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拉國
베트남어: Vương quốc Biển
해랍어: Buon quo Viyen
해랍국
브엉 꾸억 비옌,부온 쿠오 비옌
국기 국장
표어 以令率人, 不若身先
명령으로 사람을 거느리는 것은, 몸소 앞장서는 것만 못하다.
국가 독립행진곡
獨立行進曲
수도 루오시엔
Luo Xian, 羅縣
정치
공용어 베트남어, 해랍어
납왕Lao buone, 拉王 바 타이Ba tai, 杷太
역사
정부수립  
 • 해랍 제3공화국 붕괴 1945년 3월 19일
 • 해랍 인민공화국 수립 1946년 4월 3일
 • 해랍 혁명 및 왕정 복고 1961년 1월 7일
지리
면적 163,534㎢
내수면 비율 1.9%
시간대 VST (UTC+7)
인구
2018년 어림 9,345,235명
인구 밀도 57.1 명/㎢ (58위)
경제
GDP(PPP) 2018년 어림값
 • 전체 $3,146억 (55위)
 • 일인당 $33,664 (31위)
HDI 0.746 (82위, 2017년 조사)
통화 비얀 (ψυ)
기타
ISO 3166-1 117, BQV, VQV
도메인 .vy
국제 전화 +857

해랍국 혹은 비옌 왕국(베트남어: Vương quốc Biển, 해랍어:Buon quo Viyen, 영어: Kingdom of Viyen, 중국어: 海拉王國)은 동남아시아 남중국해 상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인구는 약 900만 명에 달하며 수도는 루오시엔(羅縣)으로서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표면상으로 입헌군주정을 채택하고 있으나, 국왕(拉王)이 의회 해산권과 정부 구성권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데, 2018년 기준으로 바 타이(杷太) 국왕의 왕정권 반포에 따라 과도왕정제(過渡王政制)가 운영되고 있다.

개요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베트남과 함께 맹주 지위에 있으며, 상당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 지역강국이다. 또한, 태국, 일본 등과 함께 제국주의 시절에 아시아에서 몇 안되는 독립을 유지했던 국가들 중 하나이다.[주 1] 영토는 대략 16만㎢로서 캄보디아보다 조금 더 작은 수준. 국토가 남중국해에 위치해 있기에 지리적으로 태평양인도양을 잇는 교통의 중심이자 대중국 포위망의 핵심 군사적 요지로서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하게 매장된 해저유전/천연가스 개발로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다.[주 2]

설정 계기

본인 리반의 동남아 기반 국가 운영 계보의 시작은 2015년 중순을 기점으로 현실의 라오스 남부를 영토로 했던 참파사크 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 참파사크 공화국은 네이버 카페 시스템을 이용한 전자 정부를 운영했으나 매니저 직을 타인에게 넘김에 따라 설정 운용은 와해되었고, 이후에 제이위키에서 2017년 11월, 또다른 동남아 가상국가인 란나 운영을 시도했으나 본인의 책임감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해랍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기로에 있는데, 이는 본인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할 심산으로서 3년에 걸친 동남아 기반 국가 운용의 실패를 반성하고 본인을 대표할 창작 국가 수립에 다시 한 번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명

정식 국호는 해랍 왕국(海拉王國)으로서 해랍이라는 명칭은 과거 옛 해랍 지역의 국가, 납해(拉海)에서 유래되었다. 대부분의 인구를 구성하는 해랍의 최대 민족인 해족(Người Biển,海族)은 본래 하이난(海南)에서 거주하던 민족 집단[주 3]이었다가 한인(漢人)들이 중국 남부로 진출하게 되자 남중국해(南中國海)를 건너 지금에 해랍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납해의 성립이었다.[주 4] 이후에 청나라가 국명을 바꿀 것을 제의함에 따라 '납해'를 앞뒤로 뒤집은 '해랍'이 현재의 국호로 굳혀지게 되었다.

