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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취임한 루스벨트는 즉시 일련의 대규모 구제 정책을 시행하며 위기 극복에 나섰다. 전국의 실업자들을 공공 인프라 건설에 동원한 [https://en.wikipedia.org/wiki/Works_Progress_Administration 공공사업진흥국](WPA), 농산물 가격 회복을 위한 [https://en.wikipedia.org/wiki/Agricultural_Adjustment_Act 농업조정법](AAA), 산업 구조 재편을 겨냥한 [https://en.wikipedia.org/wiki/National_Industrial_Recovery_Act_of_1933 국가산업부흥법](NIRA) 등은 국민들에게 ‘행동하는 정부’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WPA는 예술가, 작가, 기술자까지 고용의 범위를 확장하며 경제 회복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 1933년 3월 취임한 루스벨트는 즉시 일련의 대규모 구제 정책을 시행하며 위기 극복에 나섰다. 전국의 실업자들을 공공 인프라 건설에 동원한 [https://en.wikipedia.org/wiki/Works_Progress_Administration 공공사업진흥국](WPA), 농산물 가격 회복을 위한 [https://en.wikipedia.org/wiki/Agricultural_Adjustment_Act 농업조정법](AAA), 산업 구조 재편을 겨냥한 [https://en.wikipedia.org/wiki/National_Industrial_Recovery_Act_of_1933 국가산업부흥법](NIRA) 등은 국민들에게 ‘행동하는 정부’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WPA는 예술가, 작가, 기술자까지 고용의 범위를 확장하며 경제 회복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854369; box-shadow:0px 0px 15px #361427; color:#FFF; text-align:center; font-size:8.5pt; float:righ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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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order:1px solid #280D28; background:#333030; color:#E4E4E4" |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https://en.wikipedia.org/wiki/Tennessee_Valley_Authority TVA] 설립 법안에 서명하는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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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뉴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역풍에 시달렸다. 보수 진영은 뉴딜을 "국가가 자유기업을 억압하는 사회주의적 실험"이라 비판했으며, 남부 민주당 내에서도 ‘연방의 개입이 지역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반발이 거세졌다. 보수 언론들은 루스벨트의 정책이 “소련을 무너뜨린 바로 그 길”이라고 경고했고, 1937년의 경기 후퇴(Recession of 1937)는 이런 비판에 불을 붙였다. | 그러나 뉴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역풍에 시달렸다. 보수 진영은 뉴딜을 "국가가 자유기업을 억압하는 사회주의적 실험"이라 비판했으며, 남부 민주당 내에서도 ‘연방의 개입이 지역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반발이 거세졌다. 보수 언론들은 루스벨트의 정책이 “소련을 무너뜨린 바로 그 길”이라고 경고했고, 1937년의 경기 후퇴(Recession of 1937)는 이런 비판에 불을 붙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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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는 퇴임 후 덴버에서 조용한 삶을 보내며 정치적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의 정책은 한편으론 "미국 민주주의의 복원자"로, 또 한편으로는 "연방 권력의 과도한 확장"으로 평가되며 논쟁의 중심에 남게 되었다. | 루스벨트는 퇴임 후 덴버에서 조용한 삶을 보내며 정치적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의 정책은 한편으론 "미국 민주주의의 복원자"로, 또 한편으로는 "연방 권력의 과도한 확장"으로 평가되며 논쟁의 중심에 남게 되었다. | ||
==== 듀이 행정부 ==== | ==== 듀이 행정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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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order:1px solid #280D28; background:#333030; color:#E4E4E4" | 1940년 9월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에서 선거 운동을 펼치는 듀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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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E. 듀이는 1941년 1월, 루즈벨트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는 선거 기간 동안 줄곧 "정부의 크기를 줄이고, 시장의 자율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취임 이후 불과 열 달 동안 FDR 정권의 핵심 뉴딜 정책들을 급속히 해체했다. 공공사업진흥국(WPA)과 [https://en.wikipedia.org/wiki/Civilian_Conservation_Corps 민간보존단](CCC), 그리고 국가산업부흥법(NIRA)과 같은 주요 기관들은 대폭 축소되거나 폐지되었고, 연방정부의 재정 투입은 줄어들며 경제는 다시 침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 토머스 E. 듀이는 1941년 1월, 루즈벨트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는 선거 기간 동안 줄곧 "정부의 크기를 줄이고, 시장의 자율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취임 이후 불과 열 달 동안 FDR 정권의 핵심 뉴딜 정책들을 급속히 해체했다. 공공사업진흥국(WPA)과 [https://en.wikipedia.org/wiki/Civilian_Conservation_Corps 민간보존단](CCC), 그리고 국가산업부흥법(NIRA)과 같은 주요 기관들은 대폭 축소되거나 폐지되었고, 연방정부의 재정 투입은 줄어들며 경제는 다시 침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 ||
2025년 5월 27일 (화) 00: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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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미합중국(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 USA), 약칭 미국(영어: America)은 북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연방제 공화국이다.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건국된 미합중국은 1800년대 두각을 드러내며 영토를 확장했다. 1860년대에는 농업 중심의 남부와 산업화 중심의 북부 간에 노예제 확대 문제를 두고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지만 미국 내에서 인종 간의 갈등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에 패배하면서 미국은 몰락했고, 전후 국토의 6할을 잃었다. 3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잃었던 고토 수복에 성공했고, 이후 미연합국이 출범하면서 전신이 되었다.
