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y634 (토론 | 기여) (→반도) |
Destiny634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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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2024년 10월 / 다당제 | '''다음 선거''': 2024년 10월 / 다당제 | ||
'''수도''': 도쿄도 | |||
'''인구''': 약 2억 8362만명 | '''인구''': 약 2억 8362만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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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2027년 / 일당제 | '''다음 선거''': 2027년 / 일당제 | ||
'''수도''': 난징시 | |||
'''인구''': 약 10억 6100만명 | '''인구''': 약 10억 6100만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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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2028년 / 다당제 | '''다음 선거''': 2028년 / 다당제 | ||
'''수도''': 코슈부 | |||
'''인구''': 약 8600만명 | '''인구''': 약 8600만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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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2027년 이전 / 일당제 | '''다음 선거''': 2027년 이전 / 일당제 | ||
'''수도''': 신징특별시 | |||
'''인구''': 약 1억 2015만명 | '''인구''': 약 1억 2015만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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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2028년 / 다당제 | '''다음 선거''': 2028년 / 다당제 | ||
'''수도''': 울란바토르 | |||
'''인구''': 약 1,380만명 | '''인구''': 약 1,380만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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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선거 없음 | '''다음 선거''': 선거 없음 | ||
'''수도''': 타이위안시 | |||
'''인구''': 약 7,444만명 | '''인구''': 약 7,444만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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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선거 없음 | '''다음 선거''': 선거 없음 | ||
'''수도''': 시닝시 | |||
'''인구''': 3,710만명 | '''인구''': 3,710만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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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 선거 없음 | '''다음 선거''': 선거 없음 | ||
'''수도''': 라싸시 | |||
'''인구''': 850만 명 | '''인구''': 850만 명 |
2024년 7월 9일 (화) 17:08 판
개요
신질서의 황혼 세계관의 동아시아의 등장국가 및 세력 일람.
주요국
대일본제국

武士道とは死ぬことと見つけたり
무사도란 것은 죽는 것이다.
천황: 나루히토
내각총리대신: 기시다 후미오
집권 정당/이념: 자유민주당 / 보수주의, 준군국주의
다음 선거: 2024년 10월 / 다당제
수도: 도쿄도
인구: 약 2억 8362만명
대일본제국엔 해가 지는 법이 없었고, 적어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습니다. 지구상의 나라 중 5번째로 많은 단일 인구를 거느리고 있는 대일본제국은 세계에서 2번째의 군사, 산업 기지, 그리고 해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승전과 하와이 식민지로 대표되는 태평양의 소유로, 일본은 유럽과 중국에 뒤처지고 폐쇄된 국가에서 바다와 육지의 지배자로 변모했습니다. 하지만 전후로 계속해서 복잡해지는 행정과 경제는 제국을 악화시켰고, 쇼와 말년의 아시아 민중의 분노는 제국의 신질서의 황혼을 이끌었습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은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20년의 자유가 있었지만, 아시아인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일본 국민은 계속해서 제국이 이상을 이어가고 이제는 자비가 아닌 "지배"를 배신자들에게 행할 것을 강력히 원했으며, 정치는 이에 답했습니다. 제국은 국민적 요구와 국제적 외교 사이에서 조절하고, 가장 좋은 방향을 이끌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이 실패할 경우, 이 제국은 파멸의 길로 들어설수 있습니다. |
일본제국은 일본 열도, 조선, 대만을 본토로 하여 하와이, 태평양 제도, 중국의 하이난섬과 칭다오, 웨이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통치하는 세계 제2의 대국이다. 이 외에도 만주국과 광동국, 몽골을 아직도 사실상의 식민지로서 경영하고 있으며 중국을 묶어두어 아시아 역내의 강력한 패권을 수호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예고된 승리 이래로 일본은 번영을 맞이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지배를 흔들려는 움직임이 보였으나, 일본은 동남아인과 중국인의 모든 저항을 분쇄한 채로 70년대 제국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그러나 이것을 부순 80년대의 연쇄적인 아시아 혁명은 일본인에게 있어 맛본 적이 없던 패배를 조금이나바 보게 했고 초강대국의 패권을 내려놓게 했다. 이때 국민적 반발을 의식해 대정익찬회가 무너졌고 제한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수도 및 최대 도시는 도쿄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명예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우경화의 경향이 강하다. 일단 승전을 했기도 했고, 비록 90년대에 일본이 이끌던 대동아공영권의 식민 체제가 무너졌음에도 냉전 기간동안 과실을 누렸고 그 과실이 지금까지도 일본의 경제를 지탱하기에 군국주의, 전체주의, 집단주의의 잔재가 매우 짙게 깔려있다. 또한 파벌정치도 매우 심한 수준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매우 예외적인 경우[1]가 아니라면 세습가문 출신이 아니고서는 총리에 오르는것 자체가 어렵다. 이러한 귀족정이나 다름없는 체제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나올만도 하겠지만 정작 국민들 다수도 혼란이 싫어서 정치는 높은 분들이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 자민당을 투표한다.