역사

해랍의 역사
海拉史
Biển sử, Viyen sue

해랍의 역사는 민족주의 사관과 왕실에 대한 충성이 팽배한 해랍 사회에서 꺼내기 힘든 소리지만, 세계사적으로 다른 인근 국가들의 기록에 꾸준히 등장하며, 기록을 남기고 관찰할 만할 국가 체제가 세워 진 건[주 5] 한나라 출신의 임왁(任䢲)을 군주로 한 남야 왕조(南野王朝)[주 6] 시기에다가 시간이 흘러, 오나라(吳)계 군벌들 중 일부 독자 세력이 현지 토착민들과 연합하여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적인 국가를 수립하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해랍의 실질적인 역사는 외세로서 '중국'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1] 당장에 해랍의 선대 국가였던 납해 왕조(拉海王朝)가 중국 남부에 거주하던 민족 집단인 해족의 이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볼 때, 중화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받았다고 자명할 수 있고, 지금도 공공연히 고대 중국에서 파견되었던 관리들을 종묘 시조로서 숭상하는 지역적 풍습이 남아있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2] 해랍은 중화 문명에서 기원하되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미묘한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트남과 유사한 점을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3]

고대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해랍에는 기원전 2000년~1000년대 사이에 신석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현지민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최근에는 이들의 후손들이 현재의 해랍에 남아있는 소수민족들로 추정되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4] 이들은 주로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기원후 1세기경에는 타오 위 강(途怡江) 하류와 하구에서 농경과 어로, 목축 생활을 통해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한 집단끼리의 연합체 형태로서의 원시 국가가 세워졌다. (브야드부라 왕조) 이들은 한나라(漢)와의 교류를 통해 종교 등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뒤늦게 중국 남부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기원후 2세기경, 외세 왕조가 세워졌다. (남야 왕조) 남야는 3세기에서 5세기 말 경까지 번영했으며, 이후에는 타오 위 강 중류에서 일어난 위덕(Wěi dé, 暐德)[주 7]의 반란을 계기로 국력이 쇠약해져 위축되다가 6세기 말엽에 멸망하였다.

브야드부라 왕조

남야 왕조

중세

중세의 해랍은 극도의 혼란시기를 거쳐 안정기를 밟았다. 위덕의 반란으로 중앙집권적 체제가 붕괴된 남야 왕조 아래에 지방의 행정권, 군권을 책임지던 '타오쥐안'(城主, 성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번진 세력들의 할거로 통일 국가로서의 구심점을 상실한 남야 왕조는 최종적으로 멸망하고 각지에 성주들은 '부오네'(Buone, 王)를 참칭하면서 분열과 전란이 이어졌으며, 특히나 하이난에서 건너온 해족들의 남하는 이러한 혼란기를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해족들은 중국에서 유입된 선진 기술과 발달된 무기 및 전술을 이용하여 성주들을 제압하고, 당시 해족의 지도자였던 바 오에(杷威)를 중심으로 지금의 해랍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이주민 왕조인, 납해 왕조(拉海王朝)를 건립하였다. 중세의 납해 왕조는 해족과 중국 남부의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귀족층이 향유했던 해남 문화(海南文化)를 통해 산문과 시서가 발달하고 서민들의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이러한 문화가 서민계층에게도 전파되면서 잡극(雜劇), 시사(詩社)등의 서민 문화가 발달했으며 교통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재화와 물류의 교류가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상인 동업 조합과 화폐 제도가 발달하여 경제는 안정되고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관료제가 확립됨에 따라 정치적 혼란이 종식되면서 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5]

해족의 남하

성주시대(타오쥐안 시대)

납해 왕조

근세 및 근대

현대

각주

  1. 쿠윈 다오륀, 《해랍의 紀元》p.56
  2. 훈 니싱, 《지역적 풍습에 대한 고찰과 전래의 형태》p.35-p.37
  3. 쿠윈 다오륀, 《해랍의 紀元》p.85-p.86
  4. 쥔 러이쿠오 고대사비평 1999년 여름호
  5. 다시 찾는 해랍의 역사, 루오시엔왕립대학교출판부 89-8341-057-4, 75-77쪽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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