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험프리 250인 (46.3%)
(53.7%) 290인 닉슨
1964년 11월 3일
1964 대선
1968년 11월 5일
1968 대선
1972년 11월 7일
1972 대선
투표율 60.7%
투표자 85,146,194표
선거일시 1968년 11월 5일 5시 ~ 4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
에드먼드 무스키
공화당
대통령
리처드 닉슨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
선거인단
250인 290
전국득표
51.5%
43,813,279표
48.1%
40,944,450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공화당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1968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6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68년 11월 5일 실시된 미국의 46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 전 부통령이 현직 민주당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를 꺾고 당선되었다.

현직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은 민주당 후보에 가장 유력했지만,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적은 표차로 이긴 것을 보고 경선에서 물러났다. 유진 매카시, 로버트 F. 케네디, 험프리의 삼자 구도로 경선이 치러졌다. 험프리는 반 베트남 전쟁 후보인 매카시를 꺾고 지명되었다. 닉슨은 공화당 프라이머리에서 선두를 달리며, 자유파 넬슨 록펠러와 보수파 캘리포니아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 주자를 꺾고 지명되었다. 앨라배마의 전 민주당 주지사 왈레스는 민주당에서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해 주의 권리를 주장하며 인종 차별에 찬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1968년은 격동적이었고, 혼란스러웠다. 4월 초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고 전국에서 54일 간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6월 초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전국 대학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민주당 후보 지명에서 승리했을 때, 존슨의 빈곤과의 전쟁민권 운동을 계속해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존슨 행정부의 민권 운동 지원은 남부에서 험프리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앨라배마에서 인기있는 민주당 주지사 조지 왈레스가 탈당할 기회를 만들었다. 왈레스는 무소속으로 딥사우스를 이끌면서 남부 전역에서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표를 흡수했으며, 왈레스는 포퓰리즘적 공약을 남발했다. 이 과정에서 왈레스는 뉴딜 연합을 붕괴시켰으며, 남부 민주당원들이 닉슨이나 험프리보다 자신에게 휘둘리게 하는 것을 성공했다. 닉슨은 험프리가 떠드는 자유주의 의제[1]에 대해 왈레스가 격렬하게 반대하는 상황에 끌려가지 않고, 침묵하는 다수 입장을 유지해 온건한 중도 유권자의 표심을 잡는 데 성공했다. 닉슨은 도시에서의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새로운 지도력을 보여줄 것을 약속했다.

8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대부분의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험프리는 여론 조사에서 닉슨에게 크게 뒤졌다. 하지만 왈레스가 입후보를 선언하고, 11월 5일 직전 마지막 달에 존슨이 베트남 전쟁에서 폭격을 중단하기로 선언하면서, 험프리의 지지율은 닉슨과 오차범위 내로 좁혀졌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험프리가 근소하지만 앞서는 결과도 발표되었다. 하지만 선거일 직전 왈레스가 닉슨을 지지하며 사퇴하면서 험프리는 막판 스퍼트와 국민투표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닉슨에 40명의 선거인이 뒤졌다. 이것은 1965년 투표권법 통과 후 실시된 첫 대통령 선거였으며, 이로 인해 소수 인종, 특히 세기가 바뀔 때부터 대부분 권리를 제한 당했던 남부의 유색인종들의 투표 증가를 불러왔다.

리처드 닉슨은 대통령으로 최초로 당선된 전직 부통령이었다. 이 기록은 조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2020년까지 깨지지 않은 위업이었다. 또 닉슨은 대통령 선거에서 한번 패한 후 자당 후보로 다시 지명되어 본선에서 승리한 마지막 후보이다. 또 이 선거는 현직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자격이 있었지만, 당의 후보 지명을 받지 않은 마지막 선거였다. 텍사스 없이 공화당이 승리한 것 역시 이 선거가 마지막이다. 닉슨은 미네소타,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없이 공화당 최초로 당선되었으며, 1928년 이후 매사추세츠와 로드아일랜드 없이, 1896년 이후 워싱턴에서 패배하고도 당선된 첫 후보였다.

배경

1964년 선거에서 현직 민주당 대통령 린든 B. 존슨공화당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를 제치고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큰 압도적인 투표를 받았다. 이후 재임 기간 동안 존슨은 위대한 사회 정책과 급진적인 민권 법안, 지속적인 우주 개발 등 많은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존슨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존슨이 민권법을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대도시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종 폭동을 견뎌야 했으며, 세대에 걸친 청년들의 반전 운동과 외교정책에 대한 폭력적인 시위를 맛봐야 했다. 히피 문화의 출현과 신좌파 행동주의의 부상, 흑인 권력 운동의 출현은 계급, 세대, 인종 간의 사회적, 문화적 충돌을 심화시켰다. 이런 국내외적 요인에 더해, 1968년 4월 4일 민권 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테네시 멤피스에서 암살당하며, 전국의 슬픔과 분노의 폭동이 일어났다. 워싱턴 D.C.의 백악관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까지 폭동이 일어났으며, 정부는 국가기관을 보호하기 위해 의사당 계단에 기관총을 든 병사들을 주둔 시켜야 했다.

