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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역사 시나리오 속 인종은 개혁 군주였던 아버지 광종의 유업을 이어 1480년 즉위했다. 그의 치세는 급진적인 변화 대신, 부왕이 마련한 개혁의 성과를 법과 제도로 완성하고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게 하는 ‘체계화’와 ‘심화’의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 대체역사 시나리오 속 인종은 개혁 군주였던 아버지 광종의 유업을 이어 1480년 즉위했다. 그의 치세는 급진적인 변화 대신, 부왕이 마련한 개혁의 성과를 법과 제도로 완성하고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게 하는 ‘체계화’와 ‘심화’의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 ||
인종은 먼저 국가 통치의 근간을 바로 세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부왕 때부터 이어진 《경국대전》 편찬 사업을 마침내 완수하고 부속 법령인 《대전속록》까지 반포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확립했다. 나아가 자의적인 형벌을 막기 위해 사법 절차를 통일한 《집형규례》를 편찬하고, 국정 기록과 지식을 총괄하는 왕립 도서관 겸 아카이브인 ‘홍문관’을 설치하여 데이터에 기반한 통치의 중심을 마련했다. 또한, 복잡해진 행정 수요에 대응하고자 농업, 상업, 기술 등 실무를 전담하는 ‘육서(六署)’를 신설하여 관료 체계의 전문성을 크게 높이고자 하였다. | 인종은 먼저 국가 통치의 근간을 바로 세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부왕 때부터 이어진 《경국대전》 편찬 사업을 마침내 완수하고 부속 법령인 《대전속록》까지 반포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확립했다. 나아가 자의적인 형벌을 막기 위해 사법 절차를 통일한 《집형규례》를 편찬하고, 국정 기록과 지식을 총괄하는 왕립 도서관 겸 아카이브인 ‘홍문관’을 설치하여 데이터에 기반한 통치의 중심을 마련했다. 또한, 복잡해진 행정 수요에 대응하고자 농업, 상업, 기술 등 실무를 전담하는 ‘육서(六署)’를 신설하여 관료 체계의 전문성을 크게 높이고자 하였다. | ||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인종은 인재 양성과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는 유교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의학, 법학, 수학 등 실용 학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육학(六學)’ 체계를 정립했으며, 백성의 계몽을 위해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인 ‘소교(小校)’를 세우고 알기 쉬운 교재를 보급했으며, 중앙 관리를 순회 교사로 파견하는 ‘방학관’ 제도를 운영해 교육 기회를 널리 확대했다. 한편, 정비된 군역 제도를 바탕으로 중앙군을 |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인종은 인재 양성과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는 유교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의학, 법학, 수학 등 실용 학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육학(六學)’ 체계를 정립했으며, 백성의 계몽을 위해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인 ‘소교(小校)’를 세우고 알기 쉬운 교재를 보급했으며, 중앙 관리를 순회 교사로 파견하는 ‘방학관’ 제도를 운영해 교육 기회를 널리 확대했다. 한편, 정비된 군역 제도를 바탕으로 중앙군을 ‘진무소’ 체제로 재편하고, 국가 전략을 총괄하는 ‘비변부’를 상설 기구로 두어 군 지휘 체계를 일원화했다. | ||
이렇게 다져진 국력은 대담한 대외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종은 두만강 이북의 훈춘 지역에 ‘동북 5성’을 개척하여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국경 너머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남쪽으로는 삼포 왜인들의 특권을 줄이고 엄격히 통제하여 국경의 질서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쉼 없는 개혁 추진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국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아들(훗날 성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현명함을 보였습니다. 결국 인종의 치세는 선대의 개혁을 법과 제도로 완성하고, 교육과 실용 학문을 통해 국가의 내실을 다져 조선의 전성기를 연 시대로 평가됩니다. | 이렇게 다져진 국력은 대담한 대외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종은 두만강 이북의 훈춘 지역에 ‘동북 5성’을 개척하여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국경 너머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남쪽으로는 삼포 왜인들의 특권을 줄이고 엄격히 통제하여 국경의 질서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쉼 없는 개혁 추진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국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아들(훗날 성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현명함을 보였습니다. 결국 인종의 치세는 선대의 개혁을 법과 제도로 완성하고, 교육과 실용 학문을 통해 국가의 내실을 다져 조선의 전성기를 연 시대로 평가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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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영학(營學)과 관상감을 친히 방문하여 인재들을 격려하고, 왕세자는 그들을 하나하나 불러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농사 시기와 병영 편제를 묻기도 했다. "내가 그대들의 답을 들으면, 그 고을에서 군역과 부역이 공평히 이루어질지 알 수 있다." | 경기영학(營學)과 관상감을 친히 방문하여 인재들을 격려하고, 왕세자는 그들을 하나하나 불러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농사 시기와 병영 편제를 묻기도 했다. "내가 그대들의 답을 들으면, 그 고을에서 군역과 부역이 공평히 이루어질지 알 수 있다." | ||
이 무렵 신숙주는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에게 "전하께서 백성의 만사를 공정히 다스리고자 호패와 보법을 두었사오나, 과중하면 군포를 피해 도망가는 자가 다시 늘 것입니다"라 간했다. 왕세자는 "그러니 나는 향리의 농간을 살피기 위해 직접 시찰에 나서겠소. 공평함이 백성에게 두려움이 되면 나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답했다. | 이 무렵 신숙주는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에게 "전하께서 백성의 만사를 공정히 다스리고자 호패와 보법을 두었사오나, 과중하면 군포를 피해 도망가는 자가 다시 늘 것입니다"라 간했다. 왕세자는 "그러니 나는 향리의 농간을 살피기 위해 직접 시찰에 나서겠소. 공평함이 백성에게 두려움이 되면 나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답했다. | ||
이때 이미 왕세자는 정순왕후와 함께 광종을 문병하며 국정의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 이때 이미 왕세자는 정순왕후와 함께 광종을 문병하며 국정의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청의당의 여론 보고가 올라오자 그는 성삼문, 신숙주, 강희맹과 함께 회의를 열고 "백성이 진실로 곤궁하다는 말은 놓치지 말라" 했다. 광종은 병중에도 이를 듣고 흐뭇해하며 "내가 배운 것보다 너는 더 깊이 보았다. 훗날 이 기초 위에 무엇을 더할지 네 뜻을 기다리겠다" 하였다. | ||
1480년, 광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인종은 조선의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대리청정을 통해 정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인종에게 즉위식은 정치적 상징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자 조정과 사족 사회는 다시금 긴장했다. 특히 광종의 급진 개혁으로 불만을 품은 종친과 일부 문벌들은 인종이 어떤 길을 택할지를 예의주시했다. | 1480년, 광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인종은 조선의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대리청정을 통해 정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인종에게 즉위식은 정치적 상징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자 조정과 사족 사회는 다시금 긴장했다. 특히 광종의 급진 개혁으로 불만을 품은 종친과 일부 문벌들은 인종이 어떤 길을 택할지를 예의주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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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종은 "두 분의 말 모두 옳다. 그러나 백성이 스스로 군역을 감당하는 까닭은 나라가 그들의 삶을 지키기 때문이다. 지금 치되, 깊게 쫓지 말고 국경에서 그치라. 또한 성희안을 북변에 보내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하라"며 출병을 허락했다. 음력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윤필상이 이끈 조선군은 건주위 고산리 강변에서 여진군 500여 명과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고, 여진 추장과 포로들이 다시는 국경을 넘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 결국 인종은 "두 분의 말 모두 옳다. 그러나 백성이 스스로 군역을 감당하는 까닭은 나라가 그들의 삶을 지키기 때문이다. 지금 치되, 깊게 쫓지 말고 국경에서 그치라. 또한 성희안을 북변에 보내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하라"며 출병을 허락했다. 음력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윤필상이 이끈 조선군은 건주위 고산리 강변에서 여진군 500여 명과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고, 여진 추장과 포로들이 다시는 국경을 넘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 ||
이 두 차례 원정에서 기존 중앙군 체제의 약점이 드러났다. 문종 때 정비한 중앙군은 5사 체제였지만, 부대별 지휘가 산발적이고 병참이 일관되지 않았다. 인종은 이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중앙군 5사를 해체하고, 이를 통합한 | 이 두 차례 원정에서 기존 중앙군 체제의 약점이 드러났다. 문종 때 정비한 중앙군은 5사 체제였지만, 부대별 지휘가 산발적이고 병참이 일관되지 않았다. 인종은 이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중앙군 5사를 해체하고, 이를 통합한 진무소를 신설하여 그 휘하에 7부로 재편해 총 3만의 중앙군을 직속으로 두었다. | ||
진무소는 수도 방어뿐 아니라 국왕 직속의 상비군이 되어 언제든 국경에 파견할 수 있게 했으며, 각 부는 시위도총제에게 직속되어 일원 지휘 체계를 가졌다. 성삼문은 "전하, 이로써 수도는 물론 북변의 변란도 빠르게 대비하게 되어 혼란이 줄 것입니다"라 했다. 그러나 강희맹은 "그러나 이렇게 중앙군을 늘리면 국고가 빠르게 줄고 향리들의 세금 부담이 더 커질까 두렵습니다"라 했으나, 인종은 "병력이 없다면 백성이 납부한 군포도 종잇장일 뿐이다. 변경의 백성을 지킴이 오히려 그들을 편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들의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원정에 나설 때 중앙의 물자를 사용하고 변방의 주민들을 필히 위무하고 감세토록 하는 것이 좋겠소"라 말했다. | |||
이와 함께 인종은 | 이와 함께 인종은 비변부를 상설 설치해 중앙군과 지방군의 지휘 총괄부로 삼았다. 한양도성과 일부 변경 요새 방어만 맡아 하는 것에서 나아가, 중앙군과 지방의 진관군을 모두 관할해 작전계획, 동원계획, 병참까지 계획하게 했다. 다만 이를 통해 군권이 전횡함에 이르러 역모가 일어날 것을 우려한 대신들의 뜻을 따라 진무소와 분리하여 왕명으로만 비변부가 실권을 가지도록 제한하였다. | ||