다만 문민 과두정도 사실 군부와 결탁하여 이루어질 정도로 군부의 영향이 짙게 남았다. 공식적으로 1947년 도조 히데키의 실각 이후로 군인총리 시대는 종식이 되었지만 일본이라는 국가가 메이지 유신부터 대미전쟁 승리까지 이어간 길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수 있었던 군은 전후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물론 평화가 이어지면서 서서히 힘을 잃었고 90년대 민주화 이후로는 어느정도는 군의 정치개입 문제가 정상화됐다. 하지만 천황의 통수권을 근거로 천황을 앞세워 지속적 영향력을 뻗치고 있으며 자민당이 군부의 시책을 거스르면 비공식적으로 대본영으로 총리를 호출한다던가 하여 압박하는 풍경도 벌어지고 있다. 군부는 자민당의 주요 파벌과 굳게 맺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총리를 엎어버릴 능력도 있다. 실제로 자민당의 지지율이 낮아지던 시기 아베 - 후쿠다 - 아소의 연이은 교체는 군부가 움직인 것이었다.
아시아주의 역시 상당하다. 일본 위정자들의 생각은 타민족 비하보다는 타 아시아 인종에 대한 선민의식으로 점철되어있다. 다만 중국인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와 멸시를 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문화적으로는 아시아 최강국이며 추축국의 승리로 세계적으로 문화의 쇠퇴가 이루어진 와중에서 강력한 문화강국이 되었다. 종전과 군부의 쇠퇴로 70년대 이후로 자연스럽게 자유화가 된 일본은 아니메를 비롯해 게임, 음악이 새롭게 발전했다. 아니메의 경우 보수적인 색채가 강력하고 서양 문화가 철퇴를 맞아 일본 고유문화에 주력한 형태가 됐다.
일본우월주의 및 국가주의에 기반한 아시아주의 성행에서도 알수 있듯 서구에 대한 반감은 상당히 팽배하다. 친미 성향을 보일 경우 비국민 취급하는 모습의 잔재가 지금도 남아있는 상황이며 언어 역시 외래어가 거의 쓰이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1997년 이후로는 미국과 적대 관계를 청산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태평양에서 양대 해군력을 가진 잠재적 적성국으로 있으며, 양국은 2018년엔 무역 전쟁을 벌였던바도 있다.
일본은 90년대 경제적 침체를 겪은 후 늦에서 나오지 못했다. 2010년대 들어 다시금 군국주의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으며,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이나 아직도 파시즘인 이탈리아보다는 낫지만 점점 상태가 악화 중이다. 기시다 총리가 물러터졌다는 이유로 인기를 잃었고 2024년에 총리가 바뀔 예정이다. 전직 장수 총리이자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아베 신조, 지공회의 이시바 시게루, 그리고 고노 다로가 각축할 전망. 총재선 이후 있을 2024년 제국의회 총선거도 예정된 가운데 이 선거가 일본 민주주의의 마지막 불꽃이 될 것이라고 우려되고 있다.
