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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및 이탈리아 통일

하늘미르 왕국의 시작은 이탈리아 왕국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Vittorio Eman­uele II)은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Camillo Benso di Cavour) 백작이 1852년에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통일 이른바, 리소르지멘토(il risorgimaento)를 시작하였다. 카보우르는 사르데냐 왕국 혼자서는 통일을 추진하기에는 국력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자, 대신에 영국이나 프랑스을 끌어드려 이탈리아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몰아 낼려고 구상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와 영국을 도와 크림전쟁에 참전하였지만 파리 조약에서 협상과정에서 무시당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성과도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크림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하다가 러시아의 관계는 망가졌고 외교적으로 고립이 되었기 때문이다.

1858년 여름 어느 날 카보우르는 나폴레옹 3세를 방문하며 공동으로 오스트리아를 치기로 합의하며, 프랑스에 다시 한번 제안을 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배했던 롬바르디아 지방과 베네치아 지방을 사르데냐 왕국이 얻는 대신에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으로부터 니스와 사보이를 교환하기로 하며 비밀협정인 플롱비에르 밀약을 체결한다.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롬바르디아 지역의 혁명운동을 부추겨 오스트리아가 군사를 일으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의 비밀협정을 알 일이 없는 오스트리아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859년 3월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가 처들어 오지 않자,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획을 포기하고 전국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왕국을 얕보고 이를 도발 행위로 간주하며 동원령을 해제, 군대 해산을 요구하며 이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린다. 하지만, 사르데냐 왕국을 이 요청을 묵살하였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이 지배하고 있던 피에몬테를 침공하며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왕국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에마누엘 2세 국왕과 카보우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플롱비에르 밀약에 따라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면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쟁이 끝나게 된다. 1859년 6월 4일 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에 대승을 거두었고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었다. 같은 달 24일에는 롬바르디아 솔페리노 지역에서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졌고 오스트리아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직접 출정했지만 사르데냐 왕국 - 프랑스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평화협상을 시작하는데 이때 당사자인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인 비토리오는 배제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통일 이탈리아 출생으로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였고 적당한 수준에서 강화를 하며 마무리를 지을려고 했다. 7월 11일 빌라프란카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제외하고 베네토를 사르데냐에 할양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에 대해 불간섭을 약속하였다. 예상보다 적은 소득에 불만인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군사원조를 잃지 않기 위해 동의하였고 이렇게 전쟁은 끝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과의 비밀 협정(플롱비에르 밀약)을 어긴것이 되어 니스와 사보이는 양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 휴전협정은 1859년 11월 10일 취리히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사르데냐 왕국은 격분하였고 카보우르는 수상직에서 사임하였다. 고조된 이탈리아의 통일 기운이 진정되지 않았고 사르데냐 왕국의 군대와 관리들을 중부 이탈리아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도 이를 막을 여력은 없었다. 파르마, 모데나, 토스카나에서 잇따라 반란이 발생하였고 포라라등과 연합하여 중앙 이탈리아 연방(United Provinces of Central Italy)을 구성하고 곧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된다.

카보우르는 1860년 1월에 다시 수상직에 취임하였고 중앙 이탈리아 연방을 인정받는 협정(토리노 조약)을 맺게 되는데, 나폴레옹 3세는 합병을 인정하는 대가로 니스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이를 동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르데냐 왕국은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주세페 마리아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프랑스로부터 할양해준 자신의 고향인 니스를 되찾으려고 하지만, 가리발디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는 것을 막기위해 시칠리아의 반란을 지원해달라고 설득 하였다.

1860년 5월 가리발디는 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반군 패전병과 합류하여 5월 13일에 정규군을 격파하였다. 5월 14일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으로 시칠리아 섬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주도인 5월 27일에 팔레르모에 위치한 테르미니 항구를 둘러싼 전투가 벌어졌다. 나폴리 장군이었던 페르디난도 란차(Ferdinando Lanza)는 팔레르모를 포격하였지만, 영국의 해군 제독이 개입하며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폴리의 왕립군과 군함들은 철수하였고 팔레르모 시는 가리발디에게 항복한다.

