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관: 2006년 나루미 제도 위기
염사국: 나루미 해전
나루미 제도 분쟁의 일부

첨관군 전함 아오후미호가 격침된 모습.
날짜2006년 7월 27일 ~ 2006년 8월 2일
장소나루미 제도 해역&지상
결과

미국의 중재로 인한 염사국군 철수, 염사국의 사실상 승리

  • 첨관과 염사국의 관계 악화
  • 아오후미호 전함 완전히 파괴됨.
  • 나루미 제도 자원 40%를 염사국이 채굴
교전국
첨관 염사국
지휘관
  • 태양호(虎)정호 정장 단궁병 대령
  • 태양호(虎)정호 부정장 소우령 중위
  • 부(父)소망천호 정장 류환청 중령†
  • 부(父)소망천호 조타장 왕규성 소위
  • 군대
  • 첨관군
  • 첨관 경찰
  • 나루미 방위대
  • 염사국군
  • 염사국 호위해양부대
  • 염사국 왕실공수호대
  • 병력
    8,760명
    전함 24척
    4, 9130명
    전함 42척
    잠수함 11정
    헬기 8대
    피해 규모
    사망 267명
    부상 354명
    실종 8명
    전함 8척 격침
    민간인 573명 사망
    사망 124명
    부상 246명
    전함 1척 격침

    "평소처럼 근무를 서던 날이었습니다. 쌍원경 쓰고 주변을 경계 중이었는데 해무에서 난데없이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배가 나타났습니다. 우리 마츠가노호는 아오후미호가 그 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펑. 하고 아오후미호에서 불꽃이 솟았습니다."-마츠가노호 경계병 이시다 콘지

    "우리가 일하던 6일은 지옥이었다."-살아남은 이시리지마 도민의 말

    2006년에 발생한 첨관염사국의 충돌.

    배경

    그 당시 염사국은 권력투쟁과 숙청으로 뒤숭숭한 상황이었는데,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국가에선 많은 지원들을 하였으나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던 도중 국무대신 신통병이 나루미 제도에 팔아먹을 자원들이 많다는 걸 알아내어 광부들 13명을 선박에 태워 나루미 제도에 보냈다. 그렇게 나루미 제도의 이시리지마(石島)에 도착한 광부들은 어부로 위장하여 고기를 잡는 척하며 은근히 광물들을 캐어 2주에 한 번씩 선박에 3t의 광물들을 실어 보냈고 그 결과 염사국 국민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시리지마의 광물들이 매월 줄어드는 것을 이상하게 느낀 경찰서장 아라타 미시츠(アラタミシツ)가 휘하 경찰들을 데리고 광산에 가서 광물들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을 알아내었고, 이 광물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시기가 13명의 어부들이 섬에 도착한 때라는 것을 알아채어서 어부들을 주요 용의자로 선정, 그리고 물증을 잡기 위해 경찰들을 광산에 잠복시켜 광부들을 체포해 나루미지마(鳴海島)의 경찰서로 끌고 가 신원 조사를 하여 이들의 염사국 국민들인 것을 알아내었다. 당연히 나루미지마 경찰서장은 분노해 이들을 구금한 뒤 첨관 본토에 이를 알려 제대로 큰 일이 발생하게 만들었다.

    전개

    보고를 올려받은 오토다시 히케모토 대통령은 경악을 금치 못하여 염사국에 책임을 물어 이 일을 따졌다. 하지만 이미 이익을 얻은 소량광은 뻔뻔스리 모른척하였고, 이에 오토다시 대통령은 부통령이었던 마츠오카 준페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일을 맡겼다. 그러나 소량광은 이미 나루미 제도에서 얻은 자원들에 대한 욕심&해외영토 확장욕에 해군 원수 엄위홍에게 나루미 제도를 기습할 것을 명하여 이번 기회에 나루미 제도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교전

    2006년 7월 27일은 해군 원수였던 타츠카와 료쿠토(達川緑人)의 어머니의 기일이라 타츠카와가 부재중인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순찰함 하나가 오는 것을 발견한 초병 4명이 전함 아오후미호 정장 야마모토 켄스케(山本健介)에게 보고를 하였다. 야마모토 켄스케는 1999년 나루미 제도 위기에서 조타장이였던 야마모토 지로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날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지로는 우선 경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경고를 하기 전, 염사국 전함들이 몰려들어 발포를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발포에 놀란 야마모토 정장은 곧이어 염사국 사수가 날린 탄에 피격되어 사망하였고, 부정장이었던 타카사키 류우토(高崎竜人)가 그 대신 지휘를 내렸다. 곧이어 지원군들이 합세하여 첨관의 승리로 끝나는 듯 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다음날 함대가 몰려들어 응사가 시작되었고, 잠수함들이 밑에서 공격하여 6척이나 전함들을 격침시키는 첨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첨관군도 물러서지 않았으나 염사국의 화력에 밀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던 중, 염사국의 대전함 격침기(당시 첨관군에서는 그렇게 불렀다.)탄 따-하이드 우몽이 아오후미호에 명중하여 격침시켰다. 곧이어 헬기들이 합세하여 공수부대원들이 나루미 제도의 미도리지마에 상륙하고 제2차 상륙으로 전함들을 패퇴시킨 태양호정호가 달려들어 슈이리조지마(水入蔵島)에 상륙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성윤의 6촌 친척형이었던 소우령(遡優領) 중위가 슈이리조지마 전투에 뛰어들었다.

