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민국 38):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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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제헌 총선.png|섬네일|오른쪽|베트남의 제헌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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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7일에 아시아 전선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9월 13일에 공식적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한편 일본이 항복하자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 세력인 베트민(비엣민)의 봉기로 일본의 괴뢰정권이였던 베트남 제국이 붕괴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와 동시에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혁명군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남부에는 영국이 연합국의 자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전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의 처칠 수상도 베트남의 독립이 인도의 독립운동을 고무시킬까봐 우려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국부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중국대로 베트남을 위성국화하여 전후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프랑스 중 어느 한 곳도 포기 할 수 없었기에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하노이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9,200km는 떨어져있는 프랑스와 다르게 광시, 운남과 바로 붙어있던 중국에게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더 유리한 판국이였다. 결국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 국민당의 응우옌 뚜엉 탐을 총리로 하는 [[월남중국군정부 (민국 38)|자신들의 점령지]]에 [[베트남 공산당 (민국 38)|베트민]]과 [[베트남 국민당 (민국 38)|비엣꾸옥]]의 연립정권을 출범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으로 독립시겼는데 프랑스는 결국 1951년에 <ref>왜 국공내전이 진행중일때 중국을 치지 않았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공산당과 내전중이던 중국에 전쟁을 선포해 중국이 베트남으로 일부 군대를 빼야 했다면 공산군이 내전에서 더 유리해지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었고 만약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해 중국이 공산화 될시 베트남으로 공산군이 밀려들어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ref> 영국 신탁통치 이후 프랑스의 괴뢰국이였던 베트남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을 침공하지만 결과는 철저하게 발려버리고 (베트남 내전) 오히려 자신들의 영역이였던 남베트남 (베트남국)을 내주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붕괴를 초래하며 끝이 났다.  
1945년 8월 27일에 아시아 전선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9월 13일에 공식적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한편 일본이 항복하자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 세력인 베트민(비엣민)의 봉기로 일본의 괴뢰정권이였던 베트남 제국이 붕괴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와 동시에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혁명군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남부에는 영국이 연합국의 자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전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의 처칠 수상도 베트남의 독립이 인도의 독립운동을 고무시킬까봐 우려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국부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중국대로 베트남을 위성국화하여 전후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프랑스 중 어느 한 곳도 포기 할 수 없었기에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하노이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9,200km는 떨어져있는 프랑스와 다르게 광시, 운남과 바로 붙어있던 중국에게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더 유리한 판국이였다. 결국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 국민당의 응우옌 뚜엉 탐을 총리로 하는 [[월남중국군정부 (민국 38)|자신들의 점령지]]에 [[베트남 공산당 (민국 38)|베트민]]과 [[베트남 국민당 (민국 38)|비엣꾸옥]]의 연립정권을 출범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으로 독립시겼는데 프랑스는 결국 1951년에 <ref>왜 국공내전이 진행중일때 중국을 치지 않았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공산당과 내전중이던 중국에 전쟁을 선포해 중국이 베트남으로 일부 군대를 빼야 했다면 공산군이 내전에서 더 유리해지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었고 만약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해 중국이 공산화 될시 베트남으로 공산군이 밀려들어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ref> 영국 신탁통치 이후 프랑스의 괴뢰국이였던 베트남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을 침공하지만 결과는 철저하게 발려버리고 (베트남 내전) 오히려 자신들의 영역이였던 남베트남 (베트남국)을 내주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붕괴를 초래하며 끝이 났다.  
===제1공화국===
===제1공화국과 베트남 내전===
[[파일:1950년대 베트남.png|섬네일|왼쪽|50년대 베트남의 거리]]
[[파일:1950년대 베트남.png|섬네일|왼쪽|50년대 베트남의 거리]]
초대 총선이 치뤄지고 총통으로는 베트남 국민당 소속의 부홍카인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생 베트남 공화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근본적으로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공산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당시 오랜 대립으로 사이가 최악이였고 베트남 공산당이 우위에 위치해 있던 상황에서 중국 군정이 들어서자 군정당국이 어거지로 연립정권을 구성하도록 강요 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정당국에 의해 화합이 어거지로 이루어졌어도 중국에서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나자 베트남의 국공연립정권을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당은 실질적인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고 공산당은 중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연립정권을 유지하려고 애썻고 여기에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합리적으로 베트남 내부사정을 파악하여 공산당을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저찌 연립정권은 유지되었고 문맹률 저하 정책과 더불어서 경공업 개발 정책을 실시하면서 점차 국가가 안정화되고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초대 총선이 치뤄지고 총통으로는 베트남 국민당 소속의 부홍카인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생 베트남 공화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근본적으로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공산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당시 오랜 대립으로 사이가 최악이였고 베트남 공산당이 우위에 위치해 있던 상황에서 중국 군정이 들어서자 군정당국이 어거지로 연립정권을 구성하도록 강요 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정당국에 의해 화합이 어거지로 이루어졌어도 중국에서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나자 베트남의 국공연립정권을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당은 실질적인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고 공산당은 중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연립정권을 유지하려고 애썻고 여기에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합리적으로 베트남 내부사정을 파악하여 공산당을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저찌 연립정권은 유지되었고 문맹률 저하 정책과 더불어서 경공업 개발 정책을 실시하면서 점차 국가가 안정화되고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총통인 부홍카인이 비교적 보수적인 국민당 소속이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베트남 기준으로는 꽤나 진보적인 정책인 여성 참정권을 허용허고 의회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안착시키기도 했으며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등의 근대화 정책을 취한 결과 연립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상당히 올라가 나름대로 안정화 되기 시작했으나 이에 큰 반감을 가진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베트남 군부였다. 당시 베트남 군부는 구 베트민이나 친국민당 세력등 친정부 성햐의 세력도 존재했으나 약 60 ~ 70% 가량이 구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 출신이였기 때문에 매우 반공적이였고 당연하게도 현 정부에 가장 불만이 많은 세력이였다.
 
