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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수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 편입에 반대하며 전국 각지에 대규모 항의 시위가 빗발쳤고, 우크라이나 인민해방조직<ref>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편입에 반대하여 다양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세력이 모여 결성한 연합체로, 다소 온건한 비폭력 시위에서 극렬 무장투쟁까지 활동 범위가 넓다.</ref>이 키이우 중심부를 점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반란의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인민해방조직이 러시아군과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가 질서 유지를 목표로 키이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025년 4월 29일, 러시아군의 조치에 따라 완전히 폐쇄되었다. | 이에 수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 편입에 반대하며 전국 각지에 대규모 항의 시위가 빗발쳤고, 우크라이나 인민해방조직<ref>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편입에 반대하여 다양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세력이 모여 결성한 연합체로, 다소 온건한 비폭력 시위에서 극렬 무장투쟁까지 활동 범위가 넓다.</ref>이 키이우 중심부를 점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반란의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인민해방조직이 러시아군과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가 질서 유지를 목표로 키이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025년 4월 29일, 러시아군의 조치에 따라 완전히 폐쇄되었다. | ||
결국 키이우는 전쟁과 내란에도 모자라 도시 봉쇄라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러시아군의 봉쇄 조치를 놓고 크게 반발했다. 이에 일부 시민들은 고립된 도시를 재건하고자 100명의 시민위원으로 구성된 재건준비위원회(Комітет з підготовки до реконструкції, '''КПР''')를 조직했고, 동요하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며 내부 혼란을 잠재우도록 했다. 이후 CPR은 키이우국 건국을 위한 헌법을 완성해 직접 선거가 완료되는 즉시 지도자의 승인을 받을 것을 약속했고, 2026년 1월 14일, 입법부 의원 100명과 인민지도자를 선출할 총선이 실시되었다. | |||
2026년 1월 16일, 첫 | 2026년 1월 16일, 첫 총선을 통해 뽑힌 ○○○ 인민지도자가 선거 이틀 후 마린스키궁에서 취임식을 거행해 키이우국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인민지도자의 승인 하에 헌법이 공포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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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일 (화) 19: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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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에 자유를! 옛 조국에 영광을! Свобода київ! Слава старій країні! | |||||
역사 |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2월 24일 키이우 함락 2024년 12월 28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편입 2025년 3월 22일 우크라이나 반란 2025년 3월 24일 키이우 봉쇄 2025년 4월 29일 키이우국 수립 2026년 1월 16일 | |||||
국가 | 키이우 시민의 노래 | ||||
국화 | 해바라기 | ||||
면적 | 835.58㎢ | ||||
수도 | 페르체스키(Pecherskyi) | ||||
접경국 | |||||
행정구역 | 10개 주 | ||||
인구 | 367,449명 (2033년) | ||||
공용어 | 우크라이나어 | ||||
국교 | 국교 없음(정교분리) | ||||
군사 | 키이우군 | ||||
정치 체제 | 민주공화제, 중앙집권제, 단원제, 무당제[1] | ||||
인민지도자 (국가원수 · 정부수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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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키이우 흐리우냐(₴) | ||||
법정연호 | 서력기원 | ||||
여행 현황 | |||||
여행금지 | 전 지역 |
개요
키이우국(Київська Держава)은 우크라이나의 옛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위치한 공동체 국가이자 미승인국이다.
역사
키이우는 흑해로 연결되는 드니프로강에 세워진 이래 9세기 말부터 1240년까지 키예프 루스의 수도였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 13세기부터 루스 국가들을 차례대로 병합해 러시아를 중심으로 역사가 흘러가다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키이우를 해방시킴으로써 15세기까지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삼았다. 그 후 1569년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일부가 되었고, 페트로 사하이다니치의 주도로 도시를 재부흥시켜 우크라이나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1648년, 코자크 지도자인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코사크 봉기를 일으켜 우크라이나 일대를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간의 전쟁 끝에 다시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키이우는 19세기 러시아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1934년 하르키우로부터 이전해 우크라이나의 정식 수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키이우는 2차 대전과 전후 복구를 거쳐 소련의 주요 도시로 불렸다가, 소련 해체 이후 독립 국가가 된 우크라이나의 실질적 수도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탈나치화'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와 전면전에 들어갔으며(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쟁 초반 러시아군의 남하로 교전이 일어나는 등 사실상 최전방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2024년 12월 28일, 러시아와 벨라루스 연합군이 제2차 키이우 전투에서 승리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결국 2025년 3월 22일 국민투표 없이 러시아로 편입시킴으로써 키예프주(Киевская область)[2]의 일부가 되었다.