이와 함께 삼포의 왜인 문제도 조정에서 화두가 되었다. 태종 이후 금상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교린 정책의 하나로 이들에게 조선의 일반 백성조차 못 누리는 면세 등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고초도를 벗어난 어업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하지 말라는 해적질까지 하며 조정의 공마선 약탈, 살인 등등 각종 범죄를 일삼았다. 조선 입장에서는 오지 마라는데도 눌러앉은 왜인들에게 유화책을 베풀었는데도 범죄나 일으키니 배은망덕하게 여겼다. 이에 따라 서거정을 파견하여 왜인들의 혜택을 줄이고 그들을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도록 종용하고 강경책을 펼쳤다. 이와 함께 인종은 왜구 문제를 조기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 훈련원에서 수군을 위한 영선원을 따로 두어 수군 무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대마도에도 체탐사를 파견하여 정세를 주시하도록 했다. | 이와 함께 삼포의 왜인 문제도 조정에서 화두가 되었다. 태종 이후 금상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교린 정책의 하나로 이들에게 조선의 일반 백성조차 못 누리는 면세 등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고초도를 벗어난 어업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하지 말라는 해적질까지 하며 조정의 공마선 약탈, 살인 등등 각종 범죄를 일삼았다. 조선 입장에서는 오지 마라는데도 눌러앉은 왜인들에게 유화책을 베풀었는데도 범죄나 일으키니 배은망덕하게 여겼다. 이에 따라 서거정을 파견하여 왜인들의 혜택을 줄이고 그들을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도록 종용하고 강경책을 펼쳤다. 이와 함께 인종은 왜구 문제를 조기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 훈련원에서 수군을 위한 영선원을 따로 두어 수군 무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대마도에도 체탐사를 파견하여 정세를 주시하도록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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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14년, 광종이 국조오례의를 통해 국가 의례를 통일했으나, 왕실 전례와 가례 일부는 구전과 전사(傳寫)에 의존해 혼란이 있었다. 인종은 "왕실의 사사도 나라의 큰 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며 강희맹과 신숙주에게 의궤를 편찬케 했다. 이 의궤는 왕의 혼례, 왕비와 세자 책봉, 상왕 존호 올림 의식 등 왕실 전례를 모두 기록한 것으로, 이후 왕실과 종친의 일탈을 막고 법에 의거한 예를 강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전의 모든 법전과 의궤를 안전히 보관하기 위해 인종은 궁내에 "홍문관"을 설치했다. 홍문관은 광종 시기 체탐사와 격물청에서 올라온 방대한 보고서, 백민훈감과 농서·병서·상서 각종 저술까지 함께 소장하게 되어 국가 운영의 문서 창고가 되었다. 서제겸은 "홍문관에 각 고을에서 올라온 사족들의 청원과 지방 사송 기록까지 보관하면, 훗날 사헌부와 사간원이 감사할 때 큰 준거가 될 것입니다"라 하여 인종은 이를 즉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홍문관은 단순 서고가 아닌 조선 정치·행정·법제의 심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 인종 14년, 광종이 국조오례의를 통해 국가 의례를 통일했으나, 왕실 전례와 가례 일부는 구전과 전사(傳寫)에 의존해 혼란이 있었다. 인종은 "왕실의 사사도 나라의 큰 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며 강희맹과 신숙주에게 의궤를 편찬케 했다. 이 의궤는 왕의 혼례, 왕비와 세자 책봉, 상왕 존호 올림 의식 등 왕실 전례를 모두 기록한 것으로, 이후 왕실과 종친의 일탈을 막고 법에 의거한 예를 강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전의 모든 법전과 의궤를 안전히 보관하기 위해 인종은 궁내에 "홍문관"을 설치했다. 홍문관은 광종 시기 체탐사와 격물청에서 올라온 방대한 보고서, 백민훈감과 농서·병서·상서 각종 저술까지 함께 소장하게 되어 국가 운영의 문서 창고가 되었다. 서제겸은 "홍문관에 각 고을에서 올라온 사족들의 청원과 지방 사송 기록까지 보관하면, 훗날 사헌부와 사간원이 감사할 때 큰 준거가 될 것입니다"라 하여 인종은 이를 즉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홍문관은 단순 서고가 아닌 조선 정치·행정·법제의 심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 ||
계속된 여진의 북변 약탈 위협에 고심하던 인종 14년에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인 '여자신'이 조정에 직접 와서 성종에게 야춘(현재 훈춘시의 방천지역)과 훈춘(현재 훈춘시의 도심지역)을 위시로 한 남만주(지금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해당) 지역 일대에 대한 개척을 주장하여 이에 인종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여자신과 성준 등에게 명해 연변 일대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장성들을 조사하게 하고 동시에 장성 축조에 대한 계책을 세우도록 했다. 1494년부터 병조, 농서, 격서, | 계속된 여진의 북변 약탈 위협에 고심하던 인종 14년에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인 '여자신'이 조정에 직접 와서 성종에게 야춘(현재 훈춘시의 방천지역)과 훈춘(현재 훈춘시의 도심지역)을 위시로 한 남만주(지금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해당) 지역 일대에 대한 개척을 주장하여 이에 인종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여자신과 성준 등에게 명해 연변 일대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장성들을 조사하게 하고 동시에 장성 축조에 대한 계책을 세우도록 했다. 1494년부터 병조, 농서, 격서, 비변부가 수차례 회의를 열어 이 일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강희맹은 "지금 개척하면 향리와 사족이 세금과 부역을 더 거두려 해 백성이 고통받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치를 더 안정시키고 뒤에 하소서"라 했으나, 서제겸은 "개척이 가능하고 옛 장성을 보수하여 변방을 안정케 할 수 있다는 이것은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지금 아니면 여진이 먼저 방비를 견고히 할 것입니다"라 맞섰다. 인종의 세자 윤(훗날 성종)은 회의에서 "아버님, 백성에게 무겁게 하지 않고 작게 시작해 점차 늘리면 후환을 줄일 수 있습니다. 만일 갑자기 많은 농민을 옮기면 흉년과 병으로 도망이 이어질 것입니다"라 조심스레 간했다. 인종은 이를 듣고 "그 말이 옳다. 급히 하지 말고 해마다 조금씩 사민과 군영을 늘려 뿌리를 깊게 하라"라 했다. 이리하여 준비만도 4년에 걸쳐 군량과 종자, 수리 도구를 양창고에 비축하고, 사헌부에서 미리 향리 부정 사례를 조사해 방납의 구실을 막았다. | ||
1496년부터 훈춘 부근에 첫 진을 세웠다. 남이가 맡아 성을 쌓자 여진은 사냥길을 돌려가야 했고, 목축지도 잃었다. 1497년~1500년엔 공험진 부근과 혼춘강 상류까지 넓히며 총 다섯 개 성을 세웠다. | 1496년부터 훈춘 부근에 첫 진을 세웠다. 남이가 맡아 성을 쌓자 여진은 사냥길을 돌려가야 했고, 목축지도 잃었다. 1497년~1500년엔 공험진 부근과 혼춘강 상류까지 넓히며 총 다섯 개 성을 세웠다. | ||
농민들은 군량을 받고 벼를 심었으며, 병사들은 번갈아 농민을 호위하며 여진 기마대를 막았다. | 농민들은 군량을 받고 벼를 심었으며, 병사들은 번갈아 농민을 호위하며 여진 기마대를 막았다. 진무소는 7부를 교대로 보내 주둔해 군사 숙련을 유지했고, 비변부는 병참을 전담해 군량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다. 이 사업은 단순 정벌이 아니라 병영과 농지를 함께 세워 국경선을 밀어붙이는 대공사였다. 이는 한편으로 북변의 새로운 영토와 조선의 야심을 키울 수 있는 장소였으나, 그만큼 많은 자원과 인력이 소모되었으며, 북쪽으로는 여진을 오히려 결집시키는 등의 폐단이 있었다. 관리들 중 몇몇과 성균관 유생 중 일부는 이 일을 동북5성이 실효가 없어 철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조정과 인종은 이 사업에 많은 재원을 이미 투자하여 이를 물리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아직 그 효과를 보지 못했다며 길게 두고 보고 실효 여부를 가리기로 하였다. | ||
인종 말기, 국정은 이미 경국대전과 집형규례, 동북 5성 개척까지 거치며 상당히 정비되었으나, 전문 관청 체계는 여전히 육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인종은 "농사와 상업, 교육, 과학, 정보까지 확장된 관청과 업무를 육조만으로는 세밀히 다스릴 수 없다. 각 전문 관청으로 두어 이를 전담하게 하면 백성의 삶과 국정의 뿌리가 더 깊어질 것이다"라 하였다. | 인종 말기, 국정은 이미 경국대전과 집형규례, 동북 5성 개척까지 거치며 상당히 정비되었으나, 전문 관청 체계는 여전히 육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인종은 "농사와 상업, 교육, 과학, 정보까지 확장된 관청과 업무를 육조만으로는 세밀히 다스릴 수 없다. 각 전문 관청으로 두어 이를 전담하게 하면 백성의 삶과 국정의 뿌리가 더 깊어질 것이다"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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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청정이 공식 선포되자 성삼문은 "전하께서 기르신 이 아이는 단순히 유학만 아는 선비가 아니옵니다. 이미 육학의 관리들과 농업, 병정, 상공을 두루 익혔으니 조정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라 했고, 서제겸과 권계는 "그러나 아직 젊어 신료들의 간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저희가 더 굳게 보필하겠습니다"라 했다. | 대리청정이 공식 선포되자 성삼문은 "전하께서 기르신 이 아이는 단순히 유학만 아는 선비가 아니옵니다. 이미 육학의 관리들과 농업, 병정, 상공을 두루 익혔으니 조정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라 했고, 서제겸과 권계는 "그러나 아직 젊어 신료들의 간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저희가 더 굳게 보필하겠습니다"라 했다. | ||
세자는 대신들과 회의에서 언제나 온화하되 날카롭게 핵심을 짚었다. 교서가 방학관 보고서에서 향리 부정을 눈치 채지 못했을 때, 그는 조용히 "향리들의 수치를 대조해 보셨습니까? 그 기록에서 이미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라 지적해 성희안를 놀라게 했다. | 세자는 대신들과 회의에서 언제나 온화하되 날카롭게 핵심을 짚었다. 교서가 방학관 보고서에서 향리 부정을 눈치 채지 못했을 때, 그는 조용히 "향리들의 수치를 대조해 보셨습니까? 그 기록에서 이미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라 지적해 성희안를 놀라게 했다. | ||
세자는 대리청정을 맡자마자 크게 제도를 흔들지 않았다. 그는 "아버님께서 평생 세우신 것을 제가 조급히 움직여 백성이 흔들리게 할까 두렵습니다"라 하며 기존 육서, | 세자는 대리청정을 맡자마자 크게 제도를 흔들지 않았다. 그는 "아버님께서 평생 세우신 것을 제가 조급히 움직여 백성이 흔들리게 할까 두렵습니다"라 하며 기존 육서, 진무소, 비변부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세밀한 부분에서 점진적으로 바꿔 갔다. 농서의 치수 사업을 일부 완화해 세 부담을 덜게 하고, 상서에서 지방 상인 세금 보고를 6개월 단위로 바꾸어 상권에 숨통을 틔웠다. 사헌부가 삼포 잔류 왜인들의 내통 혐의를 조사하자, 성종은 "증거 없이 강압하면 무역 자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백성의 생계와도 직결되니 신중히 조사하십시오"라 지시했다. 강희맹은 이를 두고 "세자께서도 성군이 될 것이라며 속으로 감탄했다. | ||
