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국의 역사
海盛國史

이 문서에서는 해성국의 역대 군주 목록을 다룬다. 초기 해성왕조는 매금(寐禁)의 칭호를 사용했으나, 후에 매금왕/군황(寐禁王/君皇)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연호+군황'로 알려져 있으나, 인무 군황 이전에는 '추호+군황'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역대 해성국 매금왕의 목록

범례

  • 이 표는 성덕 시대에 역대 해성국 매금왕으로 공인되어 현재 널리 알려진 목록이다.
  • 해성국에 태양력(사실은 그레고리력. 실제로 그레고리력의 채택이 공인된 것은 성덕 21년.)이 도입된 1884년 이전의 날짜는 그때 쓰인 태음태양력의 날짜를 서력에 환산한 것이기 때문에, 연말의 날짜는 서력과 다른 해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음에 유의하라.
  • 후대에 편찬된 해고정기를 제외하고는 역사서가 존재하지 않는 1세기 이전의 매금왕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해고정기의 재위 연대 기록을 채용한다.
  • 인무 군황(仁武 君皇) 이후로는 추호(推號)가 아닌 연호(年號)를 사용하게 된다.
대수 재위 초상 연호/추호 시호 능호
비고

신화시대

1 1250 ~ 580 BC 금무 (錦武) 신고금무대성천황(神古命武代成天皇) 전무천황(全武天皇) 해고정기(海古政記)에 기록된 최초의 군황, 화신(和神) 화을나(和乙羅)와 옥신(鈺神) 치예(熾藝)의 후손. 신화 인물로 취급됨
2 580 ~ 340 BC 광륭 (光隆) 윤덕명효정예덕장천황(倫德明效貞禮悳長天皇) 전무덕황(全武德皇) 전무천황(全武天況)과 진시렴(眞是廉)의 아들. 신화 인물로 취급됨
3 340 ~ 130 BC 목신 (穆信) 지덕장경헌의공대천황(智悳長敬憲義共大天皇) 전무선황(全武宣皇) 전무덕황(全無德皇)과 진시하(眞是河)의 아들. 신화 인물로 취급됨
4 130 ~ 40 BC 홍열 (弘悅) 평세숙헌간경장원문명성대천황(平世淑憲懇敬張原文明星大天皇) 전무현황(全武賢黃) 전무선황(全武宣黃)과 진리은(眞悧恩)의 아들. 신화 인물로 취급됨

부족난립시대

5 40 BC ~ 13 AD 선무 (善武) 선장화량효강혜천대왕(善長和量效强慧天大王) 전소(全蘇) 전무현황(全武賢皇)과 무의(武誼)의 아들. [1]
6 13 ~ 51 효순 (效恂) 효창대원순희정공헌대왕(效昌大原恂熙正共憲大王) 전주(全周) 전소(全蘇)와 수회(秀恢)의 아들. [2]
7 51 ~ 64 숭환 (崇奐) 숭무문명대성환위혜정공선양대왕(崇武文明大成奐威慧程共宣良大王) 전휘(全輝) 전주(全周)와 진선화(眞璇華)의 아들. [3]
8 64 ~ 75 문성 (文星) 문천대무신왕(文天大珷信王) 애린위(厓璘偉) 가족 관계는 불명. [4]
9 75 ~ 83 광혜충왕(光惠忠王) 애석후(厓晳珝) 애린위(厓璘偉)의 아들로서 추정. [5]
10 83 ~ 95 효숙군왕(嚆淑君王) 이신각화(李申覺和) 가족 관계는 불명. [6]
11 95 ~ 108 민천 (旼天) 민렴국수정화도대왕(旼廉局秀正華道大王) 이신태(李申太) 이신각화(李申覺和)의 친척으로 추정. [7]
12 108 ~ 123 평연 (平然) 대평신무성신명렬문효대왕(大平信武聖伸明洌文效大王) 전칠(全漆) 매금왕가의 공식적인 시조. [8]

전란시대

13 123 ~ 155 융평 (隆平) 숭무륭천신대성사효평대왕(崇武隆天信代盛思孝平大王) 전환(全煥) 전칠(全漆)의 차남. [9]

오록시대

14 155 ~ 163 천칙 (天則) 천수제순극안공효대왕(天秀悌盾克安供孝大王) 전훈(全熏) 전환(全煥)의 장남. [10]
15 163 ~ 195 동진 (東晉) 동문강과장효명황대왕(東文康誇長效明皇大王) 전반(全班) 전훈(全熏)의 장남. [11]
16 195 ~ 234 친대 (親代) 친경공정대효대왕(親敬恭正代效大王) 전린(全璘) 전반(全班)의 차남.
17 234 ~ 257 명순 (明恂) 명목선효준철총명헌이대왕(明穆善孝峻哲寵命憲怡大王) 전호륙(全浩陸) 전린(全璘)의 장남.
18 257 ~ 289 공숙 (共淑) 공화민정충헌안효숙대왕(共和民貞忠憲安效肅大王) 전철량(全哲良) 전호륙(全浩陸)의 장남.

