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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책1 = 광성연방공화국 공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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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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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중이던 1972년 7월 20일 중장으로 진급한 조형. 왼쪽에 계급장을 달아주는 인물이 라인코리아 총리이다. 날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처음 파월 때는 소장으로 간 것이었다.<br><br>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공군을 등에 업고 '큰 일'을 꾀한다"는 음해에 시달렸으며, 1995년 12월 3일 대장으로 예편된다. 이후 외교관으로 재임용되어 주 그리스 대사로 임명되는 등 국외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베트남전 중이던 1972년 7월 20일 중장으로 진급한 조형. 왼쪽에 계급장을 달아주는 인물이 라인코리아 총리이다. 날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처음 파월 때는 소장으로 간 것이었다.<br><br>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공군을 등에 업고 '큰 일'을 꾀한다"는 음해에 시달렸으며, 1995년 12월 3일 대장으로 예편된다. 이후 국방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여 군 전술 연구나 편찬에 기여 하였고, 회고록을 편찬하여 후배 장교들을 위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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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0년대에는 파월장병들의 고엽제 피해에 대한 확실한 보상 정책과,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위해 주월광성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전면 부인했으며 참전용사 처우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혔다. 군과 정부 관료들 중 이 문제를 덮고 가려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 대장의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이후 1990년대에는 파월장병들의 고엽제 피해에 대한 확실한 보상 정책과,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위해 주월광성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전면 부인했으며 참전용사 처우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혔다. 군과 정부 관료들 중 이 문제를 덮고 가려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 대장의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2024년 9월 16일 (월) 14:37 판


광성연방공화국 국군 원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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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
김귀갑
대원수
조형
육군
김나무
육군
하인리히 에더
해군
펠릭스 슈타이너
해군
김현미
공군
조령
공군
김달걀
광성연방공화국 대원수
조형
趙亨 | Cho-Hyung
시호 天虎
출생 1914년 8월 24일
광성도 광산구
사망 2010년 8월 1일 (향년 96세)
신경현 부석군
임기 광성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1997년 7월 2일 ~ 2000년 4월 2일
광성황국 총리
1996년 6월 26일 ~ 1997년 7월 2일
광성 연방군 합동참모의장
1991년 1월 1일 ~ 1995년 12월 3일
광성 연방군 공군참모총장
1985년 10월 16일 ~ 1991년 1월 1일
광성 연방군 제 8전투비행단장
1961년 7월 28일 ~ 1964년 1월 9일
재위 광성연방공화국 공군 대원수
2010년 8월 1일 ~ 현재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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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아들 조령
본관 배천 조씨
학력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OAC)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 졸업
종교 카톨릭(세례명:베드로)
소속 정당 보수연합당
성향 강경 진보
임관 공군사관학교 (1기)
복무 광성 연방군
1949년 7월 28일 ~ 1995년 12월 3일
최종 계급 대원수(광성 연방군)
최종 보직 광성 연방군 합동참모의장
주요 보직 주월광성군사령관
공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약력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참전
서훈 연화대훈장
국가영예훈장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


개요

광성연방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베트남전 당시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기는 한데 사실 한국전쟁 당시 공군 장교로 참전하여 북한군 점령지를 돌며 폭격을 펼쳐 전과들을 다수 올렸다. 이때의 전공과 경험들은 국군 전사 연구나 실전 사례 교육에서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다.

주월광성군사령부 설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자 주도자이다.

그리고 군인 시절 절대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됀다." 라는 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언론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후 총리로 취임한 후 문민통제를 실현하는 것에 가장 앞장섰다.

생애

공군 장교

1949년 공군사관학교 입학하여 1951년 8월 5일에 첫 졸업및 임관하여 공군 장교로써의 삶을 시작한다. 임관 직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이미 광성은 전투부대 파병을 실시하던 터라 당시 조형 소위도 파한을 가게된다. 본인의 회고록 '한국전의 기억'에서는 이때가 자신의 삶, 그 어느때 보다도 긴장되는 순간 이었다 회고하고있다.

