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54번째 줄: | 154번째 줄: | ||
이 베트남 전쟁 전후를 다룬 책 '월남전의 기억'이 있다. | 이 베트남 전쟁 전후를 다룬 책 '월남전의 기억'이 있다. | ||
{{ | {{인용문1|내 인생에 있어서 한국전 참전과 월남전 참전은 큰 의의를 가진다. 그 중에서 나는 월남전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자 광성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광성을 구원하였고, 피흘려 싸운 대가로 우리 국민이 성장할 기폭제를 마련해 주었고, 대외적으로 광성의 지위를 상승 시켰으며, 자유의 성군(聖軍)으로써 최선을 다했음을 전세계에 알려주었다. - 월남전의 기억 p113}} | ||
====광성황국 국군 전용 전투식량 요구==== | ====광성황국 국군 전용 전투식량 요구==== | ||
====공군 전투비행단 증파==== | ====공군 전투비행단 증파==== |
2024년 9월 15일 (일) 19:13 판
![]() 광성연방공화국 국군 원수 목록 | ||
[ 펼치기 · 접기 ]
|
조형 趙亨 | Cho-Hyung | |
시호 | 天虎 |
출생 | 1914년 8월 24일 |
광성도 광산구 | |
사망 | 2010년 8월 1일 (향년 96세) |
신경현 부석군 | |
임기 | 광성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
1997년 7월 2일 ~ 2000년 4월 2일 | |
광성황국 총리 | |
1996년 6월 26일 ~ 1997년 7월 2일 | |
광성 연방군 합동참모의장 | |
1991년 1월 1일 ~ 1995년 12월 3일 | |
광성 연방군 공군참모총장 | |
1985년 10월 16일 ~ 1991년 1월 1일 | |
광성 연방군 제 8전투비행단장 | |
1961년 7월 28일 ~ 1964년 1월 9일 | |
재위 | 광성연방공화국 공군 대원수 |
2010년 8월 1일 ~ 현재 | |
서명 |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광성연방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베트남전 당시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기는 한데 사실 한국전쟁 당시 공군 장교로 참전하여 북한군 점령지를 돌며 폭격을 펼쳐 전과들을 다수 올렸다. 이때의 전공과 경험들은 국군 전사 연구나 실전 사례 교육에서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다.
주월광성군사령부 설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자 주도자이다.
그리고 군인 시절 절대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됀다." 라는 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언론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후 총리로 취임한 후 문민통제를 실현하는 것에 가장 앞장섰다.
생애
공군 장교
1949년 공군사관학교 입학하여 1951년 8월 5일에 첫 졸업및 임관하여 공군 장교로써의 삶을 시작한다. 임관 직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이미 광성은 전투부대 파병을 실시하던 터라 당시 조형 소위도 파한을 가게된다. 본인의 회고록 '한국전의 기억'에서는 이때가 자신의 삶, 그 어느때 보다도 긴장되는 순간 이었다 회고하고있다.
한국 전쟁
비행장 방어
1951년 12월, 최전방 속초리비행장에서 근무도중, 불시 북한군의 비행장 기습 공격으로 인해 육군지원 없이 비행장을 방어를 해야할 상황에 놓이자, 당시 조형 소위는 비행단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북한군 약 2개 연대를 긴급 소집된 총기만 소지한 사병과 일부 파일럿을 동반하여 각각 비행장 북측과 서측 방면에서 진군하는 북한군 11연대와, 2연대를 단 1개 중대급 병력으로 각개격파하고 이후 긴급이륙한 아군 공군기에 의해 상황을 정리하였다. 이 일로 소령으로 3계급 특진을 받고, 그 용맹함과 노고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을 서훈 받았다.
북폭 편대 편대장
1951년부터 1953년 정전협정 까지 휴전선 인근 격전지와 아군 지원임무, 북한군 주요 점령지와 주요 시설 및 거점을 타격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실제로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 편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폭 편대를 이끌고 휴전선 인근과 그 이북으로 약 97회 가량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기록되있다. 작전 성공률은 80%에 육박하였다. 당시 조형 대령은 그 그 노고를 인정 받아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서훈 받았다.
베트남 전쟁
월남 파병이 결정되면서, 1개 중대급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2개 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 한국 산악지역에 능숙하며 공군 지휘관으로써 식견이 넓을 것이라는 정부의 결론으로 적임자로 판단되어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본인이 육해공 장성들 가운데 월남 파병을 아주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도 있다.
1961년 즈음 조형 당시 소장은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내정 되어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 졸업 및 미육군지휘참모대학을 졸업으로 어느 정도 육상전 교육을 받고 이후, 미 육군 장성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미군 지휘부와 담판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어 한국군 복지 지원 확보, 전투장비 신형으로 교체, 지휘권 확보 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조형은 과거 한국 전쟁에서 게릴라전을 맞붙은 경험을 살려 신형전술기지 연구하고, 광성군 전술교리 개발를 통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또한 베트남의 독립 전쟁사를 꼼꼼히 검토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명분이 매우 약하며, 오히려 월맹군측이 민족 지도자 호치민의 지도 하에 "독립전쟁"을 벌이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걸 포착, 라인코리아 총리에게 "미국의 공식 요청 하에 파병을 결정"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중을 기울였어도, 역시 명분약한 전쟁에 끼어드는 걸 반대했던 야당의 공세에 밀려, 결국 날치기로 파병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야당 의원들 역시 일단 파병이 결정 된 후에는 박고담 의원을 필두로 한 주요 인사들이 위문을 와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정현모의 경우는 대권 잠룡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한국군은 용병"이라 비난한 데 대해 "우리 장병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다고 믿고, 현지에서 고투를 치르고 있다"고 반박해 에드워드 케네디의 사과를 받아냈다는 후문.
베트남전쟁은 사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세력의 독립전쟁이라는 인식은 당시 라인코리아의 최측근이었던 김페잇 보수연합당 국회의원조차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녔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해외에서도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대다수의 미국동맹국들도 베트남 파병을 거부했고, 그래서 광성군의 파병이 그만큼 미국한테는 중요했다.
이 베트남 전쟁 전후를 다룬 책 '월남전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