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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스트로이카 기념 우표

페레스트로이카(러시아어: Перестройка)는 '재건'의 의미를 가진 러시아어 단어로, 1975년 11월 혁명을 통해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주도하에 실시된 소련의 경제 및 사회 개혁 정책이다.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5단계 개혁 과제를 제시하며 신중하고 순차적인 개혁개방을 계획했다. 당시 소련은 중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로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에 시달렸고 계속된 농업 정책의 실패로 매년 막대한 양의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 안드로포프는 소련 경제의 약점이었던 농업과 경공업에 집중했다. 또한 부분적 시장 경제가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실시한 글라스노스트와 함께 소련의 변혁을 상징하는 정책이 되었다.

농업 자율화

안드로포프가 계획한 페레스트로이카의 5개 개혁 과제 중 첫 번째 단계는 농업의 부흥이었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소련 국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부터 지속된 농업 개혁의 실패와 콜호스와 같은 집단 농장의 생산력 저하로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겪었다. 결국 소련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막대한 양의 곡물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경제적으로 큰 낭비였다. 안드로포프는 소련의 농업 정책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고 블라디미르 레닌니콜라이 부하린신경제정책을 참고해 농업을 자율화하기 시작했다. 1976년, 안드로포프는 모든 콜호스의 해체를 지시하며 농민들에게 무기한 임대 형식으로 토지를 분배했다. 또한 농민들의 자율적인 경작을 허용하며 중앙 통제적인 농업에서 탈피했고, 당에서 지정한 최소 생산량을 제외한 잉여 농산물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을 허용했다. 농민들은 자신의 몫이 된 농산물의 시장 판매를 시작했으며, 그 결과 소련의 농업 생산량은 엄청난 속도로 상승했다. 농민들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생산량 확대에 주력했고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 지 불과 4년 만인 1980년, 소련의 농산물 생산력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까지 성장했다.

경공업 집중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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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유리 안드로포프

안드로포프는 11월 혁명 직후, 무너진 농업 뿐만 아니라 소련의 고질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경공업 육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당시 소련은 중화학공업에 치중한 나머지 국민들의 높아진 구매력을 충족시킬만한 소비재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배급 신청 후 수개월, 길게는 수년을 기다려야 구매할 수 있었다. 생필품과 가공식품들도 소진되는 속도에 비해 재고가 채워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 구매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다. 지방 중소도시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 중소도시 시민들은 주변 대도시까지 가야 생필품을 구할 수 있었다.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으로 소련 국민들의 생활의 질은 높은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품이 떨어져도 바로 구매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소비재 산업의 생산력이 국민들의 구매 욕구를 따라가지 못하자 결국 1970년대 초부터 암시장과 같은 지하경제가 활성화되었고, 전반적인 소련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1976년 말, 안드로포프는 대대적인 경공업 육성 계획을 발표하며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던 국가 예산을 줄여가면서까지 경공업 육성에 집중했다. 칼리닌그라드를 시작으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 지역까지 전국적으로 경공업 공단을 건설했다. 또한, 소비재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장과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로 철도를 통한 물류 운송을 확대했고 철도역과 연계해 소련 곳곳으로 혈관처럼 뻗어나가는 유라시아 고속도로 체계를 구축했다. 개선된 교통망의 확보로 소련의 물류 운송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며 빠르게 생필품난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공업 공단이 들어선 도시들 역시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이루며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 1983년, 마침내 경공업 생산량이 중화학공업 생산량의 85%까지 성장하면서 끈질기게 소련을 괴롭혀오던 생필품 부족 현상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부분적 경제 개방