이에 수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 편입에 반대하며 전국 각지에 대규모 항의 시위가 빗발쳤고, 우크라이나 인민해방조직[3]이 키이우 중심부를 점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반란의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인민해방조직이 러시아군과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가 질서 유지를 목표로 키이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025년 4월 29일, 러시아군의 조치에 따라 완전히 폐쇄되었다.
결국 키이우는 전쟁과 내란에도 모자라 도시 봉쇄라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러시아군의 봉쇄 조치를 놓고 크게 반발했다. 이에 일부 시민들은 고립된 도시를 재건하고자 100명의 시민위원으로 구성된 재건준비위원회(Комітет з підготовки до реконструкції, КПР)를 조직했고, 동요하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며 내부 혼란을 잠재우도록 했다. 이후 CPR은 키이우국 건국을 위한 헌법을 완성해 직접 선거가 완료되는 즉시 지도자의 승인을 받을 것을 약속했고, 2026년 1월 14일, 입법부 의원 100명과 인민지도자를 선출할 총선이 실시되었다.
2026년 1월 16일, 첫 총선을 통해 뽑힌 ○○○ 인민지도자가 선거 이틀 후 마린스키궁에서 취임식을 거행해 키이우국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인민지도자의 승인 하에 헌법이 공포되었다.
경제
키이우국은 유럽 최빈국이자 경제 활동이 열악한 나라 중 하나이며, 봉쇄의 영향으로 국가 빈곤율이 높아 사회 문제로 직결되고 있다. 본래 키이우는 수도로서 1인당 GDP가 매우 높은 경제적 중심지였으나, 전투 패배와 봉쇄 조치로 심각한 경제 손실을 입으면서 1인당 GDP가 최대 2,000달러까지 떨어질 정도로 크게 쇠퇴했다. 거기다 30만 명 남짓한 인구임에도 불구하고 경제 활동에 종사해야 할 인력이 부족하며, 고용률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낮아 매년 인력난,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 구조로는 정부에서 공인된 합법적인 지하경제와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공업, 인프라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다. 관광 분야에서는 국가 차원에서의 문화유산을 통해 일정한 수익을 벌어들이고는 있지만, 숙박업의 경우 키이우 봉쇄로 큰 타격을 입고 파산하는 기업이 늘고 있어 경제 구조로서의 비중은 낮다고 할 수 있다. 공업 지대에서는 공장이나 주요 공업 시설들이 남아 있기는 하나, 자국 기술과 인력이 러시아에 넘겨지면서 미숙련 노동자과 소수의 숙련공들 밖에 없다.
사회
키이우국은 봉쇄의 영향으로 국가적 잠재력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크게 밀리는 편이지만 대체로 생활 수준이 안정화되어 있다. 치안의 수준은 구 우크라이나보다 월등히 높은데, 경찰이 범죄 대응에 적극적인 만큼 우크라이나 지역 전체를 거점으로 하는 마피아의 영향력이 키이우국에 거의 없을 정도이다. 또 법적으로는 총기가 합법화되어 있으나 일반인들이 소지하지 못하도록 규제 장치를 마련해두었기 때문에 총기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이미지 중 하나인 '미녀의 나라'가 보편화되어 있을 정도로 미녀들이 많고, 이성 연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성문화에 개방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합계출산율은 2033년 기준 0.5명으로 세계 선진국들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고, 호모포비아와 가정 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국가의 인권 의식은 러시아의 평균 이상이거나 동급이다.
다만 영토 자체가 수도 키이우에 한정되어 있고, 키이우 봉쇄의 영향으로 영토가 고립되어 있다 보니, 이 곳 시민들은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인데다 러시아인들에 대한 배척과 혐오가 강하다. 때문에 키이우 시민들은 루소포비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본토 러시아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이 곳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이 차별 행위를 견디다 못해 시골로 상주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보복을 저지르는 등 민족 갈등으로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인문 사회
수도 키이우를 영토로 하는 나라이지만,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매우 한적할 정도로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다. 2033년 기준 키이우국의 인구 수는 367,449명으로, 전쟁 직전 키이우의 인구 수에 비하면 무려 1/10이 빠져나간 수준이다. 그 이유는 키이우 전투에서의 패배와 봉쇄 조치로 인해 대다수가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시민들의 생활 방식은 물론 국가의 운영에 큰 악영향을 끼쳤고, 통신조차 끊어진 탓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
종교 비율로는 공식적으로 국교가 없음에도 통합 정교회의 교세가 높으며, 무신론자들은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한다.