이러한 사실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국가적인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고 양시칠리아 왕국은 충격에 빠졌다. 팔레르모에 이어 시칠리아의 도시인 메시나까지 공격하며 메시나 해협을 건나 이탈리아 본토로 원정을 떠났다. 시칠리아와 가까운 칼라브리아주는 크게 저항 하지 않았고 가리발디의 군대에 바로 항복하며 무혈로 입성하게 된다. 코센차, 에볼리까지 진격하였고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인 프란체스코 2세는 4천명의 군대와 함께 후퇴한다. 볼투르노 강(Volturno)에서 견고한 요새를 만들었다. 1860년 9월 7일 나폴리 시로 입성하였고 볼투르노 격전에서 가에타 요새(성채)를 무너트리며 양시칠리아 왕국을 무너트린다.

이후에 나폴리, 시칠리아, 마르케 움브리아는 국민 투표를 통해서 합병을 선언하였고 1861년 2월 18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토리노에서 첫 번째 이탈리아 의회의 대의원들을 소집하였고 17일에는 이탈리아 왕으로 공표하였다. 통일 이탈리아는 헌법적, 의회적 정부 체제를 취하고 국민 주권적 원칙과 군주적인 전통을 융합시키게 된다. 같은달 27일에는 이미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를 통일 이탈리아의 새로운 수도로 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로마에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군을 로마에 주둔시켜 교황령을 보호 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에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기회는 찾아왔다.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마지막 교황령을 점령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더 이상 교황령을 보호 할 수 없었고 자국인 프랑스의 방어를 위해 로마에서 주둔시킨 군대를 송환해야 했다. 프랑스 내부에서 스당전투에 패배로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한 후 이탈리아 정부에게 로마를 획득하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개 된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은 폰차 디 산 마르티노 백작을 교황 비오 9세에게 보내 이탈리아군이 교황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무혈입성을 허락해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고 이탈리아 정부는 1870년 9월 19일로마를 포위하며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로써 로마와 라티움은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로 흡수되었고 교황령은 멸망하며 로마내에 바티칸 시로 축소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 왕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독일어: 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탈리아 왕국에 동맹을 요청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오스트리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이 전쟁의 승리하면서 베네치아를 이탈리아로 병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 성립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됨에 따라 이탈리아는 사보이 왕가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피에몬테주 피렌체 왕자에서 군림하는 국민 국가가 되었다. 통일 이전부터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첫 수상이 되었고 통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주세페 가리발디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의회를 구성하면서 이탈리아의 정치 지형은 좌우로 나뉘게 되엇고 당시 우파는 사르데냐 왕국 출신의 구 정치인, 지주, 로마 카톨릭 지지 세력, 군부 등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좌파는 자유주의, 급진주의자 그룹이다. 초대 수상인 카밀로 카보우르가 사망하자 내각은 주로 보수파가 집권햇지만 간간히 좌파가 득세하기도 했다.

20세기에는 이탈리아 왕국은 제국주의적 국가가 되었고,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트리폴리를 지배하며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를 세웠고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세워 이 둘을 합병하여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에는 이탈리아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군으로부터 자국 방어하는 것만을 바랬다. 당시 이탈리아 수상이었던 안토니오 사란드라(Antonio Salandra)는 이번 전쟁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이탈리아 북부 티롤과 달마티아를 비롯한 아드레아 해를 넘어 발칸 반도 지역을 병합하고자 했다. 사란드라의 야심은 삼국 협상과 이탈리아 사이에 맺어진 비밀 조약이었던 런던 조약으로 실현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진영에 참전하게 되는 대신에 트렌티노, 남티롤,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반도, 달마티아 북부, 아드리아 해와 접한 도서, 피우메 지역을 양도 받기로하는 약속을 한다.

