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yle="background:#FFFEE3;color:#40443A;font-size:10pt;" width="50%" | 공화국대원수 <nowiki>|</nowiki> 원수 <nowiki>|</nowiki> 상장 <nowiki>|</nowiki> 대장 <nowiki>|</nowiki> 중장 <nowiki>|</nowiki> 소장
"나는 해루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의 군인으로서, 아래 사항을 통해 나의 목숨을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자로서 우리만의 위대한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노동자 및 농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며, 국가의 적에 대항하여 국토방위를 위해 힘쓸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모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군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전폭적으로 이행하며, 나의 행동이 항상 인민의 이익과 국가의 번영을 위한 것임을 인식합니다.
나는 위대한 나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충성과 헌신으로 군복무를 이행할 것을 다짐합니다."
해루인민군 군인 선서
나는 인민과 조국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해루사회주의인민공화국과 인민의 지도자이며 해루사회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통수권자이신 박단아 대통령 각하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치며, 언제든지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할 것을 서약합니다.해루 인민군 충성맹세
해루 인민군은 해루공산당의 당군이다. 정식명칭은 해루사회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이다. 실질적으로 해루의 국군 역할을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국가 휘하의 군대는 부르주아와 봉건 압제자의 입맛에 맞는 탄압의 도구에 속한다"라는 칼 마르크스의 오랜 이론에 근거하여, "인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이라는 해석을 적용하여 당군을 지향한다.
해루 인민군 자체는 1952년 10월 23일에 발생한 10월 철혈공산혁명 다음날에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해루 적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강조하기 위해 정기택(鄭琦宅)이 해루 적군을 창설했다는 날인 1935년 6월 20일로 창설 시기를 앞당겼고, 해당 날짜를 '건군절'로 지정해 공식화했다.
주요 전술로는 총력전, 배합전, 대량 선제 기습 공격 전략, 속전속결 전략이 있다. 총력전은 우리가 아는 총력전의 의미고, 배합전은 전면에서 주력이 적을 공격하면서 특수부대가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상대 전선의 안팎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전술이며, 선제 기습 공격 전략과 속전속결 전략은 전쟁 발발 시 빠른 기동력으로 적을 공격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는 전술이다. 이러한 전술은 인구가 적은 해루의 특성에 맞게 적용되었으며 4차 중동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군 자체에서 "국방신문"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온성특별행정구과 예화특별행정구의 모든 준군사조직을 지휘하며 일부 군물자를 양도하고 있다.
특징
해루인민군은 지휘관이 휘하 병력에게 미치는 개인적 영향을 강조, 지휘관의 위치는 최전선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고 거듭 설파하는데 이게 소대장, 중대장들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사단장의 위치는 최전방이라고 강조한다. 이때문에 고위 야전지휘관의 소모율이 타국의 군대보다 높게 나타난다.
18세 이상의 남녀부터 자원입대가 가능했으며 육군은 총 5주 간, 해군과 공군은 6주 간의 신병교육대 기간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여느 군대가 그렇듯이 신교대에서 군종불문 사격, 수류탄 던지기, 각개전투 등 여러 가지 기초적인 보병 훈련을 받았다.
신병 때는 훈련소의 병기들을 지급받았다 수료시 반납 후 자신의 부대에서 자기가 쓸 병기를 새로 지급받는 타국과 달리, 훈련병 때 받은 소총을 전출시에도 계속 지참해 전역시까지 함께하는 방식으로 병기를 지급했다. 방탄모와 탄띠, 수통 등 개인장구류도 부대피복이 아닌 개인피복으로 지급됐다. 당연히 훈련병 때 지급받은 것을 전역시까지 계속 썼고, 철모 등 일부를 제외하면 전역하면서 반납하지 않고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