베트남 전쟁은 존슨 대통령의 지지를 급격하게 떨어트린 원인이었다. 1967년 말까지 60만 명 이상의 미군이 베트남에서 싸우고 있었다. 존슨은 베트남에서의 상황이 잘 풀리고 있다는 반복적인 메시지를 발표했지만, 언론은 점점 천문학적인 지출과 모호한 전투 성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68년 1월 초,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북베트남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2]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베트남군은 테트 공세를 개시했고, 베트콩이 베트남 전역의 모든 정부 거점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테트 공세는 미국의 성공적인 방어로 끝났지만, 다 죽어간다던 북베트남의 공세 규모는 많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전쟁이 정말로 승리할 수 있는지, 그리고 미국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또한 유권자들은 테트 공세로 정부의 전황 보고와 전선 전망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국방부는 베트남에 수 십만 명의 군인을 더 파견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은 존슨의 지지율을 40% 아래로 떨어트렸다. 비밀경호국은 대통령의 안전 보호를 명목으로 대학 방문을 거부했고,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리노이 시카고에서 열린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참석을 막았다.

후보

민주당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68년 민주당 지명 후보
휴버트 험프리
Hubert Humphrey
에드먼드 무스키
Edmund Muskie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8대
미합중국 부통령
(1965–1969)
미국 상원의원(메인)
(1959-1980)

유진 매카시의 부상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4년에 단 한 번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에 선출되었고, 그 전에 2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한 적이 있는데, 수정헌법 22조는 존슨이 다음 임기를 위해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68년 존슨 대통령이 재선에 출마할 것이며 민주당 후보로 다시 선택될 것이라는 게 세간의 추측이었다.

베트남에서 존슨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민주당 대권 후보들은 당내에서 대통령에 맞설 수 없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존슨의 국내 업적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반발을 누를 정도로 커다랬다. 심지어 존슨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던 뉴욕 출신의 로버트 F. 케네디 상원의원은 많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에 대항하여 프라이머리에 공개적으로 출마하기를 거부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베트남전에 반대했던 미국인들 중 상당수는 청년층 사이에서 반전 히피 운동과 대학 캠퍼스의 폭력 사태가 번지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반전이라는 목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1월 30일, 최근 파병 병력의 증강이 곧 전쟁을 끝낼 것이라는 존슨 행정부의 발표는 테트 공세가 발발하며 실제 전선의 상황과는 관계 없이 신뢰를 잃었다. 미군이 테트 공세 당시에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테트 공세는 미군 파병에 대한 미국민의 지지를 완전히 거두어들이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윽고 미네소타 출신의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존슨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그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반전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의 스탠스를 반전으로 완전히 돌리고 싶어했다. 뉴햄프셔가 1968년 첫 대통령 프라이머리였기 때문에, 매카시는 그의 제한된 선거 자금 대부분을 뉴햄프셔에 쏟아부었다. 그는 청년 코디네이터 샘 브라운이 이끄는 수천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랐다. 이 학생들은 투표 운동을 조직하고, 매카시 뱃지와 전단지를 배부하며 매카시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3월 12일 매카시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49%를 확보했다. 매카시의 지지율은 현직 대통령에 대항해 출마한 상황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지지율이었다.

존슨은 즉각적으로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로버트 F. 케네디 의원이 뉴햄프셔 프라이머리가 개최된 지 4일만에 출마를 선언했다. 매카시와 케네디는 일련의 프라이머리에서 맞붙었으며, 케네디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매카시는 케네디의 고향인 매사추세츠와 케네디가 직접 선거운동을 뛰었던 몇몇 프라이머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초반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다. 핵심 격전지인 오리건에서 승리한 후, 매카시는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인기있다고 추정되었다.

존슨의 철수

1968년 3월 31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와 케네디의 출마 선언 직후, 대통령은 전국에 TV 연설을 통해 평화협상을 위해 북베트남에 대한 모든 폭격을 중단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재선 출마를 포기하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미국의 아들들이 멀리 정글에 있고, 미국의 미래가 바로 정글에서 헤매고 있으며, 우리의 희망과 세계의 평화에 대한 희망이 매일 균형을 이루고 있단 가운데, 저는 제 시간의 단 한 시간이라도 개인적인 사유나 당파적인 이유로 이 사무실에서 행해야할 엄청난 의무 이외의 어떤 의무에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조국를 위해 민주당에 대통령 연임 지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수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존슨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1955년에 이미 심각한 심장마비를 겪었던 전이 있는 만큼 스스로도 새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우려는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는 새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지 이틀 뒤인 1973년 1월 22일 사망했다. 존슨의 불출마에는 암울한 정치적 전망도 큰 몫을 차지했다. 존슨이 프라이머리를 치르는 위스콘신에서 내부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이 다른 후보에 비해 크게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존슨이 뉴햄프셔에서 약세를 보인 후 며칠만에 지명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논쟁해왔다. 제프 셰솔은 존슨이 처음부터 백악관을 떠나길 원했고, 단지 떠날 명분을 얻은 것 뿐이었다고 말한다. 루이스 L. 굴드는 존슨이 매카시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말한다. 랜달 베넷 우즈는 존슨이 국가를 위해 자신이 스스로 물러나야 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로버트 달렉은 존슨의 정책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확실한 비전이 없었고, 그의 성격이 인기를 떨어트렸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앤서니 J. 베넷은 존슨이 동남아 정책에 대한 분노로 1968년 경선에서 쫓겨났다고 표현했다.