내가 임관한 첫 해인 1951년에는 이미 광성군은 한국전 발발로 다들 파한을 가던 터였고, 그때 내 첫 부임지를 확인해 보니 '부산'으로 적혀있었다. 나는 그때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이 주마등 처럼 스쳐가며 식은땀이 흘렀다. 들은 바에 따르면 한국은 현재 공산세력의 파상공세로 패배 직전에 내몰렸고, 거기 가면 다 죽는다는 것을 이미 한차례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행 배를 타던 그 순간에도,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어본 적이 없다. 부산에 도착하고 한국전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갈때 비로서 "살았다"라는 감정이 들었다." - 한국전의 기억 p91

한국 전쟁

비행장 방어

1951년 12월, 최전방 속초리비행장에서 근무도중, 불시 북한군의 비행장 기습 공격으로 인해 육군지원 없이 비행장을 방어를 해야할 상황에 놓이자, 당시 조형 소위는 비행단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북한군 약 2개 연대를 긴급 소집된 총기만 소지한 사병과 일부 파일럿을 동반하여 각각 비행장 북측과 서측 방면에서 진군하는 북한군 11연대와, 2연대를 단 1개 중대급 병력으로 각개격파하고 이후 긴급이륙한 아군 공군기에 의해 상황을 정리하였다. 이 일로 소령으로 3계급 특진을 받고, 그 용맹함과 노고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을 서훈 받았다.

북폭 편대 편대장

1951년부터 1953년 정전협정 까지 휴전선 인근 격전지와 아군 지원임무, 북한군 주요 점령지와 주요 시설 및 거점을 타격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실제로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 편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폭 편대를 이끌고 휴전선 인근과 그 이북으로 약 97 가량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기록되있다. 작전 성공률은 80%에 육박하였다. 당시 조형 대령은 그 그 노고를 인정 받아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서훈 받았다.

베트남 전쟁

월남 파병이 결정되면서, 1개 중대급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2개 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 한국 산악지역에 능숙하며 공군 지휘관으로써 식견이 넓을 것이라는 정부의 결론으로 적임자로 판단되어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본인이 육해공 장성들 가운데 월남 파병을 아주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도 있다.

1961년 즈음 조형 당시 소장은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내정 되어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 졸업 및 미육군지휘참모대학을 졸업으로 어느 정도 육상전 교육을 받고 이후, 미 육군 장성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미군 지휘부와 담판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어 한국군 복지 지원 확보, 전투장비 신형으로 교체, 지휘권 확보 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조형은 과거 한국 전쟁에서 게릴라전을 맞붙은 경험을 살려 신형전술기지 연구하고, 광성군 전술교리 개발를 통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또한 베트남의 독립 전쟁사를 꼼꼼히 검토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명분이 매우 약하며, 오히려 월맹군측이 민족 지도자 호치민의 지도 하에 "독립전쟁"을 벌이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걸 포착, 라인코리아 총리에게 "미국의 공식 요청 하에 파병을 결정"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중을 기울였어도, 역시 명분약한 전쟁에 끼어드는 걸 반대했던 야당의 공세에 밀려, 결국 날치기로 파병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야당 의원들 역시 일단 파병이 결정 된 후에는 박고담 의원을 필두로 한 주요 인사들이 위문을 와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정현모의 경우는 대권 잠룡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광성군은 용병"이라 비난한 데 대해 "우리 장병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다고 믿고, 현지에서 고투를 치르고 있다."고 반박해 에드워드 케네디의 사과를 받아냈다는 후문.

베트남전쟁은 사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세력의 독립전쟁이라는 인식은 당시 라인코리아의 최측근이었던 김페잇 보수연합당 국회의원조차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녔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해외에서도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대다수의 미국동맹국들도 베트남 파병을 거부했고, 그래서 광성군의 파병이 그만큼 미국한테는 중요했다.