군사
키이우국은 자국의 치안 유지와 봉쇄지대 주둔을 목적으로 키이우군을 자국군으로 두고 있으며, 총 20,000명의 상비군과 30,000명의 예비군을 두고 있다. 국방부 본부와 주요 사단들의 기지가 키이우에 위치해 있어 국군의 주요 시설로 이용되며, 해군은 드니프로강 인근 지역에, 공군은 보리스필 국제공항을 개조한 군사기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 봉쇄 지역 주변에 다량의 지뢰와 러시아군이 배치되어 있어 민간인이 들어오기에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고, 군사 훈련 또한 러시아와의 충돌을 우려해 1년에 4번으로 제한되어 있다. 게다가 자국의 경제와 생활 수준을 감안하면 군사 시설 자체가 매우 열악하고, 징병제의 폐해와 군 내 병영부조리 문제로 병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어 국방부장관과 고위 장교들이 이를 근절하기 위한 대책을 추진 중에 있다.
정치
키이우국은 현재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가 삼권분립을 이루는 나라이며, 직접민주주의와 중앙집권적인 요소가 혼합된 정치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인민지도자(Народний Лідер, НЛ)는 키이우국의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대표직으로, 행정부가 의회와 사법기관보다 권한이 강해 사실상 대통령중심제에 가깝다. 임기는 4년이며 중임이 불가하지만, 아직까지는 독재나 부정부패, 그리고 기업과의 정경유착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행정부는 인민지도자가 행정부의 수반을 담당하며, 마린스키 궁전(Маріѕнський палац)을 집무실로 두고 있다. 인민지도자는 각 행정 각료들을 임면하는 권한이 주어지고, 임기가 종료되면 신임 인민지도자가 행정부를 이양해 기존 행정부 내각을 자동 해산시킨다. 행정부는 부총리, 내각사무국, 국방부, 내무부, 경제부, 법무부, 농업식품부 등 다양한 행정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의 운영과 관리, 정책 실행을 담당한다.
입법부는 키이우국의 입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키이우의 구 지방의회를 두고 있으며, 정당 제도가 없기 때문에 특정 계층이나 단체를 주축으로 하는 회파들이 존재한다. 입법부는 총 100석으로 비례대표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만 25세 이상의 시민들이 출마해 4년 동안 시민을 대표할 입법부 의원을 지낸다. 입법부는 주로 법률 시행이나 의제별 토론, 예산안 표결 등의 권한이 주어지지만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기 때문에 과거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문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회파
키이우국은 정당 제도가 존재하지 않아 의회에서는 회파(Хвиля, 흐빌랴)라고 하는 교섭단체가 존재한다. 회파는 특정 의제나 사상을 따르는 의원들끼리 모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요건이 없고, 회파 소속으로 출마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정당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다. 현재 입법부에 의석을 보유하고 있는 회파는 총 6개이다.
- 중앙파(Централісти, 첸트랄리스트)
중앙집권제에 기반한 민주공화정을 유지하되, 인민지도자의 권력을 강하게 중시하는 회파. 최대 회파였던 시민파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고 현재 다수 회파이다. 다만 직접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기에 직접민주파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편.
- 산업파(Промисловці, 프로미슬로브치)
키이우국의 기업 출신들과 노동자 의원을 중심으로 형성한 회파로, 경제 개발과 산업 발전, 기업의 이익에 중점을 둔다. 다만 자동화 시설이나 친환경 산업에 부정적인 만큼 평등파와 대립할 때도 있다.
- 직접민주파(Прямі демократи, 프랴미 데모크라티)
초대 선거 당시 최대 회파로 자리잡은 시민파 의원들이 주축이 된 회파로, 중앙집권제로 인한 권위주의를 부정하되 시민의 정치적 활동을 강하게 보장하자는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한다.
- 평등파(Еквалітарний, 에콜니타르니)
진보주의 성향의 회파로, 사회운동가 출신부터 시작해 진보주의자, 정치인 출신 등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직접민주주의와 국가 정체성에 우호적이지만 진보주의적 견해가 강하다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여성 및 성소수자 인권, 친환경 산업, 경제적 평등을 의제로 내걸고 있다.
- 결속파(Солідарністи, 솔리다니스트)
우파 내셔널리즘 성향의 회파. 혁명파와 함께 가장 극단적인 회파로서 대부분의 회파들이 거부하고 있지만, 스테판 반데라의 사상과 우크라이나 해방을 목적으로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따르는 동시에 독재를 해야 한다는 이유여서인지 반대 의견이 높은 편.
