거나 입대하였고, 첨관수호대와 학도호국단, 강제징집된 일본군의 첨관인들이 대거 탈영해 입대하여 종전 직전 첨관독립군의 병력은 9만명에 육박하였다. 본대가 격파당한 일본군들은 산으로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고, 결국 타다미치 장군과 약 8만 2천명의 일본군은 전사하고 약 2만명의 일본군만이 살아남을수 있었다. 섬 전역이 쑥대밭이 되고나서야 연합군은 첨관 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첨관 전투로 약 22만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민간인은 당시 첨관 인구(1000만명)의 거의 절반인 480만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국부의 무려 1/4를 잃었으며 일제가 남긴 공업시설의 피해율은 50%를 상회하였다. 이렇게 첨관 전투는 큰 피해를 주었다. 다만 그러나, 전쟁이 격렬했던 1940년대에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높은 출산율, 월남과 전쟁특수에 의해 인구와 국내총생산은 늘어났으며 계급 의식의 타파와 지주계급의 해체로 균등한 소득과 부의 분배로 인해 유리한 초기 조건을 형성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이 가능하였고, 첨관군(전쟁에 참여한 군대는 첨관독립군이지만 독립군이 첨관군의 전신이므로 큰 차이는 없음)의 현대식 전면전 경험과 미국 등의 서방국들과 함께 싸워 우호관계를 형성한 대외관계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미군에 점령된 이래 첨관은 2차 대전이 종전될 때도 미군의 수중에 있었다. 상륙한 미군들을 해방자로서 열렬히 환호를 받았고 센칸청 청사를 본부삼아 첨관도에 미군정을 시작했다. 전후 외국에 있던 첨관임시정부가 귀환했지만 미군정은 지속되었다. 일본의 전후 재건문제와 한반도 분단, 공산당의 국공내전 승리등 동북아에는 불안요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센칸지마 비행장과 해군기지를 접수해 미군의 태평양 거점중 하나로 삼았다. 일본은 미국과의 항복 조약으로 한반도와 류큐, 첨관, 남사할린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고 미군정청이 첨관의 임시정부 역활을 했다. 군정청은 첨관 국민들에 대한 대민지원을 펼쳤지만 일제의 수탈과 첨관 전투로 인해 초토화된 첨관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첨관인들은 극도록 빈곤에 시달렸고 미군의 대민지원이 없다면 전 국민이 아사할 지경이었다. 미군정의 지원과 국비를 통해 첨관은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재건작업에 들어갔다.

첨관의 독립

첨관 1대 의회 개회식
노하라 야츠모토
노하라 야츠모토의 첨관독립주의 연설

독립은 1952년으로 동북아가 안정을 되찾아갈 때 논의 되었다. 첨관인들은 자신들의 독립국을 건국하길 미국에 계속 요구했고 대규모 시위까지 펼쳐질 정도였다. 결국 첨관인들이 간절하게 원하고 첨관 내부적으로 안정되어 더 이상 군정이 필요없겠다는 판단을 내린 미군정청은 첨관 임시정부에 민정권을 이양했다. 그리고 첫 대선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서 첨관은 1952년 자주적인 독립국으로 세계에 인정받는다. 그리고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제 공화국이 최종 확정되었으며, 헌법이 만들어져 첨관이 주권국가로서 건국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일본은 첨관의 독립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다시 귀속될 것을 꾸준히 첨관과 미군정에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에서 행한 독립투표에서는 과반수 이상이 독립에 찬성했고 첨관은 무리없이 독립하게 되었다. 일본은 외무성을 통해 "일본과 첨관은 같은 야마토 민족으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첨관 제1대 부통령인 시시가오 고유키(獅子顔小雪)는 "일본이 과거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보라."라고 간접적으로 귀속 반대 의사를 밝혔으며 제 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노하라 야츠모토는 취임식에서 첨관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첨관국과 일본국은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이지만 그것이 첨관의 독립을 저지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첨관인들은 과거 고향인 일본에서 인간으로서 존엄과 존중을 보장받지 못했고 이로인한 수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첨관과 첨관 인민들은 일본의 노예가 아닌 주권국가 첨관으로서 각자의 길을 가길 선언한다.