일본의 보수 정계는 다시금 군국주의와 천황제 파시즘에 주목했다. 출산율 하락, 양극화 등 가면 갈수록 커져가는 제국 내의 사회적 문제는 과거 공영권 왕관의 보석이었던 중국을 다시금 굴복시킴으로서 한 번에 해결될수도 있다. 군부는 이를 기회로 보고 있으며, 아마 세이와의 아베는 군부의 강력한 후원자일 것이다. 일본은 중국을 될수 있다면 "평화로운" 방식으로 굴복시키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2억8천만 "일본 신민"은 새로운 제국의 전략에서 조국의 훌륭한 방패가 될 것이다.
반도
반도(半島, はんとう)
일본의 반도 영토. 인구는 약 8,000만명이다. 1910년까지는 독자적인 나라를 구성하였으나 이후엔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으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전했으므로 독립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여 그 대가로 참정권과 의무교육 등 혜택을 주었고, 1952년부터는 기타가라후토, 다이완과 함께 내지가 되어 보통선거권이 부여되게 되었으며 도가 폐지되고 도도부현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후 냉전 시대엔 일본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조선도 주요도시의 성장과 토지개혁 등 사회적으로 일신되게 되었다. 경제성장에 따라 점차로 반도에서 일본에 대한 반발심은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만 되어도 서서히 일본화가 진행되었다.현재는 반도인들은 사실상 일본인으로 완전히[2] 동화되었다. 조선어 화자는 개마고원 등지의 오지 중에서도 오지까지 들어가야만 찾아볼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창씨개명은 모든 조선인이 하고 있으며 이제 완전히 정착됐다.
한편 일본은 반도 내에서 조선인 비중을 줄여 동화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조선인을 농촌의 빈곤자들을 중심으로 열도, 가라후토, 만주국 등으로 지속적으로 보내고[3] 열도에 들어오는 조선인 수만큼 다시 열도인을 반도로 보냄으로서 채우는 방식으로 대규모 인구이동을 시킨 끝에 반도의 순혈 조선계 비중이 크게 낮아졌고 열도 - 반도의 통합도 강화되었다. 현재 반도 내에서 대체로 조선계:일본계:일선혼혈의 비중은 6:2:2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당연히 반대급부로 열도에도 상당한 수의 조선인이 살며 특히나 오사카는 인구 20%가 조선인이다. 재만 일본인의 상당수도 조선인이다. 가라후토엔 무려 30%가 조선인이다. 이를 국민융합사업(国民融合事業)이라고 공식적으로 칭했다.
1952년 이래로 반도인은 완전히 일본 국민으로서 모든 정치적 권리를 누릴수 있게 됐다. 다만 사회적으로는 2등 신민 취급하거나 토인이라고 비하하는 풍조가 존재한다. 그것도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현재는 많이 사라지게 되기는 했으나 열도에 거주하는 경우 반도 출신은 편견이나 무의식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여전하다. 참정권은 있지만 반도 인구가 일본 인구의 35%를 차지하는데도 총리는 오사카에서 나고자라 반만 조선인인 쓰키야마 아키히로(이명박) 단 한명이 유일하게 나와 사실상 극도의 파벌 과두정치 하에서 조선인에게는 기회가 제한되어있다.
문화적으로는 일본 문화에 사실상 잠식되었으나 아직도 열도와 상당 부분 이질적이다. 식문화도 역시 일식과 일본식 식탁, 젓가락으로만 먹는 일본식 식사문화 등이 정착했지만 조선의 전통음식인 곰탕, 국밥, 김치 등은 아직도 전래되어 내려오며 심지어 이러한 조선 음식들은 열도로도 퍼져서 일식의 하나로 변형됐다. 일본에서 ××현 특산품 같은 비슷한 취급을 하는 것이 조선 음식이다. 언어적으로도 조선어가 완전히 말살되지는 않았고 화자가 나름 있다. 신토를 뿌리내리는 것은 지속적으로 보급한 탓에 어느정도는 되었지만, 그건 사회적 합의에 가까우며 조선인 중에 천황을 정말 신이라고 생각하거나 진심으로 신사에 가서 제신에게 참배하는 등 마음까지 신토화시키지는 못했다. 버젓이 교회도 곳곳에 있는 지경이니..