이탈리아 내의 국민 대다수와 카톨릭, 정치인, 농민, 사업가 등 각계각층이 참전에 반대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랜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었는데다가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불안과 높은 세금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사란드라는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1915년 봄에 이탈리아 전쟁에 뛰어들었다. 명분은 이탈리아의 동이 없이 세르비아를 침략했다는 사유이다. 이탈리아는 초기 87만 5천명의 병력으로 참전하였지만 지난 튀르크 전쟁에서 많은 전비를 소모해서 화력면에서 떨어진 전력이었다. 결국에는 전쟁 기간 동안 사망 65만, 부상 95만이라는 막대한 희생이 일어났다.

하지만, 삼국 협상과 함께 승전국이 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동쪽과 북쪽에서 영토를 확장하였고 티롤 백국의 일부,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반도, 자다르 일부를 할양 받았다. 하지만, 애초에 런던 조약에 포함되었던 다른 지역은 병합하지는 못면서 불구의 승리(Vittoria mutilata)라는 한계가 있었다.

파시즘의 등장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탈리아와 삼국협상 사이에 맺은 비밀 조약인 런던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내부에서는 불구의 승리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이에 민족주의적 선동이 뒤를 따랐고 1919년 3월 23일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파쇼정당을 세웠다.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던에 참전했던 군인이었고 아반티(Avanti, 전진)이라는 사회당의 기관지 편집장이었다. 하지만 사회당과 결별한 뒤에 이탈리아 투쟁 결사(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를 결성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극심한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은 정치 불안의 원인이 되었고 노동자는 총파업하고 공장과 농농장을 점령하여 노동자 자주 경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농업지역에서는 노업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장 점령이 시도되어 우익 세력과 충돌하기 이르렸다.

사회주의 혁명이 시도되자 우익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무솔리니의 파쇼 정당으로 결집하였고 1920년 조바니 졸리티가 수상에 올랐으나 사회주의 세력에 대응하지 못했고 1921년 무솔리는 파쇼정당의 이름을 국가 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으로 바꾸며 중산층의 지지를 확대하였다. 파시스트가 내각 해산을 압박하자 졸리티 수상은 더이상 내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조기 총선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파시스트당이 총선에서 과반 획득에 실패하였고 졸리티 총리가 연정구성을 제안했으나 무솔리니는 이를 거부하고 정권을 파시스트 당에 넘기라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파시스트당은 내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이른바 검은셔츠단이라고 불리는 국가안보의용민병대(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 MVSN)을 동원하여 로마 진군을 감행하였다. 수상이 공석이었고 당시 국왕이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수상으로 지명하였다. 수상이 된 무솔리니는 자유주의측 인사들과 연합하여 정부를 구성하였고 사회당 지도자인 자코모 마테오티는 파시스트의 부정선거를 비난하다 살해되었다. 1925년 12월 24일 무솔리니는 수상이 왕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의회의 결의를 무시할 수 있는 법률을 통과하였고 자치단체장은 해임되고 지방의회는 해산 되는 동시에 중앙정부에서 포데스타(Podesta)라는 집정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1928년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의회를 폐지하고 자신이 지명하는 400인의 의원들로 구성된 파쇼 대의회로 대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파시즘의 몰락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나 즉각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았다. 무솔리니와 파쇼정권은 유럽 보다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국왕이 임명한 군사령관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탱크를 비롯한 이탈리아 군의 군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하며 참전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까지 말했다. 무솔리니는 바돌리오의 의견을 수용해서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할 때 까지 유럽 전선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1940년 6월 10일 프랑스가 함락되고 무솔리니는 유럽전선에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프랑스 사보이, 니스, 코르시카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프랑스의 식민지인 튀니지알제리를 군대에 파견하였고 나치 독일은 6월 22일 프랑스의 육군 원수인 필리프 페텡과 정전 협정을 맺었고 이탈리아가 점령지를 프랑스에게 반환하도록 했다. 파쇼 정권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1940년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영국군에게 패퇴하였다. 무솔리니는 발칸 반도를 점령하려고 하였고 그리스와 전쟁을 일으켰다. 전선이 길어지고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략하면서 발칸 전역이 형성 되었다. 1941년 4월 독일이 그리스를 이탈리아는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발칸 반도 각지에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유고슬라비아 저항운동 조직)을 비롯하여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도시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자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942년 11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지역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추축국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패퇴하였다. 1943년이 되면서 이탈리아는 모든 전선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1월에는 동부 전선에 파병되어있던 이탈리아 군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 패하였다. 발칸 반동의 점령도 점점 불안정해졌고 1943년 7월에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이후에는 이탈리아는 본토도 방어 할 수 없는 상태에 일으렀다. 당시 이탈리아의 국회격인 파시즘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의 탄핵을 의결하였고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피에트로 바도리오(Pietro Badoglio)를 새 수상으로 지명하였다. 바돌리오 수상은 파쇼 정권의 종식을 선언하고 카시빌리 정전협정을 맺고 이탈리아의 항복을 협의하였다. 이탈리아군은 연합군의 산하로 들어가면서 나치 독일과 싸우게 되었지만 발칸 반도에 있었던 주력 이탈리아 군은 독일에 항복하고 계속해서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무솔리니는 구금 상태였지만 독일 공수부대를 이끌고 있던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는 그랑사소 습격 작전으로 구출되며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괴뢰정권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탈리아군 대부분이 여전히 무솔리니의 지휘를 받는 국가공화군(파시스트군)에 편입되어 있었다. 연합군과 국왕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군은 이탈리아 협력군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파르티잔(레시스텐자, 파시스트 저항단체, 이탈리아 독립군)은 독일군과 파시스트 군을 상대로 격렬한 게릴라 전을 수행하였다.