 
— 첨관독립주의 연설, 1952년 10월 1일 노하라 야츠모토

첨관은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주류 민족이 영국같은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이지만 독립한 상태인것처럼 민족이 같다고 갈라서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했다. 하나의 나라가 분단된 것도 아닌 이상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갈라서지 못하는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다는 인식을 가진 첨관인은 이미 부락민을 너머 야마토 민족이라는 의식을 버리고 첨관인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려 했다. 첨관은 미국의 원조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지원을 바탕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가장먼저 구하라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구아노 광산을 국유화시키고 각종 광업을 통해 얻어낸 부를 바탕으로 다른 분야도 육성시켰다. 그리고 일제 당시 세워진 산업시설이 소수 남아 있어 그것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일본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중계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된다. 그외 해외에 각종 인력을 파견해 실량 향상을 이끌어냈고 비슷한 시기 전쟁을 겪고 재건중인, 그리고 반일여론이란 공통점을 가진 한국과 동남아 국가 등지와 안보동맹을 체결함과 동시에 범아시아경제협력체를 창설해 경제성장을 논의했다.

군사정권

1963년 2.14 군사정변
마에바라 신이치
마츠야마-니가와 민주항쟁

1960 ~ 80년대에는 경제적으로는 발전이 시작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퇴보된 시기였다. 1950년대에는 초대 대통령이던 노하라 야츠모토가 청렴한 인물이였기에 삼권분립의 존치를 위해 노력했으며 첨관 국민들도 민주주의에 대해 점차 이해하기 시작하여 민주주의가 그런데로 유지되었으며 1960년에는 다나카 유키오(田中幸雄) 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집권했다. 하지만 불안정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의 정치 정세는 첨관 군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3년 2월 14일, 첨관 육군 대령 마에바라 신이치(前原新一)에 의해 발렌타인 쿠테타가 일어났고 정권을 탈취한 군부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신이치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 한 뒤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신이치는 박정희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고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현지의 실정에 맞게 수정한 도시운동을 전개하여 시골의 낙후한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첨관의 경제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월남전에 개입하여 월남전에 첨관 국방군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각종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2차 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현재의 북동임해공업지대를 만들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7년 스즈키 데이이치(鈴木貞一) 당시 수도방위사령관이 군부 내부 쿠데타를 시도하여(수도방위사령부 반란 사건) 대통령직을 얻으려 했으나 진압되어 실패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군부의 권력은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군부와 신이치의 독재는 첨관 민주주의의 퇴보를 불러왔다하여 비판을 받아왔으며 한국이나 동남아 등지와의 독재국간 커넥션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68혁명, 일본의 신세대 혁명의 영향을 받아 청년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이치는 민주화 요구 시위를 강력히 탄압하고 1975년 쇄신헌법(刷新憲法)을 제정하여 군부(민주정의당) 이외 정당을 모두 해산하며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대통령 간선제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강력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준 헌법을 제정한다. 결국 1980년부터 민주화 요구 시위는 당시 최고 야당인 공명진보당의 지도자였던 사토 에이치(佐藤英智)등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로 커졌다. 그 뒤 1983년 말부터 마츠야마-니가와 민주항쟁(松山-仁川 民主抗爭)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시위로 혼란스러웠고, 시위 진압도 거세졌다. 결국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1984년 신이치는 앓고있던 지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이 때를 노린 국방장관 사토 류이치(佐藤龍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를 부통령었던 료우에 리치요(龍植李千代)가 진압함으로서 료우에가 정권을 이어 받게된다.

료우에 리치요

료우에는 육군 출신 장성으로 베트남에 파병된 85,000명의 지휘관으로 월남주둔 첨관군의 총사령관으로 복무했었다. 월남에서 각종 전투를 전두지휘하고 베트남의 통일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마가라무공훈장을 받아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고 신이치는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진 그로서 직접 수도사령부의 병력을 직접 지휘해 사토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리고 대통령을 대신하는 부통령으로서 군부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료우에는 언론검열을 넘어 언론사와 결탁해서 사실상의 선전기관으로 변질시키고 민주화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함으로서 독재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럼으로 수반되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각종 노력을 해왔다. 첨관의 핵심 권력인 만큼 억압정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각종 규제를 풀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다.(포르투갈의 살라자르와 한국의 전두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1986년 센칸토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다.(당시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경쟁을 했었다) 하지만 8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고 여러 나라들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1987년 자유중국의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국민당 독재가 종결되었고 한국과 만주국의 독재자들도 차례차례 하야했다. 결국 90년대 들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정부까지 몰락하자 료우에 정권도 안전하지 못했다. 사토 에이치는 민주화세력 국민해방운동의 대표로 선출되고 독재정권을 향한 마지막 거사를 감행한다. 1992년 1월 1일, 500여명의 학생권 운동가들을 이끌고 가두행진에 나선 사토 에이치를 따라 센칸토 시민들이 그의 행렬에 합류해 50만명이 운집하게 된다. 이시카와같은 대도시에도 영향력을 준다. 사토 에이치는 대통령 관저인 구 센칸청의 주변을 손에 손을 잡은 인간사슬로 둘러싸고 자신은 정문 앞에섰다. 그리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민중가요를 부르면서 독재정권의 종식을 촉구했다. 이것이 바로 신정혁명(新正革命, 1월 혁명이라고도 한다.)이였다.

