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제 (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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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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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나라의 제15대 황제.
중국 조나라의 제15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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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재위기간은 13년으로 아버지 정명제, 아들 숭희제에 비해 재위기간이 매우 짧지만 정명제와 함께 조나라의 몇 안되는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총 재위기간은 13년으로 아버지 정명제, 아들 숭희제에 비해 재위기간이 매우 짧지만 정명제와 함께 조나라의 몇 안되는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 2. 생애 ==
== 생애 ==
안정제(기준)는 정명 5년(1473년)에 아버지 정명제와 신혜정황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준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모든 분야마다 재주가 뛰어났는데 특히 서예와 글짓기의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여 잔병 치례가 자주 없어서 황제감에 적합했다. 정명제는 4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10남 5녀를 낳았는데 이러한 형제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추후 형제간의 분란이 없었다는 점은 그의 정통성도 한몫했다.
안정제(기준)는 정명 5년(1473년)에 아버지 정명제와 신혜정황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준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모든 분야마다 재주가 뛰어났는데 특히 서예와 글짓기의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여 잔병 치례가 자주 없어서 황제감에 적합했다. 정명제는 4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10남 5녀를 낳았는데 이러한 형제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추후 형제간의 분란이 없었다는 점은 그의 정통성도 한몫했다.



2025년 6월 22일 (일) 15:11 판


조(趙)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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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 大趙
초대 제2대 제3대
건원제 흥헌제 융정제
제4대 제5대 제6대
경명제 숭태제 선혜제
제7대 제8대 제9대
명성제 문치제 경희제
제10대 제11대 제12대
영덕제 순화제 인치제
제13대 제14대 제15대
가덕제 정명제 안정제
제16대 제17대 제18대
숭희제 경정제 만통제
제19대 제20대 제21대
선치제 숭경제 경성제
남조 南趙
제22대 제23대 제24대
흥광제 영정제 만덕제
조 제15대 황제
안정제 | 安定帝
출생 1473년 7월 20일
조 남경 경선부 헤이롱장성
즉위 1505년 2월 4일
조 남경 경선부 헤이롱장성
사망 1518년 1월 17일 (향년 45세)
조 남경 경선부 헤이롱장성
능묘 강릉(康陵)
재위기간
조 황태자
1480년 12월 30일 ~ 1505년 2월 4일
제14대 황제
1505년 2월 4일 ~ 1518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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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기(纪)
준(晙)
부모 부황 고종 현황제
모후 신혜정황후
형제자매 10남 5녀중 장남
배우자 혜경공황후, 경숙현황후, 효정선황후
자녀 3남 7녀
작호 황태자(皇太子) → 황제(皇帝)
묘호 의종(毅宗)
시호 순황제
(全皇帝)
연호 안정(安定) (1505년 ~ 1518년)

개요

중국 조나라의 제15대 황제.

연호는 안정이며 묘호는 의종으로, 제 14대 정명제의 장남이자 휘는 준이다. 어머니는 정명제의 정실부인이자 두번째 황후였던 신혜정황후 이다.

제 14대 정명제를 뒤이어 왕위에 올라 대대적으로 애민정치를 펼쳤다. 또한 안정제는 권융,건석린,지의중과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고 조나라를 평화롭게 이끌었다. 바로 이 시기에 생긴 말이 안정제가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정태평성국" 이다.

총 재위기간은 13년으로 아버지 정명제, 아들 숭희제에 비해 재위기간이 매우 짧지만 정명제와 함께 조나라의 몇 안되는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안정제(기준)는 정명 5년(1473년)에 아버지 정명제와 신혜정황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준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모든 분야마다 재주가 뛰어났는데 특히 서예와 글짓기의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여 잔병 치례가 자주 없어서 황제감에 적합했다. 정명제는 4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10남 5녀를 낳았는데 이러한 형제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추후 형제간의 분란이 없었다는 점은 그의 정통성도 한몫했다.

기준은 정명 12년(148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책봉된 당일날 말과 소들이 갑자기 하늘을 보며 울고 하늘색은 보라색인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매우 원활하게 태자가 된 기준은 이후 아버지를 도와 제나라와의 전쟁에도 자주 참전하고 정명제가 승하할때까지 아버지를 충실히 따랐다. 다만 태자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살이 불어났고, 결국 지병으로 승하할 당시에는 거의 황소만한 엄청난 거구였다고 한다.

안정제는 태자시절 전쟁 참전외에는 별다른 일을 벌인적은 없었지만 정명 30년(1498년)에 일어난 환관 간신의 황제 암살 시도에 태자가 가담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궁중 안밖이 시끄러웠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정명제는 소문의 주동자를 잡아 유배를 보내도록 하였다. 아마도 자신이 죽기 전에 태자의 정통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을것이다. 사실 모든것이 만능인 태자를 구지 지겹게 잡아서 태자의 정통성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자신이 추진하던 "평정정필신책"를 저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태자는 그의 나이 32세때 정명제가 56세의 나이로 승하해 안정 원년(1505년)에 조나라 제15대 황제인 안정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즉위 초반 그의 주된 업무는 정명제가 죽기전에 마저 처리하지 못한 상소문을 모두 읽고 답변을 해주는것이였는데 그 양이 자그마치 3만필에 달하였다. 이것을 본 안정제는 혀를 내두르며 "짐이 승하할때까지는 이 많은 상소문을 모두 다 처리할수 없겠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정제의 예상과는 다르게 결국 이 상소문들은 안정제가 즉위한지 5년만에 모두 처리되었다.

안정제가 한 또다른 일은 인재의 양성이다. 안정 6년(1511년)에 당시 황실에서는 최고의 스승이자 학자였던 경성칭이 안정 5년(1510년)에 일어났던 병진대기근을 예로 들어 인재의 부족과 나라 시스템의 허점을 의의제기하여 인재의 양성을 주장했고 안정제는 이것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임인서지"(1511 - 1516) 라고 불리우는 대대적인 인재 양성의 목적에 집중한 과거 시험을 개최하게 되었다. 총관리자이자 총승인자는 안정제였으며 관리자이자 감시자는 인재 양성을 주장한 경성칭이였다. (임인서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임인서지 문서 참고.) 이러한 과거 시험을 통한 합격자는 응시자 1만명중 2천명이였다. 합격률이 20%인 어려운 과거 시험 이었던셈. 임인서지를 통해 합격한 유명한 인재는 권융,건석린,지의중이다. 모두 안정제의 뒤를 이은 제16대 숭희제,제17대 경정제때 활발히 활동하였다. (지의중은 이후 만통제를 가르친 스승이 되었다.)