- 혁명파(Революціонери, 레볼루치오나르)
극좌, 공산주의 성향의 회파. 결속파와 함께 가장 극단적인 회파로서 대부분의 회파들이 거부하고 있지만, 결속파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서로 싸우는 판국이다. 구 소련으로의 회귀와 함께 공산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목적을 두고 있다.
선거
키이우국은 선거법에 따라 만 18세 이상부터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선거에서는 4년 동안 국가를 지도할 인민지도자와 100명의 의원들을 동시에 선출하는 동시선거(혹은 총선)와, 10개 지역의 주지사를 뽑는 지방선거가 있다. 모든 선거는 키이우국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관리한다.
동시선거에서 인민지도자는 대통령과 비슷하기 때문에 직선제로 실시하지만, 회파에 가담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 대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입법부 선거는 기본적으로 3%의 봉쇄조항이 걸려있지만, 정당이 없기 때문에 회파에 투표할 수 있고, 전원 비례대표제를 통해 당선자를 선출한다. 지방선거는 인민지도자 선거와 마찬가지로 직선제로 실시되며, 회파 소속으로의 참여가 금지되어 있지만 동시선거와는 달리 실시되는 해가 지역마다 다르다.
외교
키이우국은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미승인국이고, 러시아는 이 지역을 키예프주의 일부이자 특수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키이우국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국 영토가 러시아에 지정학적으로 고립되어 있는데다, 지리상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어 SNS를 강력히 통제하는 등 외교 활동에 제약이 걸리고 있다.
그러나 민간 차원에서는 Tor를 이용해 키이우국의 소식을 지속적으로 알리는 대외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요구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지하 터널에서 회담을 가졌다는 행적을 통해 지원 세력이 있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미국이나 유럽연합, NATO조차 키이우국에 대해 별 다른 입장을 보이지 않아 국제 사회가 이를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현재로서는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와의 관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당시 이를 하나의 지방으로 인식할 뿐,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 있었는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멸망당한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을 향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키이우국이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인의 절대 다수는 이 지역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취급하거나 키예프주의 일부로 본다. 현지에서는 폐쇄되어버린 수도 키이우를 "파시스트들의 도시"라고 취급하며, 키예프주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아예 지도에 수도 키이우가 빠져 있다.
우크라이나의 정신을 계승하는 키이우국도 러시아에 부정적이고, 러시아계에 대한 증오 범죄가 잇따르고 있어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무력으로 옛 국가의 주권을 강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민들 사이에서 대체로 반러에 대한 입장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4] 때문에 러시아계들이 증오 범죄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시골로 넘어가 내부 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중이다.
문화
키이우국의 지역인 키이우는 키예프 루스에서 시작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어 슬라브권 문화의 발상지이자 고도(古都)이기 때문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과 문화적 산실이 존재한다. 성 소피아 대성당, 데샤틴나 성당 터, 마리인스키 궁 등이 대표적인 유산으로, 키이우 내에서 개발 및 복원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 많다. 국가 차원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문화를 정신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키이우 전투 과정에서 소실되어버린 일부 유산을 복원시키는 계획이 수년 째 진행 중이며, 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관광 산업이 발달되어 있기에 여전히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NSC 올림피스키(НСК Олімпійський)라는 대형 복합단지가 존재한다. 주로 지역별 축구 예선전을 치르지만, 복싱이나 종합격투기, 리듬체조 등 주요 올림픽 종목을 바탕으로 훈련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많이 낮은 탓에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크게 감소한 편이고, 우크라이나인 선수들이 폴란드나 러시아로 대거 흩어졌기에 자국 내 선수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러시아와의 험악한 관계 탓에 러시아어로 만든 매체의 수입, 시청, 연주, 공연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영향권 때문에 법률이 무력화되고, 대중매체와 공공장소, 인터넷 커뮤니티의 활동이 제한되어 있어 대부분 Tor를 비롯한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각주
- ↑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제도를 의미하며, 'Non-party system'이라고 한다.
- ↑ 기존의 키이우주 + 수도 키이우를 통합한 키이우 지역을 관할했다.
-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편입에 반대하여 다양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세력이 모여 결성한 연합체로, 다소 온건한 비폭력 시위에서 극렬 무장투쟁까지 활동 범위가 넓다.
- ↑ 가령 극단적인 내셔널리즘 성향의 시민들은 러시아인들을 '침략자'로 간주하고 자국 영토로 들여오는 것에 반대하지만, 반대로 러시아의 패권 행보를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할 뿐, 러시아인에 대한 입장에 유보적인 여론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