상당한 규모의 역사 왜곡과 국민 세뇌가 이뤄졌다. 단군이 곧 스사노오이며, 조선은 중국에 의해 갈라졌던 일본 민족의 분파였다는 일선동조론 및 동조동근론, 만선사관, 임나일본부설 역시 진실, 조선의 당파성론과 타율성론, 정체성론도 정설로서 받아들여지는 중. 삼국시대는 만선사관으로 조선사에서 빠지는 고구려를 대신해 야마토 정권을 넣었으며, 한일합방은 "동서통일"이다. 만선사관에 따라 고구려와 발해는 만주의 역사고, 신라-고려-조선과 이후 다이호 율령 이후 일본이 존재하던 시기(701-1910)는 "동서국시대"라고 부른다.[4]
여담으로, 조선사의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 당했다. 이순신이 리노이에 무쿠게오미가 된 식.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7년 충칭 함락 때 같이 산화하였고 이후엔 이승만이 1948년에 미국에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선언하면서 신 임시정부를 세우지만 1965년에 이승만이 사망한 후 와해되었다.
대만
타이완(台湾, たいわん)
일본의 남방 영토. 인구는 2천만명, 최대 도시는 다이호쿠부.
반도와는 달리 독자적인 역사나 문명을 가진 적이 없었던만큼 소수의 원주민들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일본에 동화되어있는 편이다. 다이완에서는 중국어는 사어이고 대만어 역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창씨개명은 원래 허가제로서 무분별하게 하지 못하게 했으나 1948년 2차 창씨개명 때 대만인들도 강제로 창씨개명된다.
대체로 반도의 세이슈(제주도), 열도의 오키나와와 함께 일본의 3대 해양 관광지로 꼽힌다. 그러나 세이슈나 오키나와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인 정경을 자랑하는지라 서양인들도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업도 다이완 섬의 주요 예산 수급처이다.
중화민국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밝은 해는 산 너머로 지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눈 들어 천 리를 바라보려
다시 누각을 한 층 더 올라가네
주석: 시진핑
행정원장: 후춘화
집권 정당/이념: 국민당 / 파시즘, 민족주의
다음 선거: 2027년 / 일당제
수도: 난징시
인구: 약 10억 6100만명
동방의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대지, 중국이 존재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중국의 역사는 그 무한한 가능성의 땅을 지배하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수천년 동안, 중화의 전사들은 수 많은 왕들과 황제들의 가슴 속에 야망 또는 공포를 불어넣었습니다. 중화 민족에게 패권은 필연이었습니다. 19세기, 잔혹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갈갈이 찢긴 중국의 모습에서 중국의 전성기는 끝났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같은 동방의 소국 일본에게도 패배하고, 중국은 한없는 추락의 길을 향할 뿐이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중일전쟁은 10년간 수천만의 중국인의 목숨울 앗아갔으며, 1947년 충칭에서 마지막 중화민족의 독립 정권인 국민정부는 최후를 맞았고, 천궁보의 난징 정권은 이를 대체했습니다. 1980년대에 있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은 분명히 중국에게 기회로 다가왔지만, 중국은 일본의 위협을 떨쳐낼 용기가 없었고 아직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일본의 영향 하에 있습니다. 이제 2세기 전의 일이 되어버린 중국의 전성기가 다시 올지는, 시간만이 알 것입니다. |
중국대륙에 위치한 국가이자 현 동아시아 제2의 국가. 과거 장제스의 국민정권을 "대체"했기 때문에 정부의 적통은 중일전쟁 당시 1940년에 세워진 왕징웨이 정권이 시작이며, 1980년대까지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이후 1989년 개혁파의 관료 장쩌민이 집권하게 되면서 일본의 내정 간섭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더해서 호국군 때문에 군벌이 엎어지고 티베트를 핌공해 제압해서 영토를 어느정도는 수복을 했다.