1982년, 안드로포프는 경제 개혁이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소규모 국유 기업들을 민간에 유상 양도의 형태로 소유권과 경영권을 넘기며 효율적인 경영이 가능해지도록 했다. 소련 당국은 민간에 넘긴 국유 기업들을 주식회사로 전환해 노동자들에게 주식을 균등 분배하면서 노동자들은 기업의 소유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는 생산 수단의 급속한 사유화에 대한 반발을 줄이고 공산주의 이념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정책이란 비판을 회피할 수 있게 했다. 이 조치로 많은 사영 기업들이 생기면서 더 이상 정부가 모든 산업 분야의 손익을 책임지지 않게 되었고, 정부 지출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소비재 생산품에 대한 단계적인 가격 자유화를 시행해 시장 경제의 성공적인 정착을 유도했다. 먼저 수요가 낮은 생산품들의 가격부터 자유화했으며, 상품 가격의 20%가 넘지 않는 수준에 한해서 같은 품목의 소비재라도 품질에 따른 차등 가격을 매길 수 있도록 허용해 품질의 향상을 도모했다. 1984년에는 국가 계획에 따라 거래된 소비재가 전체 구매량의 27%에 불과할 정도로 시장 경제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시장 경제의 성장으로 자연스럽게 지하경제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으며 사치품의 가격도 적정권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안드로포프의 강력한 추진력과 천연자원 수출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단기간에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한 소련은 더 많은 자본 유치를 위해 부분적 개방 정책을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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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인 안드로포프와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새로운 서기장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안드로포프의 계획을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할 것을 선언했다. 안드로포프의 지지층이었던 군부와 KGB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추였던 고르바초프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고르바초프 역시 큰 어려움 없이 개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수 시장이 안정 궤도에 오르자 고르바초프와 소련 정부는 1984년부터 향후 5년 안에 점층적인 변동환율제의 도입을 선언하며 5대 개방 도시를 지정하고 각 도시에 해외 기업의 투자를 허용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작으로 이르쿠츠크, 셰브첸코, 세바스토폴, 칼리닌그라드 순서로 해외 기업에 개방되었다. 이 개방 도시들은 제2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매력과 당시 2억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소련 시장을 노리고 밀려온 서방 자본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아이러니하게도 개방 도시들은 군사 기지나 주요 시설이 위치한 비밀 도시였고 KGB의 통제하에 이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구 성장은 경제 성장에 비해 매우 더뎠다. 심지어 비밀 도시에 대한 존재 자체가 기밀에 부쳐져 거주자들은 외부에서 비밀 도시에 대한 정보를 발설할 수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제어할 수 있는 속도로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도입이 가능했다.

일련의 개혁·개방으로 소련 경제가 점차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중앙 정부의 수입은 감소했다. 이에 소련 정부는 기업에 부과되는 소득세를 증세할 것을 선언했고 체계적인 회계와 감사 제도를 구축했다. 강력한 감사 과정에서 현저히 경영 실적이 떨어지는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단행했고 허위 실적 기재로 부당하게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기업들을 처벌했다. 또한 1989년에는 개인의 독자적인 기업 설립과 투자를 허용하며 중앙 정부의 자본이 투자되지 않은 완전한 사기업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기업을 설립할 수 있는 분야는 한정적이어서 이 시기 탄생한 사기업들은 주로 서비스업과 같은 3차 산업에 해당하는 기업들이었다. 경제 개방 후에도 여전히 국유 기업과 정부의 자본이 들어간 사영 기업이 경제의 절반 가까이 장악하고 있었고 방산, 천연자원, 기반 시설 등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분야는 개인의 투자 및 경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긴장 해소