독일은 이탈리아 점령지에서 파시스트 군대와 함께 아르데아티네 학살, 산타나 디 스타체마 학살 같은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1944년 6월 연합군은 로마에서 독일군을 몰아냈고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는 스위스 국경까지 도주하다가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었다. 다음날인 28일 파르티잔의 조직인 국민해방위원회는 무솔리니에 대해 사형을 의결하고 즉각 처형하였다. 처형된 시신은 밀라노에 있는 주유소에 다른 15명의 파시스트와 함께 내걸렸다. 최후 전선이 고딕전선이 5월 2일에게 무너지면서 파시스트군이 무너졌다.

바도리오 내각이 9개월 정도 유지되었으나 1944년 6월 9일 반파쇼 정치지도자인 당시 70세의 이바노에 보노미가 수상이 되었지만 한달만에 사임하고 파르티잔의 출신인 페루치오 파리가 수상이 되었다. 1945년 6월까지 내각을 이끌었으나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가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국왕도 1946년 5월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를 하며 물러났다.

이탈리아의 분리 독립, 하늘미르 왕국 건국

6월 2일 이탈리아에는 공화국이 선포됐고 움베르토 2세가 한 달가량 재위를 끝으로 폐위되었다. 공화국 선포 이후 제헌의회에서는 엔리코 데 니콜라(Enrico De Nicola)가 첫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이탈리아에 들어선 새 공화국 정부는 왕족인 사보이 왕가의 모든 남성에 대한 국외 추방을 명령하였다. 움베르토 2세를 비롯하여 사보이 왕가는 이 결정에 저항했고 사르데냐 왕국의 근원이 되는 사르데냐 주에 피신하였다.