이 시기 인종의 병세는 이미 회복 불능 상태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가 조정과 관료들과 자연스럽게 협력하며 신뢰를 쌓도록 한 것은 훗날 성종 치세를 부드럽게 이어가게 한 결정적 포석이 되었다. | 이 시기 인종의 병세는 이미 회복 불능 상태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가 조정과 관료들과 자연스럽게 협력하며 신뢰를 쌓도록 한 것은 훗날 성종 치세를 부드럽게 이어가게 한 결정적 포석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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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방학관 파견과 향촌 소교 설립을 둘러싸고는 지방 기득권층의 미묘한 반발도 있었다. 일부 향리와 토호들은 평민들이 글을 배우고 세상 이치를 알면 자기들의 권위를 흔들까 염려하여 소극적으로 협조하거나, 방학관의 추천 과정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이에 인종은 교서청(敎署廳, 교육 업무 관청)을 통해 각 고을에서 시행한 교육 일지를 홍문관에 정기적으로 제출하게 하고, 격서청(格署廳, 연구 업무 관청)으로 하여금 방학관의 보고서를 분석하도록 하는 등 감시와 평가 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양현고의 장학 재원을 활용하여 영학(營學)(地方學校)의 성적 우수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지방에서 학업 실력이 뛰어난 자가 사회적 배경에 관계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다. 이런 장치들은 지방 교육 혁신이 부패하거나 왜곡되지 않고 정착되도록 한 장치로서, 인종의 세심한 정책 운영 능력을 보여준다. | 물론 방학관 파견과 향촌 소교 설립을 둘러싸고는 지방 기득권층의 미묘한 반발도 있었다. 일부 향리와 토호들은 평민들이 글을 배우고 세상 이치를 알면 자기들의 권위를 흔들까 염려하여 소극적으로 협조하거나, 방학관의 추천 과정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이에 인종은 교서청(敎署廳, 교육 업무 관청)을 통해 각 고을에서 시행한 교육 일지를 홍문관에 정기적으로 제출하게 하고, 격서청(格署廳, 연구 업무 관청)으로 하여금 방학관의 보고서를 분석하도록 하는 등 감시와 평가 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양현고의 장학 재원을 활용하여 영학(營學)(地方學校)의 성적 우수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지방에서 학업 실력이 뛰어난 자가 사회적 배경에 관계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다. 이런 장치들은 지방 교육 혁신이 부패하거나 왜곡되지 않고 정착되도록 한 장치로서, 인종의 세심한 정책 운영 능력을 보여준다. | ||
인종은 나라의 문치(文治)를 다지는 한편 무비(武備) 확충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는 즉위 후 수도 방위 체제를 재편하여 군권을 국왕 아래 일원화하고자 하였다. 종전까지 한양의 중앙군은 세조 이래 오위(五衛)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인종은 이를 발전시켜 | 인종은 나라의 문치(文治)를 다지는 한편 무비(武備) 확충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는 즉위 후 수도 방위 체제를 재편하여 군권을 국왕 아래 일원화하고자 하였다. 종전까지 한양의 중앙군은 세조 이래 오위(五衛)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인종은 이를 발전시켜 진무소(鎭撫所) 휘하에 7개의 군부(軍部)를 신설하고 중앙군 약 2만 명을 재편성하였다. 7부로 개편된 진무소 체제는 국왕 친위 부대를 중심으로 오위 제대의 지휘 체계를 일신한 것으로, 군사 훈련과 편제가 더욱 표준화·체계화되었다. 인종은 유사시 효과적인 전략 수립을 위해 비변부(元帥府)를 설치하였다. 비변부는 평상시에는 중앙군의 총사령부로서 작동하며, 전시에는 모든 군영을 지휘 통솔하는 군사 작전 본부 역할을 하도록 한 기구다. 이곳에서는 가상 적국을 상정한 동원 계획, 작전 계획, 병참 계획 등을 수립하여 평시에 대비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오늘날의 합동참모본부나 총참모부에 견줄 만한 선진적인 것이었다. 비변부의 신설로 종래 병조나 의흥위 등이 담당하던 전략기획 기능이 전문화되었고, 문무 관료를 망라한 군령 체계가 구축되어, 유사시 신속한 대응 준비가 가능해졌다. | ||
해군력의 독자적 강화도 중요한 개혁 중 하나였다. 인종은 수군 훈련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수군훈련원인 영선원을 신설하여, 기존 훈련원(종합 군사 교육 기관)으로부터 수군 부문을 분리·독립시켰다. 이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던 해방(海防)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연해 지역의 왜구 침입과 교역 통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전문 해군 인력 양성이 목적이었다. 수군훈련원은 이후 조선 수군의 전력 증강과 전술 개발의 요람이 되었으며, 훗날 임진왜란 시기의 수군 선전에도 이런 기초 작업이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해군력의 독자적 강화도 중요한 개혁 중 하나였다. 인종은 수군 훈련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수군훈련원인 영선원을 신설하여, 기존 훈련원(종합 군사 교육 기관)으로부터 수군 부문을 분리·독립시켰다. 이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던 해방(海防)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연해 지역의 왜구 침입과 교역 통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전문 해군 인력 양성이 목적이었다. 수군훈련원은 이후 조선 수군의 전력 증강과 전술 개발의 요람이 되었으며, 훗날 임진왜란 시기의 수군 선전에도 이런 기초 작업이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
인종의 군제 개혁 과정에서 새로운 기구 신설에 따른 저항도 없지 않았다. 중앙군 재편 시 몇몇 기존 오위 대장들은 자신의 지휘권 축소를 우려했고, 일부 공신 출신 장군들은 “굳이 평시부터 군사 조직을 뒤흔들 필요가 있는가”라며 불만을 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인종은 강화된 군권이 반역과 외침을 예방하는 보험임을 강조하며 설득하였다. 선왕 광종이 공신 및 종친 세력을 견제하고자 호패법·보법을 강행했던 맥을 이어, 인종 역시 군권을 철저히 국가에 예속시킴으로써 왕권의 안보 기반을 다지려 한 것이다. 특히 부왕 대에 이미 군공으로 세력을 키운 무신들이 있었던 만큼, 인종은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예우하면서 실권은 새 군제 속에서 제도적으로 분산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또한 그는 젊은 무관들을 육성하여 군제 운영의 중추에 배치하고, | 인종의 군제 개혁 과정에서 새로운 기구 신설에 따른 저항도 없지 않았다. 중앙군 재편 시 몇몇 기존 오위 대장들은 자신의 지휘권 축소를 우려했고, 일부 공신 출신 장군들은 “굳이 평시부터 군사 조직을 뒤흔들 필요가 있는가”라며 불만을 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인종은 강화된 군권이 반역과 외침을 예방하는 보험임을 강조하며 설득하였다. 선왕 광종이 공신 및 종친 세력을 견제하고자 호패법·보법을 강행했던 맥을 이어, 인종 역시 군권을 철저히 국가에 예속시킴으로써 왕권의 안보 기반을 다지려 한 것이다. 특히 부왕 대에 이미 군공으로 세력을 키운 무신들이 있었던 만큼, 인종은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예우하면서 실권은 새 군제 속에서 제도적으로 분산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또한 그는 젊은 무관들을 육성하여 군제 운영의 중추에 배치하고, 진무소와 비변부의 운영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는 등 개혁의 실효를 높였다. 그 결과 인종 말년 조정은 “2만의 중앙군이 체계화되어 수도를 지키니, 군권이 임금의 울타리가 되었다”고 평할 정도로, 군사 체제가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 ||
그는 말기에 이르러 두만강 북쪽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여, 함경도 북방 국경을 넘어 새로운 거점을 건설하는 대담한 사업을 추진했다. 구체적으로 1490년대 후반부터 두만강을 넘어 훈춘(琿春)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간하고 요새를 쌓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인종은 이 신개척지를 동북 5성이라 명명하였다. 이는 세종 대의 4군 6진 개척 이후 조선이 처음으로 기존 국경선 밖으로 영토를 확장한 사례로서 그 의의가 크다. 세종 시기 김종서 등이 두만강 유역 육진을 설치해 국경을 확정지은 지 약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인종은 그 너머로 개척민을 이주시켜 경작지와 진영(鎭營)을 건설함으로써 여진 세력에 대한 선제적 대응과 국토 확장을 동시에 이루려 한 것이다. 이 정책 배경에는 15세기 후반 여진족 일부가 함경도 변경을 침탈하거나 조공을 어기는 사례가 발생하자, 아예 그 근거지 인근까지 조선의 행정력과 군사력을 미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인종은 “거친 땅을 일구어 백성의 삶터로 만들고, 변경을 굳건히 하라”는 뜻을 내려 직접 개척 사업을 독려하였고, 호조와 병조에서는 개척민 모집, 식량 운송, 성채 축성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 그는 말기에 이르러 두만강 북쪽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여, 함경도 북방 국경을 넘어 새로운 거점을 건설하는 대담한 사업을 추진했다. 구체적으로 1490년대 후반부터 두만강을 넘어 훈춘(琿春)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간하고 요새를 쌓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인종은 이 신개척지를 동북 5성이라 명명하였다. 이는 세종 대의 4군 6진 개척 이후 조선이 처음으로 기존 국경선 밖으로 영토를 확장한 사례로서 그 의의가 크다. 세종 시기 김종서 등이 두만강 유역 육진을 설치해 국경을 확정지은 지 약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인종은 그 너머로 개척민을 이주시켜 경작지와 진영(鎭營)을 건설함으로써 여진 세력에 대한 선제적 대응과 국토 확장을 동시에 이루려 한 것이다. 이 정책 배경에는 15세기 후반 여진족 일부가 함경도 변경을 침탈하거나 조공을 어기는 사례가 발생하자, 아예 그 근거지 인근까지 조선의 행정력과 군사력을 미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인종은 “거친 땅을 일구어 백성의 삶터로 만들고, 변경을 굳건히 하라”는 뜻을 내려 직접 개척 사업을 독려하였고, 호조와 병조에서는 개척민 모집, 식량 운송, 성채 축성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
2025년 7월 31일 (목) 15:04 기준 최신판


仁宗 · 인종

仁宗 · 인종
대체역사 시나리오 속 인종은 개혁 군주였던 아버지 광종의 유업을 이어 1480년 즉위했다. 그의 치세는 급진적인 변화 대신, 부왕이 마련한 개혁의 성과를 법과 제도로 완성하고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게 하는 ‘체계화’와 ‘심화’의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종은 먼저 국가 통치의 근간을 바로 세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부왕 때부터 이어진 《경국대전》 편찬 사업을 마침내 완수하고 부속 법령인 《대전속록》까지 반포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확립했다. 나아가 자의적인 형벌을 막기 위해 사법 절차를 통일한 《집형규례》를 편찬하고, 국정 기록과 지식을 총괄하는 왕립 도서관 겸 아카이브인 ‘홍문관’을 설치하여 데이터에 기반한 통치의 중심을 마련했다. 또한, 복잡해진 행정 수요에 대응하고자 농업, 상업, 기술 등 실무를 전담하는 ‘육서(六署)’를 신설하여 관료 체계의 전문성을 크게 높이고자 하였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인종은 인재 양성과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는 유교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의학, 법학, 수학 등 실용 학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육학(六學)’ 체계를 정립했으며, 백성의 계몽을 위해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인 ‘소교(小校)’를 세우고 알기 쉬운 교재를 보급했으며, 중앙 관리를 순회 교사로 파견하는 ‘방학관’ 제도를 운영해 교육 기회를 널리 확대했다. 한편, 정비된 군역 제도를 바탕으로 중앙군을 ‘진무소’ 체제로 재편하고, 국가 전략을 총괄하는 ‘비변부’를 상설 기구로 두어 군 지휘 체계를 일원화했다. 이렇게 다져진 국력은 대담한 대외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종은 두만강 이북의 훈춘 지역에 ‘동북 5성’을 개척하여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국경 너머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남쪽으로는 삼포 왜인들의 특권을 줄이고 엄격히 통제하여 국경의 질서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쉼 없는 개혁 추진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국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아들(훗날 성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현명함을 보였습니다. 결국 인종의 치세는 선대의 개혁을 법과 제도로 완성하고, 교육과 실용 학문을 통해 국가의 내실을 다져 조선의 전성기를 연 시대로 평가됩니다.
