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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의 정치인, 사회 운동가, 혁명가. [[개마공민공화국]]의 초대 서기장이자 '''22년간''' 권좌를 지킨 독재자이다. | [[개마]]의 정치인, 사회 운동가, 혁명가. [[개마공민공화국]]의 유일 정당인 [[개마 노동자당]]의 초대 서기장이자, '''22년간''' 권좌를 지킨 독재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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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3일 (토) 13:37 판
![]() 개마 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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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마의 정치인, 사회 운동가, 혁명가. 개마공민공화국의 유일 정당인 개마 노동자당의 초대 서기장이자, 22년간 권좌를 지킨 독재자이다.
생애
유년기와 독립 운동
1896년, 조선에서 개마로 이민을 온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집은 매우 가난했으므로 소학교 수업조차 받을 수 없어 10대때부터 막노동과 농사를 전전해야했다. 그러던중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에 의해 우연히 공산주의 이론을 접한 이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문자를 익히고, 돈이 생기면 닥치는대로 마르크스, 앵겔스 등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던 1917년 소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그 역시 일본에서 개마를 독립시킨 이후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1918년 6월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일으켰다. 일본 당국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현우봉만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만주 지역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1920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상해 조계지에 위치한 임시정부를 찾아갔지만 답이 없다고 판단하여 만주에 잔류하였다. 하지만 한인들과 협력하여 공산주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만주에서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 공산당 간부들과 만나기도 하고, 이르쿠츠크와 상해의 고려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더욱 적극적인 독립 운동을 벌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과 협력하여 김일성 장군과 함께 공산주의 투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공산당과의 연계 활동을 통하여 1930년대 중반쯤 그는 이미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만주 및 중국 관내에서의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1937년 몰래 개마로 입국해, 벽돌공으로 신분을 숨기고 개마의 지하 사회주의 정당 조직의 투쟁을 도왔다. 1944년 개마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그는 개마의 해방을 알리는 연설을 통해 개마의 일반 군중들 사이에서도 차지 지도자감으로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