사토 에이치
신정혁명

하지만 군부와 리치요는 끝끝내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시위대를 탄압하고 붙잡았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군부의 하야를 외쳤다. 미국과 일본, 다른 아시아와 유럽의 국가들까지 시위대 지지와 군부 퇴위 요구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자, 결국 1월 9일 리치요는 하야하였다. 하지만 리치요는 온건파였던 야마모토 타로(山本太郎)를 부통령으로 앉히고 유화책을 내세우며, 시위대와 교섭에 나서고자 하였다. 군부는 대통령 간선제 폐지와 직선제 도입, 점진적으로 개혁을 한다는 교섭안을 제안했으나 국민들은 교섭안 대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였다. 시위가 거세지며 전세계가 주목하고 미국까지도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며 결국 군부는 하야하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현대

1999년 나루미 제도 위기

료우에를 축출하고 실시된 첫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토 에이치와 민주선진당은 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민주화된 정부를 이끌었다. 사토 에이치는 금융실명제와 정치 청렴화, 경제성장 등의 업적을 이루어 민주화된 첨관을 선진국 반열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군부세력을 완전히 척결하는데는 실패하였다. 그 뒤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경제위기는 첨관도 거쳐갔으며, 첨관은 경제타격을 받게 되었다. 첨관 의회는 IMF에게서 지원을 받아야한다는 의견과 독자적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고 결국 첨관 정치와 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1997-1998년 첨관 경제위기) 그러자 이를 명목으로 군부세력은 외환위기를 민주화세력에게 돌리며 정변을 일으켰고 (1997년 첨관 쿠데타) 수도 센칸토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사토 에이치는 극적으로 수도를 탈출해 이시카와에 사령부를 두고 진압군으로 1만명의 병력을 투입시켰다. 결국 군부가 투항함으로 사태는 종결되고 주모자들은 처형되면서 그들의 1일 천하는 막을 내렸다. 이후 1999년에는 일본과 나루미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나루미 제도와 그 인근 해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 사건(1999년 나루미 제도 위기)이 있었다. 실제 전투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첨관의 안보에 경각심을 주었으며 첨관 국민들의 반일 감정과 나루미 제도 영토 수호 의식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1990년대 말의 첨관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그 와중에 2000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국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다시 히케모토

국민들은 "제발 이제 안정되게 살아보자"는 심정으로 투표에 적극 참여했고 이는 지금까지 첨관 정치에 국민들이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주적인 경제 위기 해결과 서민 경제 발달, IT산업 육성을 내세운 정의당이 승리하여 오토다시 히케모토(音田秘計元)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오토다시 히케모토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였으며 민주화와 군부 청산에 적극적으로 앞선 국회의원 출신이였다. 또한 서민적인 삶을 살아와 서민층에게 지지가 높았다. 히케모토 대통령은 금융업과 IT산업을 중심으로 육성해 금융위기를 자력으로 돌파해내는데 성공했으며, 이어 "사회 분위기를 밝게 하는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사회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또한 개혁적 정책과 문민통제 정착, 전자정부, 민주 정치 완벽 정착, GDP 2만 5천 돌파등의 업적을 이룩했다. 하지만 직설적인 말투와 시위 강경진압, 부동산 정책의 실책, 로스쿨, 이라크 전쟁 파병, 노동운동 탄압 등의 문제가 될 만한 정책과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히케모토는 2004년 재선되었으나 2004년 6월 민주선진당-새천년첨관당을 중심으로 히케모토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성 위반 발언과 선거 조작 의혹, 정적 비방 등을 하였다며 그 증거를 제출해 압박했으며, 결국 탄핵소추안의 발의되어 임기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후에 이것이 과장과 날조로 이루어진 자료임이 폭로되고, 국민적 여론이 다시 히케모토 대통령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자 비난의 화살은 새천년첨관당-민주선진당으로 날라가 결국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안 무효 선언을 하며 히케모토 대통령은 복귀하였다.