1459년(문종 9년) 음력 1월 12일, 광종(당시 왕세자 홍위)과 정순왕후 사이에서 인종이 태어났다. 문종은 자신의 유일한 적장손이 태어나자 크게 기뻐하여 전국에 곡식을 풀고 사면령을 내렸으며, 궁중과 조정은 앞다투어 축하의 표문을 올렸다. 특히 정순왕후는 본래 경전에 밝고 손수 언문까지 익혀 글을 지었을 정도로 총명하여, 어린 이현을 직접 가르치며 가정교육을 철저히 했다. 이 시기 궁중에서 이미 "세자가 장차 부왕을 이어 정사를 맡을 것"이라는 기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광종은 자신의 개혁을 물려받을 후계자를 철저히 준비시키고자 했다. 그는 세자 시절 문종에게 철저히 국정과 학문을 배웠듯, 어린 이현에게도 단순히 경서만을 가르치지 않고 격물청의 실험과 체탐사의 보고를 보여주었다. 왕실 서고에서는 농서, 병서, 각종 도감의 장부를 꺼내어 읽히며 "백성을 다스리는 길은 땅과 군사에서 나온다"고 누차 일렀다. 정순왕후는 이를 보고 "저 아이가 당신을 닮아 무거운 일을 겁내지 않을까 두렵사옵니다" 하자, 광종은 "그러니 더 일찍부터 익히게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1466년, 이현은 왕세손에 이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광종은 내수사 혁파, 호패와 보법 강행, 과전 개혁 등으로 종친과 사족들의 불만이 고조된 상태였기에, 조정과 백성에게 확실한 계승 구도를 보여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경연에서 영의정 성삼문은 "전하, 종묘사직의 대통을 이으실 적통이 이미 이 아이에 있사옵니다"라 했고, 강희맹은 "세자가 이미 육학의 기초를 능히 이해하니, 향후 육교의 뿌리가 될 것입니다"라 했다. 이후 왕세자는 경연에 나가 성삼문과 강희맹, 하위지가 벌이는 호패 시행의 공평성, 방납 혁파의 실효성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들으며 정사를 배웠다. 어떤 날은 격물청에서 실험 중이던 거중기 개량기구가 고장 나자 세자가 직접 현장으로 가 살펴보고 아우인 제안대군과 함께 개선 방안을 강구했다. 강희맹은 이를 보고 "이 아이가 정사를 장차 세밀히 다스릴 사람입니다"라 하였다. 세자 헌은 이미 부왕 광종을 따라 목공예에도 조예가 깊었기에 이런 일을 능히 하였다. 다만 이런 것을 보고 관료들은 세자가 경전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까하여 광종에게 이 일을 멀리할 것을 간청했으나 광종은 “세자의 견물을 넓히고자하는 일인데 어찌 그것이 틀렸다 할 수 있고, 과거 세종께서도 대호군과 뜻을 같이하여 학물을 닦았는데, 그런 공덕을 쌓고자하면 어찌 잡학이라고 관심을 두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라며 일축했다. 광종이 병세가 깊어지자 대리청정을 맡게 된 왕세자는 즉시 국정 문서를 스스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판목운하의 유지 비용 보고가 올라오자 그는 "이 유지비가 과도하면, 농민의 부역과 세금에 어떻게 전가될지 다시 따져보라" 하고, 격물청과 영학(營學)의 관원과 관리들을 불러 지방 물길 상황을 직접 지도 위에 표시하게 했다. 경기영학(營學)과 관상감을 친히 방문하여 인재들을 격려하고, 왕세자는 그들을 하나하나 불러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농사 시기와 병영 편제를 묻기도 했다. "내가 그대들의 답을 들으면, 그 고을에서 군역과 부역이 공평히 이루어질지 알 수 있다." 이 무렵 신숙주는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에게 "전하께서 백성의 만사를 공정히 다스리고자 호패와 보법을 두었사오나, 과중하면 군포를 피해 도망가는 자가 다시 늘 것입니다"라 간했다. 왕세자는 "그러니 나는 향리의 농간을 살피기 위해 직접 시찰에 나서겠소. 공평함이 백성에게 두려움이 되면 나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답했다. 이때 이미 왕세자는 정순왕후와 함께 광종을 문병하며 국정의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청의당의 여론 보고가 올라오자 그는 성삼문, 신숙주, 강희맹과 함께 회의를 열고 "백성이 진실로 곤궁하다는 말은 놓치지 말라" 했다. 광종은 병중에도 이를 듣고 흐뭇해하며 "내가 배운 것보다 너는 더 깊이 보았다. 훗날 이 기초 위에 무엇을 더할지 네 뜻을 기다리겠다" 하였다.
1480년, 광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인종은 조선의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대리청정을 통해 정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인종에게 즉위식은 정치적 상징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자 조정과 사족 사회는 다시금 긴장했다. 특히 광종의 급진 개혁으로 불만을 품은 종친과 일부 문벌들은 인종이 어떤 길을 택할지를 예의주시했다. 영의정 성삼문은 일찍부터 인종의 정치적 스승으로서 그를 지켜보며 "전하, 선왕께서 나라의 기틀을 닦으셨사오니 이제 전하께서는 선왕의 큰 뜻에 따라 백성들의 삶을 편히 하고 그 위에 학문과 교화를 쌓으시옵소서"라 간언했다. 인종은 이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친께서 기틀을 세우셨으니, 나는 이를 더 공평히 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아가게 하고 싶소"라 답했다. 즉위 직후 인종은 성삼문과 함께 영학(營學)과 이식삼학을 본격적으로 확대, 보급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인종은 이미 왕세자 시절부터 격물청과 체탐사를 통해 확인된 지방 실태 보고서를 수백 건 넘게 검토한 상태였다. 그는 성삼문에게 "나는 육학을 널리 두어 각 고을에 소교를 통해 기초를 가르치고 방학관을 돌려 전문 과목을 닦게 하려 하오. 향후 육교에서 배운 자들이 지방으로 나가면 향리들의 농간을 막고 백성들의 일을 살피게 될 것이오" 했다. 성삼문은 이에 크게 공감하며 "전하, 소교를 통한 아동 교육과 방학관의 순회 강습은 향리 권세를 견제할 뿐 아니라, 백성이 스스로 글과 계산을 알게 해 부역과 군역에서 속지 않게 하옵니다. 이것이 진정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길입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은 이미 노령에 접어들어 있었고, 자신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도 후일을 대비해 인재를 미리 길러두려 했다. 그는 인종에게 "강희맹은 농서와 수치에 밝고, 서제겸은 경학과 법률, 상공업에 밝사오니 이 두 사람을 적절히 써서 각기 개혁을 뒷받침하게 하시옵소서"라 천거했다. 인종은 즉위 초기 강희맹을 좌의정으로 삼아 육학 중 농서와 수치원의 교습 제도를 마련하게 했고, 서제겸은 형조와 공조를 돌아가며 맡아 상공업 진흥과 법령 정비를 지휘하게 했다. 강희맹은 곧 전국 향교와 상교에 학전을 두어 세금을 통해 학교를 운영하도록 제도화하고, 양현고를 통해 장학 자금을 지원케 했다. 서거정은 지리를 살펴 역참과 통신, 도로 체계를 정비하고, 향리들의 공납 장부를 일일이 점검하도록 하여 방납의 폐단을 더 철저히 막았다. 이렇게 인종 즉위 초기에는 성삼문, 신숙주이 정책의 큰 틀을 설계하고, 강희맹과 서제겸, 서거정 등이 각기 전문 분야에서 개혁을 구체화해 나갔다. 인종은 매일 경연을 열어 논의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즉위 초 인종은 강희맹과 함께 전국 향교와 영학(營學)을 재정비하였다. 강희맹은 "전하, 향교가 이미 문약에만 기울어 영학(營學)과 그 궤를 같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종께서 설치하신 상교는 아직 그 재원이 부족하여 사람을 가르침에 몇 명에 그친다 합니다. 학전을 더 주어 교관과 재원을 넉넉히 두고 백성이 실용을 배우게 하시옵소서"라 했다. 이에 인종은 "양현고를 더욱 충실히 하고 학전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교관 녹봉과 학교의 운영을 돌보게 하라" 명했다. 성삼문은 "농민 부담을 늘리지 않으려면 처음에는 공전에서 돌려 향교의 재정을 꾸리게 하시고, 점차 효과를 보고 늘리소서"라 했고, 인종은 이를 수락해 경기 일부와 충청 지역 향교에서 학전과 양현고를 시험 운영하게 했다. 그 결과 교관의 질과 강의가 크게 향상되었고, 백성들 중에 스스로 향교에 나와 글과 셈을 배우는 자가 크게 늘었다. 인종은 이때 집현전의 관료 몇몇과 예조, 공조의 관리들에게 백민훈감과 훈민서의 편찬을 지시했다. 이는 호패와 보법 이후 군역과 부역에서 향리에게 속아 문서를 위조당하는 농민들이 많아, 백성이 스스로 세법과 군법, 기본적인 농서 지식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집현전에서 향학에서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합당한지 밤새 논의하여 하나하나 내용을 정하였다. 백민훈감과 훈민서는 한문과 언문을 나란히 기록해 평민들도 쉽게 읽도록 했으며, 부록에는 기본 산술과 호적 계산법까지 실었다. 강희맹은 "이 책을 각 향교와 서당에 두어 교관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했고, 인종은 "경기 지역부터 반포하여 백민훈감에 따라 훈민서를 가르치게 하고 향후 전국에 확장하라" 했다. 이 시기에 백민훈감과 훈민서를 반포하기 위해 간문청을 두어 이후에도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마땅히 백민훈감에 따라 인종은 "서당을 대신할 소교를 경기 지역에 먼저 설치해 아이들에게 백민훈감을 가르치게 하고 향후 전국에 확장하라" 했다. 이에 강희맹은 경기 남부 수원 일대에 소교를 세워 훈민서를 교재로 쓰게 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이 농법을 더 잘 알게되고 도리와 예를 깨우치니 정책을 펴기 수월해졌으며 향리들의 농간에도 백성들은 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서제겸은 "수원의 한 고을에서 향리가 농간을 부리려다 백성이 책을 꺼내 직접 조세를 계산하니 크게 당황했다 합니다"라 보고했다. 동시에 인종은 선비는 마땅히 선비로서 배울 육예가 있는데, 선비들은 이제 이를 멀리하니 이를 바로세워 마땅히 배워야 함을 조회에서 역설하였다. 인종은 백민훈감과 별도로 백성의 삶을 풍족케하고 그들의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학문을 관리들에게 가르칠 방안을 강구하라 하니 육학(이학·산학·천문·역학·율학·의학)이 그것이다. 인종은 즉위 직후 성삼문과 경연에서 "관리들은 산학이 어렵다하여 기피하고 역학과 의학을 가벼이 여기고 있으나, 국사를 다루는 관리들이 어찌 농토의 크기를 모르고 역병을 다루는 법을 모르고, 농절기를 볼 줄 모르며, 평화를 위해 오랑캐와 이야기할 줄을 몰라서야 되겠는가"라 했고, 성삼문과 강희맹, 서제겸 모두 이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예조에 명하여 동서활인원을 혜민원으로 확대하여 의관 양성에 힘쓰도록 하고 사역원과 관상원도 그리하도록 했다. 또한, 이조에 명하여 산학에 능한 자를 뽑아 수치원 관직을 겸하게 하여 산학을 가르치게 하고, 격청에도 명하여 궁리원에서 이학, 물학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형조에서도 밑에 순도원이라는 관청을 세워 법을 능히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육학이라 하여 양반 관료들에게 사가독서함에 이들 학문을 필히 배울 것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육학은 궁리원(물리), 수치원(수학), 관상원(천문), 사역원(외국어), 순도원(법학), 혜민원(의학)으로 정해졌으며, 이후 육학이 지방으로 확산되며 조선의 행정과 상공업, 군사, 의료에 이르기까지 실질적 토대를 이루었다.
광종이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살폈다. 그러나 인종 2년에 조문과 시행 규칙을 끝마치지 못하고 승하하여 인종이 이 과업을 이어 하게 되었다. 인종은 이를 마무리하기 위해 성삼문을 필두로 하여 집현전 관원들에게 계속해서 각조별 세칙과 시행 속칙을 정리하게 했다. 강희맹은 지방 행정과 토지 조항을 보완했고, 서제겸은 상공업 규제와 도량형 조항을 손질했다. 그리하여 인종 10년에 경국대전은 마침내 인종 치세에 완성·반포되었으며, 부속법령을 모은 대전속록도 함께 공포되어 지방관과 향리들이 반드시 휴대하고 판결과 행정을 집행할 때 의거하도록 했다.