하지만 광동국이나 만주국 등을 되찾지 못했으며 칭다오, 하이난 등 일본의 대륙 식민지도 여전히 건재함은 물론이고 호국군 사태를 기점으로 중국에서 분할당한 산서국이나 신강국 등 몇 중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포위와 견제에 둘러싸인 상태로 사실상 일본을 상대로 굴종하기에 바쁜 한계를 안고 있는 정부이다.
수도는 난징, 최대도시는 상하이이다. 상하이 도시는 일본 식민제국의 걸작으로서 중국의 보석 역할을 하며, 현재도 일본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 있다. 경제적으로 기술력이 참담한 중국의 산업에는 아직도 일본이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의 중국의 기술 독립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또한 재중 일본인은 상하이, 톈진 등 대도시에 조계지를 이루고 상류층의 삶을 누린다.
중국은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정치가 돌아간다. 입법원은 절대적으로 국민당의 우위에 있고 국민당은 중국의 현재 고난의 최대 원인인 일본을 애써 무시한 채 중국인이 단결하면 잘 살수 있다는 무의미한 상투적 외침을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2013년 집권한 시진핑은 한층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진핑은 중국인의 빈곤을 해결하고 교육을 진흥해 중국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포부를 보였으며, 겉으로는 일본과 친선하면서도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 분명히 시진핑의 개혁안은 성공적이었으며 중국에서의 아사자는 근 10년간 명백하게 줄었다. 시진핑은 이제 중국의 진정할 독립을 누리고 있다. 일본이 다시금 군국주의에 빠져 중국으로 침공해 온다면, 분명히 중국인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광동국

南方の三つの真珠
남방의 세 진주
대통령: 레이가치우
총리: 하유광
집권 정당/이념: 국민당 / 아시아주의, 보수주의
다음 선거: 2028년 / 다당제
수도: 코슈부
인구: 약 8600만명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행정장관 체제 종료 후에도 일본의 경제적 부속국 역할을 하는 광동은 지정학적인 사고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광동의 국민과 정부 모두 정체성 위기를 겪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모리타 아키오와 소니의 훌륭한 지도로 인해, 광동은 실패한 만주국 실험을 대체하여 일본 식민통치의 좋은 예로 거듭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동인들은 광동이라는 정치적 망상에 시간이 지나며 애착을 가지져 중국을 잊게 되었고, 난징이나 도쿄의 뜻에 굴복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광동은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두 문화 가운데서 태어난 이 광동은 자신들에게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준 주인. 일본을 선택했습니다. |
1950년 자이바츠에 의해 중국에서 경제특구 및 기업국가로서 분리되었던 광동국. 만주국 실험의 연장선상으로 세워졌으며, 초반에는 아예 일본인 행정장관의 통치를 받는 일본 부속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광동의 세 진주를 빛나게 했고, 아마 광동은 신질서로부터 가장 큰 가호를 받은 국가이다.
그 이면의 광동에서는 스즈키 통치 시기에 일본인 이민자와 주진 계급 이외의 중국인들은 닭장 아파트에 살며 광동의 산업 실험을 위해 굴려지는 Npc와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도시의 화려한 도심 경관과 비교되는 낮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일본 헌병대는 경무처를 무시하고 광동의 치안을 관할하면서 주민을 감시했다.
이것이 바뀐 것은 역설적이게도 광동국의 1차 호황의 끝을 상징했던 야스다 위기로부터 시작됐다. 스즈키 데이이치의 몰락, 그리고 후지쯔 마츠시타 마사하루와의 각축에서 승리한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가 행정장관이 되었다. 모리타는 리카싱을 정부수반으로 삼고 주진에게 전면적으로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사회에도 주진의 권리를 보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계 주민들의 처우도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하고 1970년대 일본이 다시금 부상할 때, 가장 괴상한 실험국가 광동은 광동은 모리타의 지도 아래에서 희망을 보았고, 실리콘 밸리는 그것이 모든 광동인에게 행복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신질서의 황혼이 찾아오던 1989년, 모리타는 스스로 광동의 권력이 광동인의 직선으로 성립되어야 한다며 광동의 민주화를 선언하고 행정장관에서 물러나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본디 없어졌어야 할 이 지정학적 사고는 소니와 후지쯔의 능력으로 현재까지 살아남아 왔다. 오늘날 광동에서 (광동인이라는 정체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리타는 국부의 취급을 받고 있다.