==각주==
==각주==

2021년 8월 16일 (월) 17:25 판

[ 국가 목록 ]
[ 세계관 소개 ]
[ 문서 목록 ]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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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Việt Nam Cộng Hòa
국기 국장
Tổ quốc - Công minh - Liêm chính
조국, 공정, 청렴
상징
국가 공민에게 고함 [1]
국화
연꽃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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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펼치기 · 접기 ]
  • 해방 1945년 9월 13일
  • 월남중국군정부 1945년 9월 21일 ~ 1949년 3월 2일
  • 제1공화국 수립 1949년 3월 2일
  • 2.11 쿠데타 1962년 2월 11일
  • 베트남 내전 1962년 3월 28일 ~ 1963년 11월 9일
  • 제2공화국 수립 1964년 5월 18일
  • 4.16 개혁운동 1985년 4월 16일 ~ 1985년 10월 26일
  • 제3공화국 수립 1985년 11월 7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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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하노이
최대 도시
사이공
면적
331,212㎢
내수면 비율
1.3%
접경국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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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98,168,829명
밀도
276명/km2
민족 구성
킨족 85.7%, 소수민족 14.3%
출산율
1.79명
평균 수명
75.32세
기대 수명
75.32세
공용어
베트남어
공용 문자
쯔꾸옥응으
종교
국교
없음
분포
불교 70%, 기독교 8.3%, 까오다이교 등의 신흥종교 6.2%, 기타 0.1%
군대
베트남 공화국 국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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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급 행정구
58개 성, 5개 중앙직할시
제2급 행정구
707개 성도, 시, 군
제3급 행정구
10,614개 구, 시, 군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이원집정부제, 단원제, 단일국가, 공화제, 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35위 (결함있는 민주주의)
국가 원수 (총통)
응우옌푸쫑
정부
요인
부총통
당티응옥틴
총리
응우옌쑤언푹
국회의장
응우옌티낌응언
대법원장
응우옌안잡
여당
베트남 공산당
신임과 보완
민주당 (베트남)
원내 야당
베트남 국민당, 공화당 (베트남),
전국소수민족동맹
경제
[ 펼치기 · 접기 ]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GDP
(PPP)
전체 GDP
$7,699억
1인당 GDP
$7,699억
GDP
(명목)
전체 GDP
$2,603억
1인당 GDP
$8,063
무역
수입
$243.5억
수출
$236.7억
외환 보유고
$630억
신용 등급
무디스 Ba3
S&P BB
Fitch BB
화폐
공식 화폐
베트남 동
ISO 4217
VND, đ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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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7 (베트남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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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1950년 수교
UN 가입
1950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123
ccTLD
.vn
국가 코드
704, VNM, VN
전화 코드
+84

개요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 혹은 줄여서 베트남(Việt Nam)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해 있는 공화국이다.
1885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정식으로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6,70년대 내전과, 군부 독재를 겪었다. 그러나 1985년 4.16 민주혁명을 통해 민주화가 되었고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임 국가원수는 총통인 응우옌푸쫑이며 총리는 응우옌쑤언푹이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베트남의 최대도시인 사이공

국가 상징

국명

공식적인 국호는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이며 베트남은 옛 베트남 지역의 국가 남월(南越)에서 유래했으며, 공회국은 정체를 의미한다. 베트남어로 하면 비엣남에 더 가깝다. 그러나 영어 국호인 Vietnam을 음역한 일본어 표기인 베토나무(ベトナム)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이 정식표기가 되었다. 70에서 80년대 까지는 한문 명칭인 월남(越南)이 대중적인 표현이였으나 90년대부터는 사장되었다.