인종 9년, 인종은 신숙주와 논의하여 형법과 사법 절차를 표준화하기 위한 "집형규례" 편찬을 추진했다. 광종 시기 지방 토호를 견제하기 위해 많은 지방관과 하위 고을에도 아전을 두도록 하면서 많은 송사와 크고 작은 폐단이 발생했고, 지방 수령과 향리가 형률을 제각기 해석하거나 지방 토호에 의해 재판의 공정성이 흔들리는 일이 자주 보고되었다. 서제겸는 "전하, 이대로 두면 사족과 향리가 법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규례를 편찬해 형률과 절차를 전국적으로 통일케 하시옵소서"라 간언했다. 인종은 즉시 서제겸을 총책임자로 삼아 법조문과 판례를 정리케 하고, 예조와 형조, 순도원 전문가들을 불러 2년에 걸쳐 집형규례를 완성하였다.
인종 11년(1491) 정월 12일, 니마거 여진족이 함경도 조산보를 습격해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자 조정은 긴급 회의를 열었다. 성삼문은 "백성의 군포가 헛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군사로 보복해 그 위엄을 보이소서"라 주장했지만, 강희맹은 "겨울 산중에서 무리하다가 실패하면 국경을 불안케 하고 국고만 허비할까 두렵습니다"라 했다. 서제겸은 "그러나 지금 치지 않으면 봄에 더 크게 쳐들어올 것입니다"라며 성삼문을 거들었다. 인종은 잠시 고민하다 "부친께서 고르게 세운 보법의 성과를 보여야 백성이 스스로 군역을 의심치 않는다. 지금 치되 지나치게 깊게 쫓지는 말라"고 하고 윤필상에게 4천의 군을 맡겨 함경도로 보냈다. 이들은 음력 10월 18일부터 11월 2일까지 우디거(兀狄哈) 만주 지역 니마거 부락을 포위해 불사르고 포로와 가축을 회수했다.
이듬해 인종 12년(1492), 체탐사를 통해 건주위 여진이 지난해의 복수를 기획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병조 회의에서 강희맹은 "두 해 연속 정벌은 농사철을 해치고 국고를 다시 비우니, 내년에 준비해도 늦지 않사옵니다"라며 만류했지만, 서제겸은 "그러다 그들이 먼저 압록을 넘어오면 우리 체면과 국경이 무너집니다"라며 강하게 맞섰다. 성삼문은 "백성들이 보법으로 군역을 고르게 져도 전쟁이 없으면 의심하기 마련입니다. 이번에 나가 실전을 보이면 더 굳게 따를 것입니다"라 했다. 결국 인종은 "두 분의 말 모두 옳다. 그러나 백성이 스스로 군역을 감당하는 까닭은 나라가 그들의 삶을 지키기 때문이다. 지금 치되, 깊게 쫓지 말고 국경에서 그치라. 또한 성희안을 북변에 보내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하라"며 출병을 허락했다. 음력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윤필상이 이끈 조선군은 건주위 고산리 강변에서 여진군 500여 명과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고, 여진 추장과 포로들이 다시는 국경을 넘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이 두 차례 원정에서 기존 중앙군 체제의 약점이 드러났다. 문종 때 정비한 중앙군은 5사 체제였지만, 부대별 지휘가 산발적이고 병참이 일관되지 않았다. 인종은 이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중앙군 5사를 해체하고, 이를 통합한 진무소를 신설하여 그 휘하에 7부로 재편해 총 3만의 중앙군을 직속으로 두었다. 진무소는 수도 방어뿐 아니라 국왕 직속의 상비군이 되어 언제든 국경에 파견할 수 있게 했으며, 각 부는 시위도총제에게 직속되어 일원 지휘 체계를 가졌다. 성삼문은 "전하, 이로써 수도는 물론 북변의 변란도 빠르게 대비하게 되어 혼란이 줄 것입니다"라 했다. 그러나 강희맹은 "그러나 이렇게 중앙군을 늘리면 국고가 빠르게 줄고 향리들의 세금 부담이 더 커질까 두렵습니다"라 했으나, 인종은 "병력이 없다면 백성이 납부한 군포도 종잇장일 뿐이다. 변경의 백성을 지킴이 오히려 그들을 편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들의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원정에 나설 때 중앙의 물자를 사용하고 변방의 주민들을 필히 위무하고 감세토록 하는 것이 좋겠소"라 말했다. 이와 함께 인종은 비변부를 상설 설치해 중앙군과 지방군의 지휘 총괄부로 삼았다. 한양도성과 일부 변경 요새 방어만 맡아 하는 것에서 나아가, 중앙군과 지방의 진관군을 모두 관할해 작전계획, 동원계획, 병참까지 계획하게 했다. 다만 이를 통해 군권이 전횡함에 이르러 역모가 일어날 것을 우려한 대신들의 뜻을 따라 진무소와 분리하여 왕명으로만 비변부가 실권을 가지도록 제한하였다.
이와 함께 삼포의 왜인 문제도 조정에서 화두가 되었다. 태종 이후 금상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교린 정책의 하나로 이들에게 조선의 일반 백성조차 못 누리는 면세 등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고초도를 벗어난 어업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하지 말라는 해적질까지 하며 조정의 공마선 약탈, 살인 등등 각종 범죄를 일삼았다. 조선 입장에서는 오지 마라는데도 눌러앉은 왜인들에게 유화책을 베풀었는데도 범죄나 일으키니 배은망덕하게 여겼다. 이에 따라 서거정을 파견하여 왜인들의 혜택을 줄이고 그들을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도록 종용하고 강경책을 펼쳤다. 이와 함께 인종은 왜구 문제를 조기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 훈련원에서 수군을 위한 영선원을 따로 두어 수군 무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대마도에도 체탐사를 파견하여 정세를 주시하도록 했다.
인종 14년, 광종이 국조오례의를 통해 국가 의례를 통일했으나, 왕실 전례와 가례 일부는 구전과 전사(傳寫)에 의존해 혼란이 있었다. 인종은 "왕실의 사사도 나라의 큰 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며 강희맹과 신숙주에게 의궤를 편찬케 했다. 이 의궤는 왕의 혼례, 왕비와 세자 책봉, 상왕 존호 올림 의식 등 왕실 전례를 모두 기록한 것으로, 이후 왕실과 종친의 일탈을 막고 법에 의거한 예를 강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전의 모든 법전과 의궤를 안전히 보관하기 위해 인종은 궁내에 "홍문관"을 설치했다. 홍문관은 광종 시기 체탐사와 격물청에서 올라온 방대한 보고서, 백민훈감과 농서·병서·상서 각종 저술까지 함께 소장하게 되어 국가 운영의 문서 창고가 되었다. 서제겸은 "홍문관에 각 고을에서 올라온 사족들의 청원과 지방 사송 기록까지 보관하면, 훗날 사헌부와 사간원이 감사할 때 큰 준거가 될 것입니다"라 하여 인종은 이를 즉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홍문관은 단순 서고가 아닌 조선 정치·행정·법제의 심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계속된 여진의 북변 약탈 위협에 고심하던 인종 14년에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인 '여자신'이 조정에 직접 와서 성종에게 야춘(현재 훈춘시의 방천지역)과 훈춘(현재 훈춘시의 도심지역)을 위시로 한 남만주(지금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해당) 지역 일대에 대한 개척을 주장하여 이에 인종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여자신과 성준 등에게 명해 연변 일대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장성들을 조사하게 하고 동시에 장성 축조에 대한 계책을 세우도록 했다. 1494년부터 병조, 농서, 격서, 비변부가 수차례 회의를 열어 이 일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강희맹은 "지금 개척하면 향리와 사족이 세금과 부역을 더 거두려 해 백성이 고통받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치를 더 안정시키고 뒤에 하소서"라 했으나, 서제겸은 "개척이 가능하고 옛 장성을 보수하여 변방을 안정케 할 수 있다는 이것은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지금 아니면 여진이 먼저 방비를 견고히 할 것입니다"라 맞섰다. 인종의 세자 윤(훗날 성종)은 회의에서 "아버님, 백성에게 무겁게 하지 않고 작게 시작해 점차 늘리면 후환을 줄일 수 있습니다. 만일 갑자기 많은 농민을 옮기면 흉년과 병으로 도망이 이어질 것입니다"라 조심스레 간했다. 인종은 이를 듣고 "그 말이 옳다. 급히 하지 말고 해마다 조금씩 사민과 군영을 늘려 뿌리를 깊게 하라"라 했다. 이리하여 준비만도 4년에 걸쳐 군량과 종자, 수리 도구를 양창고에 비축하고, 사헌부에서 미리 향리 부정 사례를 조사해 방납의 구실을 막았다. 1496년부터 훈춘 부근에 첫 진을 세웠다. 남이가 맡아 성을 쌓자 여진은 사냥길을 돌려가야 했고, 목축지도 잃었다. 1497년~1500년엔 공험진 부근과 혼춘강 상류까지 넓히며 총 다섯 개 성을 세웠다. 농민들은 군량을 받고 벼를 심었으며, 병사들은 번갈아 농민을 호위하며 여진 기마대를 막았다. 진무소는 7부를 교대로 보내 주둔해 군사 숙련을 유지했고, 비변부는 병참을 전담해 군량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다. 이 사업은 단순 정벌이 아니라 병영과 농지를 함께 세워 국경선을 밀어붙이는 대공사였다. 이는 한편으로 북변의 새로운 영토와 조선의 야심을 키울 수 있는 장소였으나, 그만큼 많은 자원과 인력이 소모되었으며, 북쪽으로는 여진을 오히려 결집시키는 등의 폐단이 있었다. 관리들 중 몇몇과 성균관 유생 중 일부는 이 일을 동북5성이 실효가 없어 철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조정과 인종은 이 사업에 많은 재원을 이미 투자하여 이를 물리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아직 그 효과를 보지 못했다며 길게 두고 보고 실효 여부를 가리기로 하였다.
인종 말기, 국정은 이미 경국대전과 집형규례, 동북 5성 개척까지 거치며 상당히 정비되었으나, 전문 관청 체계는 여전히 육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인종은 "농사와 상업, 교육, 과학, 정보까지 확장된 관청과 업무를 육조만으로는 세밀히 다스릴 수 없다. 각 전문 관청으로 두어 이를 전담하게 하면 백성의 삶과 국정의 뿌리가 더 깊어질 것이다"라 하였다. 권계는 "지방에서 농법과 상공업, 교육이 서로 얽히는 문제를 이제 농서, 상서, 교서를 따로 두어 맡게 하면 여러 관청에서 맡은 일이 통합되어 능률이 높아질 것입니다"라 하였고, 정광필은 "허나 관원이 늘면 군량과 학교 운영비까지 나누느라 국고가 빠듯할 것입니다. 먼저 소규모로 두고 서서히 늘리소서"라 신중히 말했다. 1497년부터 인종은 경연과 의정부 회의를 통해 육서 설치를 계속 논의했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인종은 또한 국고를 위해 기존 육조의 관리들이 겸직하도록 하여 비용을 줄이고 방학관 임기를 마친 이들을 각 육서에 부임토록 하여 인력 부담을 줄였으며, 이전에 활용하지 않는 별궁을 개조하여 관청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육서는 육조의 명령을 받아 실행하되, 의정부에 육조와 별도로 이중 보고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농서는 예조가 내린 농법령을 조사·시행하며, 상서는 호조와 공조의 세금·도량형을 구체화해 시장 단속에 나섰다. 교서는 예조의 향교 인사와 연결돼 방학관, 양현고를 관리했다. 사서는 역참·우편과 지방 기록 송달을, 조서는 체탐사 정보와 무역, 외국 기술을 담당했다. 격서는 모든 기술·화학 연구를 총괄했다. 또한, 이들 업무와 중복된 기관은 이 육서와 통합하여 정비했다. 초기에는 각 육서가 서로 업무를 중복해 갈등이 생겼으나, 인종은 "육조가 큰 줄기라면 육서는 그 가지라. 서로 얽히되 줄기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라" 하며, 의정부에서 조율토록 했다.