리노우에 케이이치
미케츠카미 소시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위기 극복과 첨관 경기 회복을 내건 보수당이 집권하였다. 기업인 출신이자 보수성향인 리노우에 케이이치(李乃上圭一)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리노우에 케이이치는 2008년 전 세계를 덮친 세계 공황 속에서도 대한민국과 유일하게 OECD에서 경제 성장률 플러스세를 달성하고 2010년엔 경제 불황속에서도 경제 성장률 4%를 기록하며 경제불황을 이겨내어 경제적인 역량을 자랑하였다. 또한 2010년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선박 쥬이마루호 선원 전원을 안전하게 구출하고 치안을 강화하였으며, 수출 세계 12위의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첨-EU, 첨미 FTA 등을 이루어냈고 세계 각지에서 녹색성장의 아버지라 불리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정권이 권위주의적으로 돌아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복지 확대, 권위주의 청산 등의 정책을 공약하며 "사람답게 삽시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민주당의 미케츠카미 소시(御狐神双熾)가 당선되어 2016년 3월 1일 취임해 공식 업무를 시작하였고 현재도 대통령으로써의 직위를 수행중이다. 첨관은 현재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국가며 경제적, 기술적으로 주목받는 나라이다.

경제

첨관의 수도인 센칸토의 야경

첨관은 현재 인구가 4300만명(2016년)으로 오세아니아권 국가 중 인구가 가장 많다. 명목 국내 총생산(GDP)가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경제선진국이며, 구매력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PPP)는 세계 18위(1조 8000억$)이다. 첨관은 2018년 안에 GDP가 1조 6000억$를 돌파할 것으로 보이며, 미국의 타임지는 첨관을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국가"로 꼽으며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이 발달하고 미래를 꾸준히 개척해나가는 국가"라고 호평하는 등 첨관은 국제적으로 경제적 모범국가로 인정받고 있는 국가이다. 그런만큼, 첨관의 산업이나 대도시권 등도 첨관의 경제를 넘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까지도 많은 경제적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많은 인력과 자본, 자원까지 보유한 우수한 첨관의 산업과 경제권은 첨관 경제를 구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에는 임업, 농업 같은 1차 산업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2차 대전 이후 독립하면서 산업구조의 변화를 시도한다. 가장먼저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하기 위해 해외에 차관을 빌려 항만시설을 갖추고 자체적인 경제력 확보를 위해 산업화를 시도했다.다카키 정권에서 추진된 도시운동에서 기존에 발달된 광업에서 채취된 철광석과 석탄을 발판 삼아 해외연수와 초빙등으로 기술력을 갖춰나가면서 경제력을 발전시킨다. 제조업에도 상당한 투자를 했고 IT 사업에도 상당한 투자를 했다. 중계무역은 첨관의 지리적인 특성상 북쪽에 한국과 일본, 남서쪽에 필리핀, 동남쪽에 마리아나와 괌을 두고 있는 중간지로서 서태평양 무역의 거점으로서 역활을 수행해냈다. 점차 동남아시아 연합의 규모가 커지면서 첨관의 중계무역 수지는 더 큰 탄력을 받으리라 기대된다.

IT 산업의 경우 첨관은 주로 부품 하청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였고 점차 규모가 커지자 자체적으로 부품을 생산해 공급하고 있다. 지금도 세계 최상위권의 부품 생산기업중 하나가 첨관계 기업이다. 그래서 첨관에서 생산된 전자부품은 전세계에 퍼져 있으며 주로 미국과 중국, 일본이 고객이다. 그렇기 때문에 첨관은 IT 경쟁력 순위 5위권 이하로 내려온 적이 없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관광업에도 집중해 첨관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휴양지와 각종 랜드마크를 건설해 전세계인들을 끌어모아 현재 첨관은 세계적인 수준의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으며 이러한 서비업의 발달로 점차 3차 산업의 비중이 70%에 육박하고 있는 수준이다. 주요 관광명소로 남국의 정취가 느껴지는 해수욕장은 어느 곳이든 훌륭하다는 평이 대다수며 그외 첨관 최고봉 천관산과 센칸토에 높게 솟은 마천루 동방 타워가 있다.