    나루미 제도에 상륙한 염사국군들은 첨관의 경찰들과 군인들을 사살,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특히 소우령 중위는 민간인 105명을 직접 참수하여 기념사진까지 찍어서 국제사회의 큰 비난을 받았다. 그 후 8월 2일까지 염사국군들이 미도리지마, 슈이리조지마, 이시리지마에 주둔하여 많은 광물들을 약탈하여 본국으로 보내었다.

    결말

    이렇게 피해가 컸음에도 전투 당시 주첨미군이 개입하지 못했던 이유는 다양하였다. 우선 첨관과 염사국 모두 미국의 우방이었다(이렇게 되면 어느 한 쪽에 편을 든다면 평정성을 잃었다는 중국의 비난이 날아올 수 있었기 때문). 또한 그 당시 오토다시 대통령 큰딸의 결혼식이었는데 문제는 나루미지마에서 했던 지라 오토다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나루미지마와 가까운 섬들에 주로 방위를 두었고, 그 덕에 거리가 먼 동류이시지마, 미도리지마, 슈이리조지마, 이시리지마에는 자연스레 방위가 소홀했기 때문. 더구나 그 당시 염사국은 기습 성공을 위해 국기를 미야시로의 국기로 교체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정말 잠시동안 미군의 눈을 속였다. 여기에 그 당시 해무가 짙었던 것도 한몫하였으며, 설령 해무가 아니었다 하여도 미군이 알아볼 수 없도록 해전은 나루미 제도에서 특히 먼 곳에서만 전투하였다. 미군이 보고를 받았을 때에는 이미 슈이리조지마와 이시리지마에 상륙한 후였기 때문에 더 큰 전면전을 우려하여 개입하지 못했던 것. 여기에 염사국군이 인질을 잡고 있어 까딱하면 잠입이라 한들 인질까지 죽어버릴 수 있는 위헙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지형적인 불리함까지 더하여 미군의 잠입이 매우 어려웠다. 또한 전쟁 전에도 염사국은 미국에게 예의바르게 굴며 뒤에선 군대를 증강시키고 있었고, 이 당시 미국 대통령은 폴란드에서 정상회담 중이라서 소식을 듣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전투 후에 8월 2일. 미국은 그 전부터 주둔군대와 계속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실패. 결국 염사국 본진으로 가서 소량광을 설득해 우리가 경제난에서 구해줄 테니 그만 물러나라는 경고를 날렸다. 어차피 자원도 챙길대로 챙겼으니 적당히 물러날 예정이었던 소량광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크나큰 오판이 되는데, 첨관 측에서 침략국을 지원하였다는 비난을 날렸던 것. 결국 미국은 첨관 측에도 피해를 복구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이 전투가 끝나였다.

    반응과 여파

    첨관 측에서는 그야말로 제대로 빡쳤다. 기습도 모자라 양민들을 학살하고, 거기에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니 여간 상황이 아니었던 것. 이에 염사국 측에서 조롱을 하자 염사국에게 쌍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망한 자들을 국가 영웅으로 대접하였고 사후 1계급 추서하였다고 한다. 한편 죽은 타카사키 류우토는 대통령이었던 타카사키 유우의 아빠라고 한다. 그리고 전역하였던 야마모토 지로는 외아들이었던 켄스케의 죽음에 많이 통곡하였다고 한다.

    한편 염사국은 축배를 들었고, 소량광은 대외적으로 몰랐던 일이라며 발뺌, 여기에 달래기 위해 106명의 군인들을 영창에 보내고 그중 69명을 사형시켰다. 그 대신 우방인 미국에게서 2년동안 지원을 받다가 끝났다.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지만, 소량광이 그런 걸 신경 쓸 인간이 아니었기에... 소성윤이 이 사태를 보고 배웠는지 현재 첨관에 시비를 있는대로 터는 중.

    미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하필이면 우방국들 사이에 충돌을 하다니, 그것도 전보다 더 크게 말이었다. 더구나 복구 비용과 지원 비용 탓에 나라 경제를 말아먹을 뻔했다. 거기에 전쟁 지원 국가라고 비난받은 건 덤이다.

    영토 분쟁이 아니라 단순히 물욕 때문이었기에 더욱 비극적인 전투이다. 특히 사망한 민간인 수가 상당히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