역사
전간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경제적·문화적으로 눈부신 번영의 시기를 맞이했다. 전후 호황 속에서 전기, 주택, 석유, 고속도로 등 새로운 산업 영역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재즈와 아르데코 예술, 할리우드 영화 산업은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광란의 20년(Roaring Twenties)’이라 불린 이 시기는 미국인들에게 기술 진보와 소비사회의 가능성을 각인시킨 시기였다.
그러나 이 번영은 탄탄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붕괴되며 주식시장 대폭락이 시작되었고, 이는 곧 미국 사회 전반을 무너뜨리는 전대미문의 경제 공황으로 이어졌다. 불과 4년 만에 실업률은 3%에서 24%까지 치솟았고,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수많은 이들이 다음 끼니를 가족 식탁이 아닌, 붐비는 자선 급식소에서 해결해야 했다.
대공황 기간 중 시카고의 실업자들이 수프 키친 밖에서 식사를 받기 위해 서 있는 모습 |
이 경제적 절망은 자연 재해로 더욱 악화되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무리한 경작과 방목으로 황폐해진 대초원 지대에서는 대규모의 상층토 유실 현상이 발생했고, 이른바 '더스트 볼(Dust Bowl)'이라 불리는 재난이 중서부와 대평원 지역을 강타했다. 농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않았고, 거대한 흙먼지 폭풍은 마을 전체를 덮쳤으며, 농민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대거 캘리포니아와 서부 지역으로 이주했다.
당시 연방 정부는 이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초기에는 시장의 자정 작용을 믿고 개입을 자제했으며, 후에 제한적인 구제 정책을 시행했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 금융권과 산업계는 정부의 신뢰를 잃었고, 일반 시민들은 지도층에 대해 분노와 실망을 쌓아갔다. '후버빌(Hoovervilles)'이라 불린 빈민촌들이 도시 외곽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전국 곳곳에서 실업자 행진과 노동쟁의가 벌어졌다.
결국,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유권자들은 변화를 요구했다.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뉴딜(New Deal)을 통한 국가 주도의 경제 회복을 약속하며 등장했고, 이는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루즈벨트 행정부
공황의 깊이를 더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미온적 대응은 곧 공화당 전체에 대한 국민적 불신으로 이어졌다. "후버는 은행을 구했고, 루스벨트는 우리를 구했다"는 구호는 당시 대중의 정서를 정확히 대변했다. 이에 따라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비록 공화당 측에서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 시도한 신경제정책(NEP)과 유사하다며 극렬히 비판했으나, 이미 국민은 절망에서 벗어날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고 있었다.
1933년 3월 취임한 루스벨트는 즉시 일련의 대규모 구제 정책을 시행하며 위기 극복에 나섰다. 전국의 실업자들을 공공 인프라 건설에 동원한 공공사업진흥국(WPA), 농산물 가격 회복을 위한 농업조정법(AAA), 산업 구조 재편을 겨냥한 국가산업부흥법(NIRA) 등은 국민들에게 ‘행동하는 정부’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WPA는 예술가, 작가, 기술자까지 고용의 범위를 확장하며 경제 회복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TVA 설립 법안에 서명하는 모습 |
그러나 뉴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역풍에 시달렸다. 보수 진영은 뉴딜을 "국가가 자유기업을 억압하는 사회주의적 실험"이라 비판했으며, 남부 민주당 내에서도 ‘연방의 개입이 지역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반발이 거세졌다. 보수 언론들은 루스벨트의 정책이 “소련을 무너뜨린 바로 그 길”이라고 경고했고, 1937년의 경기 후퇴(Recession of 1937)는 이런 비판에 불을 붙였다.
그럼에도 루스벨트는 1936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며, 그의 리더십은 여전히 다수 국민에게 희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세 번째 임기 도전 여부를 두고는 끝없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소련이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확산되는 가운데 루스벨트는 미국의 정치적 안정성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40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WPA의 실무 책임자였던 해리 홉킨스를 민주당 후보로 추천했다.
홉킨스는 1940년 봄 위장성 위암 진단을 받았지만, 선거운동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투지를 보였다. 캘리포니아 베이커즈필드에서 유세를 벌이는 공화당 후보 토머스 E. 듀이와 팽팽한 접전을 벌였고, 결국 0.4%의 박빙 차이로 듀이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12년간 지속된 루스벨트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공화당이 다시금 백악관을 되찾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퇴임 후 덴버에서 조용한 삶을 보내며 정치적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의 정책은 한편으론 "미국 민주주의의 복원자"로, 또 한편으로는 "연방 권력의 과도한 확장"으로 평가되며 논쟁의 중심에 남게 되었다.