첨관의 주요 무역 대상국은 미국, 중국, 동아연방, 일본, 동남아연합, 프랑스 등이다. 첨관내 주요 대기업으로는 아시아 최대 반도체 생산업체인 히카리온(Hikalion)을 거느린 나가하마 그룹과 석유재벌로 유명한 사사오카 오일, 중공업으로 유명한 하이스터 그룹 등이 있다. 또한 부락민들이 첨관으로 갈 당시 가지고 있던 특기를 살려 다양한 사업을 차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기원이 되어 현 첨관에는 독창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이 많이 생겨났다. 유명한 중견·중소기업으로는 요리도구, 부엌칼인 '장미칼 시리즈'로 유명한 히메지, 닌텐도, 소니와 함께 아시아 3대 게임, 게임기 제작사로 불리는 스카이림 등이 있다.

정치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국가로 독립 당시 미국의 정치구조를 답습해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이 돌아가고 단원제 첨관 국회와 대법원으로 삼권분립을 시행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중화민국처럼 오권분립을 할것인지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반영되지는 못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직선제로 선출하며, 만 40세 이상의 첨관 국민이면 일정한 조건만 갖출 시 누구나 출마가 가능하다. 임기는 4년이며 1회 연임이 가능하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지명에 따라 국회의 청문회를 거쳐 임명된다. 국회는 300명의 의원들로 구성되며, 의원 임기는 4년이다. 법원은 3심제로 운영되며,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이다. 행정구역으로 수도 센칸토가 도로 지정되어 있고 그외 지방은 인구가 많고 발전된 지역은 직할시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지방자치제를 따라 8개의 현으로 나뉘며 나루미 제도는 별도로 특별자치구로 지정되었다.

행정부

입법부


제17대 첨관국회
(임기 : 2020년 3월 1일 ~ 2024년 2월 29일)
의장 : 민주당 우루하 하지메 (潤羽 創)
부의장 : 민주당 호리키타 카오루 (堀北 薫) | 자유당 시로가네 아야메 (白銀 彩芽)
민주당 - 115석 (38.3%)
자유당 - 100석 (33.3%)
유신의당 - 30석 (10.0%)
신진당 - 25석 (8.3%)
민중승리연대 - 20석 (6.7%)
녹색당 - 10석 (3.3%)
원내여당 - 115석 (38.3%) 원내야당 - 185석 (61.7‬%)
정수 : 300석 | 결원 : 0석
※ 현재 여당은 민주당이며, 나머지는 야당이다.

사법부

행정구역

외교

대한민국과의 관계

첨관과 대한민국은 상당히 긴밀한 외교관계를 맻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과 첨관은 일제강점기란 비슷한 시기를 겪었고 독립 이후 비슷한 처지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여러가지 협력을 하며 공동발전을 도모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첨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첨관도 한국과 교류를 활발히 했다. 다만 독재정권 당시 한국, 동남아의 독재 정권과 결탁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록 지금은 민주화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첨관과 한국의 교류는 활발하며 특히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술 협력 및 무역 파트너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나가하마와 삼성이 손을 잡아 현재 파트너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서로 협력하는 사이이며 문화적으로도 첨관의 만화가 한국에서 유행하고 K-pop이 첨관에서 유행하며 양국간 여행도 많이 오가는 긴밀한 관계이다.

일본과의 관계

한국 못지 않게 일본에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오히려 한일관계보다 첨일관계가 더 치열하다 볼 수 있다. 첨관인들은 과거 부락민이라 불리던 하층민들의 후손으로 차별 받아왔고 첨관섬 이주도 일본인들에 의한 강제이주에 가깝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젼히 첨관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첨관인들도 인간대우를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경험이 있어 일본인이라면 이를 갈고 있다. 그래서 첨관인들 앞에서 친일발언은 삼가는 편이 좋다. 이런 국민감정과는 별개로 양국정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맻고 있으며 미국의 동맹국으로써 군사적 협력관계에 있다. 일본의 첨단 산업에 있어는 첨관의 전자부품이 필요하기 떄문에 외교관계 단절은 불가능하다. 첨관도 일본이란 거대한 시장을 잃는건 곤란하기 때문에 양국정부는 최대한 마찰을 줄이려 노력한다. 첨관 선주민의 경우 일본인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적은 없지만 그들이 남긴 공예품이나 거석상 같은 유산은 일제 당시 아시아의 각종 문물 수집에 열을 올렸던 일본인 수집가들의 목표가 되었다. 최북단의 태평양계 민족의 작품이란 희귀성으로 일본의 잘나간다는 수집가들은 선주민의 유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자택이나 회사 정원에 전시하는 것에 일종의 자부심을 느꼈다.