고록시대

19 289 ~ 315 성문 (盛文) 성화충경광문선덕효문대왕(盛和忠瓊光文選悳效紊大王) 전혁(全赫) 전철량(全哲良)의 장남. [12]
20 315 ~ 344 신덕 (信德) 신무현충숙효의대왕(信武賢忠淑效義大王) 전출(全黜) 전혁(全赫)의 장남.
21 344 ~ 371 문철 (文哲) 문성현위철목현대왕(文盛現威哲睦賢大王) 전혜(全慧) 전출(全黜)의 장녀. 최초의 여왕(女王)[13]
22 371 ~ 405 경랑 (敬朗) 경성공의용무지명경효랑대왕(敬成共義聳武志明璟效朗大王) 전은(全誾) 전혜(全慧)의 장녀. [14]
23 405 ~ 431 가명 (可明) 가성천무통광훈영성문대왕(可成天武統光訓寧盛文大王) 전성(全晟) 전은(全誾)의 장남. [15]

현안시대

24 431 ~ 455 예연 (例聯) 예연영명정의광덕온순대왕(例聯寧明正義光悳穩珣大王) 전호(全浩) 전성(全晟)의 장남. [16]
25 455 ~ 478 대강 (大康) 대효건천체극계문우대왕(大效建天諦克係文禑大王) 전방(全芳) 전호(全浩)의 장녀. [17]
26 478 ~ 508 안화 (安和) 안공정덕신무예철성렬효광대왕(安共貞悳信武例哲成烈效光大王) 전비(全備) 전방(全芳)의 장남. [18]

정록시대

27 508 ~ 545 인고 (仁高) 인의예공흠순명정돈효대왕(仁義藝恭欽順明正旽效大王) 전홍(全弘) 전비(全備)의 차남. [19]
28 545 ~ 566 만의태성광영왕(萬義太成狂影王) 전위(全爲) 전홍(全弘)의 장남. [20]
29 566 ~ 589 천대 (天代) 천예민정태성문의만명대정공효대왕(天例旼正太成文義萬明代貞共效大王) 전화(全化) 전위(全爲)의 장남. [21]
30 589 ~ 614 명화 (明化) 무덕순원광충의신무관성화명대왕(武德盾原光忠義信珷款成化明大王) 전우(全優) 전화(全化)의 장남. [22]
31 614 ~ 615 원무공효대왕(原武共孝大王) 전장(全張) 전우(全優)의 장남.[23]
32 615 ~ 643 흠인 (欽仁) 흠공영정의무장숙소묵광숙대왕(欽共寧貞義武張淑昭默光肅大王) 전균(全均) 전우(全優)의 차남.[24]

태온시대

33 643 ~ 657 인무 (仁武) 인목개천조운정기선덕헌열현인정덕대왕(仁穆開天照韻貞琦宣悳憲悅炫璘程德大王) 전혼(全琿) 전균(全均)의 장남.[25]
34 657 ~ 666 연목 (連穆) 연인예성충흠천달도광정덕대왕(連仁例成忠欽天達道曠正悳大王) 전윤(全贇) 전혼(全琿)의 장녀.[26]
35 666 ~ 689 대천 (大天) 대무신총문영도공헌의인력대왕(大武信總文寧道共憲擬仁曆大王) 전항(全沆) 전윤(全贇)의 장남.[27]
36 689 ~ 695 도희 (道熙) 도무인지흥렬공륭업현의대왕(道武仁志興洌共隆嶪賢擬大王) 전도문(全道文) 전항(全沆)의 장남.[28]
37 695 ~ 736 영렬 (映洌) 영성미천소휴연경돈덕소무대왕(映盛美天昭烋聯敬旽悳炤武大王) 전금(全昑) 전도문(全道文)의 장남.[29]

신록시대

38 736 ~ 749 공유 (共喩) 공인민덕희각용현의신숙대왕(共仁旼德熙覺聳炫意信肅大王) 전휴(全烋) 전금(全昑)의 장남.[30]

혼정기

1945 ~ 1951 대광 (大光) 민의소친경목준위화대왕(旼義昭親敬穆峻偉和大王) 전율(全栗) 전업(全業)의 장녀.[31]