듀이 행정부
1940년 9월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에서 선거 운동을 펼치는 듀이 |
토머스 E. 듀이는 1941년 1월, 루즈벨트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는 선거 기간 동안 줄곧 "정부의 크기를 줄이고, 시장의 자율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취임 이후 불과 열 달 동안 FDR 정권의 핵심 뉴딜 정책들을 급속히 해체했다. 공공사업진흥국(WPA)과 민간보존단(CCC), 그리고 국가산업부흥법(NIRA)과 같은 주요 기관들은 대폭 축소되거나 폐지되었고, 연방정부의 재정 투입은 줄어들며 경제는 다시 침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듀이 행정부는 국내 문제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루즈벨트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추축국의 팽창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듀이는 철저한 고립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그의 외교 전략은 "미국이 강대국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도 우리를 자극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 계산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군비는 감축되었고, 해군과 공군의 예산은 루즈벨트 시절보다 30% 이상 줄어들었다. 이 결정은 특히 태평양 함대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정책에 대해 ‘현명한 긴축’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국제 정세는 듀이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 제국은 이미 중국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한 뒤 영국 본토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듀이 행정부는 고립주의 외교와 군비 축소라는 이중 실책을 범하며 미국의 국제적 입지를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결국, 이 신중함은 비극적인 실수로 귀결되었다. 듀이가 취임한 지 불과 10개월 후, 미국은 진주만과 서부 해안에서 전격적인 공격을 받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의 낙관적 접근은 완전히 뒤집히며, “듀이 독트린”은 전후 미국 정치에서 가장 무능한 전략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2차세계대전
1944년 대선에서는 대통령 듀이가 전시 지도자의 연속성을 호소했지만, 민주당은 루스벨트 정권의 체계적 정비 능력을 회상시키며 제임스 A. 팔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헨리 A. 월리스가 급진 좌파 성향의 진보당을 창당하며 표를 분산시켰고, 이로 인해 듀이가 재선되었다. 하지만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독일군이 캐나다를 통해 뉴욕 북부까지 진출하는 상황에 이르자, 미국의 국내 정치 구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194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해리 S. 트루먼을 전면에 내세워 복귀를 노렸고, 보수 공화당의 상징인 로버트 A. 태프트와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선거는 정당 정치의 붕괴를 보여주는 서막이었다. 남부의 조지 S. 패튼 장군이 국민당(National Party)을 창당하고 강경한 반공, 반독 노선을 주장하면서 남부 유권자들을 흡수했고, 좌파 유권자들은 월리스의 진보당에 결집했다. 선거 결과 트루먼은 간신히 승리했으나, 국내 정치 지형은 완전히 파편화되었다.
트루먼은 독일군의 상륙 이후 수도를 워싱턴 D.C.에서 덴버로 이전하고 “산맥 방어선” 구축했으나, 이미 전략 자산의 상당수가 파괴된 상황이었다. 1949년 내슈빌이 함락되면서 여론은 급속도로 반전했고, 결국 같은 해 가을,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종전 협정[3]에 서명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패전국이 되었다.
전후
패전 직후 트루먼은 참전 결정과 전략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임기 도중 사임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버튼 K. 휠러는 1952년까지 위기 대응에 집중했으나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그 해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신진 정치인 에버릿 덕슨이 승리했으나, 민주당, 진보당, 국민당이 각각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4개 정당이 본선에서 의미 있는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56년 대선에서는 이 같은 정치 혼란 속에 신생 진보당과 국민당을 주축으로 군소 정당들이 주권연합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며 반민주·반공화당 전선을 구축했고, 헨리 M. 잭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선된 헨리 M. 잭슨 대통령은 “강한 연방, 회복하는 경제, 존엄한 평화”를 기치로 내세우며 미국 재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주권연합은 전쟁 패배 이후 정치적 신뢰를 잃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대체해 급부상했으며, 잭슨은 이 새로운 정치 연합의 중심 인물로서, 전시 체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질서 있는 회복을 이끌었다.
1960년에는 주권연합 내에서 남부 보수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며 조지 월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월리스는 ‘전시 비상령’을 이유로 1964년 대선을 무기한 연기했으며, 야당 활동을 금지하고 주요 언론 기관을 국유화했다. 이에 반발한 오대호 주변 주(미시간,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는 연방에서의 이탈을 선언하고 오대호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정치
참고
비고(Obsidian)
외부 문서
- ↑ 이스트 코스트(East Coast) 지역은 전역이 국가판무관부에 합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상징적인 일부 도시들은 독일식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로, 뉴욕(New York)이 노이 이오르크(Neu Iork)로, 워싱턴 D.C.(Washington D.C.)가 비스마르크슈타트(Bismarckstadt)로 개칭된 것이 있다.
- ↑ 임기 도중 사임
- ↑ 1949년 6월 동안 워싱턴 D.C.에서 일본측과 독일측이 영토 분활에 대해 협의했고, 최종 종전 확정 조약은 각각의 점령지인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 8월 13일, 생방송에서 공동으로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