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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연방
française Fédération
파일:프랑스연방국장.png
국기 국장
자유, 평등, 박애
상징
국가 라 마르세예즈
국조
수탉
국화
붓꽃
위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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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43년 8월 11일 프랑스 왕국 성립
  • 1613년 북아메리카 정복
  • 1792년 9월 22일 프랑스 혁명
  • 1821년 4월 6일 유럽 통일
  • 1821년 11월 4일 프랑스 연방 성립
  • 1946년 10월 27일 이원집정부제 도입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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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파리
최대 도시
파리
면적
48,689,001km^2
내수면 비율
국가의 내수면 비율
접경국
 중화인민공화국, 몽골, 터키, 이란, 멕시코, 북한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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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513,423,499명
밀도
10.5명/km2
민족 구성
로망스족 81%, 게르만족 11%, 켈트족 6%, 기타 2%
출산율
1.3명
기대 수명
91세
공용어
프랑스어
지역어
영어, 바이킹어
공용 문자
로마자
종교
국교
없음
분포
가톨릭 63%, 개신교 11%, 이슬람 1%, 불교 1%, 무종교 24%
군대
프랑스 연방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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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옹
112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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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연방제, 공화제, 이원집정부제, 대통령제, 양원제, 문민통제
국가 원수 (대통령)
장 드 골
정부
요인
하원의장
조르쥬 생피에르
여당
자유연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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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29조 1461억
1인당 GDP
£56,768
무역
수입
£4조 1462억 3200만
수출
£3조 3663억 6300만
예산
세입
£8조 9536억
세출
£9조 1306억
외환 보유고
£1조 3604억 7100만
화폐
공식 화폐
프랑
ISO 4217
F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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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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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1962년
UN 가입
1945년
주한대사관
파리
ccTLD
.fr
국가 코드
FRA
전화 코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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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프랑스 연방(française Fédération)은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에 걸친 연방제 국가이다. 지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중화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붕괴 이후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극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프랑스 통화인 프랑은 국제 사회의 기축 통화가 되며 프랑스어가 세계 공용어로 사용될 정도이다. 또한 프랑스 주도로 출범한 지구 연합은 현재까지 지구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상징

국명

국기

국장

국가

국조

역사

로마 점령기 ~ 프랑크 왕국 시대

고대에는 로마인들이 갈리아족의 땅이라 하여 갈리아라고 불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9년 만에 갈리아 전쟁으로 갈리아를 정복했다. 갈리아족은 로마에 동화되어 갔으나 제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로마로 노예 신분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갈리아족은 로마 귀족 이주민들과 로마에서 자유민 신분이 된 갈리아족 노예들의 영향을 받아서 갈로-로망 문화를 만든다.

로마가 영향력을 잃으면서, 갈리아 지방 일대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들어와 프랑크 왕국을 세운다. 프랑크 왕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책봉받은 갈리아 지방을 다스렸다. 다른 게르만족 국가들은 제대로 된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멸망하였지만, 프랑크 왕국은 히스파니아 지방으로 쳐들어 온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제국을 격파하고 교황청과 협조하여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였다. 메로빙거 왕조에서 카롤루스 왕조로 넘어가면서,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제위를 받게 된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프랑크 왕국은 계속 분열된다. 바이킹, 마자르족, 동로마 제국이 계속 제국의 영역을 침입해 오면서, 각 지방은 방위를 위해 주종 관계를 맺고 농노제를 실시했다. 또 지중해에 준동하는 사라센 바르바르 해적 때문에 지중해 교역 형태가 변화했다. 프랑크 왕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는데, 지방간의 교류가 줄어들자 각각 프랑스 지방의 프랑스어, 이탈리아 지방의 이탈리아어로 분화되었고, 게르만족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에서는 독일어가 나온다.

중세 프랑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후, 위그 카페 백작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프랑스 왕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교황에게 세례성사를 받고 랭스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한 것을 이어받아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은 그대로 계승하였다.