인종 치세 중후반에 이으러, 국왕은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육서 설치를 위한 더 많은 관리를 뽑고 운영하기 위해 향촌의 실력자뿐 아니라 지방의 유능한 평민 자제도 포용할 수 있는 제도로서 군선향량제를 더욱 정비하였다. 이 제도는 각 고을의 수령과 향교 교관이 협의해 영학(營學) 교육을 받은 지역 인재를 향량(鄕良)으로 추천하면, 왕이 직접 면접하여 하급직부터 관직에 등용하거나 병역·행정에 우선 배정하는 방식이다. 다만 인종은 “향리나 사족이 향량을 사적으로 조작하면 제도가 백성을 해치는 칼이 된다”고 보고, 군선향량제 대상자은 방학관 또는 육교 교관의 추천을 받도록 개정하였다. 이로써 일부 고을에선 향량 추천을 위한 영학(營學)에서 평가가 열렸으며, 격서와 수치원에서 파견된 인력이 물리적 기초문제나 산술 계산을 직접 출제하기도 했다. 서제겸은 “방학관의 추천을 받는 향량은 예치에 맞고 뛰어나다는 인재를 뽑는다는 평이 많사옵니다”라며 이를 전폭 지원하였다. 이와 함께 군선향랑을 보조하기위해 인종은 교서의 운영을 통해 방학관 파견 제도를 제도화하였다. 방학관은 육교에서 수학한 중급 관원 가운데 선발되었으며, 각 도의 영학(營學)에 파견되어 일정한 기일 동안 영학(營學) 수준의 육학 과정을 지역민에게 교육하였다. 영학(營學)은 지방 교육기관으로, 기존에는 이식 삼학을 가르치는 일종의 향교이었으나, 인종은 "백성이 농사만 알아선 나라가 서지 않는다. 셈, 병서, 법리, 물상에 밝은 백성이 많아야 진정 부강하다"며, 영학(營學)에서도 육학을 의무적으로 개설하게 했다. 경상우도, 충청좌도, 경기북도에 순차적으로 방학관이 파견되었으며, 시범 운영 결과 향리들의 세무 회계 오류 감소, 농서의 개량법 보급 증가, 방역과 의약 문서 활용 능력 향상 등 실질적 효과가 드러났다. 성삼문은 "이제 지방민이 관청 문서를 읽고 답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이는 백성이 깨인 것이옵니다"라 경연에서 보고하였다. 방학관과 향량 추천을 둘러싼 향리·사족의 농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교서에서는 각 고을의 영학(營學) 운영 일지를 홍문관에 정기 제출토록 했다. 격서에서는 방학관이 각 지역에서 실시한 교육과정 보고서를 수합해 분석하고, 문제가 발견될 경우 교서에 재심을 요구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향교의 학전 운영과 연계하여, 영학(營學) 성적 우수자에 대한 장학 지원을 양현고에서 확대함으로써, 추천과정에서 경제력이나 지연(地緣)이 아닌 실력이 기준이 되도록 정비되었다.
1498년(인종 18년), 인종은 동북 5성 개척과 육서 체계 완성 등의 대규모 사업으로 국정을 쉼 없이 밀어붙인 끝에 몸에 크게 탈이 났다. 수년간의 과로와 병약 체질로 인해 기침과 시력저하, 식욕 부진이 잦았으며, 홍문관 보고를 직접 열람하다가 종종 자리에 눕기도 했다. 성삼문과 강희맹은 "전하께서 경국의 기틀을 이미 세우셨사오니, 이제는 몸을 보전하시고 백성이 근심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잡다한 일은 관리들이 맡아 하겠나이다."라 누차 간청했다. 그러나 인종은 "아직 완전히 뿌리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더 버티면 장차 더 위태로워질 지도 모르겠다, 이제 국정을 세자에게 맡겨야겠다"고 결단했다. 세자 윤(훗날 성종)은 이미 소년 시절부터 광종과 인종에게 철저히 정치와 육학을 배워왔다. 대리청정을 시작하기 전에도 농서의 치수 보고서, 격서의 기기 보고서, 군선향량제 추천 명단을 직접 읽고 검토할 만큼 실무 감각이 뛰어났다. 이에 나아가 명나라에서 건너 온 각종 서적을 찾아 읽으며 견문을 크게 넓혀 인종이 자랑스러워 했다. 대리청정이 공식 선포되자 성삼문은 "전하께서 기르신 이 아이는 단순히 유학만 아는 선비가 아니옵니다. 이미 육학의 관리들과 농업, 병정, 상공을 두루 익혔으니 조정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라 했고, 서제겸과 권계는 "그러나 아직 젊어 신료들의 간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저희가 더 굳게 보필하겠습니다"라 했다. 세자는 대신들과 회의에서 언제나 온화하되 날카롭게 핵심을 짚었다. 교서가 방학관 보고서에서 향리 부정을 눈치 채지 못했을 때, 그는 조용히 "향리들의 수치를 대조해 보셨습니까? 그 기록에서 이미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라 지적해 성희안를 놀라게 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맡자마자 크게 제도를 흔들지 않았다. 그는 "아버님께서 평생 세우신 것을 제가 조급히 움직여 백성이 흔들리게 할까 두렵습니다"라 하며 기존 육서, 진무소, 비변부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세밀한 부분에서 점진적으로 바꿔 갔다. 농서의 치수 사업을 일부 완화해 세 부담을 덜게 하고, 상서에서 지방 상인 세금 보고를 6개월 단위로 바꾸어 상권에 숨통을 틔웠다. 사헌부가 삼포 잔류 왜인들의 내통 혐의를 조사하자, 성종은 "증거 없이 강압하면 무역 자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백성의 생계와도 직결되니 신중히 조사하십시오"라 지시했다. 강희맹은 이를 두고 "세자께서도 성군이 될 것이라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 시기 인종의 병세는 이미 회복 불능 상태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가 조정과 관료들과 자연스럽게 협력하며 신뢰를 쌓도록 한 것은 훗날 성종 치세를 부드럽게 이어가게 한 결정적 포석이 되었다.
시작된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마무리하고 속편 격인 대전속록 및 왕실 의례 지침서인 조선왕실의궤까지 반포함으로써, 조선 왕조 통치의 법적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특히 《경국대전》의 완성은 조선 전기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평가되며,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 체제가 국가 전반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규범 체계의 확립을 의미했다. 아울러 인종은 형벌과 재판 절차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집형규례》라는 형법/사법 전문 절차서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는 각 지방에서 수령이나 향리가 자의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토호의 영향력 아래 판결을 굽게 하는 폐단을 막고자 한 조치였다. 실제로 인종 9년 신숙주·서제겸 등의 주도로 편찬된 집형규례는 기존 법조문과 판례를 정리하여 전국에 통일된 형사 재판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법치 행정의 일관성을 높였다. 행정 조직 면에서도 기록과 지식의 체계적 관리가 강조되었다. 인종은 홍문관(奎章閣)이라는 왕립도서관을 설치하여 국정 관련 문서와 서적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게 했다. 홍문관은 단순한 서고를 넘어, 각종 해외 서적과 과학 관측 자료(예컨대 조정에서 측정한 기상 데이터와 보고서)를 축적하는 정보의 허브로 기능하였다. 이로써 국정 운영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일元화하고 축적하여, 정책 결정의 기반을 강화하고 후대 왕들이 참조할 수 있는 국가적 아카이브가 마련되었다. 한편 인재 등용 제도에도 혁신이 가해졌다. 인종은 중앙과 기존 양반 가문 출신 위주로 관료가 충원되는 관행을 보완하고자 군선향량제라는 지역 인재 등용책을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각 지방의 향촌에서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면, 우선 일정 기관에서 학식과 능력을 검증하고(이른바 영학(營學)에서의 시험), 이를 통과한 자를 국왕이 친히 면접하여 관직에 채용하는 절차였다. 이를 통해 과거(科擧)만으로 발탁되기 어려웠던 지방의 유능한 인물이 등용되어 관료층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다만 기존 양반 관료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이렇게 뽑힌 인재는 처음에는 중요 요직(청요직)에 임명될 수 없도록 제한하고, 후에 과거 시험을 다시 거쳐야 높은 자리로 승진할 수 있게 하는 절충책을 두었다. 이와 같은 장치는 새로운 인재를 포용하면서도 기득권 세력의 불안을 누그러뜨려 개혁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려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 결과 “추천과정에서 경제력이나 지연(地緣)이 아닌 실력이 기준이 되도록” 여러 보완장치가 마련되었으며, 지방에서 올라온 신진 관료들은 중앙 정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인종 치세의 행정 개혁은 이처럼 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공정한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한편, 인적 쇄신을 도모하여 왕권과 신권의 새로운 균형을 꾀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인종이 전문화된 관학(官學) 체계를 정립하였다 점이다. 그는 육학으로 지정된 각 학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육교(六校), 즉 여섯 개의 국립 특수 학교를 설립하였다. 구체적으로, 외국어는 사역원, 의학은 혜민원, 법학은 순도원, 수학은 수치원, 천문학은 관상원, 물리학은 궁리원에서 각각 담당하여 전문 인재를 양성하고 행정 실무에도 기여하도록 개편되었다. 이들 육교는 기존의 성균관·향교 등이 유교 경전에 집중했던 한계를 보완하여, 과학기술 및 실용 지식을 갖춘 인재를 체계적으로 길러내는 기관이었다. 초기에는 각 분야의 관청을 겸한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인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해당 분야에 능통한 관원들이 교수로 임명되어 교과과정을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좌의정 강희맹과 같은 인물은 농학 서적 편찬과 수치원(數値院, 수학 교육 기관)의 교습 제도 확립을 주도하였고, 서제겸 등은 법학·상공업 부문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등 관료 학자들이 육교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관학에는 현실 문제 해결에 필요한 지식들이 대거 도입되었으며, 문신들의 재교육도 함께 이루어졌다. 인종은 젊은 관료들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 업무를 쉬고 학문 연마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장려하여, 재능 있는 문신들이 새로운 학문에 대해 연구하도록 독려하였다. 실제 정책 실행에 필요한 전문성을 관료 스스로 함양하게 하는 효과를 노렸다. 이 같은 교육 혁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되 실용 정신을 중시하던 인종 치세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물론 초창기에는 일부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젊은 세대가 전통 경학보다 잡학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종은 “세종께서도 학문을 넓히신 공덕이 있었다”며 이러한 비판을 일축하고, 다양한 지식이 백성의 삶과 국가 부강에 기여하는 바를 역설하였다. 그는 유교 경전 교육과 실용학문 육성을 모두 장려함으로써 도덕과학(道德과 科學)의 조화를 추구했고, 백성의 생활 개선과 국가 경쟁력 제고라는 명분으로 설득하여 반대론을 누그러뜨렸다. 그 결과 인종 후반기에 이르면 새로 설치된 육교 출신 인재들이 조정과 지방에 투입되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유생과 농민들까지도 실용 지식의 가치에 눈뜨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조선 사회의 지적 지평을 넓히고 향후 기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성과로 평가된다.