이 베트남 전쟁 전후를 다룬 책 '월남전의 기억'이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한국전 참전과 월남전 참전은 큰 의의를 가진다. 그 중에서 나는 월남전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자 광성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광성을 구원하였고, 피흘려 싸운 대가로 우리 국민이 성장할 기폭제를 마련해 주었고, 대외적으로 광성의 지위를 상승 시켰으며, 자유의 성군(聖軍)으로써 최선을 다했음을 전세계에 알려주었다. - 월남전의 기억 p113

광성 연방군 전용 전투식량 요구

미군의 C레이션은 무엇보다 동양인 입맛에 안맞는다. 1965년 파월 초기 한국군도 겪었던 문제다.[1] C레이션의 음식ref>채명신 장군이 강력히 주장</ref>은 너무 기름지고, 동양인의 담백하고 고 탄수화물 식단에는 맞지 않아 조형 사령관은 미군에 강력하게 광성형 전투식량을 개발과 연구에 도움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주장은 미군 지휘부에서 결국 승인하여 광성에 전투식량 공장을 건설하여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이는 조형 사령관 본인이 의도한 바도 있지만 주변 참모들의 주된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공군 전투비행단 증파

내가 공군 지휘관으로써 속초리비행장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기습에 대응할 때, 공군의 부재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체감 했다. 만약 내가 북한군과 전투할 때 우리 공군기가 조금만 늦게 이륙했더라도 나는 이미 전사하여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월남의 지형또한 한국과 유사한 바, 라인코리아 총리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 1개 공군 전투비행단을 증파해줄 것을 요청했다. - 월남전의 기억 p203

공군 지휘관 출신으로서 앞으로 제공권 장악과 공중지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이였기에, 이후에 정부 승인으로 제 8전투비행단[2]월남 공군지원단이 도착하여 대민지원과 아군과의 연합작전으로 많은 전공을 올렸다.

독자 지휘권 확보

조형 사령관은 광성군이 미군사령부 예하부대로 배속된 것을 보고,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일단 주된 이유는 현재 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있으며 작전 방식또한 문제가 있다는 것 이였다. "만약 우리가 미군에 배속되어 미군의 지휘를 받는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는가? 미군은 우리를 위험한 곳에 몰아넣고 방패로 삼을 것이다."[3] 이러한 판단으로 미군 지휘부에게 조형은 광성군의 독자 지휘권을 강력 요구하였고, 결국 독자 지휘권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만약 광성군이 미군의 배속을 받았다면 주월광성군사령부주월광성군전사의 공식 전사자 수 보다 3배이상 더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광성 군수품생산 건설 요구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자 피복, 군화, 총알 등등 전쟁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군수품이 광성군의 증파가 이루어짐에 따라 부족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무엇보다 당시 군수물품의 생산은 일본에서 이루어 졌기에 많은 장병이 이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4]

조형사령관은 광성의 경제발전과 중공업산업의 유치와 발전을 위해 미군 지휘부에 광성에 피복, 군화, 총기 등등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을 설치하여 광성산 군수품을 광성군에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승인되어 이후에 섬유산업과 정밀공업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평가 받는다.

M16A1 소총 보급

회의 중에 미군 대령은 반자동식 M14소총을 칭찬하며 "M14는 기존 M1소총의 단점을 보완하고,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광성군에도 적절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조형 장군은 아연실색하며 "내가 한국 속초리에서 싸울 때 만약 자동연사가 되는 M2카빈이 아니였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근데 지금 그 나무 총에 거추장 스럽고 무겁기까지 하며, 심지어 반자동인데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는 베트콩을 도대체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 라고 응수 했다. 작전 참모들은 미군 대령의 말에 동의하였으나 조형 장군만이 반발하여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자동화기를 포기해선 안됀다." 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군 수뇌부와 작전 참모들의 반응은 냉담했으며, 때때론 질타까지 받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미군에게 M16A1 소총을 광성군 전체에 보급해 줄 것을 반복적으로 요청하였고 미군은 결국 두손두발 다들고 이에 응했다.

장병 복지 개선

조형 장군은 파월 장병들의 복지를 개선하는데 부단히 힘썼다.