미국과의 관계

미국은 첨관 해방의 일등공신으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첨관은 미국의 해외령인 북마리아나와 괌과 인접해 있다. 그래서 가깝게 교류를 하고 있으며 첨관에서 생산된 식량이 괌으로 수출되어 상당한 이익을 벌어들인다. 첨미관계에 있어 군사를 논하지 않을수 없는데 주요 공군기지인 센칸지마 비행장은 미군과 공동소유를 하고 있으며 주첨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주첨미군은 육군과 공군, 해군 보급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실상 육상방위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고 첨관 육군은 사실상 주첨미군의 보조역에 가깝다. 첨관은 섬나라인 특성상 해공군 위주로 양성해왔고 대륙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육군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첨미군에게 육상방위를 맡기고 육군 예산을 줄여 해공군에 투자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었기 떄문에 내린 조치이다. 여담으로 미국인들은 첨관인과 일본인을 구분하는 것을 힘들어해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보이는데 그때면 첨관인들은 미국인과 캐나다인은 뭐가 다르냐며 반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만과의 관계

비슷한 자연환경과 비슷한 근대사를 가져서 그런지 첨관과 대만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 관계는 1987년 단절되었다. 하지만 대표부를 두었고 비공식적으로나마 교류중이다. 양국은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똑같은 남국(南國)이지만 첨관은 일본, 대만은 중국과 더 유사한 풍습을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관계

첨관과 오스트레일리아는 첨관 임시정부가 호주에 지부를 세우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100명의 첨관인들이 호주로 이주하였으며, 추후엔 호주군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싸우기도 하였다. 종전 후엔 국교를 수립하였고 서로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 사사오카 오일이 호주의 석유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첨관의 기업들도 호주에 진출하였다.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

첨관과 동남아는 범동남아-태평양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동남아의 독재 정권과 첨관의 독재 정권이 일종의 한국-첨관-동남아 삼각 커넥션을 맺기도 하였다. 동남아엔 첨관 기업들의 공장이 많이 건설되어 있다.

염사국과의 관계

2006년에 벌어진 전투로 인해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현 대통령 때에는 그나마 사이가 좋아졌지만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

군사

사회

첨관의 인종은 첨관인이 90%인 단일민족이다. 첨관인은 일본에서 첨관으로 건너온 부락민 세력을 말한다. 토종 일본인은 10 ~ 20% 정도이며, 대부분 사업 차 온 일본인들이다. 최근 첨관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자 일본 기업들이 첨관으로 진출해 일본인이 첨관에 거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첨관인-일본인간 불화나 갈등도 생겨 첨관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1995년 민주화 이후 동성혼이 합법화되었고 1998년에 사형과 징병제가 폐지되었다.

문화

첨관은 선주민들이 여느 문명들 못지않게 찬란한 문명과 수준높은 문화와 기술을 일궈냈다. 그러나 700년경을 정점으로 인구수는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천년경 한명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 많게는 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첨관 선주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지금도 인류사의 주요 미스테리로 거론된다.

현재 첨관은 전통적인 문화 대신 현대 대중 문화가 발달한 편이다. 독립 이후 일본과 미국을 통해서 현대 문화를 받아들여 첨관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1990년대 민주화를 기점으로 현대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첨관 방송은 1954년 SBS(Senkan Broadcasting Corporation)의 창설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 우민화 정책 이후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1980년대 리치요의 언론억압과 방송사 통폐합이라는 흑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민주화와 경제 발전 이후로 TV 채널도 다양해졌고 2010년대 이후로 예능 프로그램도 늘어났다. 또한 신문도 매우 발전하였고 현재 히메지신문, 센칸토 타임즈, 남국 신문, 첨관신문, 태평양신문 등의 다양한 신문들이 존재한다.

첨관의 인터넷은 엔도 마모루 박사(1899~2001)가 개발한 pc통신인 '히카리'를 통해 시작된다. 1990년대 인터넷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며 1992년엔 10여개의 pc통신이 난립했을 정도로 엄청난 기세를 보여주었다. 현재는 한국 다음으로 인터넷 속도가 빠르고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아진 인터넷 강국이다.

  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경보
  2. 이마가라가 남긴 통치 유훈이며, 현재도 관공처에 붙어있는, 첨관 내치의 덕목이다.
  3. 노하라 야츠모토가 제창한 첨관 민주주의의 기초이며 헌법 초안에도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