인종 치세의 교육 개혁은 기초 교육의 확대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는 어린 아이들부터 읽고 쓸 줄 알아야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진다고 보고, 각 지방 향촌에 소교(小校)라는 초등 교육 기관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향촌의 아동들도 한문과 언문(훈민정음)으로 글자를 깨우치고, 산술과 기초적인 지식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소교의 교과에는 유교 윤리의 초보적인 소양과 함께 농업 기술 등 실생활에 유익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단순한 글공부를 넘어 생업과 실천적 지식을 함께 가르쳤다. 요컨대, 과거 일부 양반 자제들만이 사설 서당에서 배우던 것을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하여 평민층 어린이까지 교육의 범주에 포섭한 것이다. 이 조치는 장기적으로 볼 때 농민 계층의 의식 성장과 지역 사회의 역량 강화로 이어져, 지방 자치와 향촌 사회의 통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소교 출신 청년들이 군역 부과나 세금 계산에서 향리에게 속지 않고 대응했다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성삼문은 “백성이 스스로 글과 계산을 알게 되면 부역과 군역에서 속지 않게 된다”고 하여 아동 교육의 의미를 찬양하였는데, 이는 곧 인종이 추구한 “백성 계몽을 통한 민본 정치”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교육 기관을 크게 늘리면서 현실적인 난제가 따랐다. 가장 큰 문제는 전문 교원의 부족이었다. 새로 세운 육교와 급증한 소교를 모두 감당하기엔 당시 유학자나 전문가 인력풀이 턱없이 모자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종은 방학관(放學官)이라는 임시 교관 제도를 고안했다. 방학관은 중앙의 숙련된 학자나 관료를 일정 기간 지방에 파견하여 순회 강습을 맡긴 직책으로, 일종의 순회 교수 제도였다. 예컨대, 서울의 관상원에서 천문을 연구하던 관리가 방학관으로 뽑혀 지방을 돌며 천문학 기초와 역법을 가르치고, 혜민원 소속 의관이 지방에 내려가 위생·의약 지식을 전수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분야별 전문가들이 돌아가며 각 지역 소교나 향교에서 육학 과목들을 가르치도록 함으로써, 교사 인력의 지역 편중 문제를 완화하고 새 교육 과정의 지방 안착을 도왔다. 방학관의 노력으로 “향리들의 세무 회계 오류 감소, 농법 개량 보급, 방역과 의약 문서 활용 능력 향상 등 실질적 효과”가 빠르게 나타났으며, 지방 사족들도 새 학문에 눈뜬 인재들을 쉽게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인종은 궁극적으로 육교에서 전문 교원을 충분히 양성하면 방학관 제도를 서서히 축소·폐지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후일 성종 대에 이르러 일부 실현된다. 물론 방학관 파견과 향촌 소교 설립을 둘러싸고는 지방 기득권층의 미묘한 반발도 있었다. 일부 향리와 토호들은 평민들이 글을 배우고 세상 이치를 알면 자기들의 권위를 흔들까 염려하여 소극적으로 협조하거나, 방학관의 추천 과정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이에 인종은 교서청(敎署廳, 교육 업무 관청)을 통해 각 고을에서 시행한 교육 일지를 홍문관에 정기적으로 제출하게 하고, 격서청(格署廳, 연구 업무 관청)으로 하여금 방학관의 보고서를 분석하도록 하는 등 감시와 평가 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양현고의 장학 재원을 활용하여 영학(營學)(地方學校)의 성적 우수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지방에서 학업 실력이 뛰어난 자가 사회적 배경에 관계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다. 이런 장치들은 지방 교육 혁신이 부패하거나 왜곡되지 않고 정착되도록 한 장치로서, 인종의 세심한 정책 운영 능력을 보여준다.
인종은 나라의 문치(文治)를 다지는 한편 무비(武備) 확충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는 즉위 후 수도 방위 체제를 재편하여 군권을 국왕 아래 일원화하고자 하였다. 종전까지 한양의 중앙군은 세조 이래 오위(五衛)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인종은 이를 발전시켜 진무소(鎭撫所) 휘하에 7개의 군부(軍部)를 신설하고 중앙군 약 2만 명을 재편성하였다. 7부로 개편된 진무소 체제는 국왕 친위 부대를 중심으로 오위 제대의 지휘 체계를 일신한 것으로, 군사 훈련과 편제가 더욱 표준화·체계화되었다. 인종은 유사시 효과적인 전략 수립을 위해 비변부(元帥府)를 설치하였다. 비변부는 평상시에는 중앙군의 총사령부로서 작동하며, 전시에는 모든 군영을 지휘 통솔하는 군사 작전 본부 역할을 하도록 한 기구다. 이곳에서는 가상 적국을 상정한 동원 계획, 작전 계획, 병참 계획 등을 수립하여 평시에 대비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오늘날의 합동참모본부나 총참모부에 견줄 만한 선진적인 것이었다. 비변부의 신설로 종래 병조나 의흥위 등이 담당하던 전략기획 기능이 전문화되었고, 문무 관료를 망라한 군령 체계가 구축되어, 유사시 신속한 대응 준비가 가능해졌다. 해군력의 독자적 강화도 중요한 개혁 중 하나였다. 인종은 수군 훈련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수군훈련원인 영선원을 신설하여, 기존 훈련원(종합 군사 교육 기관)으로부터 수군 부문을 분리·독립시켰다. 이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던 해방(海防)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연해 지역의 왜구 침입과 교역 통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전문 해군 인력 양성이 목적이었다. 수군훈련원은 이후 조선 수군의 전력 증강과 전술 개발의 요람이 되었으며, 훗날 임진왜란 시기의 수군 선전에도 이런 기초 작업이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종의 군제 개혁 과정에서 새로운 기구 신설에 따른 저항도 없지 않았다. 중앙군 재편 시 몇몇 기존 오위 대장들은 자신의 지휘권 축소를 우려했고, 일부 공신 출신 장군들은 “굳이 평시부터 군사 조직을 뒤흔들 필요가 있는가”라며 불만을 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인종은 강화된 군권이 반역과 외침을 예방하는 보험임을 강조하며 설득하였다. 선왕 광종이 공신 및 종친 세력을 견제하고자 호패법·보법을 강행했던 맥을 이어, 인종 역시 군권을 철저히 국가에 예속시킴으로써 왕권의 안보 기반을 다지려 한 것이다. 특히 부왕 대에 이미 군공으로 세력을 키운 무신들이 있었던 만큼, 인종은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예우하면서 실권은 새 군제 속에서 제도적으로 분산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또한 그는 젊은 무관들을 육성하여 군제 운영의 중추에 배치하고, 진무소와 비변부의 운영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는 등 개혁의 실효를 높였다. 그 결과 인종 말년 조정은 “2만의 중앙군이 체계화되어 수도를 지키니, 군권이 임금의 울타리가 되었다”고 평할 정도로, 군사 체제가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말기에 이르러 두만강 북쪽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여, 함경도 북방 국경을 넘어 새로운 거점을 건설하는 대담한 사업을 추진했다. 구체적으로 1490년대 후반부터 두만강을 넘어 훈춘(琿春)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간하고 요새를 쌓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인종은 이 신개척지를 동북 5성이라 명명하였다. 이는 세종 대의 4군 6진 개척 이후 조선이 처음으로 기존 국경선 밖으로 영토를 확장한 사례로서 그 의의가 크다. 세종 시기 김종서 등이 두만강 유역 육진을 설치해 국경을 확정지은 지 약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인종은 그 너머로 개척민을 이주시켜 경작지와 진영(鎭營)을 건설함으로써 여진 세력에 대한 선제적 대응과 국토 확장을 동시에 이루려 한 것이다. 이 정책 배경에는 15세기 후반 여진족 일부가 함경도 변경을 침탈하거나 조공을 어기는 사례가 발생하자, 아예 그 근거지 인근까지 조선의 행정력과 군사력을 미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인종은 “거친 땅을 일구어 백성의 삶터로 만들고, 변경을 굳건히 하라”는 뜻을 내려 직접 개척 사업을 독려하였고, 호조와 병조에서는 개척민 모집, 식량 운송, 성채 축성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동북 5성에는 전략적 요충지마다 진(鎭)과 보(堡) 형태의 요새가 구축되고 수백 호의 주민이 이주하였다. 개간된 평야에는 군사 농장이 운영되어 주둔 병력의 식량을 자급하게 하는 한편, 일부 곡물을 인근 본토로 반출하여 국가 재정에도 보탬이 되었다. 이 정책은 고려 예종 때 윤관 장군이 여진 정벌 후 동북면에 9성을 쌓았다가 방어상의 어려움으로 1년 만에 반환한 사건과 대조를 보이는데, 인종은 이러한 전례를 참작하여 지속 가능하고 항구적인 식민 정책을 펴고자 노력했다. 그는 성을 쌓은 뒤 곧바로 철수했던 고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선정된 거점 5곳 각각에 충분한 수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성곽을 보강했으며, 민가의 안전을 위해 성내에 창고와 우물, 방어시설을 갖추게 했다. 또한 개척지 방면으로의 행정구역 확대를 위해 일부 지역은 함경도의 기존 군현을 승격·분할하여 신설 고을로 편제하는 조치를 취하고, 이들 신설 동북 5성에는 유능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여진족 회유책도 병행되었다. 인종은 토착 여진 추장들에게 조선 관작을 주고 무역 특권을 부여하거나, 일부 여진 주민들을 조선의 군호(軍戶)로 받아들여 보호하는 대신 세금을 부과하는 등 포용과 군사 압박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유연한 접근 덕분에 큰 전투 없이 조선은 해당 지역에 안착할 수 있었고, 명나라 또한 두만강 이북의 분쟁을 조선이 알아서 정리한 것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다. 오히려 인종은 명 조정에 사신을 보내 여진 토벌과 개척 성과를 보고하고, 그간 명에 조공로를 침범하던 야인들을 소탕한 점을 부각하여 은근히 지지를 얻어내기도 했다. 물론 동북 5성 개척 사업은 막대한 경비와 행정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변경에 성을 쌓고 지키는 데 재정 부담이 상당하였고, 추운 기후와 물자 수송의 어려움으로 개척민들의 고생도 컸다. 조정 내 일부 신하들은 “만 리가 넘는 변방 땅을 억지로 지키려다 자칫 국력만 소모할 우려가 있다”거나 “명나라가 혹 이 문제로 의심을 품을 수 있다”는 걱정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종의 의지는 확고했고, 그는 “개척은 한때의 비용이 들지만 얻는 땅은 영원히 우리 자손의 터전이 된다”고 답하며 반대론을 눌렀다. 실제로 인종 말기까지 동북 5성 가운데 몇 곳은 아직 안정화 단계에 있었으나, 개척은 순조롭게 진척되어 후임 왕인 성종 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후대의 평가에 따르면 인종의 북방 개척은 조선이 한반도 경계선을 넘어선 유일한 영토 확장 시도였으며, 비록 그 영역이 광범위하지는 않았으나 국방 상 요충 확보와 자부심 고취에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멀고 방어선이 늘어난 만큼 이후로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고, 실제로 인종 사후에도 해당 지역 방어에 긴장이 요구되었다. 그럼에도 인종의 결단과 실행력은 조선의 북진 정책을 현실로 만들어, “태조 이성계 이래 언감생심 못 넘보던 두만강 밖에 성을 쌓았다”는 찬사를 들으며 국가 발전의 지평을 넓혔다.