존슨의 철수 이후 민주당은 빠르게 네 개의 파벌로 분리되었다. 하나는 리처드 데일리가 이끄는 노동조합과 대도시 지도부로 구성된 파벌로 FDR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통제한 파벌이다. 이들은 존슨의 철수 이후 당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했으며, 곧바로 휴버트 험프리를 추대하기 위해 집결했다. 다른 하나는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을 중심으로하는 파벌이었다. 이들은 반전운동 대학생, 지식인, 중산층 도시백인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스스로를 민주당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나머지 그룹은 각각 아프리카계 미국인, 라틴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RFK 지원파벌, 그리고 백인 남부 민주당원으로 구성된 FDR의 뉴딜 정책에 수혜를 입은 일부 고령 유권자들로 구성된 파벌이다. 특히 마지막의 남부백인들은 초반에는 험프리를 지지했지만, 이후 제3의 물결을 만든 조지 왈레스 전 앨라배마 주지사를 지지한다.

베트남 전쟁의 성과와는 관계 없이, 그 자체로 민주당을 분열시키는 주요 문제로 작용되었고 전쟁을 일으킨 존슨은 많은 리버럴 민주당원들에게 전쟁을 상징하게 되었기 때문에 존슨은 쉽게 후보로 재지명될 수 없었다. 게다가 지명되더라도 본선에서 공화당에 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존슨 본인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선에서 물러남으로써 패배의 오명을 피할 수 있었고, 충성스러운 부통령이었던 험프리에게 차기 대권을 넘겨줌으로써 지도부를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었다.

프라이머리

존슨이 물러난 이후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출마를 선언했다. 케네디는 4곳[3]에서, 매카시는 6곳[4]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두 후보가 직접 서로를 겨냥해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케네디는 3곳을 이긴 반면, 매카시는 한 곳에서 이기는데 그쳤다. 험프리는 프라이머리에 출마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대리인들에게 그 일을 맡겼다. 플로리다 출신의 조지 A. 스마더스 상원의원과 스테펜 M. 영 오하이오 상원의원이 그들이다. 이들이 프라이머리에서 험프리를 대변하는 사이 험프리는 리처드 J. 데일리 시카고 시장과 같은 민주당 지도부가 통제하는 프라이머리가 실시되지 않는 주에서의 대의원 투표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했다. 케네디는 인디애나 프라이머리에서 브래니긴과 매카시를 꺾었고, 이후 네브래스카에서도 매카시를 꺾었다. 케네디의 승리가 자명해 보였지만, 오리건에서 매카시가 케네디를 이겼다.

오리건에서 케네디가 패배한 후 실시되는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는 케네디와 매카시 모두에게 승부지점으로 인식되었다. 매카시는 전쟁에 반대한 최초의 대통령 후보로 반전운동을 주도하던 대학에서 많은 유세를 진행했다. 케네디는 대도시의 빈민가와 바리오에서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케네디와 매카시는 프라이머리 며칠 전에 TV 토론에 참여했다. 토론은 무승부로 간주되었고, 6월 4일 케네디는 캘리포니아에서 46% 대 42%라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하지만 매카시는 경선에서 철수하는 것을 거부했다. 매카시는 뉴욕시의 반전운동가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는데, 바로 그 뉴욕 프라이머리에서 케네디와 경쟁할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케네디가 6월 5일 자정 직후 암살되었기 때문에 뉴욕 프라이머리는 빠르게 쟁점화되었다. 그는 26시간 후 착한 사마리아인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에 대해 많은 정치사학자들은 케네디가 살았다면 민주당 후보 지명을 받을 수 있었을지에 대해 논쟁했었다.

민주당 전국대회와 반전시위

공화당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68년 공화당 지명 후보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스피로 애그뉴
Spiro Agnew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6대
미합중국 부통령
(1953-1961)
제55대
메릴랜드 주지사
(1967–1969)

선거

여론조사

선거전략

선거테마

험프리의 추격과 10월 서프라이즈

왈레스의 사퇴와 막판 판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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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인종 문제나 민권 운동 등
  2. 실제로 당시 북베트남은 하노이로부터 60km 지점까지 남베트남이 진격해 전운이 기운 상황이긴 했다. 당시 북위 17도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는 소련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으며, 중국도 북베트남군으로 위장해서 인원을 지원했지만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북베트남의 패배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인디애나, 네브래스카, 사우스다코타, 캘리포니아
  4.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 오리건, 뉴저지, 일리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