페레스트로이카가 막 시작됐던 당시 안드로포프와 소련 정부는 소련 경제의 걸림돌 중 하나가 미국과의 군비 경쟁이라 생각했고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 미국과의 긴장 해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데탕트로 미소 양국 간의 긴장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롯한 동구권 억압과 중국과의 소중 분쟁에 빠지며 공산권의 분열이 가시화되자,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했고, 이듬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까지 중국을 방문하자 미국과 중국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미국은 소중 분쟁에서 중국을 암암리에 지원하면서 공산권의 내분이 더욱 심화되도록 유도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은 중국까지 소련을 위협하며 냉전이 다극 체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안드로포프는 공산권에서 흔들리고 있던 소련의 패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미국과 타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76년, 서기장 취임 연설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공식적인 시작을 선언한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폐지를 공표하고 소련이 행했던 동구권 국가를 향한 무력 행사와 인권 탄압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또한 세계 평화를 강조하며 언제든 미국과 평화를 위한 대화를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7년, 제39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가 소련 방문 의지를 내비치며 페레가보리라 불리는 미소 양국의 정상회담이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1977년 10월 25일, 지미 카터 대통령이 모스크바브누코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환대로 시작된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전략 무기 제한 협정의 핵무기 제한 규모 확대와 양국의 적대적 군비 경쟁을 완화할 군축 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기로 합의했다. 소련은 자국의 국제 무역 수입 중 일부는 무조건 미국의 제품을 수입하겠다는 수입 할당제와 같은 미국의 독점적인 특혜를 인정하면서 미국의 광범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소련과 미국의 모스크바 회담은 사실상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으며 격화되었던 이데올로기 경쟁이 완화되는 계기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공산주의의 종말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회담으로 미국은 중국과 회복되어가던 외교 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하며 전부 원점으로 되돌렸으며, 소련을 중심으로 중국을 제외한 공산권의 국가들과 차례로 국교를 정상화했다. 소련과 미국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서로를 유일한 경쟁국으로 인정하며 다른 나라들이 미소 양극 체제를 위협할 수 없도록 전략적 협력을 맺었다. 소련은 미국의 서유럽에 대한 영향력, 미국은 소련의 동유럽 영향력을 인정하고 서로 이를 침해하지 않을 것을 합의했다. 이러한 양국의 결정으로 전세계에 거센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 서구권 국가들은 미국이 더 이상 소련과 적대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유사시 미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큰 안보 위협을 느꼈으며, 동구권 국가들에서는 프라하의 봄과 같은 민주화 요구가 이어졌다.

첨단화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침체된 경제를 성공적으로 되살린 고르바초프와 소련 정부는 여전히 낙후되어 있던 소련의 행정 체계와 서방에 비해 뒤쳐진 정보 기술 분야에 주목했다. 소련은 수학자이자 컴퓨터 이론 학자인 미하일 글루시코프가 계획했던 전국 단위의 네트워크 시스템인 오가스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고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1962년에 글루시코프가 계획할 당시, 오가스 프로젝트의 목적은 소련 전역을 컴퓨터 네트워크로 연결해 실시간으로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효율적인 전자 정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즉, 컴퓨터를 통해 더 빠르고 정확한 사회주의 체계를 구축하려 했지만 소련 공산당의 반발로 국지적인 성과만 거두는데 그쳤다. 고르바초프와 수뇌부는 가장 먼저 오가스 프로젝트의 기본 골조인 사회 전반에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보급하고 이를 연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컴퓨터 제조 기술과 시설이 부족했던 소련은 IBM과 애플을 비롯한 미국 IT 기업들의 개인용 컴퓨터를 적극 수입해 민간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미국 기업들과 기술 교류를 통해 일렉트로니카 BK 같은 소련 자체 기술로 제작한 PC를 출시하는 등, 첨단 기술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오가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불과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1989년 3월, 소련의 정부 기관 PC 보급률은 70%를 넘겼다.

오가스 네트워크가 완전히 자리잡는데 성공한 1991년까지 소련의 네트워크망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인트라넷 환경이었다. 이런 이유로 오가스는 주로 정부 기관과 기업의 업무용으로 사용되었다. 민간에서는 문자를 통한 간단한 소통이나 정부에 의해 공개된 정보만 공유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기존에 금지되어 있던 각종 정보를 민간에 자유롭게 공개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 중이었는데, 이 정책의 일환으로 오가스의 외부와의 연결을 허가했고 오가스의 용도를 대폭 확대했다. 1991년 8월, 미국의 NSFNET과 네트워크 연결에 성공한 소련은 월드 와이드 웹을 기반으로 하는 인터넷 서비스의 제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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