사르데냐인들은 사르데냐 왕국에서부터 이어와 공화정보다는 왕정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사르데냐 주민들은 이탈리아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언어부터 토종 사르데냐어와 다른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생활방식도 본토의 방식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당시의 사르데냐 민족주의자와 왕정 찬성파, 자본가들은 공화정이 된 이탈리아와의 분리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창하였고 많은 사르데냐인들은 이에 공감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이었던 무솔리니를 임명한 사보이 왕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기도 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거대한 국채, 엄청난 세금 등 경제가 황폐해진 이탈리아와 함께 갈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이탈리아 분리 독립 찬성론자도 있었지만, 이탈리아와 한 몸이 되어야 살 수 있으며, 현재의 분리독립으로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 분리 독립 반대론자들이 있었다. 초기의 분리 독립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공산당 당원이었다. 사태의 시작이 사르데냐 내 왕정 옹호 여론과 사보이 왕가의 피신이었던 점을 고려했을 때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추방 명령을 이행하려 공권력을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왕실을 옹호하는 시위대와 여러 차례 충돌을 빚으며 반이탈리아 정서가 팽배해졌다. 여론의 뭇매를 맞자 지역 내 치안 책임자가 교체되고, 왕가의 체포를 통해 이탈리아 신정부의 질서 확립 사실을 대내외에 공고히 하려 했던 정부의 계획은 시작부터 꼬여버리며 정치적 위기로도 번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사르데냐 독립 위기가 시작됐다. 새로운 치안 책임자는 악화하는 여론을 사실상 방기했고, 사르데냐의 독립여론은 점차 커졌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관공서에 대한 테러 움직임도 커졌으며, 이탈리아 중앙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불신임 선언 격으로 지방 정부와 의회의 해산 및 재선거 합의가 압도적인 지지 아래 단행되게 됐다. 한 달 만에 이뤄진 긴급 지방선거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사르데냐 독립파 세력이 크게 약진하며, 독립이라는 최우선 목표 아래 대연정을 통한 지방정부가 구성됐다.

새로 구성된 사르데냐 지방정부는 분리독립 주민투표라는 목표를 위해 질주했다. 지선 직후인 1946년 7월 19일 사르데냐주 주민을 대상으로 열린 이탈리아 분리독립 찬반 주민 투표에서 찬성 73.5%로 분리 독립에 찬성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왕정을 지지했지만,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이나 대연정에 참여한 좌익정당 내에서 독립지지 역시 매우 증가했다.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로서는 이 결과에 납득할 수 없었으며, 이는 헌법을 위반한 주민 투표이며 무효라고 주장했다. 분리독립론자들은 공산 세력을 견제하던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서방 세력들을 설득하려고 다방면으로 시도했으나, 미국을 제외하면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미국은 신생 독립국을 통해 지중해에 영향력을 투사할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독립에 찬성했으나, 영국은 몰타의 독립여론, 프랑스는 바로 옆의 코르시카 독립여론을 의식해 사르데냐의 독립에 반발하고 있었다. 사르데냐 위기가 장기화하자 내부에서는 강력하게 이탈리아의 억압 정책에 반발하며, 자체 민병대를 조직하여 사르데냐 주의 도시에 이탈리아 정부 기관과 군 기관을 점령하였고, 이탈리아는 이에 대응해 사르데냐 섬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변 해협을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탈리아인의 사르데냐 섬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사르데냐섬에 있던 이탈리아의 자산들이 전부 넘어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민병대는 사르데냐내에 있는 이탈리아 군을 몰아내었고, 이 과정에서 사르데냐 섬 전국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에 압력을 가해 사르데냐 사태에 대한 안보리 중재안 투표에서 기권을 강요했고, 미소의 중재안이 UN 안보리를 통해 사르데냐와 이탈리아에 제시됐다. 중재안에 따라 당시 사르데냐를 임시 통치하고 있던 일부 원로들과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와 협상을 한 끝에 1946년 12월 9일 협상안을 도출하였다. 협상 요약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사르데냐 주에 대한 분리 독립은 인정하며, 국체 역시 사르데냐 주민의 뜻에 따라 결정한다.
2. 왕정으로 할 경우 사보이왕가의 자손들이 왕가를 맡는 것은 안되며, 국명은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 왕국 등 사보이가를 연상시키는 국명을 정해서는 안된다.
3. 사보이가의 정치 참여를 금지한다.
4. 사보이가는 이탈리아 공화국 입국을 금지한다.
5. 이탈리아인과 사르데냐인들의 거주, 이동, 교류, 경제 등 다양한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그 권리를 보장하는데 있어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
6. 이탈리아 문화 및 역사, 이탈리어 교육을 의무로 실시해야 한다.
7. 상호 국가간 역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8. 이탈리아 및 사르데냐가 위치한 영해(티레니아 해) 및 영공을 공유한다.
9. 이탈리아와 사르데냐 기업의 사업 자유를 보장하며, 상호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10. 사르데냐 내에 있는 새로운 국가는 이탈리아의 자산을 보호해야고 이탈리아 자산을 사용할 시에 이탈리아 공화국에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11. 이탈리아의 국민과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체 군대를 파견하고 관리를 파견한다.
12. 연례마다 열리는 이탈리아 연합 훈련에 참여해야 하며, 상호 군사 마찰 및 선전포고를 금지하며 불가침을 원칙으로 한다.
13. 사르데냐 새로운 국가는 이탈리아 공화국을 최혜국으로 인정해야 한다.
14. 조약에 제시된 사항 외에는 내정 간섭을 금지한다.
15. 이탈리아 공화국은 조약에 제시된 사항 외에는 사르데냐 새로운 국가에 대한 내정 간섭을 금지한다.