잘먹어야 잘 싸우고, 그래야 많은 장병들이 힘을내 싸운다. - 월남전의 기억 p310

당시 파월장병 배식소에는 현대 해군급 식단이 나왔다. '잘 먹어야 잘 싸운다'는 철학으로 전투식량과 배식에 매우 신경을 썼다, 또한 일선에는 음식을 최대한 맛있게 조리하여 병사들의 만족도를 조사하여 직접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또한 무좀방지와 말라리아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샤워장 설치와 하루 최소 2시간 이상 군화를 벗어 발을 환기하고 세척을 명령하였다.

베트남 현지인 보호 정책

조형 장군은 미군이 등한시하던 대민지원과 현지 민심 확보에 심혈[5]을 기울였는데 같은 유교 문화권인 데다 동양인이라는 점, 한국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전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본 점 등으로 이 부분에서도 큰 성과를 거둔다. 미군은 이러한 대민 정책을 군이 할 수 없고 민간 단체가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미국스러운 원조 방식으로 그냥 트럭에 쌀을 갖고와서 마을에 던져놓고 가기 일쑤였다. 베트남 주민들은 이에 대해 "우리 쌀 뺏어가서 자기들이 인심 쓴다."고 불평을 하였다. 반면 광성군은 쌀이 모자라는 집집마다 전투병들이 직접 찾아가 쌀을 원조해주고 얼마나 부족하느냐, 다음에 또 오겠다 라는 말도 해 베트남 주민들의 마음에 더 와닿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에 더하여 조형 장군 본인도 수시로 사령부 근처의 마을로 직접 나가 주민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베트콩 인접 지역에 있는 마을도 수시로 시찰해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등 이런 부드러운 방식과 더불어 베트콩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적성 촌락은 완전히 포위해놓고 경고 방송과 경고 포격을 하고 몇 날 며칠이 걸리든 간에 계속하는 물샐 틈 없는 포위로 도주자를 차단, 도발 의지를 아예 꺾어놓았다. 이런 당근과 채찍의 병용으로 투항 베트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구정공세 반격 작전

자세한 내용은 구정 공세 반격 작전 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968년 1월 1일, 이미 20여일 전 조형 장군은 미군 정찰 보고 와 한국군의 구정 기간 대규모 공세 예상 정보를 입수하고, 그 즉시 반격 작전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이후 진짜로 구정 공세가 발생하자 그 즉시 작전을 전개하여 엄청난 전공을 올린다. 이 작전은 광성 언론을 포함한 전세계로 보도되며 광성군의 위엄을 전세계에 떨쳤다.

신형 전술기지 개발

4개 사단 규모인 광성군을 쪼개 중대 규모로 화력기지인 중대방어기지를 여러개 건설하여 베트남 마을들을 보호하는 형태로 배치하였는데, 미군은 이를 두고 각개격파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으며 광성군 장교들도 미군이 대대급 작전을 주로 펼치고 있으니 자신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중대급으로 쪼개놓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장 조형도 첫 작전회의 때 이를 이해한 지휘관은 한 명도 없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그러나 사실 이 배치는 조형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각 기지는 어느 방향에서도 중기관총과 무반동총의 자체 중화기 사격을 집중시켜 방어에 임할 수 있고, 각각의 기지는 105mm 견인곡사포대의 사거리 안에 지어져 있어 더 큰 규모의 적이 공격해오면 포병 사격으로 지원이 가능했다. 중대방어기지의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전투가 디엔칸 전투로, 육군 1개 중대 병력으로 북베트남 정규군 2개 연대를 상대로 백병전에 진내사격까지 강행하는 혈투 끝에 단 1개 중대가 진지 방어에 성공했다.