국기


유산과 자유의 기
Lá cờ tự do và di sản
지위 공식 국기
채택일 1949년 1월 1일
근거 법령 <베트남 공화국 국기법>
비율 3:2


베트남의 국기는 유산과 자유의 기이며 비공식 적으로는 황저삼선기라고 불린다. 응우옌 왕조의 10대 군주 타인타이 황제가 고안한 것으로 붉은색 가로 세 줄은 팔괘의 첫 번째인 건(乾)괘를 형상화한 것으로 태극기 좌상단의 건괘와 같다. 황저삼선기의 노란색은 베트남인과 베트남의 토지, 붉은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뜻한다. 그러나 이 깃발의 제작자가 현대 베트남에서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응우옌 왕조의 황제이기 때문에 공산당내 급진파 당원들은 국기 변경을 요구하기도 한다.

국장


유산과 자유의 문장
Lá cục trưởng tự do và di sản
지위 공식 국장
채택일 1949년 1월 1일
사용처
  • 국가기관
  • 국가문서
  • 여권
  • 훈장
  • 해외공관

베트남의 국장는 유산과 자유의 문장이며 비공식적으로는 황저삼선문라고 불린다. 황저삼선기가 들어간 황저삼선문을 두마리의 녹색용이 잡고 있는 형상이다. 한편 민간에서는 정식문장에 들어가는 황저삼선문을 더 자주 사용한다. 민간에서는 국장의 두마리의 용이 국가, 민족, 자유, 독립, 그 이외의 기타등등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공식적으로 밝혀진 의미는 없으며 가장 유력한 의견은 방패는 국가, 국민, 민족등을 의미하고 두마리의 용은 국가나 민족을 보호하는 존재라는 것이 현재 주류의견이다.

국가


공민에게 고함
Tiếng Gọi Công Dân

지위 공식 국가
채택일 1949년 1월 1일

베트남의 국가는 공민에게 고함으로 원곡은 르우흐우프억(Lưu Hữu Phước)이 작사, 작곡한 노래이다 학생행진곡이다.. 제1공화국 시기에는 '청년행진곡'이라는 명칭으로 개사되어 불렸으나 현재는 공민에게 고함으로 바꾸어 부른다.

역사

독립과 건국

베트남의 제헌 국회의원 선거

1945년 8월 27일에 아시아 전선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9월 13일에 공식적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한편 일본이 항복하자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 세력인 베트민(비엣민)의 봉기로 일본의 괴뢰정권이였던 베트남 제국이 붕괴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와 동시에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혁명군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남부에는 영국이 연합국의 자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전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의 처칠 수상도 베트남의 독립이 인도의 독립운동을 고무시킬까봐 우려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국부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중국대로 베트남을 위성국화하여 전후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프랑스 중 어느 한 곳도 포기 할 수 없었기에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하노이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9,200km는 떨어져있는 프랑스와 다르게 광시, 운남과 바로 붙어있던 중국에게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더 유리한 판국이였다. 결국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 국민당의 응우옌 뚜엉 탐을 총리로 하는 자신들의 점령지베트민비엣꾸옥의 연립정권을 출범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으로 독립시겼는데 프랑스는 결국 1951년에 [1] 영국 신탁통치 이후 프랑스의 괴뢰국이였던 베트남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을 침공하지만 결과는 철저하게 발려버리고 (베트남 내전) 오히려 자신들의 영역이였던 남베트남 (베트남국)을 내주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붕괴를 초래하며 끝이 났다.

제1공화국과 베트남 내전

50년대 베트남의 거리

초대 총선이 치뤄지고 총통으로는 베트남 국민당 소속의 부홍카인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생 베트남 공화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근본적으로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공산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당시 오랜 대립으로 사이가 최악이였고 베트남 공산당이 우위에 위치해 있던 상황에서 중국 군정이 들어서자 군정당국이 어거지로 연립정권을 구성하도록 강요 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정당국에 의해 화합이 어거지로 이루어졌어도 중국에서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나자 베트남의 국공연립정권을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당은 실질적인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고 공산당은 중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연립정권을 유지하려고 애썻고 여기에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합리적으로 베트남 내부사정을 파악하여 공산당을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저찌 연립정권은 유지되었고 문맹률 저하 정책과 더불어서 경공업 개발 정책을 실시하면서 점차 국가가 안정화되고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총통인 부홍카인이 비교적 보수적인 국민당 소속이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베트남 기준으로는 꽤나 진보적인 정책인 여성 참정권을 허용허고 의회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안착시키기도 했으며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등의 근대화 정책을 취한 결과 연립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상당히 올라가 나름대로 안정화 되기 시작했으나 이에 큰 반감을 가진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베트남 군부였다. 당시 베트남 군부는 구 베트민이나 친국민당 세력등 친정부 성햐의 세력도 존재했으나 약 60 ~ 70% 가량이 구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 출신이였기 때문에 매우 반공적이였고 당연하게도 현 정부에 가장 불만이 많은 세력이였다.

각주

  1. 왜 국공내전이 진행중일때 중국을 치지 않았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공산당과 내전중이던 중국에 전쟁을 선포해 중국이 베트남으로 일부 군대를 빼야 했다면 공산군이 내전에서 더 유리해지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었고 만약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해 중국이 공산화 될시 베트남으로 공산군이 밀려들어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