민주화 이후로 광동국은 뿌리인 중국과 종주국인 일본 사이, 두 세계 사이에서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광동의 미래에 도움이 될지 토론하는 양당이 들어섰다. 광동인들은 많은 경우 뿌리 대신 고통도 주었지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한 종주국을 선택하였고 오늘날 광동은 일본의 "혈맹"으로서 굳건히 서 있다. 혈맹이라는 무게는, 아마 일본이 중국을 밣기로 결정했을 때 최전선에 설수 있는 용기를 요구할 것이다.
수도는 코슈(광저우), 현 지도자는 레이가치우.
대만주제국

五族協和
오족협화
황제: 원력제
국무총리대신: 류샤오보
집권 정당/이념: 만주국 협화회 / 아시아주의, 군국주의
다음 선거: 2027년 이전 / 일당제
수도: 신징특별시
인구: 약 1억 2015만명
만주국은 국가 지위를 수립한 이래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일본에 의존해 왔습니다. 관동군은 북쪽으로는 러시아군, 서쪽으로는 불온한 중국에 맞서 국경을 지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관료집단은 국가의 중요한 기관이자 국체의 심장으로서 경제를 관장합니다. 바다 건너 기업들은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산업 국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이 선의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관동군과 만주 총무부는 만주의 정치사회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무원은 총무부의 '인애' 없이는 거의 무력합니다. 만교(만주 산업 주식회사)가 지배하는 기업들은 이윤을 명분으로 만주의 법을 스스로에 대해 왜곡하는 순진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현재 상태는 평형 상태입니다. 무언가를 바꾸려면 무언가를 주어야 합니다. |
만주사변으로 관동군이 설립한 일본의 괴뢰국. 명목상 제국이나 주권이 전혀 없는 나라이다. 관동군은 공영권이 무너지고도 만주에 여전히 주둔하며, 만주 총무부를 통해서 내정에 간섭했으며 만주국 유일 정당인 협화회를 내세워서 민주주의 요구를 철저히 짓밣았다. 만주는 아직도 일당제와 일본에 의한 경제적 수탈, 산업현장의 학대에 신음하고 있다.
만주국은 대동아의 공장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일본 최대의 산업 기반으로서 신징, 하얼빈을 위시로 한 만주국의 도시는 완전한 식민 도시로서 설계되었다. 평안해 보이는 신징 황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공해와 과로에 시달리는 한족 노동자들의 모습,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쥐어짜내는 총무부와 청나라계 황실이 군림하고 있다. 만주국은 그 자체로 강철과 용광로로 가득찬 지옥이나 다름없다.
현재 일본의 혈맹국이나 형제국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실상은 사실상 일본의 외지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다. 육군, 특히 관동군의 영지로서 만주국은 관동군이 러시아와 반항적인 중국을 경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거점이며, 한족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만주족에 이어 제국 네 최하위 서열을 이루고 있다.
광동국의 실리콘밸리 실험은 성공하였으나, 만주국은 대표적인 실패작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명과 암이 있다면 암에 해당한다. 자이바츠가 주도한 광동과는 다르게, 관동군의 통치 하의 만주국은 광동처럼 중국인 계층의 신분상승 기회를 주거나, 또는 기본권이라도 보장하는 등의 조치조차도 없었다. 일본 본토의 민주화 이후에도 관동군은 관동군 휘하 만주 주둔부대인 "만주군"을 설치하고 간토주를 거점으로 만주 지역을 옥죄었으며, 본국은 이를 내버려두고 있다.