 
— 1946년 12월 9일 칼리아리 조약

미국과 소련의 중재아래 성립된 협상 조약으로 이 조약을 칼리아리에서 체결하여 칼리아리 조약이라고 한다. 이날 모든 사람들이 나와 독립을 축하하는 파티를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칼리아리 조약은 대외상으로는 분리독립이 되었으나 대내상으로는 높은 수준의 자치라서 반쪽짜리 독립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947년 1월 신 국명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국가의 명칭을 결정하였다. 조직위원회는 5명의 원로들이 참석하였다. 사사리-올비아를 다스렸던 마테오 알렉산드로 미르(Matteo Alessandro Mir) 백작을 비롯하여 안젤로 루카(Anjelo Lucca) 대주교, 사르데냐 상공협회(하늘미르 상공회의소 전신)장 레나르도 지오르다노(Renardo Giordarno), 사르데냐 자치 위원장 리카르도 마르치오(Riccardo Marcio), 사르데냐주 법원장 마씨모 지오르지오(Maximino Giorgio) 등이 참석하여 국명을 정했다. 국명은 각 위원들이 새로운 국가에 어울릴 만한 단어를 하나씩 제시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탈리아와의 차별을 두기위해 라틴어에 기반한 사르데냐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마테오 알렉산드로 미르 백작은 nŏvus(새로운), 안젤로 루카 대주교는 universális(보편적인, 만인공통인), 레나르도 지오르다노상공협회장은 honoris(명예), 리카르도 마르치오 사르데냐 자치 위원장은 autŏnomía(자치, 자율, 주체성), 마씨모 지오르지오 법원장은 libértas(자유, 자유시민권, 자주독립)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적절하게 조합한 결과 HANUL 이라는 조합이 나왔으며, 라틴어 계열의 특성상 h는 묵음 처리가 되기 때문에 [아누르-]로 발음 된다. 영어권은 이를 [해널-]로 발음한다. 후에 동양에서는 한국어로 [하늘]이라 발음하기도 한다.

이렇게 신 국명으로 HANUL이 정해졌고 이번에는 누구를 왕좌에 앉히느냐가 정해졌다. 국왕은 국가의 정신의 통합의 구심이며, 국민 총의에 기초한 자여야 하므로 원로들의 합의에 따라 입헌군주제의 특성상 의회의 선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47년 4월 30일 하늘미르의 제헌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5월 1일에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의회에서는 사보이가가 아닌 하늘미르 왕국에 독립에 기여하고 현재의 회복 및 발전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마테오 알렉산드로 미르 백작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의결하였다. 또한 제헌헌법을 제정하였고 7월 28일 제정된 헌법을 최초로 공포하였다. 이것에 제1대 하늘미르 왕국 헌법이다. 마테오 알렉산드로 미르 국왕의 가문인 미르(Mir)를 신 국명에 붙여 ´HANULMIR´ 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