카페 왕조는 명목상 프랑스 왕국 전체를 통치하였으나 각 지방 영주들이 세운 소국들의 권한이 막강하여, 실질적으로 카페 왕조의 왕들은 수도가 있는 일드프랑스 지역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른 영주들로부터 왕의 권위를 인정받는 선에서 그쳤으며, 늘 대영주들의 권력에 휘둘리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지중해 무역이 성장하고 농사 기술이 발달하자, 점차 입지가 늘어난 카페 왕조는 지방 영주들의 땅을 점령하며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갔고, 필리프 2세 집권기에 이르자 귀족들을 완전히 압박할 정도의 왕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카페 왕조의 성장은 잉글랜드와의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고,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에 의해 영토를 수복하려는 프랑스는 자주 영토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세력이 강했기에 프랑스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나, 잉글랜드가 존 왕 시기에 이르면서 세력이 약화되어 프랑스는 프랑스 내 모든 영토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카페 왕조 이후 등장한 발루아 왕조 시기, 잉글랜드는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에 쳐들어옴으로써 백년전쟁을 일으켰지만 100여년간 지속된 전쟁 끝에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프랑스 왕국 체제가 점차 안정될 무렵, 신교도 세력인 위그노와 프랑스 가톨릭 세력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가톨릭을 지지하며 신교도를 탄압하던 당시 프랑스 왕실인 발루아 왕조와 신교도 측 기즈 가문간에 전쟁이 발생하였다. 전쟁은 수십년간 지속된 끝에 발루아 왕조가 패하고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 낭트 칙령이 발표되며 종결되었다. 내전이 종결하고 난 후 안정이 되자 프랑스는 외부에 다시 집중했다. 독일 지역에 비해 일찍 내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 프랑스로서는 큰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낭트 칙령으로 타협한 것을 바탕으로 리슐리외와 같은 관료의 주도 아래에서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도입한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1600년에는 220,000명에 달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면서도 30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동맹하였고, 심지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30년 전쟁이 끝났을 무렵부터 유럽의 패권국 중 하나가 되었고,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해 북아메리카 동부 지역을 완전한 프랑스 영토로 확보하고 다수의 프랑스인들을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낭트 칙령이 폐지된 1685년 프랑스의 인구는 21,500,000명이나 되었고 여전히 프랑스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파리도 인구가 510,000명으로 엄청나게 증가해 런던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에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의 이탈로 재정에 큰 손실을 얻었다.

프랑스 혁명과 유럽 통일

재정난에 시달리던 프랑스가 이를 해결하고자 소집한 삼부회에서 프랑스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3신분이 다른 두 계급의 세금을 모두 부담하는 결정이 가결되었다. 계몽사상이 유행하던 당대 프랑스 사회에서 이러한 결정은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루이 16세를 끌어내어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하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장기간의 관습법과 귀족, 부르주아지의 견제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앙시앵 레짐(프랑스의 기존 체제)은 이를 계기로 변화하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혁명 이념이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귀족과 왕정의 실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주변국들은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와 대립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혁명의 기치를 유럽 전체에 전파하기 위한 프랑스 혁명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유럽은 거대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국민개병제를 통한 징병으로 무수히 많은 대군으로 성장하여, 스페인, 시칠리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러시아 원정은 실패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로 영국 본토에 상륙해 1821년 영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기점으로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체가 항복하면서 유럽 전역은 프랑스로 통일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연방제를 도입하였고,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스인들을 정복지 각지에 이주시키는 프랑스화 정책을 펼쳤다. 이로써 프랑스는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좋은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를 열었다. 이때가 프랑스의 첫 전성기이자 막강한 현대 프랑스의 기반이 된 시대이다. 벨 에포크 시대를 맞은 프랑스는 산업의 발전으로 공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매우 풍족해졌고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국가의 번영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북아메리카 전역을 손에 넣었으며, 일본과 중국을 개항시키고 정복된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였던 인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손에 넣는 등 아시아에서의 세력도 확장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과 식민지 국민들은 계속 착취를 당해서 여전히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강력한 국력으로 이러한 것들을 해결해가며 점차 프랑스 주도의 질서를 확립해 갔다. 이즈음 유럽 전역과 북아메리카는 거의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현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각 민족들의 분리주의 운동이 모두 진압되고 프랑스의 민족 통합 정책이 지속됨에 따라 유럽의 문화는 완전히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민족 통합 정책은 토착 프랑스인들을 유럽 곳곳으로 이주시키고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한 로망스족과 유럽의 주요 민족들 간 결혼을 장려하는 동시에 백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 '프랑스인'이라고 정의하는 신 민족 개념을 만들어냈다. 또한 프랑스는 러시아와 함께 당대에 둘 뿐인 열강이 되었으며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고 해외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한 자본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부르주아 계급을 발생시켜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적 양극화가 가중되었고, 까미유, 피에르 등의 사상가에 의해 사회주의가 창시되자 이를 지지하는 노동자 세력들에 의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극도록 혼란한 사회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