일본인 이민자는 현재 500만 명이 넘고 만주국의 주요 도시로 일본인촌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 이로 인해서 만주에 수십 년을 살아온 일본인들도 자신의 고향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만주의 한족과 섞이는 일은 없이 단지 한족의 피로 만들어진 공업 생산물을 누릴 뿐이다.
수도는 신징(신쿄). 현 황제는 원력제이고 총리는 류샤오보.
기타
대몽고국

주석: 롭샹나밍 강투무르
집권 정당/이념: 중앙당 / 국수주의, 보수주의
다음 선거: 2028년 / 다당제
수도: 울란바토르
인구: 약 1,380만명
1936년 몽골군 정부 및 1939년 출범한 몽강연합자치정부의 후신으로, 1942년 3월 다이고 작전을 통해 몰락한 소련의 극동지방을 침공한 일본에 의해서 몽골 인민공화국이 붕괴, 그곳을 모두 흡수하고 덤으로 일본군이 투바까지 가서 투바도 넘겨주게 된 통일 몽골이다. 1942년 5월 데므치그돈로브가 대몽고국을 선포하고 칼간에서 울란바토르로 대몽고국 정부를 수립했다.
역시 일본의 괴뢰국 상태로, 몽골은 만주국과 함께 만몽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만주국보다 그 지위가 낮은 수준이다. 다만 역설적으로 일본에게 있어 몽골은 만주보다는 지정학적 가치가 낮아서 일본, 정확히는 관동군의 간섭에서 어느정도는 자유로웠다. 굳이 일본인 이주민이 유치되지도 않았으며 적당한 자치권을 가진 채로 현재에 내려온다. 더해서 다당제도 제한적으로나마 성사되었다. 그래도 관동군의 몽골 주둔 및 몽고 총무부의 내정간섭은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적으로는 데므치그돈로브와 두구얼쑤룽 부자가 50년이나 세습 통치를 하다가 1991년에 민주화를 이루어졌다. 다만 대놓고 친일 성향인 몽골 중앙당이 일본에게 푸시되는 상황이라 완전 민주주의라 볼수는 없다.
한족의 분리주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으로부터 화북지방의 일부 영토를 다시 전리품으로 받으면서 현재 몽골은 중국인이 인구의 약 40%이다. 이들 중국인은 중국 귀속을 원하지 몽고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덕왕이 좀 동화정책을 펼친다든지 정상적으로 대했다면 몰라도, 이전 역사의 앙갚음인지 한족을 철저하게 탄압해버려서 민심은 시궁창이 됐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관동군의 관심이 만주 안정화로 옮겨간 사이에 분리주의 한족 반군이 내몽고에서 준동하는 통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에 몽골 정부는 한족 부역자 + 몽골군으로 이루어진 특무대와 일본군 공중지원을 내세워 게릴라들을 갈아버리는 것으로 대응 중이며 내몽고의 치안은 상당히 불안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중국의 대몽 영항력 행사 기도로 이어져, 몽고는 일중관계 균열의 전장이 되어가고 있다. 관동군의 장교들은 제국의 신성한 무기로 몽골군을 무장시켜 줘도 해결되지 못하는 게릴라 문제를 몽고의 일본에 대한 궁극적 불충의 근거로 보고 있고, 이것은 이후 관동군의 전면개입이나 주권 상실로 이어질 수가 있다.
산서국

주석: 푸천
집권 정당/이념: 염계군벌 / 국수주의, 전제주의
다음 선거: 선거 없음
수도: 타이위안시
인구: 약 7,444만명
일본이 호국군 전쟁 이후 중화민국의 독립수비대이던 산시성 진수행정공서를 중국에서 떼내고 세운 국가. 1968년 정식 수립됐고 초대 주석에는 푸쭤이가 올랐었다. 1974년 푸쭤이가 죽자 아들 푸헝[1]이 직을 고스란히 승계하여 1997년까지 통치하면서 사실상 푸씨 왕국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인권이나 생활 수준도 중국보다도 낮다. 헌법도 없고 사실상 군벌국가/세습왕조로서 굴러간다.