인종 치세의 대외 관계는 한마디로 명에 대한 존화(尊華)와 일본에 대한 강온 병행 정책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는 부왕의 유훈을 따라 대명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 힘썼다. 인종은 명과의 사대 외교를 행함에 있어서도 실리를 추구하여, 학문적 교류와 선진 문물의 도입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에 조선 사신단은 명으로부터 천문·지리·병법·의서 등 다양한 서적과 기기류를 들여왔고, 인종은 이를 번역·연구하도록 하여 국내 학문 발전에 활용했다. 또한 명의 변경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포로 송환 문제, 무역상의 분쟁 등을 원만히 해결하여 국격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인종 후반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왜구 토벌 정보를 공유하거나, 여진 정세에 대한 첩보를 제공하는 등 주도적으로 조공 이상의 협력 관계를 모색하기도 했다. 이는 일방적인 조공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안정에 기여하는 자주적 파트너로서 조선의 위상을 보여주려는 포석으로 이해된다. 반면, 일본 및 여진족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균형 있게 구사하였다. 여진에 대해서는 앞서 살핀 동북 5성 개척과 토벌로 국경 안전을 도모한 것이 주효했다. 한편, 왜구 문제와 관련해서는 인종도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는 주로 삼포(三浦)라 불린 세 항구의 일본인 거주지 관리에 대한 것이었다. 세종 이후 개항한 경상도 부산포, 제포(창원 진해), 염포(울산) 등지에는 왜인 무역상들이 왕래하며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등 조선 일반 백성보다도 우대받아 왔다. 그럼에도 일부 왜인들은 무역 범위를 벗어난 밀무역과 어로(漁撈) 남획, 심지어 해적 행위까지 자행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조정에서 금하며, 조선의 공물선마저 노략질하는 등 배은망덕한 범죄를 일삼았기에,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인종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명신 서거정 등을 파견하여 일본인들의 과도한 특혜를 축소하고 범법 행위를 엄벌하는 조치를 취하게 했다. 구체적으로는 삼포 왜관에 체류할 수 있는 인원과 선박 수를 제한하고, 무기 소지를 금하며, 조선의 어업 한계선을 넘어 활동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강화하였다. 또한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에 대해서는 추방이나 처형 등 강경 대처를 하여, 법의 권위를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삼포 통제 정책은 일본측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인종은 군사를 동원하여서라도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단호함을 과시했다. 실제로 1490년대 후반 몇 차례 삼포의 왜인들이 소요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조선 수군과 지방 관아의 협력으로 미연에 진압되었다. 인종은 “무역 통제가 지나치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점도 인지하여, 한편으로는 대마도주와의 외교 채널을 가동해 왜상들을 회유하고, 통상의 창구는 열어 두되 기강은 잡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인종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세자 윤(훗날 성종)의 역할이다. 인종 말년 세자 윤은 사실상 부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살필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삼포 문제에서도 세자는 신중론을 펼쳤다. 사헌부에서 삼포에 남아있던 왜인들의 간첩 혐의를 조사할 때 세자는 “증거 없이 강압하면 무역 자체가 끊길 것이니 신중히 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자칫 무고한 일본인까지 억압하여 교역이 단절되고 경남 해안 주민들의 생계가 타격받는 사태를 막고자 한 것이다. 세자의 이런 지휘에 대해 노대신 강희맹은 “세자께서도 성군(聖君)이 되실 것”이라며 탄복했다고 전하며, 이는 인종의 대외 정책이 단순히 강경一변이 아닌, 무역과 국민경제를 염두에 둔 균형 감각 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인종 치세의 대외 관계는 “큰 나라엔 예를 다하되, 이웃 나라의 무뢰함은 용납치 않는다”는 원칙 아래 전개되었다. 그의 외교 정책은 조선을 국제 사회에서 체면을 지키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왜구와 여진에 대한 적극적 조치로 국민들의 안보 불안을 해소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종기 법제의 정비는 단순히 책 속의 법률 완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 통치 방식의 변화를 동반했다. 인종은 법 시행을 소홀히 하는 관리를 엄중 문책하고,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법령을 쉬운 언어로 풀이한 해심지언(解心之言) 등의 교화를 반포하여 법률 준수를 독려하였다. 또한 경국대전 반포 후 초기에는 융통성 없는 법 집행으로 민원을 낳는 경우도 있어, 이를 조정에서 사례별로 검토하며 보완해 나갔다. 이처럼 성문화된 법과 탄력적 운영의 조화를 꾀한 덕분에, 법제 정비의 효과는 비교적 부드럽게 사회에 녹아들었다. 법치 행정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왕권의 임의적 개입을 줄이고 관료제의 자율성을 높이는 측면도 있었는데, 인종은 이를 예측 가능한 통치 질서의 수립으로 인식하고 용인하였다. 결국 인종 시대의 법제 확립은 조선 왕조 통치 구조를 성숙시키는 토대가 되었고, 후대의 붕당 정치 시기에도 경국대전의 대의는 국정 운영의 최종 기준점 노릇을 하게 된다.
육서의 설치와 운영은 인종 치세의 국가 역량 강화 정책의 정점으로 볼 수 있다. 전근대 왕조에서 정보 수집, 경제 정책, 학술 연구를 이렇게 세분화된 관청에 맡긴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인종이 얼마나 전문성과 데이터에 기반한 통치를 지향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새로운 관청을 여럿 신설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기존 육조의 권한 조정 문제를 야기했다. 일부 육조 판서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축소될까 염려하여 반대했으며, 특히 공조에서는 “공조가 할 일을 별도로 나누면 관청만 비대해진다”고 불만을 표시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결과적으로 육서 각 부에는 문관 대신뿐만 아니라 무관이나 기술직 출신도 발탁하여 인재 등용 폭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왔다. 결국 시간이 흐르며 육서 제도는 정착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조정 대신들도 육서의 보고 없이 정책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만큼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는 조선 통치가 경험과 직관뿐 아니라 자료와 전문지식에 입각하여 이루어지는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인종의 치세는 이렇듯 다방면에서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냈으나, 동시에 몇 가지 한계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우선, 그의 개혁 정책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속도도 빨랐던 탓에, 일부는 제도적으로 완전히 뿌리내리기 전에 그의 퇴장으로 중단되거나 조정이 필요했다. 대표적인 예가 육서 체제와 동북 5성 개척 사업이다. 육서의 각 기관들은 인종 재위 중에 기틀을 잡았지만, 실제 관료 조직에 완전히 녹아들어 자율적으로 기능하기에는 시일이 더 필요했다. 예컨대 격서의 과학 연구는 인종의 특별 관심 덕에 활발했으나, 후대 왕들이 그만큼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유지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교육 정책 역시 그러했다. 소교와 방학관 제도를 통해 초석을 다졌지만, 전 국민 교육이라는 이상을 현실화하려면 막대한 재정 투입과 지속적 노력이 요구되었다. 인종 말년에 방학관 파견이 점차 줄어든 것은 전문 교원 양성으로 인한 자연감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재정 압박에 따른 축소 측면도 있었다. 새로운 학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자 학전만으로는 재원이 부족해졌고, 양현고 역시 관리의 부정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성종 등이 이를 보완하여 맥을 이었지만, 인종이 좀 더 장수하여 여유롭게 확대, 정비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 뒤따른다. 또한 재정과 행정력의 한계 역시 인종 개혁의 그늘이었다. 교육, 군사, 개척, 연구 등에 동시에 힘쓰면서 국고의 부담은 상당했으며, 관리들의 업무 과중도 높았다. 실제로 인종 후반에는 곳곳에서 “각사에 일이 너무 많아 관원이 피로하다”는 하소연이 상언되었고, 1498년 인종 본인도 과로로 쓰러질 정도였다. 이는 곧 한 사람의 성군(聖君)에 지나치게 의존한 개혁 드라이브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인종 자신도 이를 깨닫고 건강이 여의치 않자 미련 없이 물러났지만, 그의 조급했던 행보로 인해 주변 신료들은 언제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내몰렸던 셈이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은 “인종이 만약 재위 기간을 두 배로 늘여 좀 더 여유 있게 개혁을 실천했다면, 관료제의 자연스러운 학습과 수용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인 평가일 수 있다. 인종으로서는 부왕 대 치열한 권력 투쟁과 사회 혼란을 겪은 뒤라, 시간을 지체하면 보수 반동이 올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고, 또 본인의 체질이 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성과를 내려 한 면이 있다. 실제로 그는 “더 버티면 장차 더 위태로워질지도 모르겠다”고 토로하며 개혁의 속도 조절과 퇴진을 결단했는데, 이는 몸은 비록 따르지 못하지만 끝까지 큰 뜻을 포기하지 않은 군주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결론적으로, 인종은 짧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을 한층 부강하고 정비된 나라로 변모시켰다. 부왕으로부터 이어받은 중앙집권 개혁을 제도적으로 완성하고, 신진 세력과 새로운 지식을 대담히 수용하여 국가 역량을 극대화하려 했던 왕으로서, 그의 치적은 조선 역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겼다. 동시에 과도한 개혁 추진으로 인한 피로와 본인의 건강 악화, 그리고 미처 펼치지 못하고 남겨둔 몇 가지 숙제들은 성군이라도 인간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인종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막고 개혁의 불씨를 다음 세대로 이양하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이는 “한 사람이 천하를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다. 다만 바른 길을 닦아 후인에게 맡길 뿐”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구현한 행보였다. 그의 개혁은 세자 성종에게로 이어져 큰 틀에서 유지되었고, 조선 왕조는 인종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후일 고·헌종 시대의 번영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후대의 역사평론가들은 인종을 일컬어 “몸은 약했으나 국가는 건강하게 만든 임금”이라 평한다. 인종 치세의 경험은 지도자의 비전과 실행력, 그리고 제때의 용퇴까지도 모두 국익의 일부임을 잘 보여준 사례로서, 오늘날까지도 역사 속 귀감으로 남아 있다.
인종은 정순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나 정치적 긴장 속에서 성장했으나, 개인적으로는 다정하고 섬세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왕비 안혜왕후는 명석하고 온화하여, 인종과 성격이 잘 맞았다. 궁중 기록에는 인종이 하루 일정이 끝나면 반드시 안혜왕후와 차를 마시며 국정을 비롯해 시사(時事)와 가정사를 함께 의논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안혜왕후는 정치에는 깊이 개입하지 않았지만, 왕세자 윤(훗날 성종)과 그 동생들을 교육하는 일에는 늘 정성을 다해 인종을 크게 돕기도 했다. 궁녀들의 기록에는 인종이 "오늘 하루 궁리원에서 본 신기한 장치를 왕비께 설명드렸더니 한참을 웃으시더라"라고 말하며 뿌듯해 했다는 구절이 실려 있다. 이는 두 사람이 관심사가 비슷했으며 학문과 궁정 문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교감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인종은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특히 장자인 세자 윤(성종)을 각별히 아꼈다. 그는 광종과 자신이 걸어온 개혁의 길을 윤이 이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직접 국정 문서와 농서, 격서의 연구 결과를 보여주며 "이것이 너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세자 윤도 매우 총명하여, 일찍부터 인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대신들이 "세자께서 이미 군선향량제 명단을 직접 열람하고 향리 부정을 지적했다"고 전하자 인종은 미소를 지으며 "저 아이가 이제 나보다 더 깊이 보는구나"라 했다. 아버지로서의 인종은 엄격하면서도 자식의 재능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동생들에게는 비교적 부드러운 아버지였다. 별궁에서 왕자들이 활쏘기와 격구를 연습하면, 인종은 가끔 옆에서 바라보다가 "몸은 놀리되 마음은 게으르지 말라"라며 다정히 권유했다고 한다.
인종은 조선 군주 가운데 드물게 기계 장치와 공학, 그리고 물리적 원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물시계와 거중기 모형을 만지며 시간을 보낸 기록이 있고, 즉위 후에도 격서나 기기청에서 새 기계를 가져오면 자신이 먼저 시연을 보았다. 또한 가끔 시와 음률에도 탐닉해, 궁중에 들어온 명나라의 신악기나 류큐에서 헌상한 피리를 직접 불어보기도 했다. 안혜왕후가 이 모습을 보고 "대체 임금께서 악공 흉내까지 내십니까"라며 웃으면, 인종은 "임금이라도 마음은 백성과 같아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향과 다례(茶禮)에도 취미가 있어, 홍문관 서고에 쌓인 각지에서 들어온 차와 향료를 직접 시험했다. 문관들이 경연에서 어려운 보고를 올린 뒤, 인종이 잠시 숨을 고르며 "오늘은 청해 향을 피우라. 마음을 가다듬고 듣자"고 한 기록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