대장 예편


베트남전 중이던 1972년 7월 20일 중장으로 진급한 조형. 왼쪽에 계급장을 달아주는 인물이 라인코리아 총리이다. 날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처음 파월 때는 소장으로 간 것이었다.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공군을 등에 업고 '큰 일'을 꾀한다"는 음해에 시달렸으며, 1995년 12월 3일 대장으로 예편된다. 이후 국방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여 군 전술 연구나 편찬에 기여 하였고, 회고록을 편찬하여 후배 장교들을 위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파월장병들의 고엽제 피해에 대한 확실한 보상 정책과,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위해 주월광성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전면 부인했으며 참전용사 처우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혔다. 군과 정부 관료들 중 이 문제를 덮고 가려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 대장의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정계 진출

라인코리아와의 인연

자세한 내용은 광성황국 역대 총선 결과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광성황국의 전 총리이자 보수연합당 당수 라인코리아와의 인연으로 보수연합당에 가입하여, 라인코리아와 라코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차기 총선 후보로써 급부상하게 된다. 보수연합당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모략 선동에 전면 대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보수연합당의 총리 후보로 출마하여 광성통합자유당소속 정현모 총리와 맞붙게 된다.

정현모 총리의 부탁

총선기간 중 조형의 당선이 확실 시 되자, 정현모가 직접 조형과 만나 한가지 부탁을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형의 회고록인 '광성민국 건국'에서 기록된 바로는 정현모 총리가 조형에게 "나는 아직 해군과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실현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나는 군인출신도 아니고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라 해군장성들의 도전을 받고있으니 광성의 몇 안돼는 명장인 당신이 문민통제를 완벽히 실현 시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6] 이렇게 정현모 총리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군인에게 맡겼다는 것이 지금에서 봤을 때는 정말 탁원한 판단이었다고 보지만 당시에는 이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어서 많은 이들이 "군인이 군인을 핍박한다"라는 식으로 오해를 하곤 했다.

총리 당선

자세한 내용은 광성황국 역대 총리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결국 1996년 7월 2일, 광성황국의 마지막 총리, 조형은 취임하였다.

조형의 파격적인 언행과 과거 행보 발굴,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라인코리아의 지지를 통해 표를 결집시켜 득표율 63.6%이라는 경이로운 수치로 광성통합자유당 정현모 와 27.3의 차이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이후에 공약으로 내건 군방예산 축소와, 문민통제 실현, 친서민 정책, 탈권위주의 정책을 모두 이행하였다.

베트남 전쟁 광성군 민간인 학살 의혹 입장 표명

본인이 주월광성군사령관이기 때문에도 그렇고, 참전용사의 명예와 군 위상 실추를 막기위해 조형이 직접 선언을 통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라고 못박아 버렸다.
이 선언으로 많은 참전용사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군 위상 실추를 막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 받는다.

문민통제 실현

과거 해군과 군내 공화파, 황군파를 모두 경질, 축출해내는 것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군내 파벌 문제는 본인이 군인일 때도 심각한 문제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총리로 취임한 이후에 군내 공화파와 황군파를 모두 축출하여 잠시 군이 인력 부족문제로 휘청이기도 했으며 많은 장성들이 진급이 막혔다.[7] 특히 해군이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여 많은 반발이 발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해군의 도전을 아예 사전에 차단해 버렸으며, 이후 군이 정치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도록 방지하게 한 결정적 역할이라고 평가 받는다.[8]

황국 폐지

자세한 내용은 광성황국/역사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광성민국 건국

총리로 취임한 직후, IMF 사태가 차츰 정리됨에 따라

은퇴

사망

사후 대원수 추대

논란

주월광성군 전사 책임

양민 학살 의혹 묵인

지휘 무능 의혹

해·공군 갈등 발생?

광성민국 반대 여론

광성민국 건국 강행

사진

기타

  1. 채명신 장군이 강력히 주장
  2. 과거 본인이 비행단장으로 있던 부대
  3. 월남전의 기억 p277
  4.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만 해도 반공, 반일 정서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5. 당연히 손자병법에 나오는 내용이다.
  6. 발간 당시에는 논란이 있었으나 정현모 전 총리의 "사실이 맞다"라고 인정하여 종결되었다."
  7. 김원일 해군참모총장도 이 정책으로 더이상 다른 보직으로 진급하지 못했다.
  8. 또한 군내 파벌로 인한 갈등 문제와 내전 위기 고조도 이후로 전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