수도는 타이위안. 현임 주석은 푸쭤이의 손자이자 24세에 산서 권좌에 올라 현재까지 집권 중인 푸헝의 차남 푸천[2].
아시아태평양공영기구 회원국이지만 푸쭤이부터가 중일전쟁 말기까지 일본군을 갈다가 겨우 항복한 케이스기 때문에 이곳 산서의 주인 푸씨 가문도 일본에게 썩 순종적인 스탠스는 아니다. 일본도 일본대로 산서의 7천만이나 되는 주민을 착취해대며 일본에 대한 여론만 악화시키고, 원조로 연명하는 주제에 자존심은 높은 산서를 대단히 불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견제의 주요 기지로 기능하는 중이다.
서하국

주석: 마샤오취안
집권 정당/이념: 마가군벌, 청해군벌 / 전제주의
다음 선거: 선거 없음
수도: 시닝시
인구: 3,710만명
칭하이성, 감숙성, 후이족 거주지 일대에 위치해 있는 일본의 괴뢰국. 중일전쟁 종료 후 서북삼마이던 마부팡과 마훙빈은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며, 마부팡은 칭하이성 일대에서 마훙빈은 감숙성 일대에 자신의 군벌집단을 창설했다. 1955년에 마훙빈의 삼남 마둔징이 감숙성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츠지 마사노부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제압했고, 감숙성에다 세이호쿠 호멘군(서북 방면군)을 만들었다.
호국군 전쟁 때 일본에 의해서 중국 분할의 일환으로 분리되어서 산서국에 이은 2번째 군벌국가로 거듭났다. 서북군벌 중 마가군벌이 지배 세력으로 두었고, 츠지의 서북방면군은 과거 마훙빈의 땅이었던 자신의 군정부 영역을 마부팡에게 부여했으며 마부팡은 초대 주석에 취임했다.
마부팡이 1975년 죽자 장남 마지위안[3]이 세습받아 2대 주석이자 서북왕이 되었다. 그는 2012년까지 37년이나 이곳 서하를 통치한다. 현재 주석은 마지위안의 장남인 마샤오취안. 여기도 산서국처럼 군벌 세습국가로서 굴러가는 중이며, 과거에 있었던 츠지 마사노부의 개입 덕에 상당히 일본에 순종적이다.
수도는 시닝.
티베트 왕국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집권 정당/이념: 티베트 왕당파 / 전제주의
다음 선거: 선거 없음
수도: 라싸시
인구: 850만 명
티베트 왕국은 달라이 라마 통치 하에 있는 신정국가, 전제군주국이다. 1912년 신해혁명 때 독립선포하였으며 중화민국과 갈등을 벌이던 중 1946년 중일전쟁 말기에 중국이 완전히 분열되고 멸망해가자 군대를 보내 쓰촨성 일대를 주워먹었으며 일본과 협정을 맺어 독립국 지위를 공인받고 대동아공영권의 준회원국으로서 합류했다.
쓰촨성을 차지한 티베트는 그곳을 완전히 편입하기 위하여 한족에 대한 인종 청소를 자행하는데 이때 대게르만국의 슬라브족 및 유대인 절멸을 모방했다. 수많은 중국인이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았더라도 티베트 불교 신앙, 달라이 라마 참배 등 티베트 전통문화를 강요하며 거부할 경우 총살했다. 이러한 잔혹한 티베트의 정책은 일본과 공영권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되어 쓰촨성의 한족은 대부분 죽거나 강제로 티베트인의 외양을 갖출 것을 요구받았다.
1990년 어느정도 힘을 갖춘 중국에게 침공을 당해 다시 쓰촨성은 뺏겼고, 티베트 고원으로 축소되었다. 중국은 티베트를 승인하지 않고 무장테러단체 취급을 하며 중화민국전도에 포함시키는 중이다. 일본도 티베트 문제에 관심이 크게는 없어서 동인도(자유인도 정부)를 통해 무너지지 못하게만 관리하고 있다.
수도는 라싸이며 현 달라이 라마는 텐진 갸초또는 달라이 라마 1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