해성국

1978 ~ 1988 고성 (高成) 고무대의신덕친영문성대왕(高武代義信悳親寧文晟大王) 전희(全熙) 전율(全律)의 장녀.[32]
1988 ~ 2015 평문 (平文) 평의실덕문성대왕(平義實德文盛大王) 전예성(全叡晟) 전희(全熙)의 장남.[33]
2015 ~ 현재 파일:JHR.png 현영 (賢英) 현신덕원예성대왕(賢信悳元譽成大王) 전화량(全和量) 전예성(全叡晟)의 장녀.[34]

각주

  1. 해고정기에서는 전무현황의 아들로서 묘사되었으나, 실제 정사에서는 부족 난립 시대에 비롯된 부족연맹국가의 연맹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실질적인 현 매금왕가의 선조로 인정받고 있다.
  2. 정사에서는 크게 비중있게 등장하지 않으며, 실제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해당 인물의 실존성이 있는지 분분한 실정이다. 해고정기에서는 보위에 오른 뒤 숨을 거두었다는 묘사로만 나타나고 있기에 가상 인물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3. 효순 군황과는 달리 정사에도 실존한다고 판명된 인물이며, 이후 다른 성씨가 연맹장 지위를 세습함에 따라 전씨일가가 정쟁에서 패배하여 일시적으로 지위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4. 연맹을 구성하던 애씨일가가 정쟁에서 승리하여 연맹장 지위를 세습하게 된 것으로 정사에서 추정하고 있다.
  5. 해고정기에서는 실존 인물로서 보지 않고 있으나, 관련 유물의 출토로 학계에서는 실존 인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짧은 재위기간과 연호가 전해져 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국내 역사상 최초의 폭군(暴君)으로 보고 있다.
  6. 이신씨(李申氏)출신으로 여겨지나, 이(李)씨라는 설도 있음. 해고정기의 묘사된 바를 통해 애석후에게 반하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것으로 추정되나, 말소죄를 당한 것으로 된 정황을 보아 애석후와 같은 폭군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
  7. 이신각화와 마찬가지로 이(李)씨라는 설이 있음. 이후 전씨일가가 연맹장 지위를 세습하게 되는 정황을 통해 정쟁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게 된 것으로 추정됨.
  8. 숭환 군황과는 먼 친척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9. 재위기간 내내 전란 기간을 보냈으며, 이 시기에 부족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정책을 펼치는 시도를 보이면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며, 장자세습제(長子世習制)를 확립하였다.
  10. 융평 군황의 왕권 강화 정책을 통해 장자세습제가 확립되었으며, 이 시기에 처음으로 매금(寐禁)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
  11. 천칙 군황시기의 활약했던 오씨(悟氏)가 섭신(攝臣)직을 세습하면서 오록시대(悟錄時代)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에따라 왕권은 다시 약화되었으며, 전근대적인 입헌군주체제를 보이게 된다.
  12. 성문의 개도(盛文之開道)를 통해 일시적으로 왕권을 회복하며, 오씨(悟氏)를 정계에서 몰락시키는데 성공하나, 고씨(高氏)가 섭신 지위를 세습하면서 고록시대가 개창됨에 따라 왕권은 다시 약화된다.
  13. 정사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분하나, 해고정기를 비롯한 역사서에 비롯된 내용에 따라 여성인걸로 유력하게 보이고 있다. 사회적, 지리적인 여건 상 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어려운 점이 아니었던 것을 들어 학계에서도 여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14. 문철 군황의 자식 중에 남자가 없기에 왕녀(王女)로서 즉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15. 재위 말년에 근왕파를 중심으로 경오의 화(庚午之禍)가 일어나면서 고씨(高氏)가 대거 숙청되면서 고록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현안시대를 통해 왕권이 일시적으로 회복된다.
  16. 현안의 개혁(賢安之改革)을 주도하였으며, 정치적 중심지를 현안부(賢安部)로 옮긴 뒤, 대대적인 관제 개편 및 정치 운동을 일으켰다.
  17. 한반도 삼국(三國)과 교류를 시도하였고 일본의 왜오왕(倭五王) 중 한 명인 안코 덴노(安康 天皇)에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18. 말년의 정화록(貞華綠)을 비롯한 정씨(貞氏)들을 대거 중용함에 따라 왕권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천교(天敎)를 신봉하여 정사를 소홀히한 전형적인 암군(暗君)이다.
  19. 안화 군황의 장남인 공익태자(共翼太子)가 근왕세력을 모아 정화록을 몰아내려 하자, 정씨 세력은 인고 군황을 내세워 효원문(效元門)에서 공익태자와 근왕파를 일제히 처형시키면서 정록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이 내란을 효원의 반정(效元之反政)으로 부른다.
  20. 해고정기에 따르면 왕위에 오른뒤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사를 내팽겨친 암군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정씨 세력에 반하여 왕권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인 비운의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21. 신라(新羅)와 조공 관계를 체결했으며, 신라를 통해 당(唐)과도 책봉 관계를 맺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봉건체제가 확립되었으며, 반도를 통해서 많은 서적과 문물 및 기술이 도입됨에 따라 빠른 속도로 개혁을 일구었다. 다만, 위 개혁은 국왕 중심이 아닌 정씨(貞氏)의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많은 폐단이 있었다.
  22. 신라를 통해 우경법이 도입 및 정착하는데 공헌하였고, 시장을 관리 및 감독하는 관시전(觀市典)을 설치 및 기존의 매금(寐禁) 칭호를 대신하여 매금왕(寐禁王)과 군황(君皇)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본인이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고, 천대 군황 시기에 견신사(遣新事)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수입한 정씨 일족에서 건의한 것을 반영 및 반포하였다.
  23. 재위에 오른지 1년도 채 안되어 요절하였기에 해고정기에서는 연호가 전해지지 않는다. 추호 역시 근세에야 추존된 것으로 학계에서 보고 되고 있다.
  24. 선왕이었던 형이 재위에 오른지 1년도 안되어 요절하였고, 형의 자식들 역시 일찍 요절하였기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기에 신라와의 조공 교류를 재요청하였으나,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지나친 대당외교로 무산되었고, 일본과의 교류와 함께 백제와 교류를 통해 반도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 문화적으로는 풍류를 즐기는 청담사상(淸淡事相)을 기조로 문학 사조들이 등장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무왁렴(務䢲廉) 등이 있다.
  25. 노덕신(盧悳信)을 비롯하여 개혁파들로 이루어진 근왕파를 통해 정씨일족을 정계에서 퇴출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수도를 태온부(太穩部)로 옮기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태온시대(太穩時代)가 개창되었다. 유례없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여 신라의 무열왕(武烈王)과 공식적인 교류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시법이 정착되면서 처음으로 추호가 아닌 시호(詩號)를 받았기도 했다.
  26. 660년에 백제(百濟)가 멸망하면서, 일본을 거쳐 많은 도래인(到來人)들이 건너왔다. 이를 통해 도래 문화(到來文化)가 성립되었으며, 연목 군황은 이들을 대거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코자 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이 복식과 관제를 정비하고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한 것. 다만, 지방 행정 개편은 크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반도와 다르게 봉건체제가 뿌리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
  27. 최초로 '대천(大天)'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재위 말년에는 연목 군황시기에 도래인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통해 해고정기(海古政記)를 편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도래인들은 후에 조정을 장악하여 태온시대의 몰락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28. 명순 군황, 공숙 군황을 제외하고 고대 시기(기원전 ~ 1250년)에서 유일하게 2자 이름을 가졌다. 어릴때부터 건강이 약했기에 연목 군황이 직접 장수를 기원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위에 올랐음에도 건강이 좋지 못했고, 결국 무리하게 정무를 돌보다가 피를 토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시기에 해고정기가 편찬되었으며, 국호를 공식적으로 해영(海瑛)이라 정하였다.
  29. 도희 군황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면서, 12살에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에 도래인들의 조정 장악력은 최고도에 도달하였으며, 특히 도래인 가문에서 비롯된 신씨(伸氏)가 섭신직을 세습하면서 신록시대가 개창되었다. 영렬 군황은 재위기간 내내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였으며, 수도도 신씨가 거점으로 삼고 있던 평의부(平義部)로 옮기는 수모를 겪었다.
  30. 발해(渤海)와 공식적인 수교 관계를 체결하였다. 또한, 일본과 발해를 잇는 교통로의 중간에서 중계 무역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에는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신씨 세력 주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기존의 부역을 폐지 및 조용조를 실시하였고 호적, 기록대장을 실시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율령을 체계화하여 기존의 관습화된 령(令)을 성문화하였다.
  31. 독립 직후 전왕가(全王家)의 왕공족 폐지에 '군황 및 매금왕'으로서 복위되었다. 혼정기로 인해 초기 내각의 무능력함과 더하여 공화파와 반왕실의 득세로 인해 1951년, 공화 쿠데타로 강제 퇴위하였다. 1956년까지 공화정부의 강제로 유폐되었으나, 직계 일가족과 함께 탈출하여 급히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32. 1978년, 무오복벽을 통해 복위하였다. 대대적인 국민대담화를 통해 과거 왕실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밝혔으며, 왕실의 개혁을 추진하여 기존의 허례허식을 혁파하고 간소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왕위를 장남인 전예성에게 양위한 뒤 태천황(太天皇)으로 있다가 급사하였다.
  33. 고성 군황의 양위로 왕위에 올랐으며, 어머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왕실의 관습을 혁파하는데 기울였다.
  34. 아버지인 평문 성황이 급사함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역대 매금왕들 중 서브컬쳐 산업에 가장 호의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